아라파트, 팔레스타인, 냉소적인 우울

– 당대비평 원고를 기진맥진 끝내고 다시 인권 교재 원고에 매달려 허둥대고 있다. 일전 국가인권위원회의 소수자 인권보고서에 수록하기위해 작성했던 원고를 조금 손본 후 낼 작정이었는데 조금 손을 본다는 일이 깡그리 다시 쓰는 원고가 되어가고 있다. 우선 그 사이 숨가쁜 변화가 있었으니 그걸 반영하자는게 욕심의 발단이었다. 지난해 말 로렌스 재판의 승리로 상징되는 미국 사회에서 마침내 비역법이 폐지되었다. 그 결과 이번 미국 대선에서 동성애자 결혼의 합법화까지 나아가는게 아니냐는 발작적인 반동이 기승을 부려 결국 도덕적 가치가 대선의 판세를 판가름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그런 변화를 우리의 맥락에 비추어 읽어보자고 생각했다. 또한 일전 원고에서 누락했던 유럽에서의 변화 등 역시 간단하게나마 언급할 작정이었다. 동성애자 결혼에 관련한 최근의 변화 역시 귀추의 대상이잖은가. 유럽의회, 유럽재판소 등의 중요한 결정에 대해서도 언급해야지 이런 생각에서 자료와 정보를 정리하다가 일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결국 원고를 전연 다시 쓰게 되었다. 화를 자초한 셈이다. 거의 나아가던 몸살이 다시 도지면 어쩔까 걱정이다.
– 아라파트의 부고야말로 지난 얼마동안 접했던 죽음의 소식 가운데 가장 슬프고 참담한 것이리라. 팔레스타인 분쟁에 관하여 덧칠되어있는 수많은 정보들 – 대개 미국의 저널리즘을 경유하여 도착하는 – 에 가리워진 “가자 지구에서의 삶”을 나 역시 알리 없다. 그저 가끔 팔레스타인 문학이나 가뭄의 비처럼 만난 팔레스타인 영화를 통해 혹은 진보적인 해외 저널을 통해 알 수 있을 따름이다. 물론 팔레스타인에서의 삶은 종족의 삶이지만 또한 인민의 삶이다. 그들의 삶을 종족화하고 종교화하려는 그 모든 시도에 맞서 팔레스타인 민중의 삶을 다시 읽어야 할 것이다.
– 신경질적인 냉소와 싸우는 게 나의 지난 몇년 동안의 가장 중요한 전쟁이었던 것 같다. 해소된 혹은 극복한 싸움이라고 믿었지만, 신문을 들출 때마다 그런 믿음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지난 며칠 동안의 평화는 아마 신문을 보지 않은 탓일지 모른다. 하루에 두 세개의 신문을 사서 읽고 종내엔 주간지까지 사서 읽으며 나는 투덜대고 증오하고 혐오하며 살고있었던 듯 하다. 매주마다 한두 상자 분량의 신문과 잡지를 갖다버리며 그만큼의 분량의 홧병을 마음에 쌓아두었던 듯 하다. 물론 나는 기필코 달관하지 않을 것이다. 끊임없이 화를 낼 것이며 분노에 떨 것이고 욕설을 퍼붓고 술주정을 부릴 것이다. 주름진 낯으로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생명과 생타가 인류의 화두라고 강변하는 老 민중시인과 같은 삶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 티비 뉴스에서 그의 낯을 보며 나는 슬펐다. 풍자냐 해탈이냐를 일갈하며 해탈을 증오했던 그가 해탈하여 버렸다. 오오! 과연 누구를 믿고 의지하며 살 것인가.
– 앓는 동안 낮밤이 바뀌어 버렸다. 극도로 무력하고 졸음에 쫓기게 만드는 약의 禍 때문이었을 것이다. 약기운에 눌려 오후 늦게야 눈을 뜨고 결국 다음날 아침녘에야 눈을 붙이는 생활을 하느라 엉망이다. 내일은 바람이라도 쐬며 몸의 탐침을 바꾸던가 해야겠다. 지금 아침 7시에 가까워오고 있다. 술을 조금 마셨는데도 정신은 멀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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