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적 대중문화 비평의 재출발-<오팡시브>의 문화분석을 읽는 재미(?)


N Jaar – Killing Time

“문화산업” 비판, 이후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문화산업’ 비판은 20세기의 가장 획기적인 또 결정적인 문화비평의 사례로 알려져 있다. Th. W. 아도르노, M. 호르크하이머, <계몽의 변증법>, 김유동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1.
그들은 비판이론(critical theory)이란 이름의 독특한 마르크스주의적 이론을 통해 독일은 물론 미국을 비롯한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문화에 대하여 집요한 분석과 비판을 펼쳤다. 그렇지만 정작 그것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 했는지를 둘러싸고 의견들은 분분하다. 게다가 온갖 낭만적이고 보수적인 문화비평과 그들의 주장은 혼동되기 일쑤였다. 이를테면 널리 자리 잡은 상투적 해석에 따르면 그들은 고급예술을 높이 사고 대중문화를 경멸하는 엘리트주의라는 치명적인 한계에 빠져있었다고 조롱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대중문화의 여러 현상들에 대해 탐탁찮은 듯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TV드라마이든, 재즈이든, 일간지 점성술란이든, 할리우드 영화이든, 그들은 대중들이 사랑하고 기꺼이 자신의 삶의 이야기와 쾌락 속에 소중하게 포함시키는 그 모든 것들을 비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긴 그들은 대중에게는 낯설고 어렵고 불편하기까지 한 쇤베르크니 알반 베르크니 하는 음악가들의 곡이나 제임스 조이스, 마르셀 프루스트, 사무엘 베케트 같은 난해한 전위문학가들의 작품을 선호한다. 역시 정작 속내는 대중문화는 쓰레기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고 그를 대신해  진짜, 본래적인, 진정성 있는 문화를 택하도록 설득하는 것일까.

그렇지만 이는 오해라고 말 할 수밖에 없다. 이는 그들의 ‘문화산업 비판’을 ‘산업문화 비판’으로 곡해하는 짓에 가깝다. 아도르노는 「문화비평과 사회」란 유명한 글에서 문화비평(Kulturkritik)을 향해 신랄한 쓴 소리를 뱉는다. 그가 보기에 자신의 시대의 문화비평이란 것이 “절망과 엄청난 괴로움이 존재하는 곳에서 단지 정신적인 것, 인류의 의식상태, 규범의 쇠퇴 따위 만”을 보고 그에 대해 오만하게 속물근성, 허영, 사치, 광기 따위의 낙인을 부여하곤 한다는 것이다. Th. W. 아도르노, “문화비평과 사회”, <프리즘>, 홍승용 옮김, 문학동네, 2004, 8쪽.
그리고 반세기도 전에 씐 이 글은 마치 오늘의 문화비평을 겨냥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속물근성을 필두로 대중문화의 다양한 정신적 효과를 비방하는 문화비평은 오늘에도 매우 흔히 볼 수 있다. 그러한 문화비평들 대개 ○○사회니 ××문화니 하는 이름을 붙이며 대중문화의 바깥에서 대중문화를 헐뜯고 다른 좋은 문화적 가치와 마땅히 취해야할 규범적 문화의 꼴을 주문한다. 그렇지만 문화산업 비판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만약 문화산업 비판 역시 그런 것이었다면 그것의 이름은 문화산업 비판이 아니라 ‘산업문화’ 비판이라고 해야 좋을 것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말하는 문화산업 비판에서 말하는 비판은 ‘변증법적’ 비판을 가리킨다. 직접 그의 말을 빌자면 변증법적 비판이란 이런 것이다. “변증법은 정신 숭배에도, 정신에 대한 적대관계에도 빠져서는 안 된다. 변증법적 문화비평가는 문화에 가담해야 하며 또한 가담하지 말아야 한다. 그럴 때에만 그는 자기 자신을 정당하게 대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도르노는 진정성의 문화, 실체성의 문화, 본래적인 문화 운운 그 어떤 아름다운 정신적 가치를 들먹이며 자신이 상대하는 대중문화를 경멸하고 ‘정신숭배’에 빠지는 것을 경고한다. 즉 그는 관념론적인 문화비판에 조심하도록 충고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반대의 편향, 즉 소박한 유물론에 빠지는 것 역시 경계한다. 다시 말해 문화란 고작해야 현실을 은폐하거나 신비화하는 당의정이거나 베일에 불과하며 그것의 핵심은 결국 그것을 요구하는 객관적 현실이나 경제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 말이다. 아도르는 이를 “정신에 대한 적대관계에 빠지는 것”이라 꼬집으며 그 역시 피하도록 요청한다. 그렇다면 “문화에 가담하며 또한 가담하지 말아야 한다”는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한 이율배반에 가까운 모토를 어떻게 새겨야할까.

아도르노의 주특기는 그러한 이율배반을 제거하지 않고 문화와 경제 사이의 대립을 사유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데 있다. 이는 주변에서 걸핏하면 마주하는 우리 시대의 문화비평과 제법 다른 접근이다. 많은 문화비평은 신자유주의 문화 비판이란 슬로건을 내걸 길 즐긴다. 이런 주장들의 속내는 간단하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사회에 살고 있으며 대중문화는 결국 그러한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의 특성을 닮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경제와 문화 혹은, 고색창연한 마르크스주의적인 어법을 빌자면,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가 무엇인지 딱 부러지게 밝히는 경우는 없다. 다만 비판적인 채 몸짓을 취하는 문화비평은 문화 자체에서 세계를 거울처럼 반영하는 무능력하고 수동적인 모습만을 발견하고는 문화를 조롱한다. 다시 아도르노의 표현을 빌자면 ‘정신에 대한 적대관계’에 빠지는 것이다. 물론 이는 또한 반대의 경향과도 함께 한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초래한 고통과 비참을 무시한 채, 즉 그것의 물질적인 삶의 세계로부터 초월한 채, 정신과 의식상태 혹은 규범의 쇠퇴 따위만을 고발하고 비난하는 데 머문다. 그리고는 곧장 문화란 우산 아래 현실을 망라하고는 그에 맞선 진정한 문화를 앞세우기에 바쁘다. 그렇다면 이 역시, 다시 아도르노의 말을 빌자면, 정신숭배에 빠지는 일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문화산업 비판’에서 찾아보야 할 점은 자신들이 대면하였던 문화 현상에 대해 얼마나 올바르고 정확한 비평을 제시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들의 작업에서 보전해야 할 합리적 핵심은 바로 방금 말한 이율배반을 견디면서, 즉 문화의 타율성과 자율성을 함께 인식하면서, 그것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변증법적 비평의 원리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이 과연 그들이 그토록 옹호하고 다듬어냈던 변증법적 문화비평을 자신들이 행한 문화산업 비판에서 제대로 실현했는지를 따지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외려 우리의 궁금증은 이런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과연 그러한 변증법적 대중문화 비판을 계속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사례를 찾아볼 수 있기는 한 것일까.

대중문화의 변증법적 비평

독자들이 거머쥔 이 책은 OLS(Offensive libertaire et sociale)란 좌파 단체가 발행하는 문화비평 계간지 <오팡시브Offensive>에 실렸던 평론, 대담 등을 묶은 것이다. 단체의 이름이 알려주듯이 이들은 매우 역설적인 지향을 내건다. 자유지상주의적인 노선 즉 어떤 형태의 억압, 권위, 규율에도 반대하는 그 노선은 반(反)사회적이거나 절대적 개인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지만 이들은 자유지상주의라는 노선과 함께 하는 또다른 노선의 이름으로 사회적 혹은 사회주의적인 노선을 택한다. 이는 마치 절충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두 개의 노선을 접붙이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프랑스어에서 사회라는 개념이 독일어에서의 사회라는 개념과 함축하는 바가 크게 다르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핏줄과 전통, 문화에 의해 매개된 공동체라는 것으로서 사회를 상상하는 독일 식 사회 개념과 개인들 사이의 연대를 통해 만들어진 인위적 공동체를 가리키기 일쑤인 프랑스 식 사회 개념은 사회 개념이 진동하는 양 극처럼 보인다. 전자에서 개인은 사회에 통합되고 그것이 마련한 가치와 규범을 내면화하여야 하는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리고 후자에서는 개인으로서 자신을 구성하는 일이 성공리에 완수되지 않으면 사회란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길 것이다.

이는 미국인들이 자주 말하는 공동체주의와 개인주의 사이의 관계를 말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미국인들이 말하는 공동체주의와 개인주의의 관계란 것이 단지 문화의 문제에 불과한 것이라면 독일과 프랑스에서 그것은 문화라기보다는 사회적 관계를 체험하는 원리이자 정치를 상상하는 지평 자체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문제는 사회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우선적인가를 택하는 것이 아니다. 두 가지 모두 허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자리에서인가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이 (아도르노를 참조하며) 말했듯이 개인인가 사회인가라는 쟁점은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문제이기는커녕 이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아포리아 즉 해결 불가능한 이율배반에 가까운 것이다. 따라서 그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차라리 게슈탈트심리학에서 말하는 배경과 형상(figure and ground)의 관계처럼 여겨야 옳다고 말한다. 이는 개인을 형상으로 보면 사회는 배경으로 나타나고, 다시 사회를 형상으로 보면 개인은 배경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 때문이다. 형상과 배경을 한꺼번에 볼 수 없다. 개인과 사회는 항상 다른 것을 배경으로 해서만 파악되는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럼 어쩌자는 것인가. 그러니 이율배반이라는 논리적 모순을 피하기 위해 개인과 사회란 대립 항을 현실을 인식하는 틀로서 채택하지 말자는 것인가. 아니면 둘 사이에 어떤 황금률을 찾아내자는 것인가. 제임슨은 역시 아도르노 못잖게 변증법적인 입장을 제기한다. 개인과 사회의 이율배반, 마르크스주의적인 용어로 옮기자면 적대 혹은 모순은 관념적인 부조리가 아니라 현실을 움직이도록 하는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OLS라는 단체가 내선 기이하고 이율배반적인 이름에 대하여 크게 의아스런 기분을 느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들이 절대자유주의적인 입장과 사회주의적인 입장을 함께 놓는 것은 원을 사각형으로 만드는 일처럼 불가능한 정치적 노선을 겨냥하거나 터무니없이 부조리한 종합을 행하겠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모순을 변증법적으로 사유하겠다는 그들의 의지를 기입하고 있는 듯 보인다.

<재미가 지배하는 사회>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을 참조하며 사회비판과 예술비판을 결합하겠다고 말한다. 프랑스의 대표적 베버주의 사회학자들이 쓰고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그 책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초기 자본주의의 정신이었던 것처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정신이란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그들이 그 책에서 말하는 사회비판이란 20세기 중반까지를 지배했던 사회주의의 자본주의 비판, 즉 착취와 지배에 대한 비판을, 그리고 예술비판이란 1968년 혁명 이후의 미학적 자본주의 비판, 즉 개인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고갈시키는 권력으로서의 자본주의 비판을 일컫는다. 다시 말해 이 책을 출판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이름으로 내건 명칭처럼 그들은 아주 오래전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변증법적인 비평으로서의 대중문화 비판을 시도하고자 한다. 그것도 대중문화를 비평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불가능할 뿐 아니라 일종의 보이지 않는 금기에 의해 그런 비평이 재갈물린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말이다.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라는 새로운 학문(아니 새로운 이름으로 등장한 문화비평의 정신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은 대중문화 비평을 대중문화의 수용과 소비를 통해 나타나는 대중의 쾌락, 욕망, 거부, 타협을 읽는 일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대중문화는 고급예술에 기죽을 필요가 없으며 문화비평은 그 안에서 축복받아야 할 수많은 미덕을 찾아내면 그것을 기려야 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오팡시브>가 프랑스 좌파 내부의 대중문화 비평에 대해 신랄한 조롱을 퍼붓는 것 역시 바로 이러한 추세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더 서글픈 점은 프랑스 좌파 비평가들은 스포츠, TV드라마 따위의 한술 더 떠 그 안에서 대단한 철학적 가치가 스며들어 있는 것처럼 너스레를 떤다는 것이다. 아무튼 방향은 같다. 대중문화는 민중의 아편도 아니고 지배의 트로이의 목마도 아니며 대중은 그렇게 호락한 바보가 아닌지라 대중문화 안에서 자신들의 자취를 남기고 또 기꺼이 자신들의 욕망과 정체성 따위를 실현하는 것으로 전용하고 정복한다는 것이다. 요점은 이런 것이다. 대중문화 만세! 대중문화여 영원하라!

‘좌우합작’ 문화비평으로부터 좌파적 문화 비판을 구제하기

따라서 대중문화는 그것의 생산의 단계에서 승인되고 소비의 단계에서도 승인된다. <오팡시브>의 말을 빌자면 “세계화된 문화산업에 이처럼 거듭 항복 의사를 표시하는 것은 아무런 제동장치도 듣지 않는 오락문화의 강림을 예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좌파에 의한 (대중)문화 비판이 거부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자체가 금지되어 있는 상황에서, <오팡시브>는 그 금지된 과제를 스스로 떠맡겠다고 기염을 토한다. 그리고 우리는 급기야 그들이 서슴없이 대중문화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힐난할 때, 눈을 의심하게 된다. 먼저 우리는 마치 더 이상 용인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진 주장을 뻔뻔하게 되살리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그러한 비판을 위해 그들이 꼼꼼하고 치밀한 분석을 기꺼이 제공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오팡시브>의 대중문화 비판은 외부의 현실이 대중문화의 내용을 통해 전달된다는 식의 케케묵은 ‘반영론’을 쫓지 않는다. 대중문화에서 지배계급의 의지나 자본주의의 초월적 정신이 그 내용 속에 담겨있고 반영된다는 식의 주장은 그들의 접근과 관계가 멀다. 그들은 변증법적 비평의 원리를 쫓으며 대중문화의 바깥에서 진짜 문화를 알고 있는 호사가의 자리에 선 채 대중문화를 헐뜯고 비방하지는 않는다. 또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니 세계화니 금융지배 경제니 하는 개념을 걸핏하면 들먹이며 그것을 마치 배경화면 정도로 써먹기만 하고, 정작 그것이 문화의 내부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밝히지 않는 추상적인 (윤리적, 미학적) 비판들과도 선을 긋는다(아마 눈치 빠른 독자라면 한 때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독일의 대학에서 가르치는 어느 한국 철학자의 문화 비판을 대뜸 떠올릴 것이다). 여기에 실린 글들은 바로 대중문화의 내부에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문화의 형식과 구성, 효과를 비판한다. 새로운 자본주의가 발휘하는 영향 혹은 규정을, 대중문화의 내부에서 읽고, 또 그것이 자신의 외부인 듯 보이는 자본주의적 경제질서에 의해 매개된 것임을 밝혀준다.
그렇지만 <재미가 지배하는 사회>가 오늘날 희귀할 대로 희귀해진 변증법적 대중문화 비판을 복원하려는 시도로만 여긴다면 이는 소홀한 대접일 것이다. 우리는 ‘내 집 마련의 이데올로기’에서 만연한 관광 혹은 ‘포스트-관광’ 문화에 이르는 대중문화의 여러 모퉁이를 순회하게 된다. 무엇보다 좌우를 막론하고 근대 세계에서 더할 나위 없는 영예를 누려온 스포츠에 대한 비판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고 또 여차하면 재미난 분란을 일으킬만한 대목이다. 2002년의 한일 월드컵 경기 시절 한국에서도 역시 축구는 물론 대중문화로서의 스포츠를 둘러싼 흥미로운 비평들이 출현하였다. 특히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문화비평가들의 평론은 축구에서, 가볍게는 유사 부족 문화나 대항문화에서부터 시작해 비판적 민족주의의 이르기까지, 수많은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이러한 비평은 스포츠의 열광적인 소비자로서 팬덤(fandom)이라는 주관적 위치를 당연시하며 스포츠라는 국가적이면서도 비즈니스적인 그 문화산업의 객관성에 대하여 말을 아낀다. 나아가 그것은 스포츠가 자신을 제시하기 위해 쏟아내는 신화적 어휘와 구문들을 복기하며 혹은 코드를 바꿔 사용하며 스포츠의 이데올로기적 지배를 용인하고 또 촉진하였다. 그런 점에서 스포츠는 대중문화의 원(原)-이데올로기를 농축하고 있다. 그리고 <재미가 지배하는 사회>는 그러한 대중문화 비평에 참여하는 ‘비판적’ 읽기의 허위를 스스럼없이 폭로한다. 이러한 비타협적인 태도야 말로 이 책을 술술 읽게 만드는 재미 가운데 하나이다. 물론 ‘재미가 지배하는 사회’가 제공하는 재미와 전연 다른, 꽤 괜찮은 재미가 있음을 깨닫는 것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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