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릿한 시대의 흐릿한 언어들


The Knife – Heartbeats

1.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흐릿하다. 그것은 저 쪽에 놓인 세상이 밝고 선명하지 못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것을 바라보는 이 쪽 편, 그러니까 그것을 체험하고 인식하고 표현하는 나 혹은 우리의 감각과 정신이 흐릿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대관절 어느 쪽이 흐릿한 것일까. 이쪽 아니면 저쪽?

2.
동시대미술이란 이름의 최전선에 있다고 자처하였던 한 학과의 젊은이들이 졸업한다. 비참하고 황폐한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이들에게 ‘동시대’란 말은 뺨을 올려붙이고 싶을 만큼 화를 돋우는 말일 것이다(‘빡치게 한다’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한 것이다). 나 역시 동시대란 말이 싫고 지겹다. 아마 이 말에 대한 나의 혐오를 쏟아내며 툴툴대는 모습을 본 친구들도 많을 것이다. 동시대란 말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모두 동시대라는 시간 없는 시간의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20세기의 미술사를 조금이라도 눈여겨 본 이들은 잘 알 것이다. 그 시대의 미술은 마치 시간에 환장한 자들처럼 모두 어제와 결별하고 있음을 자랑 질하고 자신이 미래임을 선언하는 게 마치 버릇 같았다. 그들은 언제나 시간에 민감했고 시간 위에서 줄타기를 하였다. 그들에게 제일 역겨운 것은 노스탤지어나 복고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시간은 끝장났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인다. 미래, 아방가르드, 진보, 발전, 성장, 총체성, 목적 같은 말들은 모두 신빙성 없는 말로 낙인찍혔다. 모두 이런 개념들이 근처에 어슬렁거리기라도 하면 호기 있게 침을 뱉거나 이런 딱한 꼴을 봤냐는 듯 눈살을 찌푸린다. 그렇게 시간을 기약하던 자리에는 운명이나 숙명 같은 것이 자리 잡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래란 빙하가 녹아내리고 오존층의 구멍이 확대되고 열대우림이 사막화되고 이산화탄소가 성층권을 꽉 채운 숙명적인 비전으로 대체된 지 오래이다. 그건 시간이라기보다는 시간 이전의 연대기적 서사시의 노래꾼이 말하던, 운명에 가깝다. 앞이 흐릿하다. 시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3.
융합예술학과의 졸업전시는 시대착오적인 말들을 겁 없이 내건다. 아카이브에 내 맘대로 골라낸 이야기로 말과 이미지의 양탄자를 짜는 일이 대세인 수상쩍은 시대에 말이다. 역사(쓰기)란 말은 구리고 기억이나 회상, 트라우마 같은 말이 훨씬 미덥게 여겨지는 시점에 역사란 말을 불러내는 것은 심상찮은 짓이다. 하물며 감히 “질문”이란 말을 끄집어내다니. 알다시피 질문, 물음, 문제 따위의 개념은 우리를 동일한 역사적 시간대로 묶어내는 장치이다. 물음을 던진다는 것은 궁금증을 털어놓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먼저 우리가 함께 상대하는 세계가 있음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 질문은 그 질문에 찬성하든 이의를 제기하든 어쩔 수 없이 함께 하는 이들을 불러 모은다.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들이 입만 열면 문제설정이 어쩌고저쩌고 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물음은 구조를 전제하고 그 구조는 그를 상대하는 집단적인 주체를 정립한다. 그러므로 질문이란 한 시대를 식별하는 상징이다. 질문이 없다면 그건 어떻게 사는지 알지 못하는 자들의 앙케이트와 여론조사만이 있을 뿐이다.

4.
당연히 놀랄 일은 정치란 말을 감히 꺼낸다는 것이다. 졸업전시에 정치란 용어가 들어오는 것은 골치 아픈 일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융합이나 통섭이란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사회사업가, 액티비스트, 인류학자, 사회조사원, 도시설계자, 공동체운영자, 샤먼, 자생적 과학자, 기술요원 등으로서의 예술가라는, 얼핏 듣기엔 신기하고 화려한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미심쩍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색다른 생활경험의 창조자, 멋진 라이프 스타일의 창조자, 인생을 심미화하는 기획자라고 입만 열면 뇌까리는 기업가들의 모습과 어째 자꾸 겹쳐보인다.
경제와 문화가 동화되어버린 세계에서 융합은 도달해야할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서 성취된 가짜 꿈이다. 그것은 진정한 융합, 이를테면 지적 노동과 육체노동의 분할을 극복한 융합 같은 것과는 꽤나 다른 것이다. 이는 마르크스 같은 이가 말한 이상사회의 융합 형(?) 인간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 참 멀다. 그렇다면 융합은 우리 시대의 가장 저속한 이데올로기인 셈이다. 외려 예술은 그러한 값싼 융합에 호응하는 게 아니라 예술의 타자인 경제에 종속되지 않도록 하는 것, 새로운 감각과 경험, 이미지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아낌없이 노력을 바쳐야 한다. 누구는 그게 바로 저 옛날 성행하다 망한 모더니즘 미학의 알파이자 오메가 아니냐고 비웃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산되고 극복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억압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예술에서의 정치이다. 그런데 바로 그것을 졸업전시 주제에 미술에서 찾을 수 있다고 기염을 토한다. 놀랄 일이다!

5.
미래가 없다고 사망선고를 받은 이들이 자신의 눈을 비비며 실눈을 뜨고 예술과 대면하며 세상의 윤곽을 그려내려 한다. 그들은 그러한 자신들의 몸짓에, 질문, 주체, 역사, 정치 같은 성긴 말들을 수여한다. 흐릿한 시대에서 벗어날 흐릿한 언어들이 떠오르고 있다. 목전에 새로운 시간의 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듯하다.

_2016 융합예술학과 졸업전시를 축하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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