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팔이 혹은 물화된 정동: 감정과 체험의 유물론을 위하여 (1)

“사회주의 확립의 가장 큰 이점을 꼽으라면 말할 것도 없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아야하는 고통스러운 필요성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준다는 점일 것이다.”
(O. 와일드, “사회주의에서 인간의 영혼” 중에서)
”, 거짓의 쇠락, 은행나무, 2015, 223쪽.

정동적 전환?

언제부터인가 비판적인 인문사회과학의 관심사는 재현이라는 물음으로부터 슬금슬금 벗어나기 시작했다. 재현 혹은 표상이라는 문제설정은 ‘언어학적 전환(linguistic turn)’이라고 칭해지기도 하는 변화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제기한 물음은 이제는 제법 상식이 되다시피 되었다. 그것의 핵심적인 전략은 객관적이고 보편적 진실이라는 것이 어떻게 재현의 체계에 의해 구성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구조주의적 언어학의 흔한 정의를 빌자면 어떤 기표의 개념적 의미로서의 기의의 관계는 자의적이며 우연적이다. 그것은 랑그(F. de. 소쉬르), 야생적 사고(L. 스트로스), 신화(R. 바르트), 에피스테메와 담론(M. 푸코), 상징계(J. 라캉) 등에 의해 구조화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어적 실천이든 아니면 비언어적 실천이든 그것과 결부된 의미는 적극적으로 유예되어야 하며 그러한 표상의 체계를 생산한 권력, 제도, 사회관계를 드러내야 한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데올로기 비판 혹은 물신주의 비판과 공명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런 점에서 표상 비판은 지배적인 지식, 문화, 태도 등에 우리가 어떻게 예속되며 그를 통해 어떻게 주체성을 획득하게 되는지를 규멍하는 유력한 이론적 정치적 접근이었다. 그리고 지나치게 단순하게 요약한 것일지 모르지만 이러한 접근은 지난 수십 년간 인문사회과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접근으로 자리잡아왔다.

그렇지만 최근 우리는 감성, 감정, 정동 등의 개념이 언어적 전환을 대체하는 새로운 접근으로 부상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예컨대 쓰리프트는 정동이란 개념을 통해 사회적 관계와 실천을 분석하는 기획을 “비-재현적 이론(non-representational theory)”이라 지칭하며, 그것이 어떻게 기존의 인문사회과학과 단절하는 것인지를 역설한다. N. J. Thrift, Non-representational theory: space, politics, affect, London & New York: Routledge, 2008. 정동적 전환이 매개, 표상(재현), 이데올로기, 헤게모니 등의 개념을 기각하고 그것이 더 이상 오늘날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분절하는데 합의하는 듯하다. 포스트-헤게모니적 권력의 분석을 위해 헤게모니 개념을 대신해 정동을 제안하는 스콧 래시, 재현과 매개란 개념으로 생명정치적 권력의 작동을 분석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브라이언 마수미 등의 주장은 끝없이 많은 지식인들의 주장을 통해 반향되고 있다. S. Lash, Power after Hegemony: Cultural Studies in Mutation?, Theory, Culture & Society, vol. 24  no. 3. 2007.;  가상계. 한편 B. 베스는 정동적 전환이란 포스트-해석학적 접근에 다름 아닌 것이라고 정의하며 자본주의생산양식 혹은 정치경제학 ‘비판’이 요구하는 해석학이 여전히 중요한 것이라고 역설한다. B. Best, “Fredric Jameson Notwithstanding”: The Dialectic of Affect, Rethinking Marxism, Vol. 23,  No. 1, 2011. 마르크스주의를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만들어내는 지적, 상상적 환상에 대한 비판적 해석학으로서 정의하고자 하는 시도는 단연코 F. 제임슨의 사고에서 비롯된다. F. 제임슨, 정치적 무의식, 이경덕 외 옮김, 민음사, 2015. 아울러 정동적 전환과는 정반대로 후기 자본주의 문화의 논리적 특성으로서 정동의 쇠락(the waning of affect)을 역설하는 제임슨의 언급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F. Jameson, 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1991, pp. 10-11.

정동적 전환(affective turn)이라 스스로 자처하는 이러한 전환은 감성과 감정, 정동 등을 분석과 이해의 대상이자 ‘비판’의 대상으로 구성한다. 정동적 접근을 대표하는 글을 망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리만치 쏟아져 나와 있다. 한국에서 자신의 접근방식을 정동적 전환과 연관시키는 경우는 최근에야 눈에 띈다. 그렇지만 대중적인 문화비평이나 사회비평은 자기의식적으로 정동적 접근을 취한다고 주장하는 학술적 분석에 앞서 정동적 전환을 보여주어 왔다. 이는 “모멸감”, “혐오”, “수치심”, “불안” 등의 개념을 통해 세계를 제시하고 분별하는 일련의 글들과 대중적 논쟁은 정동적 전환이란 것이 학술 동네의 사태가 아니라 상당 기간 한국 사회에서 분석과 비평의 격자로서 역할 했음을 보여준다. 최근 국내에 공간된 정동론적 문화이론을 소개하는 글로는 일단 다음을 참조하라. B. 마수미, 가상계, 조성훈 옮김, 갈무리, 2011.; 나이절 스리프트 외, 정동 이론, 멜리사 그레그, 그레고리 J. 시그워스 편, 최성희, 김지영, 박혜정 옮김, 갈무리, 2015. 정동적 전환의 선두에는 마수미로 대표되는 들뢰지언들과 세즈윅, 벌란트, 아메드 등으로 대표되는 일부 퀴어이론 학자들이 있다. 후자의 경우 그들은 초기 게이해방담론에서 제기된 자본제적 도시화와 동성애정체성의 억압, 이성애적 가부장제와 자본제적 핵가족의 재생산을 통한 소수적 성정체성의 고안과 차별 등을 상대화하며 수치심과 혐오 등의 범주를 퀴어 주체성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준거로 삼는다. 따라서 이들은 동성애혐오 비판과 커밍아웃의 정치라는 에이즈 위기 이후 주류 성소수자운동의 정치적 프로그램을 전유하면서도 이를 자긍심(pride)의 정치라는 정동의 정치로 번역한다.
아울러 그를 부정하기 위한 사회적 실천 역시 그에 의해 조정된다. 이는 심리치료의 모델을 참조한 치유의 실천일 수도 있고, 모멸감을 가져다주는 사회에 맞서 자긍심과 자아존중감을 갖도록 배려하는 심리-정치적 사회운동의 모델을 통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는 문화연구, 문학비평, 미학, 사회학, 정치학, 지리학 등의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의 글쓰기를 통해 구체화되기도 한다. 이에 대한 설득력 있는 비판을 고려하려면 다음의 루스 레이스의 글을 참조하라. R. Leys, The Turn to Affect: A Critique, Critical Inquiry, Vol. 37, No. 3, 2011. 다음의 글 역시 정동적 전환에 대한 비판으로서 참조할 가치가 있다. C. Papoulias & F. Callard, Biology’s Gift: Interrogating the Turn to Affect, Body & Society, Vol. 16  No. 1, 2010. C. Hemmings, Invoking affect: cultural theory and the ontological turn, Cultural Studies, Vol. 19 No. 5, 2005. 한편 감정사학으로 대표되는 역사학에서의 정동적 전환을 대표하는 윌리엄 레디의 작업을 논평하며 감정사와 역사유물론적 읽기를 대조하는 다음의 글 역시 흥미롭다. 김성호, 감정사(感情史)의 개념과 쟁점 -윌리엄 레디의 연구를 중심으로, 영미문학연구회, 영미문학연구, 29권 1호. 2015.; W. 레디, 감정의 항해, 김학이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6.

그렇지만 이 글에서는 정동적 전환을 공언하고 또 이를 제시하는 이론적 글쓰기를 상대하지 않는다. 이보다 세월호 참사를 전후하여 확인할 수 있는 감정의 세계로서의 현실이라는 새로운 사회분석의 해석 담론에 유의하고자 한다. 감정, 정서, 정동, 정서와 같은 개념은 비판적인 학술 담론이기에 앞서 아니 그를 초과하거나 아니면 추월하며 이미 오늘날 한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분절하려는 다양한 담론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러나 감정은 비판의 담론이 아니라 또한 지배의 담론에서도 중요한 패러다임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 정신병리학이나 정신분석학에서 신경약학이라 신경생리학으로의 전환은 감정의 구체적인 구별과 규정, 치료를 겨냥한다. 행동경제학이란 거창한 이름으로 경제학을 석권하는 새로운 경제이론은 이해관심이라는 합리적 경제인간을 대신해 비합리적인 충동의 감정적 주체를 경제활동의 주인으로 내세우며 심리적 전환을 꾀한다.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과 감정을 판매하여야 한다는 소비자마케팅은 감정을 분류하고 해독하려는 노력에 광분한다. 빅데이터라는 새로운 정보통신기술의 총아는 감정판독기로서의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는 데 여념이 없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감성과 감정은 어느새 자리 잡은 현실 자체의 지층이자 세계를 분별하고 표상하는 시점이 되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몇 개의 장면에 눈길을 돌려보자.

감성팔이의 세계 – 몇 개의 장면들

#1
“과연 진심은 논란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크고 작은 논란에 휩싸였던 엠넷 ‘쇼미더머니 시즌4’가 변화구를 던졌다. ‘쇼미더머니 시즌4’ 논란의 중심에 있던 인물 두 사람이 있다. 바로 위너 멤버 송민호와 래퍼 블랙넛이다. 두 사람은 방송 중 각기 여성비하와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의 줄임말) 논란에 휩싸였다. … 송민호는 대결곡 ‘겁’에 자신의 6년 연습생활 이야기를 담았다. 긴 연습생활 속, 그가 겪었던 고뇌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느껴지는 곡이었다. 블랙넛도 ‘내가 할 수 있는 건’이라는 곡을 선보이며 랩과 함께 살아온 자신의 삶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는 ‘외로운 마음을 가사에 풀었다. 저에 대한 인식이 좋게 바뀔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지만 왜 제가 이렇게 됐는지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고백했다. … 승자나 패자나 얻은 것은 있었다. 다름 아닌 시청자들의 공감이다. 이들이 살아 온 환경과 내면에 접근하면서 자연스럽게 공감대가 형성됐다. 논란으로 인한 부정적 이미지에도 좋은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디스전’ 양상으로 흘러가던 ‘쇼미더머니 4’가 전반적으로 중심을 잡았다는 호평도 상당하다. 한편으로는 이를 ‘감성팔이’ 카드로 보는 이들도 있다. 그간 부정적인 논란들로 관심을 끌고, 마무리 단계에서 시청자들의 감정에 호소하고 있다는 것. 특히 이들의 가정사 노출이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흔히 등장하곤 하는 ‘감성팔이 전략’이라는 의견이다. 우여곡절 끝에 ‘쇼미더머니 4’는 이제 결승전을 남겨두고 있다. 과연 이들이 마지막까지 논란을 뛰어넘어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진정성과 감성팔이 사이, <노컷뉴스>, 2015. 8. 22. http://www.nocutnews.co.kr/news/4461917(2016년 3월12일 마지막 접속).

#2
“눈을 감지 말아주세요. 입은 계속 오물거리지만 먹을 것은 없습니다. 나날이 야위어 가는 하와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엄마는 차라리 눈을 감습니다. 매일 8천명의 어린이가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는 이 현실에 눈을 감지 말아주세요. 한 달에 3만원이면 하와같은 아기 29명에게 영양실조 치료식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아기들은 건강을 되찾을 수 있고 엄마들도 다시 힘을 낼 수 있습니다. 당신의 관심이 희망입니다.” UNICEF 정기후원회원 모집 광고 내레이션.

#3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는 해고 노동자들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은 ‘해고과정, 해고당시, 또 해고 이후에 본인들의 억울함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극심한 인간적인 모멸감’이라고 말했다. 정혜신 박사는 15일 <go발뉴스>와의 전화인터뷰에서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겪는 고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라며 ‘심리적 내상의 후유증은 수십 년까지 갈 수 있다’고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대한 심각성에 대해 이야기 했다. 정 박사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과 동시 해고 노동자와 그 가족들, 아이들 마음속에 엄청난 상처, 내상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 하는 것’과 ‘우리 사회가 지혜를 모으고 마음을 포개는 일들을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쌍용차 나이팅게일’ 정혜신 전국 ‘와락’ 나선다. <Go발뉴스>, 2013. 2. 16.
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80(2016년 3월 12일 마지막 접속).

#4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의 한 대형 빌딩 1층 건물 벽면에 국회의원 후보의 홍보동영상이 전자광고판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광고판 속엔 고화질 카메라가 지켜보는 사람들의 미세한 표정 변화와 시선을 잡아내고 있다. 이 장비를 설치한 회사는 정치컨설팅 회사다. 유권자 반응을 분석하고 이를 이용해 선거전략을 짜고 있는 것이다. 바로 신경과학과 정치캠페인을 접목시킨 ‘뉴로폴리틱스(Neuropolitics·신경정치학)’다.
뉴욕타임즈는 3일(현지시간) 최근 전세계적으로 유권자들의 시선, 표정, 동공 확장 등을 신경과학적으로 분석해 선거캠페인 전략을 세우는 ‘뉴로폴리틱스’ 시대가 도래했다고 보도했다. 뉴로폴리틱스는 수년전부터 마케팅 기법으로 주목받아온 ‘뉴로마케팅(신경마케팅)’에서 출발했다. 이는 기업들이 소비자 반응을 뇌파, 표정, 시선추적, 심장박동 등 신경과학과 심리학 수단을 이용해 분석하고 판매극대화 전략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가장 적극적인 나라는 멕시코다. 엔리코 페나 니에토 대통령은 지난 2012년 대선때 유세에 참가한 유권자들의 표정, 뇌파, 심장박동 등을 분석해 광고를 만들었다. 니에토 대통령의 제도혁명당(PRI)은 지난 6월 총선에서 유권자에게 호감도가 높은 후보를 선별할 때도 이 방법을 활용했다. 멕시코 히달고시에선 시의 주요 정책수립을 위한 시민 반응을 파악하기 위해 설문조사 대신 뉴로폴리틱스를 활용하고 있다.” 표정 읽고 ‘票心’ 훔친다…신경정치학의 등장, <매일경제>, 2015. 11. 4.
http://news.mk.co.kr/newsRead.php?no=1053769&year=2015(2016년 3월 12일 마지막 접속).

아무렇게나 골라 본 몇 개의 장면. 그것은 모두 우리에게 감정과 감성이란 낱말 속에 가둔다. ‘감성팔이’를 통해 관심을 얻으려는 연예인으로부터 해고의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이라 할 ‘모멸감’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고통에 이르기까지. 인터넷 기사를 검색하거나 사회연결망서비스인 페이스북(facebook)의 타임라인을 뒤지거나 트위터를 훑다보면 우리는 ‘감성팔이’란 이름으로 빈정대는 그렇지만 또한 우리 모두를 꼼짝없이 급습하는 눈물겨운 사연과 인물에 시선을 빼앗기곤 한다. 학대당한 애완동물에서부터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어린이, 해고당한 노동자나 다문화가정의 외국인 여성을 넘어 사하라사막 이남의 기아로 죽어가는 아이와 시리아를 탈출하는 난민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바로 이러한 불행한 피해자들의 얼굴을 매순간 마주하고 있다. 그것은 아픔을 겪는 자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고통과 비참을 바로 그들이 겪어야 하는 감정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통해 감지하고 인식하도록 촉구받는다. 흉악범죄자들이나 잔학한 행동을 보이는 자들은 ‘공감제로’의 사이코패스로 정의된다. 그들의 윤리적인 악은 그들의 감성에서 원인을 발견한다. 국제구호기구는 거의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라면 어디에서나 광고를 내보낸다. 지구화된 자본주의가 초래한 불평등과 빈곤, 사회적 안전망을 제공할 수 있는 공적 장치를 사실상 상실한 채 아비규환에 가까운 내전상태에 내몰린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 각지의 갈등은 천사와도 같은 유약한 피해자로서 어린이를 통해 고통의 형상을 전달한다. 따라서 구조적인 결정으로서의 빈곤, 전쟁, 학살, 폭력 등은 감성적인 호응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피해자의 낯 위에서 자취를 감춘다.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에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는 신경정치학이라는 놀라운 과학의 활약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것은 신경마케팅을 응용한 정치캠페인에 머물지 않는다. (신)칸트주의적인 윤리학을 통해 즉 정치적인 선택과 결정을 규제하는 윤리적 이상을 가정하고 이를 통해 개인 혹은 집단의 합리적인 인식이 어떻게 행위를 규정하는지를 판별하려고 하였던 비판적인 정치에 대한 거부와 조롱으로 이어진다. 급진적인 자유주의 정치학자인 코놀리는 신경정치학을 적극 원용하며 이러한 W. E. Connolly, Neuropolitics: Thinking, Culture, Speed,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2.
그리고 신경정치학은 신경미학, 신경지리학, 신경경제학과 같은 숱한 과학을 재구성하는 비밀의 열쇠로 작동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경과학이라는 과학의 야심과 정력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이는 감성과 감정, 정동이 모든 현상의 현실(reality)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비판적인 학술담론에서부터 대중적인 사회비평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정신의학의 새로운 심리학적 처치와 치료의 방법에서 새로운 사회운동의 접근 방식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서 두루 확인하게 된다. 이것은 바로 감성 혹은 감정, 정동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중심으로 선회하는 새로운 문화적 기류이다. 사회를 감성의 직조물로 인식하고 헤아린다는 것은, 얼핏 생각할 때, 투박하고 추상적인 개념적인 프레임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려는 시도에 비해 섬세하고 또 구체적인 것처럼 간주된다. 나아가 그것은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의 바깥에서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겪고 느끼는 이들의 자리에서 세계를 바라보려는 윤리적인 노고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추상적인 정체성의 규정들 이를테면 소득, 지위, 나이, 건강, 성별, 국적, 학력 등의 무수한 규정들을 통해 그 인물의 경험을 뻔한 사실로 환원하고 한정하려는 충동에 저항하는 것처럼 간주될 수도 있다. 따라서 그것은 내가 그를 알기 위해 참조하는 객관적인 기준을 초과하며 살아간다. 나는 그를 이해하기 위해 나의 선입견과 편견을 기꺼이 유예하며 그가 삶에서 체감하는 느낌에 다가서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윤리적으로 온당한 새로운 윤리적 준칙을 발명하고 우리를 단속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추세에 대하여 정당한 의심을 품을 수 있다. 이를테면 이러한 의혹들 말이다. 그러한 ‘감성팔이’는 새롭게 부활한 도덕적 감상주의(sentimentalism)이 아닐까, 우리는 의심할 수 있다. 신경과학, 뇌과학 및 정신약리학 등의 신종 과학을 동원하고 퀴어정치, 여성주의, 탈식민주의 등의 새로운 정체성의 정치를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프로그램으로서 흔히 말해 ‘혐오와 수치심’에 맞서 자긍심과 자기인정의 정치로 대항하기 위한 전략으로 스스로를 내세울 때 우리는 그것이 해방과 변혁의 정치를 해치는 일탈로 간주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감성과 감정, 정동이란 것을 가짜 혹은 사이비 문제로서 신속하게 처분하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제기될 수밖에 없던 조건을 무시하는 허술한 비판일 수도 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내재적 비판이 아니라 외적인 거부일 수도 있다. 느낌과 감정, 정동에 대한 관심은 비판적 인식이 무엇을 결여하고 있는가에 대한 부정적인 징후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는 기꺼이 이런 물음을 던지고 그에 대하여 대응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이러한 물음을 떠올리면 감정, 감성, 정동 등의 개념을 통해 새로운 윤리-정치적인 사유를 제기하려는 시도를 되새겨보려한다. 물론 그것은 감정이나 감성, 정동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려니와 윤리-정치적으로도 백치와도 같은 짓이기 때문이다.

감정체제 혹은 감성의 질서로서의 사회라는 가설

세월호 사태, 혹은 세월호 참사가 2년을 지나가고 있다. 언젠가 어느 글에서 세월호 참사란 표현과 세월호 참사란 표현을 섞어 사용했단 이유로 독자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비판한 사람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란 이름으로 사회문제를 심리학적 사태로 환원하는 ‘치유의 실천’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대목에 분개하였다. 그는 나의 냉소적이고 그 스스로의 표현을 빌자면 “싸가지 없는” 태도가, 바로 세월호 참사라는 표현과 함께 세월호 사태란 표현 방식 속에 녹아있다고 지적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힐난한 익명의 독자의 ‘싸가지’에 대해 그다지 유감은 없었다. 외려 나로 인해 큰 상처를 입었다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기도 하다. 그 사태를 겪으며 참을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을 느낀 그리고 무한한 죄책감을 느낀 이들의 감정적 고통에 냉소적으로 초연한 척 굴고 있다는 인신공격에 관해서도 납득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주장을 제기하고자 했을 때 나는 그런 발언이 많은 이들을 불편하고 거북하게 만들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글의 제목을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삼았고 글의 앞머리에서 지나치리만치 장황하게 과연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될지에 관해 몇 개월 동안 번민했음을 고백하였다. 그리고 고통과 슬픔, 원망의 감정으로 결속된 ‘우리’라는 공동체에 나 역시 깊이 참여하고 있음을 애써 강변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그런 나의 선제적 혹은 예방적 조치도 그다지 소용없었다. 나를 격렬히 비난한 그에게 나로서는 대꾸할 방편이 없다. 그의 힐난을 듣고 나는 대꾸할 생각이 없었다. 그것이 사건이든 사태이든 참사이든 재난이든 파국이든 무엇이든, 그것이 우리를 창자가 끊어질 듯한 고통을 안겨주고 잠을 못 이루게 하는 슬픔으로 뒤척이게 하고 느닷없이 왈칵 사지가 마비될듯한 쓰라린 통증을 안겨준다 할지라도 김애란은 이를 “몸안에 천천히 차오르는 슬픔이 아니라 습격하듯 찾아오는 통증”이라고 말한다. 김애란,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눈먼 자들의 국가, 김애란 외, 문학동네, 2014, 11쪽.

그것을 우리의 감정에 충격을 미친 무엇으로 축소하여서는 안 될 것이라는 요구. 그것은 ‘객관적인’ 사태이며 그것을 현실이 조직되고 움직이는 방식에 대한 분석과 비판으로 대응해야 할 물질적 현실로 다뤄져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은 완강한 장벽 앞에서 어쨌든 저지당하고 말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문득 뒤르켐을 떠올려 볼수도 있다. 사회학에 관해 들어본 이가 있다면 뒤르켐의 자살론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 저작은 고전사회학 이론의 정전 가운데 하나 정도로 치부되지만 그 저작은 생각보다 도발적인 주장을 제기한다는 것은 곧잘 간과되곤 한다. 그 저작의 가장 특징적인 점 가운데 하나는 감정과 사실 사이의 구분을 사색하며 사회라는 개념을 전자보다 우위에 놓는 대담한 가설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는 실존적이며 개인적인 행동 가운데 가장 그러한 것이라 여겨 마땅한, 다시 말해 개인적인 것 가운데 가장 개인적인 행위일 자살을, 사회에 의한 규정으로서 기꺼이 환원할 수 있다고 강변한다. 아마 사회이론의 역사에서 가장 위험한 도박이라 말해도 좋을 그 도박에 판돈을 걸면서 뒤르켐은 사회라는 객관적 실존이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실효를 발휘하는지 증명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감정에 좌우되는 것처럼 보이는 사태인 자살을 사회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주장한다.

“1897년 간행된 자살 Le Suicide에서 이미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일탈 현상을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현상으로 환원시키려는 학자들을 공격했다. 이 학자들은 범죄나 자살의 큰 책임 ‘모방’에 있다고 생각했다. … 자살의 원인으로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원인(파산, 비탄, 실연, 그리고 모방)은 어떻게든 벌어지고야 말 일을 벌어지게 만드는 핑계에 불과하다. … 자살의 원인은 사회적 기원을 가진 성향이지, 이론가들이 헛되이 중요성을 부여하는 이러저러한 특별한 상황들이 아니다. ‘개인들이 자살을 결심하게 만드는 것은 개인 속을 파고드는 집단의 어떤 성향들이다. 흔히 자살의 원인으로 치부되는 개인적인 사건들은 희생자의 정신이 미치는 영향과 다를 바 없다. …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슬픔이 외부에서 비롯되었지도 모른다. 그것은 개인이 속한 집단에서 비롯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살을 일으키는 우발적 원인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E. 피에라 외, 검열에 관한 검은 책, 권지현 옮김, 알마, 2012, 238-9쪽.
(강조는 인용자)

뒤르켐의 저작을 요약하여 소개하는 글에서 말하듯이 뒤르켐은 심리적인 개인 혹은 감정의 주체를 사회적 원인에 의해 규정되는 주체와 구분한다. 그렇지만 그가 말하는 사회란 추상적인 개념은 오늘날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같은 개념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치닫는다. 후자의 정신의학적 개념은 특정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감정의 주체를 향해 크게 눈을 뜬 채 그것을 초래한 원인인 객관적 사태를 외상적 원인으로 환원한다. 반면 뒤르켐은 오직 개인의 감정과 개인사에서 자살이라는 죽음의 원인을 찾기를 거부하고 그것을 사회라는 원인 속에 정박시킨다. 물론 이것이 “사회적 사실”이라는 그의 악명 높은 개념의 원천이 되었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렇지만 집합적 표상과 심성으로서의 사회(적 사실)을 탐구한 그의 사고는 오늘날 더욱 흥미롭게 읽힌다. 그는 자살을 통해 드러나는 사회적 사실을 읽으며 이렇게 말한다.

“예외적으로 높은 자살의 수는 오늘날 문명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심각한 질병의 상태를 나타내며 그 심각성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자살은 그 증상을 측정하는 척도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다. … (그러므로) 집단적 우울의 경향을 치유할 유일한 방법은 그러한 경향이 상징하는 것이자 그러한 경향을 만들어내는 집단적 질병 자체를 치유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이미 낡아서 단지 겉모습만 제공하는 사회적 형태를 인위적으로 복구할 수 없으며, 또한 역사적 유추 없이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전혀 새로운 것을 창출해낼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새로운 생활형태의 싹을 찾아서 그 성장을 촉진해야 한다.” E. 뒤르켐, 자살론, 황보종우 옮김, 청아출판사, 2016, 510-1쪽.
(강조는 인용자)

뒤르켐은 자살의 개인적 심리학, 즉 감정적 고통의 개인적 시점으로부터 집단적 질병의 사회학으로 나아간다. 물론 그가 제안한 조합주의적(corporatist) 정치의 프로그램을 지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최근 사회(적인 것)의 발생을 탐색하는 사회의 계보학 연구가 보여주듯이 뒤르켐은 근대적인 사회의 발생에 결정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가장 획기적인 작업은 단연코 동즐로의 저서일 것이다. J. 동즐로, 사회보장의 발명, 주형일 옮김, 동문선, 2005. 한편 다음의 저작들 역시 참조할 가치가 있다. 다나카 다쿠지, 빈곤과 공화국: 사회적 연대의 탄생, 박해남 옮김, 문학동네, 2014. 홍태영, 국민국가의 정치학, 후마니타스, 2008.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사회 및 사회(과)학의 발생을 비판하는 고전적인 연구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G. 투르비언, 사회학과 사적 유물론, 윤수종 옮김, 푸른산, 1989.
정치경제학 비판을 통해 부르주아 사회의 적대를 계급투쟁이란 개념으로 규정하고자 한 마르크스와 달리 뒤르켐은 베버와 더불어 사회란 개념을 도입한다. 그는 연대(solidarity)로서의 사회라는 개념을 통해 계급 사회 혹은 ‘두 도시’의 사회가 아니라 연대로서의 사회란 개념을 도입한다. 이는 적대와 모순으로 분열된 사회가 아니라 공동생활에 함께 협력하는 개인들의 집합체라는 관념을 가리킨다. 그는 프랑스 혁명이 초래한 사회조직의 붕괴를 만회할 방법으로 공화주의자들이 상상한 국가도 아니고 혹은 퇴행적인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한 특수주의적인 지역사회가 아니라 분권화된 직업조합을 제안한다. 그렇지만 뒤르켐의 “사회민주주의”라는 정치적 프로그램을 시비하는 것이 여기에서의 직접적인 관심사는 아니다. 단지 우리는 사회민주주의란 것이 탈감정적인 것이기는커녕 자살을 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뒤르켐이라면 집합감정이라고 불렀을 바로 그 사회적 감정을 직조하는 전망으로서 제안되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감정과 개인이란 시점으로부터 사회라는 시점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비평하는 시점을 이동하는 그의 제스처를 새삼 강조하는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는 뒤르켐이 나아갔던 방향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어떤 흐름에 우리가 압도당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로 돌아가자. 아마 세월호 이후 우리가 그 사태를 새기는 방식을 대표하는 것을 꼽자면 아마 다음과 같은 것일지 모른다. 조금 길지만 인용해 보도록 하자.

“세월호 사고로 사고 당사자·관계자는 물론 TV를 통해 소식을 접하는 온 국민이 우울함과 슬픔에 빠져 있다. 갑자기 눈물이 흐르거나 일상생활에 죄책감을 느끼는 등 불안정한 상태를 제어하지 못해 당황하는 사람도 있다. 혹시 내가 이상한 것은 아닐까? 세월호 트라우마에 대해 많이 하는 질문을 순천향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황재욱 교수의 자문을 얻어 일문일답으로 풀어 보았다.
우선 전에 없던 급격한 불안함·우울함에 놀라 본인이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이 아닌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황 교수에 따르면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은 사고 당사자(당사자·가족), 관계자(구조활동 참여자), 현장에 방문한 사람 순으로 위험도가 높으며, TV를 통해 사고 소식을 접하는 국민들이 해당될 가능성은 적다고 한다. 사고 후 증상이 약 한 달간 지속되야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인지 알 수 있기에 현 시점에서 판단하기에는 이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슬픔은 급성 스트레스 반응에 따른 자연스러운 감정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조언했다.
또래 학생들의 큰 사고에 특히 충격을 받은 청소년들을 위해서는 수업시간에 교사와 함께 이야기하며 감정을 공유하길 권했다. 교사·학부모 등 주위 어른들이 공감해주고, 애도반응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인지시켜주는 것이 좋다. 일상생활이나 여행 등을 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런 경우 본인의 마음이 불편하다면 감정을 숨기거나 억지로 활동에 참여할 필요는 없으며 다만 직장, 학교 등 기본적인 일상은 유지하라고 권했다. 교사와 학생이 슬픔을 공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직장에서 동료들과 애도의 마음을 나누는 것도 괜찮다.
합동분향소에 조문을 가는 것은 여러 사람들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행동이며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애도하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 황 교수는 “참고 억누르려 하기보다 공감과 애도를 나누는 것이 좋다. 혼자 감정에 매몰되지 말고 표현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국민들이 사고 관련 소식을 접하며 느끼는 감정을 ‘트라우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말보다는 정상적인 ‘애도 반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나의 주변에 사고 당사자가 있다면 대한신경정신의학회·대한정신건강의학과의사회의 ‘재난시 정신건강대책과 국민정신건강 지침(세월호 사고관련 정신건강 지침)‘을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당사자·친구와 가족·소아청소년·자녀의 애도반응 돕기·애도시기에 나 자신을 돕기 등 대상자 별 대처법이 담겨있다.” “[세월호 침몰 참사] 슬픔·우울·자연스러운 감정…‘세월호 트라우마‘? 이렇게 극복하세요”, 비주얼다이브,  http://www.visualdive.co.kr/2014/05/%ec%84%b8%ec%9b%94%ed%98%b8-%ec%b9%a8%eb%aa%b0-%ec%b0%b8%ec%82%ac-%ec%8a%ac%ed%94%94%c2%b7%ec%9a%b0%ec%9a%b8%c2%b7%ec%9e%90%ec%97%b0%ec%8a%a4%eb%9f%ac%ec%9a%b4-%ea%b0%90%ec%a0%95/
여기에서 우리는 감정의 고통으로서 세월호 사태를 재현하는 서사와 대면한다. 그러나 방금 인용한 글에서 제시되는 것처럼 그것은 단지 의학적인 처방이 아니다. 여기에서 언급되는 우울, 슬픔, 애도, 공감은 오늘날 인문사회과학이 가장 애호하는 개념들로 자리 잡았고 또 거의 인플레처럼 소비된다. 이는 의학적 서사에서 정치적 서사로 다시 문학비평적 서사로 끊임없이 코드를 전환한다. 이러한 코드전환(transcoding)을 조율하는 핵심적인 작인은 단연코 감정 혹은 정동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앞의 의학적 치유의 서사는 마치 대구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 어느 신문기사에서 반향된다.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구조된 생존자들, 애타는 실종자 가족들, 망연자실한 유가족들, 또 이들의 친구, 교사, 친척들은 지금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자칫하면 이들은 한없이 슬픔과 고통 속에 빠져들어 평생 심리적 불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들이 회복할 수 있을까요. 정신과 전문의와 심리상담 전문가들에게 이들이 겪는 고통과 치유 방법에 대해 들어보았습니다. … 세월호 참사는 부실한 재난 대응 시스템의 총체적 난국을 여과 없이 보여줬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잘못된 제도와 체계, 인식 등을 개선하는 일과 동시에 이미 발생한 피해를 줄이는 것도 중요하다. 핵심은 재난 피해자에 대한 사후 관리와 지원이다. 이들이 겪는 심리적 어려움이 무엇이고, 치유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정신과 전문의와 심리상담 전문가들에게 문의했다.… 트라우마는 재난과 재해뿐 아니라 전쟁과 학살, 범죄피해 등에 의해서도 만들어진다. 한국 사회는 이미 트라우마를 양산한 환경인 셈이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사람들은 감정조절에 문제가 생기고, 관계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모든 문제의 원인을 스스로에게 전가해 극심한 죄책감을 느끼거나, 외부로 표출해 분노를 발산한다. 이들이 겪는 트라우마의 근원이 사회에서 비롯됐음을 알려주고, 회복과 치유에 힘쓰는 일을 더 늦기 전에 시작해야 하는 이유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어줘야…”, 한겨레신문, 201년 4월 25일,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34591.html

인용한 기사는 “부실한 재난 대응 시스템의 총체적 난국”을 지적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잘못된 제도와 체계, 인식 등을 개선하는 일과 동시에 이미 발생한 피해를 줄이는 것도 중요하다”고 못 박는다. 그리고 순식간에 “핵심은 재난 피해자에 대한 사후 관리와 지원이다. 이들이 겪는 심리적 어려움이 무엇이고, 치유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라는 물음으로 뛰어 오른다. 이러한 도약은 오늘날 우리가 사회적 현실을 인식하려 할 때 개입하는 ‘해석의 담론’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분별하고 인식하려는 어떤 사태가 주어졌을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매개하는 해석의 담론을 채택한다. 우리는 그것을 감정의 담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감정의 사태(“감정의 쓰나미”)로서 세월호 사태를 힐난하는 주장에 대해서도 역시 익숙하다.

어떤 블로거는 이렇게 말한다. “세월호로 슬픔을 나누는 양하면서도, 들끓는 감정의 쓰나미로 우리는 슬픔을 키워온 게 아닌가. 우리는, 우리들 감정에 좀 더 ‘솔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세월호의 무절제한 감정 쓰나미로 대한민국이 떠내려 갔다. 세월호 100일 지난 즈음, 우리의 냉철한 감성이 그 어느 때 보다 필요한 시점이 아닌 가해서, 울 이웃님들의 진정성에 호소해 본다.” 그는 지나친 감정적 압력을 불편해 한다. 후쿠시마 사태를 이겨내는 일본인의 국민성과 달리 감정에 치우친 한국인의 국민성을 원망하며 침착하게 사태를 수습하고 다른 이에게 자신의 고통을 전가하지 않으려는 일본인이 부럽다고 말한다. 심지어 어떤 이는 이런 고백을 하며 자신에 대한 진단을 호소한다. “이번, 세월호 침몰 사건을 보면서, 솔직히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전혀 슬프지도 않고,  동정심도 들지 않구요. 정확한 심정은, 내가 보기엔 아무 감정이 없는데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너무나 떠들썩하게 슬퍼하고 또 슬픔을 반강요하고 웅성웅성 하는 게 놀랍고 신기합니다. 또한 이런 강한 전체적인 분위기(감정)과 전혀 동질감을 느끼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어 그게 더 놀랍습니다. … 이런 솔직한 내 감정과 생각을 혹시 누군가에게 말하면, 니 가족이 저렇게 되면 어떻겠냐, 라고 반문하는 분 또한 계시던데, 이 또한 저도 겪어본 바에 의하면, 이때 또한 그렇게 오열하거나 슬프지 않았던 기억입니다. 슬프기보다는 그냥 먼길 잘 가시라고, 수고했다. 담담하고 편안한 감정이었네요. 본인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저를 모함하고 대단히 나쁘게 보던 경우도 있었는데요, 매우 신기하고 재밌기도 하고, 꽤 놀랍습니다. 함부로 사석에서 이런 얘기를 꺼내기가 부담되더군요. 아무튼, 제가 분명히 남들과 다름을 느꼈고, 이런 나는 무슨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건지에 대하여 전문의의 소견을 들어보고 싶어 일단 글로써 자문을 구합니다. 말씀 기다립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그리고 이 글을 쓴 이는 곧 이런 댓글을 마주해야 했다. “슬프기보다는 그냥 먼 길 잘 가시라고, 수고했다. 담담하고 편안한 감정이었네요. 이 말인 즉슨 누군갈 떠나보낸 적은 있지만 갑자기 떠나보낸 상황 같지는 않은데요. 갑자기 정말 갑자기 사람을 잃으면 정말 저런 소리가 나올까요? 수고했다고 잘 가시라는 소리가 나올까요, 과연?” 그는 세월호 사태를 보며 자신의 무감각함이 혹시 자신의 정신적인 이상(異常)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지 의아해하며 그러한 슬픔에 기꺼이 동일시할 수 없음을 실토한다. 그리고 그의 글을 읽은 어떤 이는 “갑자기 정말 갑자기 사람을 잃으면 정말 저런 소리가 나올까요? 수고했다고 잘 가시라는 소리가 나올까요, 과연?”이라고 분개한다. 그는 그것을 고통으로 절감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원망스럽고 견디기 어렵다. 인용한 블로거의 글은 네이버 블로그를 검색한 결과에서 따온 것이다. 인용한 블로그의 출처는 따로 밝히지 않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판정할 수도 없고 판정해서도 안 되는 사악한 도덕 게임에 휘말린 것 같은 기분에 직면한다. 감정을 에워싼 신화는 오롯이 개인의 가장 내밀한 자발적인 무엇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그 감정을 야기한 객관적 사태가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이 그 사태와 어긋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존중하고 헤아리도록 주의 받아 왔다. 그러므로 대다수가 겪는 격통에 스스로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불안이나 그러한 고통의 느낌을 감지하지 못한다는데 대한 분노나 모두 수긍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어느 편이나 우리가 겪는 사태는 감정의 탐침(探針)에 의해 지시되어야 할 사태라는 점은 동의한다.

그런 점에서 감정에 의해 조회되고 재현되는 세계라는 시점 전환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태는 세월호 참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세월호 참사 자체를 넘어 우리는 그것을 한국 사회에서 감정의 세계로서 세계를 체험하고 재현하는 담론적 전환의 임계점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감정의 세계로서 현실을 체험하고 재현하려는 시도는 전연 새로운 것이 아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감정적인 반응, 우울, 불안, 환멸, 분노, 절망 등의 정서는 역사적으로 언제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정치적 행위와 단락되며 감정 자체가 가치로서 규정되고 또 모방과 평가의 대상으로서 자리 잡게 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혁명을 둘러싼 평가에서 최근 감정의 정치, 특히 도덕적 감상주의를 둘러싼 논란은 흥미롭다. 이는 프랑스대혁명에 대한 기존의 서사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자유주의 역사학자들의 해석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끈다. 자유주의자들은 프랑스대혁명을 전체주의의 기원이자 폭력적 일탈로서 규정한 바 있다. 그렇지만 최근 많은 사회학, 역사학적 분석은 초월적 절대성, 보편주의, 탈구체화된 윤리 등으로 대표되는 프랑스대혁명의 윤리로부터 프랑스대혁명 시기 이들에 의해 동원된 감정의 정치에 대하여 주목하며 새로운 분석을 시도한다. 예컨대 감정사 연구를 대표하는 레디의 연구라든가 연민이나 동정과 같은 감정의 역사적 계보학을 사회학의 시야에서 포착하려는 볼탕스키 등의 연구는 주목할 만하다. L. Boltanski, Distant suffering: morality, media, and politics, Graham Burchell. trans. Cambridge &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W. Reddy, The Navigation of Feeling, Cambridge &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그리고 이는 급기야 재난과 파국의 레토릭을 통해 우리의 감정적 반응을 긴장시킨다. 우리는 그 사태를 통고하는 숨 막히는 수사인 재난과 파국이라는 명명 앞에서 이미 어떤 감정적 격통을 예비하여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우리가 경험하는 객관적 사태는 감정을 통해 분별된 사태로서 제시된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자기공명영상장치(fMRI)를 비롯한 신경영상학적인 광학장치가 생산하는 이미지와 갖가지 심리검사에서 시작해 심리적 수사를 통해 표상되는 정치적 사태, 나아가 정동론이란 범주를 통해 포괄된 문화, 사회 이론에 이르기까지 모두는 세계를 감정의 표상으로 환원한다. 이는 기존의 언어적 전환이 초래한 한계, 즉 언어나 이데올로기를 통해 세계를 재현으로 환원한다는 그들의 비판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정동론적 접근을 선도하는 마수미가 기호학적 담론을 염두에 두며 고발하는 것처럼 “구조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장소이며,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사태들의 순열이 불변의 생식적 질서의 자기 동일적인 집합 속에서 예측이 가능한 해설의 천국”이라면 이는 또한 재현 이후의 정동의 담론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다. B. 마수미, 앞의 글, 52쪽.

비록 정동적 전환을 대표하는 이론적 주장들이 구조와 달리 사건, 목적 아닌 증폭 등을 우위로 놓는다고 할지라도 그 역시 세계에 대한 재현의 부담으로부터 혹은 의무로부터 절대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재현(representation) 비판 혹은 이데올로기론 비판으로서의 정동적 전환에 대해서는 별도의 분석과 논증이 필요할 것이다.
이에 견주면 정동적 전환의 대표적인 경향이라고 할 감정사학의 대표적 저자인 레디(W. Reddy)의 ‘감정체제(emotional regime)’ 같은 개념 W. Reddy. 앞의 글 참조. 한편 레디에게서 흥미로운 점은 언어학에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외려 그것을 갱신하며 보완하려 애쓴다는 점에 있다. 그는 진위발화(the constatives)나 수행발화(the performatives)와 구분되는 감정발화(the emotives)를 제안한다. 이는 진위발화의 소박한 객관적 사실주의나 수행문의 구성주의적 접근 모두를 피하려는 그의 역사 읽기의 인식론적 전략을 보여준다. 여기에서는 일단 감정발화란 것이 역사적 실재를 보다 핍진하게 재현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점을 강조해두기로 하자. 다시 말해 정동론적 전환이라고 해서 재현 비판이라는 관점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며 아울러 의미작용(signifying practices)을 상대화하는 데 한결 같이 동의하는 것만은 아니란 것이다.
은 외려 역사적 현실을 감정의 구성을 통해 포착하고 표상한다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비(非)재현적인 접근으로서의 정동론이 내세우는 자가당착적인 주장에서 비껴난다.

그렇지만 이는 감정으로서의 세계라는 접근으로부터 비롯되는 또 다른 쟁점 즉 그것의 윤리-정치적 효과와 함께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논란 속으로 들어가 볼 필요가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의 윤리적 자장을 가로지르는 비평에서 진은영은 니체와 보들레르를 인용하며 시혜의 도덕과 투쟁의 도덕이라고 부를 만한 두 개의 윤리적 격률을 대조한다. 이 글에서 진은영은 노예의 도덕, 즉 약자에 대한 연민과 동정심이 아니라 자신을 긍정하고 고양하는 자의 수치심이라는 것을 대조하는 니체의 도덕이나 구걸하는 거지를 두드려 패고 그의 반격으로 인해 몸싸움을 벌인 이후에 “불평등을 넘어선 인간적 연대”를 겪도록 하는 보들레르를 참조한다. 그가 사태와 무관한 듯 보이는 철학적, 문학적 예화를 참조하는 것은 겉멋부리기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 우리는 이것이 우리를 에워싼 슬픔과 분노의 감정적 마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숨고르기와 같은 글쓰기임을 알 수 있다. 그녀가 위대한 근대 철학과 문학의 저자를 참조하는 이유는 이는 바로 세월호 참사에 대응하는 주체의 모습을 찾아내려는 데 있다. 단지 유일하게 허용된 감정 그리고 그 감정에 의해 생산된 정동적 윤리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녀의 말을 직접 인용하여 보자.

“그들(세월호 유가족들-인용자)의 정당한 싸움이 ‘몹시 가여운 사람’이라는 사회적 온정주의의 선을 조금이라도 넘어가면 그들은 곧바로 시체 장사꾼으로, 혹은 불온 세력으로 매도되며 사회적 폭력에 노출될 것이다. 세월호 이후의 문학은 이러한 온정주의의 금지선들, 그리고 시혜의 논리를 반동적으로 활용하는 감성정치들이 정당한 싸움을 마비시키지 못하도록, 고통 받는 이들의 표상을 여러 방식으로 균열시킬 수 있어야 한다. 눈물을 흘리면 싸우는 이들, 니체가 표현했던 열매를 ‘손수 따는’ 이들의 형상을 발명하며 다양한 상상과 질문의 방식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설명 이 시적 상상들이 실현되기 어려운 것일지라도, 우리가 가진 상상과 사유의 벽돌은 ‘온정이 베풀어질 때까지 너는 그저 기다려야 한다’는 윤리적 독재를 부술 수 있을 것이다.” 진은영,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눈먼 자들의 국가, 김애란 외, 문학동네, 2014, 83쪽.(강조는 인용자)

인용한 부분에서 진은영은 투박하고 또 과격할 수 있는 개념, ‘사회적 온정주의, 시혜의 논리, 감성 정치, 윤리적 독재’ 같은 거친 개념을 끌어들인다. 그것은 그녀의 표현을 빌자면 ‘고통받는 이들의 표상을 여러 방식으로 균열’시키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그러한 균열을 통해 양분된 주체의 모습을 이미 글 속에 그려넣는다. 그것은 무력하고 창백한 피해자로부터 투쟁하는 자, 가만히 있지 않는 자로 균열된 고통 받는 이의 표상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균열된 표상은 나란히 대조할 수 있는 표상이 아니다. 그것을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통의 감정 속에 파묻힌 무력한 주체와 투쟁하는 주체는 단지 이질적인 감정을 통해 분기(分岐)된, 동등한 감정 주체의 종별적 형태가 아니다. 무력한 슬픔과 투쟁하는 분노를 각각 담지 한다는 점에서 두 주체는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반쯤 말한 것에 불과하다. 두 주체는 교환가능한 주체도 아니며 종합할 수 있는 주체도 아니다. 전자의 주체는 완벽히 객관화된 감정, 자신이 처한 처지에서 비롯되는 감정으로서 즉 사실의 표지로서 간주된 감정이다. 이때의 감정이란 겉보기와는 달리 전적으로 사물처럼 다루어지는 감정이다. 그것은 그 주체가 처한 사실로부터 비롯된 수동적인 반응이자 자연적인 효과인 것이다. 반면 투쟁하는 주체의 경우 사태는 다르다. 투쟁하는 주체 역시 감정에 추동된다. 그렇지만 그렇게 추동하는 감정의 성분을 분노, 두려움, 증오, 원망, 용기, 투지 등으로 분류하고 이를 심리학적 테크놀로지를 통해 객관화하는 것은 어쩐지 코믹하다 못해 난센스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이 때 중요한 점은 여기에서의 감정이나 정동은 세계에 대한 표상 혹은 관념과 분리되지 않은 체 함께 작동한다는 점에 있다. 즉 감정과 정동인가 아니면 표상, 언어, 이데올로기인가가 아니라 둘은 함께 하며 이 둘은 분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정치적 주체화의 메커니즘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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