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을 훑어낸 후

– 만취할 만큼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술을 잔뜩 마셨더니 오한이 으스스 온 몸을 훑는다. 잠깐 눈붙인다. 무슨 꿈이었을까. 두 개의 노래가 같았고 똑같은 진실을 발설하는 것이었다는…이상한 꿈이었다. 도대체 무엇의 비밀을 알려고 그런 꿈을 꾸었을까. 어제 오늘 내 머릿 속 도랑에서 흘러 다니던 어떤 생각의 건지가 그런 불쾌한 꿈을 조장했을 것이다. 고얀 것.
– 저널의 새 物主를 찾아야 하는데, 뾰족한 수가 없다. 그 일에 총대를 매고 나설 만큼 그것에 깊이 관여한 일도 적도 없는데, 그 일을 상의하잔다. 물론 책임을 지지 않은 채 입공양만 하는 편집위원들-나보다 훨씬 소속감도 강했으리라고 믿는 이들-에게 불만이 없지 않다. 이미 출판계는 초토화되었고, 언론 쪽으로 가자니 덥석 급소를 물고 놓아주지 않을까 하는 불안 때문에 갈 길이 분명치 않다. 내일쯤 아는 출판사 몇 곳에 전화라도 넣어봐야겠다. 자유주의적인 쿼터로 내게 할당된 편집위원의 몫을 누리며 그간 제가 털어놓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겠다던 나의 의지와 달리, 저널에서 가장 상스러운 좌익이 되어버렸다. 지혜롭고 또한 선량한 이들 곁에서 성난 낯으로 투덜내는 악역이 달갑지 않다. 그럼에도 홧병에 가깝도록 절망했고 분노했던 좌파 지식인 집단의 기류에 개입하고 싶었다. 몇 꼭지의 글을 썼?별반 호응도 없었으며 논쟁의 가능성은 쥐꼬리만큼도 없었지만 스스로를 몰아부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 이번 주는 최악의 스케줄이다. 주말에 몰린 심포지엄, 강의 때문에 머릿 속이 노랗다. 블로그 관련 심포지엄에서 사회를 맡았는데, 딱히 임자가 없어 어찌어찌 역을 맡았는데, 따로 그 문제에 관해 자료들을 읽어두기가 귀찮다. 일견 뻔한 인터넷을 둘러싼 말장난과 허황된 언어의 향연에 동승하기도 싫다. 그래도 어쩌랴.
– 결국 친구를 위해 씨네21에 글을 쓰게 되었는데, 더럭 걱정이 된다. 조금 억지를 쓰고 강변을 해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잇단 시사회가 끝난 후 평자들로부터의 악담과 핀잔에 주눅들고 질겁한 친구는 내게 자신을 옹호할 책임을 떠넘겼다. 친구와의 우정을 생각해서 선선히 수락한 일인데, 쏜살같이 연락이 왔다. 씨네21의 기자가 오후에 전화를 걸어 지면을 만들자고 한다. 짐작보다 넓은 지면을 주겠다는데 그게 더 걱정이다. 수십 매를 쓸만큼 아직 그 영화를 내가 진득하게 즐겼던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향후로는 영화에 관한 리뷰나 기고는 않겠다고 작정하고 있던 터에 우정의 責任으로 글을 쓰게 되었다. 꾀바르고 스마트해진 관객들을 무시하고 무대뽀로 현실을 정면으로 재현하려는 친구의 시대착오적인 결심과 의지를 칭찬하기로 결정했다. 스타일이라곤 없는 이 범박하고 무딘 영화로부터 미덕으로 가득한 정치학을 찾아내는 것이 내 요점이 될 터인데..
– 밀린 일들이 뒤통수에서 계속 꼼지락댄다. 면회를 다녀와야 하고, 새로 제 둥지를 찾은 후배의 집들이를 마련해주고 싶고, 미처 꼼꼼히 챙기지 못한 학생들의 프로포절에 조언을 덧붙여주어야 한다. 주말의 민노당 강의에서 털어놓을 이야기의 얼개라도 마련해두어야 하는데 아직 감감하다. 전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의 성 소수자 운동이란 거창한 이름을 제안했는데, 딱히 어떤 이야기에서 시작해야 지금의 문제들을 적절히 요약하고 개입할 구멍을 찾을지 모르겠다.

4 thoughts on “오한을 훑어낸 후”

  1. 전 아직 영화 못봤는데… 첨부터 그다지 기대가 되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전 마지막 공연 씬 편집할 때 그 부분만 잠깐 봤었는데요, 저랑 조금의 관련도 없는 영화였다면 볼 생각도 없었을 것이고 어쩌다 보게 됐어도 좋아하진 않았을 듯. 일단 비쥬얼에서 아무런 욕구도 해결해 주지 않잖아요.

  2. 글쎄올시다…비주얼? 나는 그런 겸손함과 정직함이 그 영화의 제일 큰 미덕이라고 생각하는데. 어차피 뮤직비디오를 만들 생각이 아니었고 하물며 예술영화와는 담을 쌓고 출발한 사실주의 영화로서의 접근 때문에 나는 그 영화에 거꾸로 감동을 먹었거든.. 여튼 보시게나. 보시고 뭐라고 하든 하게나 ^^

  3. 동진씨, 여전하신 것 같아서 좋네요. 가끔씩 들어 와서 글만 읽고 나가다가, 저 밑에 누군지 모를 방문자들에 대한 우려를 한명이라도 덜어 드리고자 인사 남기고 갑니다. 다들 잘 지내시는지… 살짝 보고 싶네요. ㅋㅋㅋ 언제라도 플로리다 오시면 대환영이에요.

  4. 지혜씨, 멀리서 고생많으시죠? 마침 어제 예전 영화제 식솔들과 함께 술을 한잔 했습니다. 강행군을 하고 널부러지고 싶었죠. 결국 술 한잔 사겠다고 호탕하게 장담하고선, 혼자 끄덕 졸다 분위기만 썰렁하게 만들고 일찍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지혜씨, 안부 전하죠. 가끔 소식 전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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