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알 같은 구체성의 음험함

 Feist – Let It Die (Live At The Rehersal Hall)

 언제부터인지 기억이 가물한데, 그만 입버릇이 되어버린 말이 있다. “깨알 같다”는 말이 그것이다. 걸핏하면 입에 올린다는 게 스스로에게도 맘에 걸려 다시는 이 말은 쓰지 말아야지 거푸 다짐까지 할 지경이 되었다. 어디서 이 말을 주워듣고 허구한 날 입에 달고 살게 되었을까, 한심하단 생각도 들었다. 세간 사람들의 속내를 드러내는 말들을 골라내 그 말을 한동안 입버릇처럼 쓰다 버리곤 하는 연구원 K선생이랑 대화하다 그만 덜컥 그 말에 덜미가 잡힌 것일까. 아교풀로 붙여놓은 것처럼 이 말은 항시 입안을 맴돌다 튀어 나오곤 한다. 이를 대신할 만한 말이 혹시 없을까 이따금 궁리도 한다. 자주 쓰는 낱말이 스스로 따져보는 괴팍한 버릇은 나랑 큰 인연이 없다. 그런데도 이 말은 어쩐지 신경이 쓰이고 거슬린다.

그러나 짐짓 생각해보면 사정은 내가 그 낱말에 딱히 애착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 낱말을 불쑥 뱉지 않을 수 없는 “깨알 같은” 것들이 즐비한 탓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를테면 상점에서 물건을 들여다보거나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택배원이 배송 문자메시지를 보내거나 할 때 나는 그들의 자잘하고 세심한 말과 정보, 어째 이런 걸 다 신경 썼을까 싶은 소소한 등속에 바투 “깨알 같다”며 감탄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거실이 허전하다 싶어 화분을 사러 간 가게에서 고무나무 화분 하나를 골랐다. 값을 치르고 나오려는 데 화분의 바닥을 보여주며 마개가 있음을 알려준다. 듬뿍 물을 줄 때는 모르겠지만 조금씩 물을 줄 때는 막아두어도 좋다며 실내에 두고 볼 수 있어 좋단다. 그러면서 화분 높이만큼의 근사한 가방에 화분을 넣고 리본인지 표찰인지 하는 걸 가지에 걸어준다. 실은 그 가게 자체가 깨알 같다. 화분에 얹어놓으면 좋을 손톱만한 플라스틱 피규어, 크고 작은 전지 가위, 유리와 흙, 종이 등으로 만든 가지각색의 화병, 게다가 꽃이며 나무를 그려넣은 엽서 따위가 두 평도 채 되지 않을 공간에 빼곡하다. 모든 게 너무나 깨알 같다. 하물며 배달된 치킨조차 깨알 같다. 내용물이 섞이지 않도록 세심히 간을 나눈 상자도, 입가심을 하라고 챙겨준 캔디도, 손 글씨로 쓴 편지도, 주문한 치킨의 이름도, 죄다 깨알 같다.

한 때는 그 깨알 같은 것들이 신기하고 흐뭇했다. 구석진 곳까지 깊이 눈여겨보고 배려하는 듯해서 어쩐지 다정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젠 그 깨알 같은 것들이 지겹다. 먼저 그 깨알 같은 구체성의 정밀함은 나를 숨 막히게 한다. 그것은 마치 그것을 찾는 이의 소망을 모조리 짐작하고 헤아린다는 듯이 너스레를 떠는 것 같다. 사물은 그것을 손에 쥔 사람의 재량과 욕망에 의지한다. 어린아이의 손에 들어간 홍당무는 애꿎은 고양이의 먹이가 되기도 하고 한나절 동안의 장난감이 되기도 하고 놀이터의 토템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물은 그런 자리를 순순히 허락하지 않는다. 사물은 이미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는 듯이 교만을 떤다. 그것을 쓰고 만지는 이들의 욕망을 이미 모두 계산에 넣었다는 듯이 기염을 토한다. 철학자들이라면 이를 객체는 주체가 되었고 주체는 객체가 되었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사회학자라면 그보다 조금은 더 알기 쉬운 말로 이제는 인간조차 대상화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온전히 나의 고유한 보물인줄 만 알았던 감정과 욕망은 모두 들통이 났고 사물은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다며 킬킬대는 듯하다.

철학자들이라면 이를 객체는 주체가 되었고 주체는 객체가 되었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사회학자라면 한때 유행하다 사라진 소외란 말을 끄집어 내 이제 소외가 완성되었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온전히 나의 고유한 보물인줄 만 알았던 감정과 욕망은 들통이 났고 사물은 나와 우리에 관해 이미 다 알고 있다며 킬킬대는 듯하다. 구체성에 깃든 음험함 가운데 보다 큰 것은 그것이 어느 때보다 추상화된 세계를 감춘다는 데 있을 것이다. 얼마 전 금융위기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추상적인 허구인 것처럼 다루는 자본주의의 결정판이었다.

자본주의는 누군가 만든 사물을 다루는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얼마의 가치를 가졌는지에 따라 구분될 뿐인 상품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세계이다. 상품과 화폐는 으뜸가는 추상이다. 그러나 그 추상이란 것은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추상이 아니라 세상을 활보하는 살아있는 추상이다. 그런 추상이 절정을 이룰 때 구체성 역시 활개를 친다. 물론 이 때의 구체성이란 추상적 세계의 적이 아니라 그것을 보완하는 반쪽일 뿐이다. 화폐라는 물신, 추상이 지배할 때 세상은 가짜 구체성이 범람하도록 한다. 깨알 같은 세계는 그런 세계를 가리키는 이름일 터이다.

_한겨레신문 칼럼에 기고한 글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