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체제의 비판 – 어떤 민주주의를 위해 비판할 것인가

과거사 청산이라는 “문제”
거의 잊혀지고만 그렇다고 이렇다 할 주목을 받은 적이 없던 소설 한편이 생각난다. 재일교포 작가였던 이회성의 소설 {금단의 땅}이 그것이다. 차라리 공상과학적인 통속 정치소설이라야 제격일 이 소설은, 박정희체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워낙 읽은 지 오래여서 기억이 가물 하지만 줄거리는 제법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그 소설은 박정희체제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는 지하전위조직의 활동을 다루고 있다. 안타깝게도 소설의 결말에서 주인공은 혁명을 성사시키려는 거사 직전 정체가 들통나 사형을 당한다. 조총련계의 사회주의자였던 이회성은 소설을 쓰는데 충분한 자료를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짐작컨대 그의 소설은 남민전이나 통혁당 사건에서 몇 가지 소재를 얻고 일본 언론 매체를 통해 알게된 남한의 정치체제에 그 나름의 상상을 교직하였을 것이다. 그 소설에는 조금 엉뚱한데도 있다. 주인공인 혁명가의 모습은 어딘지 박정희의 모호한 정치적 정체성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황당한 공상적인 정치소설을 싸구려 대중소설이라고 간단히 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문득 “과거사 청산”의 시대에 우리가 직면한 기억의 과제를 생각하면 이 소설에서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진지하고 엄격한 진실의 보고서보다 이 공상적인 정치소설이 더 큰 진실을 발언하는 것 말이다.

<당대비평> 겨울호에 기고한 글. 며칠을 끙끙대며 썼다. 기고하는 저널의 편집위원인데다 그 저널을 대표하는 원칙을 비판하는 글이어서 매우 부담이 컸다. 가능하면 게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아마 최근 쓴 글 가운데 가장 쓰고 지우길 많이 한 글이지 않을까 싶다. 털고나니 후련하다. !

“탈냉전 민주화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지금, 우리는 “과거사 청산”이라는 과제에 직면했다. 그를 생각할 때, 이 소설은 정확한 조사와 기록을 통한 진실의 규명보다 더 올바르고 진정한 “청산의 실천”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과거사청산은 대충 지난 수십년 간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보수 세력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반공주의와 국가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려는 민주주의의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이데올로기 비판으로서의 과거사 청산을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작동시킨다. 과거의 정치체제 특히 박정희체제란 질서와 안정을 내세웠지만 국민을 항상적인 내전과 공포의 상태로 국민을 몰아넣고 사회에 대한 여하한 비판도 모두 반역과 체제전복으로 처분하는 “죽임의 정치체제”였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탈냉전의 시대, 민주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계몽된” 시민으로서 우리들은 더 이상 이런 정치 체제를 용인해서는 안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 반공주의와 국가주의로 대표되는 반민주적인 이데올로기를 비판해야 한다. 반공주의와 국가주의란 국가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허위적인 환상이다. 우리는 파시즘적인 지배 세력의 정치적인 이해를 은폐했던 반공주의와 국가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인 허구의 뒤편에 숨겨진 진실, 고문과 살인, 반인륜적인 삶의 존엄의 파괴를 폭로하고 고발하여야 한다. 반공주의와 국가주의 그리고 여전히 이에 의탁한 채 자신의 힘을 유지하고 있는 정치세력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과거사 청산이라는 이데올로기적인 투쟁이 필요한 것이다. 질서와 안정, 번영과 조국근대화? 그것의 실질은 잔인무도한 국가의 폭력과 물샐틈없는 국민의 감시와 공포였다.
국가 폭력의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과 피해를 조사?그들에게 응분의 보상을 제공하고 온당한 복권의 기회를 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어야 한다. 이는 어떤 위협을 무릅쓰고 관철시켜야할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과거사 청산이 위와 같은 논리에 머물러서는 안될 것이라는 것 역시 굽힘없이 주장해야 할 것이다. 송두율 교수의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또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비전향장기수의 민주화 운동으로의 인정에 관련한 파문에서 드러나듯이, 우리는 극우보수세력의 위협 못지 않은 자유주의적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 듯이 보인다. 게다가 우리는 탈냉전 시대의 민주주의란 말을 무색하게 할 만큼 소심하고 냉전 시대의 유령에 시달린다. 시민사회를 소외시킨 국가권력, 시민사회의 주권과 이해를 매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시민사회를 대신하여 사회적 삶의 내용을 결정하는 국가, 그리고 그런 국가가 존재하는 한 불가피할 수밖에 없는 전체주의적인 폭력으로서의 정치적인 억압과 살인. 이런 시민사회-국가의 모델에 얽매여 있는 한 우리는 과거사 청산을 위한 결정적인 몸짓에 결코 한 발짝도 다가서지 못할 것이다. 이런 자유주의적인 관점의 정치적인 기획으로 진정한 민주주의를 전유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혁당은 무엇인가, 통혁당은 무엇인가, 남민전은 무엇인가, 또한 다른 수많은 정치조직의 투사들은 무엇인가. 그들을 국가 폭력으로 고통받은 무고한 시민으로 환원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그들의 삶은 모두 자유주의적인 민주주의의 틀에 적합한 삶, 단지 국가폭력의 피해자로서의 삶으로 환원되어도 좋은 것일까. 그들의 정치적 삶의 실체, 그들이 확신했고 실천했던 정치적인 삶의 내용은 함구되어도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면 {금단의 땅}이란 소설은 더욱 돋보이지 않을 수 없다. 그 소설 역시 중앙정보부와 경찰, 군대 그리고 국가감시기구의 위협과 폭력을 폭로한다. 그렇지만 그 소설의 진정한 이야기는 혁명가들의 정치적인 삶이다. 그들의 정치적 삶이란 분명하다. 그들이 박정희체제를 타도하고 건설하려 했던 미래 사회의 청사진, 이를 이루기 위해 작성했던 그들의 섬세한 혁명의 전략. 우리가 그것을 지지하고 인정하느냐의 여부와 관련 없이 우리는 그것이 그들의 정치적인 삶의 실질이었음을 인정할 수 있다. 그것은 과거사 청산에서 마주하는 피해자들의 표정 없는 얼굴과 전연 다르다. 그 소설의 허구적인 주인공들은, 현재에 이르러 민주화 운동이자 국가폭력의 피해라고 불리는 애매한 “추상적인 삶”, 그것이 비워내는 정치적인 실질을 보여준다. 그 소설이 민주화운동의 투사, 국가폭력의 피해자에게 어떤 충분한 위안을 마련해줄 수 있을까. 그렇지만 그 소설은 적어도 성공적인 기억을 실천한다. 적어도 우리가 표준적인 정신분석학이 가르쳐주는 교훈을 받아들인다면 말이다. 정신분석학은 기억이란 것이 상징적인 질서와 화해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 걸러진 과거에의 의식이 아님을 극구 강조한다. 적어도 기억이란 것이 견딜 수 없는 감정적인 압력과 불쾌를 겪으면서 외상적인 과거와 만나는 일이라면 그것은 자신의 상징적인 세계를 뒤흔드는 일일 수밖에 없다. 그 때의 기억이란 잊혀진 일을 의식 속에 되살려내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진 기억을 위협하는 과거의 공포와 경악을 체험하는 일이다. 그것은 “기억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억의 상징적인 회로를 무너뜨리는 만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상할 수 있는 비판, 과거사 청산은 특별한 정치활동을 했던 자들뿐 아니라 광범한 시민들까지 지배했던 적나라한 국가폭력을 극복하는 것이라는 “한계 설정”에 수긍할 수 없다. 그러한 한계 설정은 곧 과거사청산의 범위와 방식을 한정하는 것을 넘어 과거사 청산이 지닌 정치적인 정체성 자체를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정치와 정치적인 것 그리고 민주주의
클로드 르포르가 말한 “정치(the politics)”와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의 구분을 참조하여 말한다면, 우리는 민주주의란 것이 정치로 결코 환원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정치”란 경제적인 제도나 문화적인 관행처럼 사회를 구성하는 하위적인 영역 혹은 체계 가운데 하나를 가리킨다. “정치적인 것”이란 거칠게 요약하자면 정치와 경제, 문화 등의 하위 영역이나 체계로 구성된 사회, 바로 그 사회를 구조화하는 원리를 결정하는 몸짓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민주주의는 “정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적인 것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정치로서의 민주주의, 즉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투표와 선거의 자유 따위와 구분해야할 것이다. 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정치적인 것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실천하려했던 “좌익용공세력”의 활동, 그들의 실질적인 정치적인 삶을 표백시켜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인 삶의 내용을 비워낸 채 그들을 “정치” 즉 형식적인 제도와 절차로 환원된 민주주의 안에 놓인 무력한 존재로 전락시키고 말 것이다. 앞의 도식대로 말하자면 우리는 “정치의 주체”와 “정치적인 것의 주체(우리의 표현대로라면 민주주의의 주체)”를 구분해야 한다. 유신헌법을 지지하고 반공법을 준수한 정치적인 공동체 안의 시민은 정치의 주체이다. 여당인 유신공화당을 비판한 야당과 그들에게 투표한 시민 역시 정치의 주체이다. “좌익용공세력”도 물론 정치의 주체이다. 법률적으로 규정된 범죄자로서 재판을 받고 정치적인 반대파란 이름으로 알려졌다는 점에서 그들은 정치의 주체이다. 그러나 “좌익용공세력”은 정치적인 게임 구조 안에서 지배집단과 대칭적인 관계에 놓인 그런 주체인가. 당연히 아니다. 그들은 정치와 다른 하위체계들 사이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조직하는 사건을 실천하려 했다는 점에서 정치를 넘어서는 공간에 속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짓궂은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박정희체제의 한국적 민주주의 혹은 민족적 민주주의야말로 “자유민주주의”의 위반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가장 순수하게 실현하는 형태가 아니었을까. 박정희체제는 정치가 정치를 기율하는 정치체제의 공간으로 정의되어야할 것이다. 박정희체제는 유신헌법을 제정하고 허수아비 정당을 결성하고 숱한 정치적인 결정과 제도를 통해 정치를 가득 채웠다. 박정희체제는 자유민주주의의 바보같은 원칙 즉 “정치는 정치이다”라는 동어반복적인 형식논리를 철저히 따른 체제였다. 따라서 박정희체제의 민족적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충분히 민주주의적인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정치적인 것을 사회의 하위체계인 정치로 환원함으로써 정치를 물신화한다. 자유민주주주의 정치적인 주체란 자본주의적인 상품관계 안에 놓인 물신적 주체처럼 1인 1표의 투표권이라는 정치적인 권리의 물신주의에 빠져든 주체이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를 구조화하는 원리를 변화시키는 정치적인 행위와 하위체계인 정치적인 장 안에서 벌어지는 형식적인 정치적인 활동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박정희체제는 진정 자유민주주의적이다. 박정희체제는 정치를 정치로서 즉 악무한에 가까운 자기반영적인 순환의 한계 안에 가두는 체제였기 때문이다. 박정희체제의 정치를 특징짓는 것은 무엇보다 숱한 헌법의 개정(“유신 헌법”)과 법률의 선포(긴급조치법을 위시한 수많은 특별법과 정치적인 포고, 칙령)에 있었던 것 아닐까. 그리고 수많은 정치적인 제도와 관행을 고안하고 복잡한 관료제를 실행함으로써 정치를 더없이 정치의 하위체계 안에 합리화시켰던 것 아닐까.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박정희체제는 완벽하게 비민주적인 정치적 권력이었다. 이는 “정치적인 것”의 공간, 즉 하위체계로서 정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공간인 “정치적인 것”의 공간을 질식시켰기 때문이다. 박정희체제가 수많은 자유민주주의적인 기본권을 제한하였다는 것, 자유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정당한 정치적 참여와 대표의 절차, 관행을 부정했다는 이유에서 비민주주의적인 체제였던 것은 아니다. 박정희체제의 특성은 정치와 “정치적인 것” 사이의 단락(短絡), 즉 하위체계로서의 정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정치적인 것”의 공간, 근본적인 사회적인 협약이 벌어질 수 있는 공간을 철저하게 가로막았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박정희체제가 불철저한 자유민주주의였다는 것, 충분한 법치국가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될 것이다. 박정희체제의 유산에서 벗어나는 민주주의의 기획이 고작 자유민주주의의 완성, 시민사회와 국가의 정상적인 관계를 정립하는 것으로 머물러서는 안된다. 정치 안에 더 많은 민주주의적 법률을 심어놓고 더 많은 민주주의적인 권리를 보장하는 것으로 민주화가 축소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파시즘적인 형태로 정치를 정치의 한계 안에 가두었던 박정희체제의 논리를 단순히 뒤집는 것에 불과하다. 박정희체제의 파시즘적인 특성은 적나라하고 야수적인 국가 폭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박정희체제의 파시즘적인 특성은 하위영역으로서의 “정치 안에서의 정치”를 벗어나는 정치, 앞서 말한 대로라면 “정치적인 것”을 개방하는 실천을 배제한데 있다. 따라서 진정한 정치적 행위는 정치의 파괴로 즉 헌정질서의 문란과 정치의 파괴로 몰아붙인 데 있다. 따라서 정치적인 이견과 반대는 곧 정치 자체의 부정 그리고 반사회적, 반국가적인 행위로 규정되었다. 결국 한국 사회에서 진정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적인 실천을 행한 주체가 있다면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의 이름은 “좌경용공세력”이다.
정치와 경제의 이분법을 넘어, 강제와 동의를 넘어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박정희체제의 또 다른 결정적인 특성을 발견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박정희체제를 정치적으로 극복하려는 노력을 가로막는 근본적인 장애물인 정치와 경제의 도착적인 관계이다. 박정희체제를 둘러싼 숱한 정의와 분석은 바로 이런 정치와 경제의 도착적인 관계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박정희체제에 대한 비판의 자유주의적 논리가 어쩔 수 없이 갇히고 마는 불가피한 논리적 궁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조국 근대화와 한강의 기적의 주역으로서의 박정희체제와 폭압적인 정치권력으로서의 박정희체제 사이의 관계이다. 조갑제와 이인화를 비롯한 극우보수적인 이데올로그는 차치하고서라도 범박한 민중의 여론은 경제적인 근대화의 성과에 관한 한 박정희체제의 업적을 인정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좇는다. 가난을 숙명처럼 알고있던 국민에게 하면 할 수 있다는 신념을 안겨준 체제, 보릿고개의 빈궁을 넘어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였던 국가를 중진국의 대열에 올려놓은 체제, 아무런 자원도 갖지 않은 나라에서 수입대체 산업화와 수출 주도의 공업화로 세계가 경악할 경제적인 성장을 이룩한 체제. 박정희체제를 항상 따라다니는 이같은 시중의 상식은 박정희체제의 연루자들이나 숭배자들에게 국한된 신화적인 믿음이 아니다. 이는 박정희체제의 비판과 극복을 위한 논리 속에서 그리고 바로 현존하는 정치의 인식의 지평 안에 끈덕지게 따라다니는 신화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박정희체제를 둘러싼 논란도 바로 이 언저리에서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박정희체제를 정의하기 위해 제시된 수많은 정치학, 경제학 분야의 유사과학적인 개념은 앞서 든 신화적인 믿음을 공고히 한다. 이미 박정희체제를 정의하기 위해 과대성장국가, 개발독재, 발전국가, 국가주의적 근대화수동혁명체제, 관료적 귄위주의론 등 여러 가지 개념들이 제시되어왔다. 이러한 개념들은 모두 암묵적인 논리로서 정치-경제의 분리와 두 하위체계의 긴장을 가정한다. 아마 이런 박정희체제의 인식론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최근 출간된 {개발독재와 박정희시대}에 실린 이병천의 말일 것이다.
“예컨대 박정희시대의 개발과 독재, 경제기적과 정치억압 사이에 과연 어떤 관련이 있는지, 나아가 한국 모더니티의 역사에서 개발독재와 민주화운동은 각기 어떻게 자리매김되어야 하는지 하는 기본문제에 대해서조차 본격적이고 충분한 학술적 토론이 있었던 것 같지 않다. 박정희시대의 성취를 애써 외면하는 ‘근본주의적 초비판’도 물론 문제지만 냉전 초국가주의·돌진주의의 위험성을 망각하는 ‘무반성적 승리주의’, 미성숙한 한국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에 찬물을 끼얹는 박정희 우상화 담론이야말로 탈냉전 민주화시대 박정희 바로보기의 최대의 장애물이다.”
그는 박정희체제에 대한 보다 성숙한 인식이란 이름으로 개발과 독재, 경제와 정치를 대립시킨다. 한국자본주의 성격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비판적인 정치경제학자였던 그가 정치의 근본적인 우위라는 “정치경제학 비판”의 공리를 모를 리 없을 것이다. 만약 그것을 알고있지만 지금엔 그것을 부정하게 되었다면 그는 그런 입장과 결별하게 된 이유를 알려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어쨌든 위의 짧은 인용 글에서 보듯이 그는 “근본주의적 초비판”이란 이름으로 박정희체제의 정치적인 정체성을 비판하려는 입장을 극구 깎아내리고 있다. 물론 그는 ‘미성숙한 한국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에 찬물을 끼얹는 박정희 우상화 담론’에 관해서도 비판한다. 그러나 박정희라는 정치지도자에 관한 우상화담론의 핵심이 바로 박정희라는 전직 대통령을 흠결 없는 영웅으로 이상화하는 성인전(聖人傳)적인 신화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정치와 경제의 구분 그 자체에 있는 것 아닐까. 그런 점에서 ‘근본주의적 초비판’이라고 그가 부른 입장은 ‘박정희 우상화 담론’과 대립적인 담론이기는커녕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조건 아닐까. 즉 탁월한 경제적인 성과를 이뤄낸 체제였지만 군사독재라는 비민주적인 정치체제라는 점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논리야말로 근본주의적 초비판이든 우상화담론이든 대립적이기는커녕 상호보완적인 두 담론(?)의 조건 아니었을까. 이런 점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성숙과 시민사회의 복원을 주장하면서 박정희체제를 비판하는 자유주의적인 입장과 박정희체제의 경제적인 기적과 성과를 예찬하는 입장 사이의 유사성을 비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주목할 만한 비판은 이광일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 체제로의 이행이라는 변화의 흐름 안에서 박정희체제를 둘러싼 논쟁을 해석할 필요가 있음을 분명하게 밝혀준다.
“가장 일반화되어있는 박정권에 대한 다른 하나의 평가는 경제발전의 업적은 인정하지만 자유주의적 기본권리 등을 억압하였기 때문에 정치적인 측면에서 비판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평가는 경제(사회)와 정치를 서로 외재적으로(externally) 설정하고 양자의 내적 관계에 대해서는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고 있다. …… ‘국가 대 사회’라는 자유주의적 영합게임의 틀을 전제로 하는 이 입장은 그동안 제기된 모든 문제의 주요 근원이 국가의 권위주의적 개입에 기인하므로 국가의 경제개입 배제 및 시장경쟁 원리의 충실한 관철이 보장된다면 문제는 자연히 해소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입장은 근대화론에 기반한 ‘기승전결론’을 신자유주의논리와 접합하여 수용한 ‘신근대화론’으로, 이제 제2의 경제도약을 기반으로 ‘정치적 민주화’만 공고화시키면 21세기에는 ‘세계 속의 한국(Korea in the World)을 구현할 수 있다는 논리를 함축하고 있다.”
앞의 인용문에서 단언하는 것처럼, 박정희체제의 정치적 과오와 경제적 공적을 분간하고 둘 사이에 균형잡힌 분석을 하자는 주장은 거부되어야 한다. 물론 이런 주장이 박정희체제 비판의 공간을 점유하게 된데에는 무엇보다 ‘자본주의 비판’의 위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체라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국가의 형태를 한국 자본주의사회구성체의 맥락으로부터 떼어낼 때 결국 우리는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킬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정치와 경제의 외재성을 가정하는 논리를 극복하고 박정희체제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기획을 되살려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해 넘어가기 앞서 잠시 한가지를 지적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이는 박정희체제의 이데올로기 비판의 공간이 “강제였는가 동의였는가, 파퓰리즘이었나 합의독재였는가, 기동전이었는가 진지전이었는가” 등을 묻는 기존의 논의에 대해서이다. 박정희체제가 강권적인 국가폭력의 체제였는가 아니면 국민의 동의와 내면적인 동일시에 바탕하고 있었는가를 둘러싼 논쟁은, 박정희체제 비판의 기획을 계속하여 정치적인 빈곤에 허덕이게 만들어버린다. 비록 그런 논의에 내장되어있던 비판적인 함의를 고려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박정희체제 비판을 빈곤한 자유주의적 주권의 모델 안에 감금한다는 폐해에 견주면 무시할만한 것이다. 앞의 논의는 주권이라는 법의 모델 혹은 주권적인 개인의 계약으로서의 국가라는 모델을 보편화시킨다. 그 결과 박정희체제와 그 지배대상이었던 민중을 모두 정치적 주권성(sovereignty)으로 간단히 환원되어버린다. “인민은 어떻게 국가권력에 주권을 양도하였는가”라는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정초적인 환상은 언제나 국가권력을 강제와 동의, 합의와 폭력이라는 틀 안에 각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주의의 주권적인 법의 모델은 국가권력이 얼마나 강제와 동의였는지를 측정하느라 자신의 모든 정력을 소모한다. 그리고 그것은 정치 비판의 공간을 밀폐시켜 버린다. 국가의 폭력과 일상의 폭력을 함께 분석하여야 한다는 정치 비판의 확장과 심화는,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정치비판을 자유주의적인 지평으로 계속 뒷걸음질치게 만드는 유혹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국가권력이 얼마나 강제였고 동의였는가, 합의였고 폭력이었는가를 묻는 물음은, 해체주의적인 말장난을 하자면 자유주의의 국가권력을 둘러싼 환상을 유지시켜주는 소급적인 환상, 즉 주권성의 신화를 대리보충(supplement)하는 수행적인 언표에 불과하다. 요컨대 그것은 박정희체제가 얼마나 전체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치체제였는가를 분석하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 박정희체제를 둘러싼 향수와 선망이 얼마만큼의 합의였고 동의였는지을 분석하기 위해 그토록 힘을 쏟을 필요가 있을까. 과연 그것이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 차라리 그것은 모두 상식적으로 모두 아는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뿐이라고 조롱받아야하지 않을까.
조국 근대화에서 민생까지 – 박정희체제의 생권력
우리는 박정희체제 비판을 지금의 민주주의의 기획과 결합시키기 위해 박정희체제의 정치경제학비판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박정희 향수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자생적인 이데올로기를 분석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박정희체제에 대한 비판은 여러 갈래이다. 박정희체제의 정치적인 이념, 유신헌법과 국민교육헌장, 훈시와 포고, 담화문, 그리고 새마을노래의 가사 등에 등장하는 공식적인 교의로서의 박정희 이데올로기가 있다. 그것은 형식화된 지식, 관념, 교의 등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이다. 지식인들은 주로 이를 겨냥하여 박정희체제를 비판한다. 다음으로 물질화된 이데올로기, 즉 학교, 가족, 경찰, 감옥, 군사제도 안에서 실행되는 관행, 의례와 캠페인 등이 있다 이를테면 “새마을운동”은 알튀세르 식으로 말하자면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원형이다. 이런 물질적인 이데올로기로서의 박정희 이데올로기는 박정희 향수론에 물든 극우보수세력들이 주로 의존하는 관점이다. 이들의 관점은 정확히 물신숭배적이다. 극우보수세력의 박정희 향수의 특성은 어느 철학자의 말을 비틀어 사용하자면 “정당화 담론”이 아니라 “우상화담론”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상화담론인 이유는 박정희체제에 대한 합리적인 이성을 통한 이해가 아니라 병적인 열광과 맹목적인 이해관심에 물들어있다는 뜻에서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물신숭배란 엄격한 뜻에서 진정으로 우상화이다. 우상화로서의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장치로부터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다. 즉 박정희체제의 의례적인 실천, 관행, 기념물(경부고속도록, 포항제철, 구미수출자유공단 등)로부터 그리고 그것이 각인해 놓은 신체적인 기억, 삶의 활력과 열정이라는 정서적인 힘의 반복충동. 극우보수세력은 그런 점에서 박정희체제의 “이념”에 호소하지 않는다. 조갑제와 이인화를 비롯한 박정희 “우상화담론”의 열성적 이데올로그는 그런 점에서 한결같다. 그들은 박정희체제를 둘러싼 정치적인 논쟁 자체를 불신하고 혐오한다. 박정희체제를 정당화하는 것 자체가 자유주의적인 수다, 공허한 민주주의적인 일탈로 박정희체제의 삶의 정수를 배반하는 지식인적인 불평에 동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리고 이는 모든 파시즘의 특성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또 한가지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이 있다. 그것은 박정희체제에 관한 자생적인 이데올로기이다. 그것은 거칠게 말하자면 국민의 기억 안에 담겨있다. 과거사 청산을 둘러싼 논의에 대해 나타나는 전반적인 염증과 혐오는 민생에 관해서나 신경쓰라는 것이었다. 참여정부의 4대개혁입법에 대한 한나라당의 공격 역시 민생정치였다. 열린우리당의 보수적인 분파들이 국가보안법폐지와 과거사청산을 비롯한 주요한 현안에 대하여 거리를 두기 위해 동원하는 논리 역시 민생 우위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민생의 이데올로기를 우리는 바로 자생적인 이데올로기의 표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박정희체제의 경제적인 업적에 대한 퇴행적인 향수가 아니다. 차라리 박정희체제라는 권력에 대하여 맺는 혹은 그 체제가 권력 일반에 대하여 맺도록 만들어 놓은 이데올로기적 관계의 모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수 있다. 우리가 박정희체제의 정치경제학 비판으로 박정희체제의 권력 비판을 완결할 수 없다고 말할 때 염두에 두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박정희체제라는 특수한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경제학 비판으로 중단해서는 안된다. 박정희체제가 어떻게 주체성을 만들어놓았는지 분석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근대 자본주의의 독특한 생권력(biopower)으로서 박정희체제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셀 푸코는 그의 생애 후반부에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계보를 추적하며 근대자본주의의 권력에 대한 분석을 확장하려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사후 그의 이론적인 작업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1976년에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이뤄진 강의를 기록한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이다. 이 글에서 푸코는 나치권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분석을 제시한다.
“나치사회의 특이한 점은 생권력과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주권이 사회전체에 확산된 사회라는 점이다. 시민을 마음대로 죽이고 살릴 수 있는 권한을 국가에게 허용하는 고전적이며 구시대적인 메커니즘과 규율 및 조절 주변에 형성된 새로운 메커니즘, 즉 생권력이 메커니즘이 정확하게 한데 합쳐져있다. 그래서 나치국가는 자신이 정돈하고 보호하고 보증하고 생물학적으로 배양하는 삶의 장과, 누구든지-타민족이 아니라 자기고유의 국민들까지도-죽일 수 있는 주권을 공존시킨 국가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위에서 인용한 푸코의 글을 정확히 박정희체제에 적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박정희체제야말로 생권력의 화신이다. 박정희는 국민이 따뜻한 쌀밥을 배불리 먹고 기와집에서 살게 하는 꿈을 꾸었던 도착적인 모습의 근대 군주였다. 그가 도착적이었던 것은 파시즘의 핵심적인 특성이 그렇듯이 살리기 위해 마음껏 죽였다는 점에 있다. 즉 삶을 위해 죽음을 동원했다는 것이다. 아리안 인종의 삶, 독일 국민의 생명을 위해 생식과 진화라는 생물학적인 논리(우생학과 사회위생학 등)를 동원했던 나치즘은 생명, 삶에 미친 권력이었다. 이처럼 박정희체제도 역시 국가의 부강과 국민의 안녕을 위해 마음껏 죽일 수 있었다. 긴급조치와 반공법으로 상징되는 죽일 수 있는 군주적 권력은 번영과 행복이라는 근대적 생권력과 함께 회전하였다. 알다시피 박정희는 평생동안 자신이 복지사회를 위해 매진하고 있다고 믿었다. 예컨대 유신체제의 수립 직후 박정희는 이렇게 강변하였다.
“우리가 남보다 뒤지지 않고 앞서 나가려면 남보다 더 많은 땀을 흘리고 더욱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하겠으며 능률을 극대화하고 국력을 배양하여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할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서 복지국가를 건설할 수 있고, 그 터전 위에서 평화통일을 추구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하자는 것이 10월유신인 것이다”
따라서 박정희체제는 단순히 억압적인 정치체제로도 후후발 산업화 국가의 효율적인 경제체제로도 환원할 수 없는 독특한 권력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국민을 순수한 상태의 삶, 즉 건강과 생명, 행복이라는 상태로 환원하는 권력이었다. 따라서 나치즘에 있어 유태인의 학살이 순수한 삶의 형상으로 둔갑한 독일 국민의 진화와 안녕을 위한 것이었다면 박정희체제는 그에 대응하는 인종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근대 사회에서 인종주의란 지배받는 대상으로서의 국민을 인구(population)로 치환하면서 탄생한 정치적인 테크놀로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인종이란 건강과 장수, 안전과 행복을 위해 보호받아야할 정상인과 병자, 범죄자, 정신병자로 분류된 주민, 인구의 종이기도 하고, 인구의 조절과 관리를 위해 구분되는 남성과 여성, 이성애자와 동성애자이기도 하며, 유전적인 기질과 특성에 따라 구분된 좁은 의미에서의 인종적인 종(類)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종주의란 특별한 이념도 아니고 정책도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 자신의 울타리 안에 통치하는 자와 통치받는 자 사이에 설정한 지배의 합리성이며 이를 실현하는 다양한 기술과 제도, 관행의 복합체일 뿐이다. 그렇다면 박정희체제의 인종주의란 무엇일까. 박정희체제가 생물학적인 종(species)으로서의 인종, 생명 혹은 삶의 주체로서의 국민을 상대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 상기되는 박정희체제란 삶, 생명을 돌보는 권력의 형상이다. 배고픔, 질병, 무지, 실업, 부패, 게으름, 이 모든 삶의 위협과 박정희체제는 투쟁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극악한 죽임의 체제였던 박정희체제야말로 국민의 삶을 극대화하려고 했던 권력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새마을운동과 유신체제가 같은 동전의 이면인 것은 이 때문이다. 근면, 자립, 협동을 통해 보다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분투하는 국민과 부패, 자조, 게으름에 빠진 국민을 구분하며 훈육과 통제를 실행했던 새마을운동. 따라서 새마을운동이야말로 원형적인 생권력의 테크놀로지가 아닐까. 그렇다면 박정희체제의 유태인은 누구였을까. 물론 좌경용공세력 혹은 더 확대하자면 북한이었을 것이다. 박정희체제의 반공주의와 반북주의가 공산주의체제에 대한 이념적인 부정으로 환원하는 것은 전연 오해일 것이다. 권력이 마음껏 유린할 수 있고 처치할 수 있는 비정치적인 생명으로 환원된 좌경용공세력과 간첩. 이들이야말로 아감벤이 말했던 저 유명한 “호모 사체르(homo sacer)”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정치적인 공동체 안에 더 이상 속하지 않은 “벌거벗은 삶(bare life)”, 순수한 생명으로 환원된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거리낌없이 죽을 수 있었고 죽여야 했다. 삶을 위해 살아가는 국민 그리고 그와 연결된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외부, 그것이야말로 유태인의 세계였고 간첩과 좌경용공세력, 그리고 북한 아니었을까.
박정희체제의 비판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으로
우리가 박정희체제를 그토록 오랜 동안 극복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 그는 애꿎은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 살해하고 고문한 독재자였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를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았는가. 그는 우리를 빈곤과 질병, 기아와 부패로부터 구제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박정희체제를 둘러싼 이런 직접적인 향수에 박정희체제는 가둬져 있지 않다. 민생의 이데올로기는 박정희를 더 이상 언급하지 않지만 박정희체제를 재생산하는 자생적인 이데올로기이다. 민생의 이데올로기란 자신의 행복과 안전을 돌보는 자기(the self)가 되어버린 국민적 주체의 에토스이다. 민생(民生)이란 이름으로 압축되는 인민의 삶, 나치즘의 용어를 빌자면 민족의 신체(Volksk rper), 그것이 박정희체제의 유령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유산이다. 그리고 진중권이 생체권력으로서의 박정희체제가 국민들에게 각인한 바이오코드라고 불렀던 바로 그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권의 이름으로, 시민사회란 이름으로 박정희체제를 비판하는 것이 왜 불충분하고 불가능한지 자각해야 한다. 우리는 인권의 이름으로 장식된 추상적인 민주주의와 삶의 권리란 내용으로 충만한 “한국적 민주주의” 사이에서 오갈 데 없이 엉거주춤 서있다. 그 불안한 표류의 자리에서 박정희체제의 유령은 죽지 않고 살아 날뛴다. 민생의 이데올로기에 갇힌 주체는 바로 박정희체제의 유령에 홀린 주체이다. 박정희체제는 자신의 삶을 돌보는 자기에의 배려와 국민의 삶을 돌보는 권력의 행사를 일체화시켰다. 그리고 그런 권력의 이데올로기가 바로 민생의 이데올로기이다.
지금 우리가 무력하게 휩쓸려 들어가고 있는 전지구적인 자본주의체제는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내고 있다. 포괄적인 집합적 삶으로서의 인구, 즉 주민으로서의 삶을 인구로서의 삶을 돌보는 권력은 퇴장하고 있다. 포드주의적인 복지국가의 퇴락이 그것을 보여준다. 설령 존재한다하더라도 그것은 점차 쇠퇴하고 있다. 그 자리를 메우는 것은 바로 자율과 책임의 개인이다. 우리는 이것이 신자유주의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자본주의 권력이 삶의 권력을 작동시키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는 간단히 말하자면 사회와 경제의 구분을 삭제하고 모든 사회적인 삶의 행위를 경제적인 합리성의 모델에 따라 정의하고 조직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더 이상 인구는 전과 같은 국민적 주체가 아니라 스스로를 책임지는 자율적인 시민, 기업가적인 개인과 그들의 네트워크로 된다. 한국사회에서 인플레처럼 사용되고 있는 시민사회란 용어야말로 우리 시대의 인구를 가리킨다 할 수 있다. 새로운 권력은 전보다 더 생권력을 극대화시키고 전면화한다. 노동력과 임금은 인적 자원으로 둔갑하고, 사회적 보장과 공중보건, 고용, 주거, 교육정책의 대상으로서의 국민은 “생산적인 복지를 책임지는 개인”, “능력개발에 애쓰는 자기”, “자유계약자이자 인적 자본으로서 자신을 책임지는 기업가적 노동자”, “자기주도적인 평생학습에 진력하는 나”로 바뀐다. 이는 모두 자신의 생명, 삶을 위해 애쓰는 새로운 자본주의적인 주체이다. 국민의 정부 이후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 진행된 일련의 한국 사회의 구조조정은 바로 박정희체제의 권력을 조정하고 새로운 자본주의 체제의 권력을 조형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 탈냉전 민주화 시대의 권력이 박정희체제와 단절한 체제라는 믿음은 자유주의자들의 정치적 환상 속에서나 가능한 것일 뿐이다. 박정희체제는 생권력의 주체로서 국민을 주조하였고 이는 지금에도 여전히 잔존하고 또한 배가되고 있다.
따라서 박정희체제의 비판이 현재의 비판을 위한 기획이라는 모두가 동의하는 입장을 제대로 실현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신자유주의적인 체제로서의 한국 자본주의 비판을 우회할 수 없다. 물론 그것은 신자유주의 비판을 더 많은 사유화, 더 많은 탈규제, 더 많은 고용유연화를 비판하는 것으로 한정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우리는 이런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으로 인해 초래된 실업과 빈곤, 삶의 위기를 겪고 있고 또한 충분히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이라면 굳이 신자유주의란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다. 그것은 그저 언제나 존재하던 반민중적인 정책, 자본의 전략의 한 종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인 이행이란 곧 한국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형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권력을 형성한다. 우리가 박정희체제 비판에서 또한 과거사 청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바로 오랜 동안 건망증에 빠진 채 있고있던 자본주의 비판의 기획을 되살려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인 개혁이 정점에 달해있는 지금 박정희체제의 비판은 자유주의적인 사유의 유혹에 굴복하고 변화된 체제가 요구하는 주체의 형상을 축복하는 늪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반대의 방향으로 달려갈 수도 있다. 박정희체제의 국민을 자본주의의 근대적인 주체의 계보학 속에서 사유함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사유의 씨앗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탈냉전 민주화가 고무하는 관용과 존중의 민주주의, 자유자본주의적인 민주주의를 넘어 우리의 사회적 삶의 세계를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민주주의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체제의 비판이 어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인가를 잊는다면 잃는 것은 민주주의 그 자체가 될 것이다. ■

불안의 시대와 주변의 공포

시대의 기분 – 우울과 불안
항우울제가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우울증의 시대는 어느덧 뉘엿뉘엿 저물었다. 알다시피 지금은 “비아그라”의 시대이다. 어디에선가 슬라보예 지젝이 말했듯이 비아그라는 만성성욕항진상태에 잠기도록 우리를 몰아넣는, 기괴한 혹은 물질화된 윤리적인 명령이다. 섹스는 오르가즘의 생리학으로 환원되었고 우리는 더 이상 섹스의 명령으로부터 피할 수 없다. 우리 시대에 쾌락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 나쁜 짓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그것은 또한 소비자본주의의 스펙터클이 쉼 없이 쏘아대는 주문(呪文)의 모습이기도 하다. 언제부턴가 우리를 찍어 누르고 있는 웰빙 현상은 바로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명령이 지닌 뻑뻑한 위협을 보여준다. 한 알의 푸르스름한 당의정 안에 객관화되어 있는 윤리적인 명령, 그것을 지젝을 쫓아 이야기하자면, 당연히 “즐겨라”일 것이다. 물론 그 즐겨야 한다는 명령은 외부의 어떤 장소를 점유하고 있는 통제자의 목소리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행복과 안녕을 돌보는 자의 보편적 심리학이 되었다. 더불어 자신을 돌보고 변화시키는 자유는 얼굴 없는 명령이 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이 상상하는 구속되지 않는 삶의 상태인 자유(자유에 관한 표준적인 정의처럼 되어버린 이사야 벌린이 <자유론>에서 언급했던 그 자유)는, 이제 실체 없는 강압이 되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얼굴 없는 명령, 목소리 없는 강제. 그런 점에서 불안은 또한 우리 시대의 자유에 부착된 미망(迷妄)이기도 하다. 우울의 시대에 명령은 바깥으로부터 도착했다. 자신이 복종하거나 따라야 할 규범은 외부에서 자신에게 행사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그 외부를 자신 안에 옮겨 넣을 수 있다. 바깥에서 행사되는 명령을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힘으로 바꾸어내는 장치가 만들어졌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푸코가 말했던 저 유명한 고백(the confession)의 주체나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양심의 주체가 바로 그에 해당될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에게서 우러나는 명령에 따르는 주체를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것은 바깥의 명령의 반영이고 그것은 역으로도 그러하다.
그러나 불안이 비롯되는 장소는 따로 없다. 그것은 도처에 있고 또한 어디에도 없다. 그저 불안에 압도당하는 주체만 있을 뿐이다.
“파랑새 증후군”이니 “생존자 증후군(survivor syndrome)”이니 혹은 “노동중독”이니 하는 현상이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다. 이 모두는 노동과 상관되어 있다. 20대 초반의 직장인들이 자신이 일하는 직장에 지긋이 눌러있지 못하고 계속하여 자리를 옮기는 증상을 파랑생 증후군이라 부른다. 생존자 증후군이란 끊임없는 구조조정이 끝난 뒤에 자리를 지키게 된 이들이 느끼는 스트레스와 불안을 가리킨다. “노동중독”이란 말뜻 그대로이다. 일에 미친 사람이다. 사람들은 일에 몰입하고자 하며, 일을 사랑하고 일을 숭배한다. 이 모두는 불안이다. 노동하는 주체의 모습 역시 우울에서 불안의 궤적을 따라 움직인다. 우리는 이런 변화를 설명할 작은 초상을 그려볼 수 있다. 노동자와 직장인들이 마시던 음료의 변천을 생각해보자. 스트레스와 피로에 찌든 노동자의 모습은 80년대와 더불어 사라지는 듯이 보인다. 그 때까지는 “박카스”와 “우루사”의 시대이다. 피로회복과 자양강장의 시대였고 노동자들에게 문제는 스트레스와 권태라는 우울이었다. 그리고 이는 테일러주의(Taylorism)과 포드주의(Fordism)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잠시 술독을 풀어주는 “컨디션”이 잘 팔리는 시대가 있었다. 90년대였다. 이 때엔 영업과 기획, 마케팅이 중요한 시대였고, 소비자본주의가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권태를 잊고 고역스러운 노동에서 벗어난 기쁨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획과 마케팅, 영업을 위해 술을 마시는 시대였다. 신세대가 등장하였고 틈새시장이니 고객만족이니 하는 용어들이 세상을 휩쓸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대가 흔들리고 있었고, 과소비를 푸념하는 목소리가 웅성거리며 들려왔다. 마이카 시대니 배낭여행이니 하는 말들이 이제는 먼 옛날처럼 여기지리만치 소비자본주의는 맹렬하게 삶의 속도를 바꾸었다. 그리고 더 이상 우울에 시달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불안이 바야흐로 세상을 좀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불안이 바야흐로 세상을 좀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외환위기를 거쳐 지금에 접어들었다. 빠르게 바뀌는 제품생산의 주기, 변덕스러운 소비자의 욕구, 걸핏하면 들먹이는 무한경쟁의 전지구적인 개방 그리고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지식의 생산과 소비가 시대의 기분을 바꾸어버렸다. 외환위기와 구조조정이 들이닥친 이후 우리는 노동자와 직장인을 가리키는 표상이 사라진 음료의 시대를 살고 있다. “비타500”이니 하는 웰빙 음료가 이제 시장을 석권한다. 지식기반정보사회라는 개념이 상용어가 되었고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같은 신조어가 세상을 떠다니는 시대이다. 변화를 두려워하여선 안된다는 주장이 범람하고 안주하고 기생하는 사람보다 변화에 도전하고 변화를 촉진하는 직장인만 필요하다는 주장은 이제 시쳇말이 되었다. 고용없는 성장의 시대에 부와 노동의 관계, 그리고 일과 삶의 관계는 혼란스러워진다. 노동과 일을 둘러싸고 오랜 동안 유지되어왔던 사고의 습관이 바뀌기 시작했다. 변화를 두려워하다 망한 사람들에 관한 우화집인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스펜서 존슨, ꡔ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ꡕ, 이영진 옮김, 진명출판, 2000
같은 책이 장안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구본형, ꡔ익숙한 것과의 결별 – 대량실업시대의 자기 혁명ꡕ, 생각의나무, 1998
이란 서정적인 제목의 자기계발서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 책을 쓴 이는 인문학적인 자기계발서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며 우리 시대의 최고의 경영컨설턴트 겸 윤리학자가 되었다.

시대의 기분, 시대의 인식 – 노동이라는 소실매개자(vanishing mediator)

우리는 이 글에서 우리 시대의 불안한 주체를 다루려 한다. 그러나 그 불안한 주체란 심리적인 문제를 앓는 개인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막연한 시대의 감정에 시달리는 사회적인 군상을 가리키는 것 역시 아니다. 불안한 주체란 탈근대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하는 주체를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성적인 개인의 태도와 감정이기에 앞서 변화된 자본주의사회에서 살아가는 주체의 모습이다. 기분이라는 감정의 배치는 또한 사회의 물질적 관계의 배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안한 주체란 심리적인 개인이나 집단이 아니라 새로운 자본주의사회의 주체성을 가리키는 초상이다.
이 글은 불안을 겪는 주체를 탈근대 자본주의사회의 변화된 노동의 모습과 연결한다. 시대의 기분은 곧 자신이 사는 시대의 모습을 재현하려는 충동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그러나 시대의 기분은 시대의 전모 혹은 아직도 그 개념에 충실할 필요를 느낀다면 시대의 총체성에 이르지 못하고 있음을 보이는 징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시대의 기분은 시대에 대한 인지적인 독해에 이르지 못했을 때, 우리가 시대를 사유하기 위해 의지해야 하는, 불완전하고 소극적인 사유의 방법이다. 당연히 (프레드릭 제임슨의 유명한 제안처럼) 시대를 “인지적으로 지도 그리는(cognitive mapping)”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Fredric Jameson, 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1991
그러나 인지적 지도그리기를 통해 탈근대 자본주의사회의 총체성을 그려내는 것은 비웃음의 대상이 될게 분명하다. 알다시피 우리 시대에 가장 비웃음거리가 된 개념 가운데 하나를 꼽자면 그것은 총체성이란 개념일 게 뻔하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자본주의 사회의 총체적 재현을 시도하려는 어떤 노력도 거대 서사란 이름으로 혹은 계몽적인 이성의 횡포란 이름으로 규탄받아왔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에 굴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우리가 비판해야할 대상은 거대서사가 아니라 외려 “물신적 총체성”이다. 사실 우리는 자신을 에워싼 세계를 재현하고자 하는 충동에서 한 치도 자유롭지 못하다. “위험사회”에서 가장 잘 팔리는 것은 트렌드에 대한 분석과 기회 분석을 가능케 하는 프로그램과 소프트웨어라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다. 사이비 미래학이 시대의 학문이 되었다는 것도 우울한 일이다. 다시 프레드릭 제임슨의 말을 빌자면 이런 총체적 재현을 향한 충동은 “음모론(conspiracy)”이라는 알레고리적인 서사에게 포획되어 버린다. Fredric Jameson, “Totality as Conspiracy”, The Geopolitical Aesthetic: Cinema and Space in the World System,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92, pp. 9-35
아니면 스펙터클이 세계에 관한 해석을 전달하고 순환시킨다. 스펙터클은 우리 시대의 물신적인 총체성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사유를 지배하는 것은 거대서사와 계몽적인 이성이 아니라 물신적인 총체성이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세계를 총체적으로 재현하려는 꿈 자체를 포기할 필요가 전연 없다. 반대로 그런 총체적인 재현에의 꿈을 물신적인 총체성에 양보하지 않는 것, 음모론과 스펙터클, 위험사회의 인식론적인 도구들에게 세계를 사유하는 권한을 주지 않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이 글에서 시대의 기분을 노동이라는 범주와 연결하려는 것은 그런 발상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시대의 기분을 통해 어렴풋이 시대를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시대의 기분으로부터 시대를 향한 인식으로 도약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노동이란 범주를 경유하여야 한다.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양한 삶의 활동을 매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의 정체성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인식한다는 것은 탈근대 자본주의사회의 총체적인 모습을 재전유하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노동의 종말이나 노동의 소멸을 주장하는 우리 시대의 주장들은 노동이란 매개자를 저주한다. 제레미 리프킨, ꡔ노동의 종말ꡕ, 이영호 옮김, 민음사, 1996
더 이상 노동으로부터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정보로부터 가치가 생산된다는 지식정보자본주의론 등은 노동이란 범주를 추방하고 새로운 매개자로부터 자본주의사회의 총체성을 재현하려 한다. 피터 드러커, ꡔ자본주의 이후의 사회ꡕ, 이재규 옮김, 한국경제신문사
따라서 노동은 소실매개자(vanishing mediator)가 되었다. Fredric Jameson, “The Vanishing Mediator; or, Max Weber as Storyteller”, The Ideologies of Theory : Essays 1971-1986 Vol. 2, pp. 3-34
물론 노동이란 범주를 저주하고 추방함으로써 자본주의사회에 관한 새로운 재현을 추구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후기산업사회론을 비롯한 여러 담론적 기획은 한결같이 노동을 지나간 산업사회에 속한 것으로 처분하려 하였다. 그러나 진실은 노동이 사라지거나 종말을 거둔 것이 아니라 노동을 규정하고 전유하는 새로운 권력이 등장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종래의 자본이 노동이라고 규정했던 노동의 정체성은 종말을 거두었다. 이에 우리는 연연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노동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노동을 전유하고 지배하는 자본의 권력은 노동에 관한 새로운 표상을 생산하고 그를 통해 노동과 노동하는 주체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핵심 역량 혹은 인재와 주변의 노동
탈근대 자본주의사회의 주체는 특별한 장소의 은유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는다. 예컨대 주변이라는 공간의 은유를 통해 탈근대자본주의 사회의 주체를 그려내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탈근대 자본주의사회에서 공간의 배치는 중심과 주변의 차이를 지우기 때문이다. 벨리디안(Belidian) 사회란 말이 있다. 벨기에라는 가장 부유한 사회와 인도라는 가장 빈한하고 참담한 사회가 이제는 한자리에 모여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벨기에와 인도를 합성한 말이 벨리디안이고 벨리디안은 도처에 있는 사회이다. 로스엔젤리스도 벨리디안이지만 캘커타도 벨리디안이다. 전지구적인 이동을 즐기는 비즈니스맨을 위한 휘황한 컨벤션센터와 국제 수준의 호텔과 레스토랑이 모여있는 재개발 타운이 있고 동시에 벌거벗은 가난에 내동댕이쳐진 사람들이 동냥을 다니는 슬럼이 한 곳에 있다. 따라서 지정학적인 구분으로서의 중심과 주변은 뭉개진다. 탈근대 자본주의사회에는 중심과 주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안과 바깥이 있다. 전지구적인 화폐와 정보, 생산의 네크워크 안에 통합되어 있는 내부 그리고 그 바깥에 놓인 사막으로 변해버린 외부, 혹은 보이지 않는 곳.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ꡔ제국ꡕ, 윤수종 옮김, 이학사, 2001

한편 문화적 은유로서의 주변 역시 효력을 잃게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주변에서 비롯되는 기분은 우울일 것이다. 중심을 향한 혐오와 회의로부터 주변은 움직이고, 우울은 냉소와 회의를 생산한다. 아이러니와 풍자는 우울에서 비롯되는 태도이다. 그래서 주변으로부터 우리는 중심을 조롱하고 전복할 수 있는 반항적인 가치를 얻어내곤 했다. 중심의 권력과 태도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목소리는 주변에서 나왔다. 그렇지만 지금 그런 문화적인 특권을 지닌 주변은 어디에도 없다. 주변의 감성을 집약하던 “쿨(the cool)”이 겪은 운명이 아마 이를 극명하게 보여줄 것이다. 쿨이란 거칠게 요약하자면 자본주의 도시에서의 정상적이고 규격화된 삶을 향한 환멸과 냉소, 그로부터 비롯된 삶의 형태이자 의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자세한 것은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데이비드 로빈스, 딕 파운틴, ꡔ세대를 가로지르는 반역의 정신 COOLꡕ, 이동연 옮김, 사람과책, 2003
그러나 지금 그 쿨은 전지구적인 마케팅, 홍보, 광고를 통해 존재한다. Thomas Frank, The Conquest of Cool: Business Culture, Counterculture, and the Rise of Hip Consumerism,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7
고객욕구조사를 하던 자본주의는 이제 새로운 마케팅과 광고의 테크닉을 개발하고 있다. “국민 소비자”를 대상으로 앙케트를 하거나 성별과 연령, 인종, 소득에 따라 구별된 인구학적인 집단의 욕구를 따르던 자본주의는 이제 취향과 소비의 규범, 라이프스타일을 수집하고 분석한다. Don Slater, Consumer Culture and Modernity, Cambridge, Polity Press, 1997
고정되고 안정된 인구학적인 분류 혹은 덩어리는 없어지고, 더 이상 평균(혹은 그 이상이나 이하)이란 척도로 측정할 수 없는 흐름만 있는 듯이 보인다. 이 모두는 소통의 네트워크를 통해 작동한다. 결국 우리는 주변의 감성과 의식으로서 쿨에 관하여 말할 수 없다. 문화적 은유로서의 주변은 숨가쁜 유행과 라이프스타일, 소비규범을 강박적으로 쫓고 모방하는, 질식할 듯이 밀폐된 소비의 스페터클 안에 흡수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변에서의 삶이 사라졌다고 여겨야 할까. 그러나 주변이란 용어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주변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시대의 삶을 재현하는 도구로 자리 잡는다. 우리는 주변이라는 위치가 차지하는 새로운 자리는 노동이란 개념을 통해 조명될 수 있다. 노동을 재현하는 다양한 담론 안에 주변이란 개념은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핵심 역량(core competency)과 주변 인력이라는 구분을 도입하는 경제학, 경영학 담론이나 “한 명의 인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인재경영론같은 통속적인 매체 담론은 모두 핵심과 주변의 이분법을 도입한다. 구직과 채용에 관련된 기관과 기업, 교육, 직업훈련에 연계된 학교와 기관, 기업에서 만들어내는 다양한 노동의 표상 역시 언제나 인재와 주변의 이분법을 동원한다.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이 되도록 애써야 한다며 구직자를 향해 조언과 충고를 쏟아내는 리쿠르팅 회사와 대학교의 취업상담실, 지식강국이 되어 국가경쟁력을 향상시키는 인적자원개발계획을 마련해야 하며 핵심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국가 기구나 정책연구기관, 기업연구소들. 이 모두는 노동을 둘러싼 재현을 생산하고 그 안에는 핵심과 주변의 은유가 가로지른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노동의 재현에 등장하는 핵심과 주변은 무엇이고, 이 안에 등장하는 주변이란 무엇일까. 또한 이는 불안이라는 우리 시대의 기분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을까.
인재라는 담론은 노동하는 주체와 관련된 다양한 재현을 응축한다. 노동하는 주체의 능력에 관한 재현은 “자격(qualification)에서 역량(competency)으로” 바뀌었다. 노동하는 주체를 지배하는 권력의 재현 역시 “통제와 명령에서 동기부여(motivation)와 몰입(commitment)으로” 바뀌었다. 노동하는 주체와 그의 활동의 질 그리고 그 결과를 연결하는 재현 역시 바뀌었다. 예컨대 임금과 보상을 가리키는 용어와 개념들이 바뀌었다. 능력주의와 성과주의로의 이행, 연봉제를 비롯한 새로운 임금체계의 등장과 확산은 모두 그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 모두는 한국 사회에서 독특하게 강조되고 있는 인재론 혹은 인재경영의 담론 안에 집약된다. 이미 1990년대를 전후하여 기업 경영을 둘러싼 담론에서 인재 혹은 인재경영이란 말은 상투어구가 되었다. 삼성 그룹의 경우 경영 목표를 인재 경영이라 천명하고 인재론이라는 새로운 노동의 담론을 선취하고 또 확산시켜 왔다. 이는 그즈음 봇물처럼 쏟아져 들어온 새로운 경영학 담론을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 톰 피터스나 피터 드러커, 짐 콜린스같은 경영학자들의 저작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 책들은 한결같이 노동에 관한 새로운 담론을 제안했다. <포브스>나 <이코노미스트>같은 외국의 경제 및 경영 관련 잡지들을 비롯하여 국내의 대중매체들을 통해 유포된 새로운 노동의 재현 역시 이를 거들었다. 지식근로자, 상징분석가, 골드칼라, 프리 에이전트, 변화촉진자, 창조적 계급같은 개념들이 노동하는 주체에 관한 새로운 표상이자 규범으로 제시되었다. 이러한 개념들은 인재, 혹은 핵심 역량 등의 개념과 교환될 수 있는 것들이다.
노동하는 주체에 관한 새로운 재현은 자본주의사회의 변화를 재현하는 새로운 담론과 대응한다. 이는 알다시피 “지식정보자본주의” 이 역시 무형의 경제, 네트워크경제, 탈조직자본주의, 미적 경제(혹은 체험의 경제), 창의적 경제 등 다양한 이름을 걸치고 등장한다. 그러나 이 모든 개념은 강조점을 달리 할뿐 모두 수렴한다.
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세히 다룰 수 없겠지만, 지식정보자본주의론은 노동에 관한 새로운 표상을 산출한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바로 인재란 개념과 다르지 않을 지식근로자란 개념일 것이다. 지식정보자본주의론의 요점은 새로운 경제체제에서 무엇이 가치를 낳는가로 요약할 수 있다. 이에 관한 지식정보자본주의론을 주장하는 이들의 답변은 분명하다. 기존에 가치를 생산하던 것이 노동이었다면, 보다 구체적으로는 노동과 그것이 축적된 기계와 설비를 비롯한 생산수단이었다면, 이제 가치는 지식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기존의 산업 부문(농어업이나 제조업)은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추가함으로써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니면 지식과 정보 여기에는 심미적인 체험, 라이프스타일 등을 망라하는 정서적이고 상호주관적인 생산물 등이 포함된다. 예를 들어 스포츠 용품 회사는 도전 정신이나 승부의 경쟁심, 유희적인 기분, 이국적인 쾌감 등을 생산해냄으로써 상품의 가치를 높인다는 식이다. 또한 보살핌(caring)과 관련된 지식과 서비스를 덧붙임으로써 기본의 서비스산업은 지식정보화된다고 주장된다.
그 자체로부터 가치를 생산(정보통신산업이나 생명공학산업, 금융 및 방송연예산업 등)해 냄으로써 새로운 성장과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이와 함께 노동을 둘러싼 표상 역시 바뀌게 된다. 지식정보자본주의론이 노동에 관한 새로운 표상을 위해 생산해낸 개념적인 쌍생아는 지식근로자이다. 지식근로자란 바로 그 가치를 생산해내는 노동의 주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지식근로자는 특정한 직업적인 주체에 국한되지 않는다. 핵심기술을 지닌 엔지니어와 과학자, 소프트웨어 개발자, 경영컨설턴트, 펀드 매니저, 디자이너, 광고기획자, 영화감독 등의 새로운 직업적 주체들은 흔히 지식근로자이자 인재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들만이 지식근로자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심각한 조롱을 받았던 지식근론자론의 변종인 “신지식인”론이 가리키듯이 그것은 모든 주체를 포함하는 담론이다. 신지식인론은 지식기반경제로 이행하고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제시된 새로운 시민적 정체성 혹은 시민(citizenship)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를 주동했던 김대중 정권은 역설적이게도 그 개념이 제시하고 있는 자율적이고 자기책임의 개인이라는 규범에 거스른 채 국가동원의 캠페인이란 형태를 쫓음으로써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또한 신지식인을 경제적 주체로 환원하는 듯한 인상을 줌으로써 그것이 새로운 탈국민적인 시민 혹은 어떤 이의 개념을 빌자면 유연시민성(flexible citizenship)을 구성하려던 기획으로부터도 이탈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신지식인론과 함께 법석스럽게 진행되던 보수 언론사들의 지식강국캠페인 등이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신지식인론은 실패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거시적으로 국가의 교육 및 경제 정책의 변화(인적자원개발계획, 평생학습사회 구축, 생산적 복지로의 개혁, 지방분권화를 통한 기업가적 지역경영 등)에서부터 미시적으로는 기업의 구조조정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신경영전략부터 시작하여 최근의 지식경영, 품질경영, 가치경영 등에 이르기까지 국내의 기업조직은 다양한 경영을 둘러싼 새로운 기술과 제도, 관행을 실천하여왔다. 그렇지만 이는 단순히 생산성과 효율성, 합리성을 높이기 위한 자본의 실용적인 선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의함은 물론 개인들이 자기와 맺는 관계, 그리고 경제적인 주체와 다른 사회적 주체성의 형태(예컨대 시민이라는 정치적 주체성) 사이에 놓인 관계 역시 변형시키는 기획이었기 때문이다.
에서부터 “아침형 인간”으로 정점에 이른 이른바 자기계발의 붐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 스며들었다. 따라서 신지식인론에서 자기경영(self-management)의 주체에 이르는 일련의 연속체는 변화된 자본주의사회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주체성의 형태라는 점에서 동질적이다.
노동하는 주체의 불안
말하자면 지식근로자란 기업조직에 속한 특정한 부류의 집단 혹은 개인을 가리키지만 더불어 기업조직 나아가 시민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주체성에 관한 재현을 아우르는 패러다임적인(paradigmatic) 기능을 한다. 인재나 핵심 역량같은 개념은 기업조직에 속하든 아니면 그 외부에 있든 모든 이들의 삶을 규정하는 효력을 발휘한다. 우선 인재와 핵심역량은 노동의 능력을 둘러싼 재현을 바꾸어낸다. 이는 흔히 자격에서 역량으로의 변화로 설명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격이란 쉽게 말하자면 자격증, 학력같은 것이며 그 안에 전제된 특정한 지식을 가리킨다. 그 지식이란 형식적으로 규정하고 반복적으로 생산될 수 있는 지식과 행위의 규칙, 코드를 가리킨다. 이는 주로 읽고 쓰고 셈하는 지식의 형태로 전달된다. 이를 지식정보자본주의에 관련된 담론들은 각자 나름대로 형식지, 명시지, 공식지라고 부른다. 이와 대별되는 새로운 지식은 “암묵지(tacit knowledge)”란 개념으로 대표된다. 언어나 공식, 시각적 표상처럼 언어적으로 표상할 수 없지만 노동하는 주체 안에 체현되어있는 비공식적인 솜씨와 기술, 감정과 태도 등을 가리켜 암묵지라고 부른다. 이는 마이클 폴라니의 인식론적인 입장에서 따온 것으로 폴라니는 형식지(explicit knowledge)와 암묵지를 구분하며 기존의 철학적인 인식론이 형식지만을 특권화하고 있음을 비판한 바 있었다. 자세한 것은 다음을 참조하라. 마이클 폴라니, ꡔ개인적 지식-후기비판적 철학을 위하여ꡕ, 김봉미, 표재명 옮김, 아카넷, 2001. 또한 지식경영 혹은 지식창조기업이란 이름으로 형식지와 암묵지를 노동과 노동능력에 관한 새로운 모델로 제안하여 엄청난 영향을 끼친 다음의 두 일본 경영학자의 저작 역시 참조하라. 노나카 이쿠치로, 히로다카 다케우치, ꡔ지식창조기업ꡕ, 장은영 옮김, 세종서적, 1998
이들은 과거의 경제에는 학교를 통해 배운 지식으로 평생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지만 지식과 정보의 급격한 혁신과 변화가 이뤄지는 지금에 그것은 쓸모가 없어졌거나 가치가 저하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팀체제론이나 전사적인 품질관리, 식스시그마, 고성과작업장, 학습조직 등의 모습으로 잇달아 등장했던 노동과정의 관리 담론들 역시 이런 능력의 담론과 상관한다. 그것은 노동하는 주체에게서 협동, 주도성, 창의, 혁신 등과같은 비공식적인 지식을 끌어내기 위한 다양한 장치와 지식, 기술을 강조한다.
일본식 경영, 초우량기업, 위대한 기업 등의 이름으로 등장한 최근의 경영 기법에 관한 담론들 역시 기업조직에 관한 담론이면서 동시에 노동하는 주체의 정체성에 관한 담론을 만든다. 그것은 노동하는 주체의 다양한 삶의 능력을 자본의 편에서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한 다양한 테크놀로지(측정, 평가, 교육 훈련의 모델 등)를 포함한다. 결국 인재 혹은 핵심역량이 지배하는 노동은 당연히 그동안 익숙하게 여겨왔던 시간에 따라 분절된 노동, 기계를 다루고 근력이나 지식을 적용하는 노동이 아니다. 네그리와 하트의 표현을 빌자면 이제 탈근대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이 지배하는 것은 비물질적인 노동, 정서적인 노동이다.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탈근대화, 생산의 정보화”, 앞의 책
또한 노동시간 동안에 이뤄지는 직접적인 활동이 아니라 그들이 삶 속에서 만들어내는 지성과 정서, 지각과 습관 등이다. 마우리치오 라차라토같은 이태리의 자율주의 철학자는 이제 자본은 노동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지배한다는 뜻에서 노동이란 개념을 버리도록 주장하기도 한다. 노동하는 주체의 정신적, 물질적 능력의 집행만을 강조하고 고용된 시간과 장소(작업장, 노동시간)에서의 노동만을 특권화하는 노동이란 개념을 버리고 “정신의 협력(cooperation between minds)” 혹은 삶의 무한한 잠재성(virtuality) 등의 개념을 사용할 것을 주장한다. 자본은 노동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지불되지 않는 삶의 힘(biopower) 자체를 전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Maurizio Lazzarato, “From Capital-Labor to Capital-Life”, Ephemera-theory & politics in organization, vol. 4, no. 3, pp. 187-208. 이 글은 인터넷을 통해 볼 수 있다. http://www.ephemera.org
따라서 인재와 핵심역량은 생애 전체에 걸친 능력의 습득과 향상을 강조하고 노동하는 주체를 모든 주체에게 확장한다. 따라서 그것은 고용관계에 놓인 노동자뿐 아니라 모든 주체들이, 능력있는 삶, 성공하는 삶을 위하여 평생 감당해야하는 의무이다.
두번째로 인재와 핵심역량이란 개념은 노동을 관리하고 지배하는 권력에 관한 재현 역시 변화시킨다. 가상 기업이니 네트워크 조직이니 나아가 1인 기업이니 하는 개념들은 모두 이런 변화를 반영한다. 지식기반정보사회를 주장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관료주의를 타도하고 창의성과 자율성을 죽이는 조직을 붕괴시키자고 주장한다. 아마 이 분야의 가장 대표적인 이데올로그는 누가 뭐래도 톰 피터스(Tom Peters)일 것이다. 그는 ꡔ초우량기업의 조건ꡕ이란 이름의 저서로 20세기 후반 최고의 경영학 분야의 스타가 된 이후 혁신, 해방, 혁명, 혼돈 등의 파격적인 개념을 동원하여 기업과 일터에 관한 새로운 담론을 잇달아 생산하여 왔다. 그에게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그가 직장인과 같은 노동하는 주체의 표상을 완전히 제거하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자기(self)”에 관한 이야기만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우리는 자신을 고용된 직장인으로 여겨서 안되며 1인기업(가)의 자유계약, 노동자가 아닌 브랜드를 가진 나의 자기고용(self-employment)이란 형태의 새로운 주체성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는 국내에 유행하고 있는 많은 자기계발담론들이 공통적으로 참조하고 있거나 모방하는 주장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톰 피터스는 푸코의 표현을 전용하자면 탈근대 자본주의사회에서 “자기의 배려(care of self)”의 에토스를 경제적인 주체성으로 변환시키는 우리 시대의 윤리학자라 할 수 있다. 그의 저작은 모두 우리말로 번역되어있다.
기업이 위계적이고 관료적인 조직체계를 통해, 표준화되고 파편화된 업무의 지시와 명령을 통해 운영됨으로써 노동하는 주체의 자율성과 자기실현의 욕구를 억압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재나 핵심역량은 곧 그런 능력이 발휘되고 조성될 수 있는 새로운 인간관계와 조직형태 등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달리 말한다면 인재와 핵심역량은 권력관계에 관한 새로운 재현을 생산한다. 여기에서는 이제는 아무런 저항 없이 사용하는 일반 용어가 되어버린 리더십(leadership)이란 개념을 가지고 설명해 보기로 하자. 리더십이란 개념은 명령과 통제를 행사하는 감독자, 경영자, 관리자 등의 표상을 대신하며 일약 부상한 개념이다. 리더십은 기업 조직 안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관계를 규제하는 권력에 관한 담론이지만 종래의 권력의 표상을 제거한다. 그것은 명령이 없는 권력, 규범이 없는 권력의 모습을 취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기존의 권력에 관한 재현을 아우르고 있던 규범화시키는 권력(norminalizing power) 혹은 훈육의 권력(disciplining power)과 단절한 새로운 권력의 재현이 노동의 세계에 출현함을 볼 수 있다. 이런 새로운 권력의 등장을 분석하며 탈근대 자본주의사회를 분석하기 위해 푸코가 말한 훈육사회란 개념으로 부족하며 통제사회(society of control)란 개념이 요구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질 들뢰즈, “추신: 통제사회에 관하여”, ꡔ대담 1972∼1990ꡕ, 김종호 옮김, 솔, 1993
지시하고 명령하는 권력은 집단적으로 조직된 노동자를 상대하고 그들을 규범(norm)에 복종하도록 하며 그에 따라 정상과 일탈, 과오를 측정하였다. 그러나 이제 일터에서의 권력은 자신이 규범을 제정하고 타율적인 명령을 통해 자신을 행사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고 스스로 주장한다. 이제 권력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개인의 힘과 그런 의지를 유혹하고 고무하는 외부의 힘이 결합하고 소통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리더십을 둘러싼 담론들은 이제 리더란 개인 스스로 동기를 만들어내고 창의성을 발휘하며 몰입하도록 만들어내는 주체여야 함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리더십론은 앞서 말했던 노동의 능력을 창출하고 지배하기 위한 권력의 담론이다. 그것은 조직의 구성과 배치, 업무의 설계와 조정, 의례와 퍼포먼스의 상연 등을 통해 노동하는 주체로 하여금 스스로를 변형하도록 요구하고 유혹한다. 그러나 이 역시 기업 조직에 속한 노동자에게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성공하는 자기, 행복한 자아, 자기를 실현하는 주체란 새로운 주체성의 표상과 결합되고 모든 사회적 주체에게 적용된다. 셀프-리더, 셀프-매니지먼트, 퍼스널 브랜드 등은 모두 이를 반영하는 개념들이자 테크놀로지이다. 자신을 향상시키려는 의지는 자기 삶의 리더가 된다는 말이고, 자기 삶의 리더가 된다는 것은 또한 자신을 지배하고 지배받는 주체로 만들어내는 권력을 작용시킨다는 말이다.
세번째로 노동의 평가와 보상에 관한 담론 역시 바뀐다. 이는 익히 들어왔던 성과주의, 능력주의 등에 근거한 새로운 평가 체계 그리고 연봉제로 요약되는 보상 체계를 통해 나타난다. 그것은 생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려는 기법이기도 하지만 또한 노동하는 주체를 둘러싼 새로운 재현을 만들어내는 담론이기도 하다. 최근의 노동을 둘러싼 지배적인 담론은 인재와 핵심 역량은 거액의 연봉과 파격적인 근무 조건을 누리며 일에서 무한한 기쁨과 자신을 실현하는 즐거움을 만끽한다고 역설한다. 평생직장의 시대에서 평생직업의 시대로 바뀐 지금 노동하는 주체들은 포트폴리오 인생이 되어 자신을 평가하고 인정하며 자신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터를 찾아 자유롭게 이동하는 유목민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난무한다. 많은 신경제 담론은 우리 시대의 노동하는 주체의 모습을 압축하는 모델은 “프로스포츠선수”라고 즐겨 말한다. 프로스포츠선수는 자신의 투혼과 열정을 발휘하며 자신을 실현하는 쾌감을 맛보고 이를 연봉에 반영한다. 그리고 그는 자유로운 계약자가 되어 팀을 전전한다! 따라서 노동의 평가와 보상에 관한 담론 역시 노동하는 주체를 새롭게 재현한다. 이번에는 인재와 핵심 역량은 프로스포츠 선수와 겹쳐지고, 노동의 평가와 보상을 가리키는 연봉, 능력, 성과 등의 개념은 다시 노동하는 주체에 관한 새로운 재현과 겹쳐진다.
주변의 불안에서 벗어나기 – 노동과 총체성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노동하는 주체를 둘러싼 담론 속에서 주변은 어디에 있을까. 물론 그것은 모든 주체의 자리에 있다. 자신을 향상시키고 변화시키려는 데 주저한 사람, 평생에 걸친 직업생애 동안 요구되는 학습과 변신을 게을리 한 사람, 타인과 소통하고 그를 자신의 편으로 삼기위한 커뮤니케이션의 능력을 발전시키지 못한 사람 그 모두는 낙오자이며, 패배자이고 또한 주변의 존재이다. 따라서 주변에 속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인재의 잠재성을 갖고 있으며 또한 동시에 주변의 씨앗을 품고 있다. 결국 모두가 불안하며 모두가 기괴한 흥분에 사로잡혀 자신을 표현하고 제시하려는 충동에 시달린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기분인 불안은 우리 모두를 조울증에 사로잡힌 주체로 만들어 버린다. 열정적으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향상시키려는 의지에 현혹되어 있는 나 그러나 끊임없이 무한경쟁에 낙오될 수 있으며 언제나 실패를 두려워해야 하는 나. 이런 불안한 주체의 모습은 곧 탈근대 자본주의사회가 자신의 노동하는 주체를 생산해낸다.
그러나 이미 언급했듯이 이런 불안한 나 혹은 자기(self)의 주체성은 동시에 노동자의 주체성이자 학생의 주체성이며 국민의 주체성이다. 최근 육군본부는 “군 자기계발 시범사업”을 시행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현역병들은 지적탐구와 경력개발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배움, 문화, 가족 등으로부터 단절되므로 국가의 미래를 이끌 중요한 인적자원인 이들을 보다 체계적으로 양성할 방안이 필요하다는데 전경련과 軍이 인식을 함께 하여” “재계, 군과 손잡고 軍 인적자원개발에 함께 나서”, 전경련 보도자료, 2004, 10, 14.
그 사업을 출범시키게 되었다고 한다. 사업의 내용은 어학과 자격, 소양(비즈니스 교양 등)과 경영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인재 혹은 핵심 역량이 되기 위해 실천하는 주체 혹은 자기계발하는 주체는 또한 군인이기도 하다. 이런 변화는 매우 흥미롭다. 군대는 훈육사회의 요람이자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군대 또한 탈근대자본주의 사회의 주체성을 생산하는 공간으로 흡수되고 있는 것 아닐까. 물론 감옥과 복지수용시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삶의 공간, 모든 삶의 주체는 이런 주체성의 범형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노동하는 주체와 시민적 주체 그리고 자신을 돌보는 자아를 연결하던 이전 시대의 매트릭스는 새롭게 바뀌었다.
가족에서 직장으로, 학생에서 노동자로, 정상인에서 감옥으로 이동하며 각각의 분할된 공간에 그러나 각각의 동종적인 훈육의 권력에 복종하던 우리의 삶은 이제 미분화된 삶의 흐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훈육의 권력이 낳은 우울의 기분은 이제 탈근대 자본주의가 자신의 주체성에 부여한 불안의 기분으로 변형되었다. 따라서 우리 시대에 중심과 주변은 불안이란 감정 안에 겹쳐져있다. 불안은 자신의 주변으로의 몰락을 두려워하는 공포 그리고 거꾸로 인재와 핵심 역량, 스타 플레이어와 초우량 퍼스널 브랜드가 될 수 있다는 들뜬 흥분 사이로 소용돌이친다. 그렇다면 이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는 어디에 있을까. 물론 그것은 탈근대 자본주의사회를 비판할 수 있는 새로운 주체성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주체성의 모습을 그려내려는 작업은 무엇보다 빈사상태에 이른 노동 그리고 노동하는 주체라는 매개자를 되살려내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비록 그것이 더 이상 과거의 함축과 다른 것이겠지만 그리고 더 이상 과거의 주체들과 다른 주체의 모습이겠지만, 그것을 발견하고 해석하려는 작업을 포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탈근대 자본주의사회의 총체성을 그려낼 수 있을 때, 그리고 그 총체성을 매개하는 노동을 되살려낼 수 있을 때, 결국 우리는 우리 시대의 인지적인 지도를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지도를 발견함으로써 불안에 표류하는 자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출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

소송사회에서 새로운 헌법을 상상한다


헌법을 바꾸자는 이야기가 무르익고 있다. 그러나 바뀔 헌법의 모습이 어떤 것일지 상상하는 노력보다 헌법을 바꾸려는 욕망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배경이 무엇인지 캐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헌법을 개정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문과 욕망 뒤에는 최근 벌어진 사태들이 있다. 대통령의 탄핵소추, 국가보안법의 합헌 판결, 그리고 양심적 병역거부를 위시한 주요한 사안들의 헌법과의 부합 여부를 둘러싼 쟁송 등. 결국 사회적 대립과 정치적 갈등이 벌어지는 주요한 무대는 한결같이 헌법이었다. 그리고 헌법재판소는 일약 법률을 규율하는 기관을 넘어 모든 정치적 사회적 갈등을 매개하고 조정하는 권력의 심급이 된 듯 보이기까지 하였다.
이는 어떤 이들이 “정치의 사법화”라고 부를 만큼 한국 사회가 탈근대적인 “소송 사회”에 접어들었음을 알려주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우리는 “법만능주의”란 말이 무색하리 만치 모든 문제를 법의 판결로 환원하고 법의 판단에 호소하는데 주력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 어느 문학평론가는 자신이 어느 출판사를 문학권력의 표현이라고 비판했더니 반비판이 돌아온 게 아니라 명예훼손죄로 고발한다는 소장을 받았다고 푸념한다. 사소한 것이지만 그것 역시 소송 사회의 단면을 비춘다. 분하고 억울하면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변호사를 선임하고 법의 조정을 받으면 된다는 논리가 횡행한다. 더욱 가관인 것은 언제부터인가 파업이 벌어질 적마다 등장하는 사용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이란 것이리라.
지금 노동조합의 쟁의 행위가 초래하는 불이익에 관하여 기업은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이는 자본 역시 권리의 주체라는, 얼핏 들으면 대단히 형식논리적으로 옳은 주장에 근거한다. 그러나 노동삼권은 노동에 기반한 사회, 고용 임금에 근거하여 부의 분배가 이뤄지는 자본주의를 지탱하여 온 원리이다. 사실 임금소득자란 개념으로 노동하는 자의 삶을 법적 계약의 주체로 한정하는 것부터가 이미 법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보여준다. 자본주의적 법률은 노동을 평등한 계약자들 간의 계약에 따른 공정한 행위로 재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논외로 칠 때, 노동삼권은 얼마간 서구의 자본주의의 특정한 역사적 단계(즉 복지국가적 자본주의)의 타협과 성과를 반영한다. 이 시대의 법은 사회란 노동(혹은 고용)에 바탕한다는 공리를 전제한다.
따라서 노동삼권이란 노동자라는 특수한 이해집단의 권리이기에 앞서 사회란 노동에 근거함을 전제하며 제시된 사회적 조정의 원리일 것이다. 노동삼권을 요구하는 노동자란 특수한 이해집단이기에 앞서 법이 상대하는 “국민”, “사회적 존재 일반”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다. 결국 노동삼권이란 국민이 자신의 삶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한 권리의 하나이다. 반면 기업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인민의 권리, 피치자의 권리를 특수한 이해관계자의 권리로 축소한다. 이는 몇몇 논자들이 이야기하는 “시민사회의 소멸”이라는 흐름에 대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민사회란 자본주의사회에서 국가와 사회를 매개하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노동조합이나 지역사회는 국가가 사회를 관리하고 경영함에 있어 사회를 매개하여주는 장치였다. 그러나 이제 시민사회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소송하는 개인이 들어서고 있다. 따라서 “쟁의의 주체”는 “소송의 주체”로 바뀌고 있다.
따라서 헌법의 개정을 둘러싼 욕망에는 노동에 근거하고 시민사회의 매개를 통해 사회를 관리하던 체제가 저물어가고 있다는 인식이 깔려있을 것이다. 불과 십년 만에 비약적인 성장을 했던 노동조합운동은 이제 시민사회를 형성하는 주축이 되어 국가와 협상하는 주체가 되기는커녕 탈규제적인 개혁을 가로막는 귀찮고 성가신 사회 발전의 장애물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를 향한 비판적인 기획이 설 자리는 영영 사라지고 소비자적인 시민의 잇단 소송과 판결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다. 따라서 기업가적인 정부와 소비자적인 시민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언제나 법률적 소송이라는 형식에 의존하고 사회적 갈등의 공간은 법정이라는 밀실에 유폐되어 버린다. 87년의 6월 항쟁 이후 등장한 새 헌법이 이미 낡은 법이 되었다는 주장은 솔깃한 이야기지만 그것이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개정이 아니게 될 가능성이 높기에 우리는 걱정을 덜 수가 없다. 굳히 탈규제적이고 유연한 지배를 보증하는 헌법이 등장하지 않아도 국제법에 따라, 국제기구의 비준과 요구에 따라 한국 사회는 관리받고 있다. IMF 위기가 헌법의 위기가 아니었다면 무엇인가. 사회적 부의 분배와 관리를 위한 권리가 국민에게 더 이상 바탕하지 않는 법의 체제를 겪은 마당에 헌법의 자리는 옹색하고 처량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헌법 개정을 둘러싼 논의에 참여하는 두 개의 흐름을 경계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한 쪽에서 주장하듯, 현재의 헌법에서 더 많은 인권, 더 많은 기본권, 더 많은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차별과 억압, 착취를 극복하는 주체를 소송의 주체로 형식화하는 몸짓에 불과하다면 그같은 헌법 개정의 논리에 명백히 반대해야 할지도 모른다. 레이건-부시 정권의 사법개혁의 핵심이 “위대한 사회”의 국민을 “자율과 책임”의 소비자적 개인으로 바꾸는 것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여성과 유색인종, 이주노동자, 게이와 레즈비언, 장애인, 복지수혜자는 자율과 책임의 개인이기에 앞서 사회의 성원이다. 인민이라는 정치적 주체를 상대하던 헌법을 잘게 나뉘어진 다원적인 이익집단과 지역사회로 나누는 헌법의 개정은 위험하고 또한 보수적이기까지 하다. 한편 극우적인 호헌론자와 달리 사회의 규범적인 한계로서 헌법의 존속을 지지하는 즉 법의 규범적인 초월성을 지지하는 또 다른 호헌론자들의 주장에도 반대할 필요가 있다. 헌법에 냉소적인 눈길을 건네는 것이 곧 법이 유일한 사회적 통합의 조건일 수밖에 없음을 무시한 섣부른 태도라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군주의 명령보다는 민주적인 헌법이 낫지만 그렇다고 헌법이 사회를 묶어주는 유일한 한계라는 것은 법을 향한 물신주의에 불과하다. 헌법을 향한 의문은 사회의 통합의 조건을 향한 의문이 아니라 사회의 적대와 대립을 향한 의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헌법을 개정하려는 욕망은 곧 헌법이 재현하는 사회적 구성원리에 관한 반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헌법의 전문을 다시 쓰는 상상에 어떤 재갈을 물릴 필요가 없다. 헌법의 전문을 바꿔쓰는 우리의 실험이 곧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를 발명하는 실천이어야 한다면 말이다. 이를테면 나는 이렇게 헌법의 전문을 바꿔 쓸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은 인류의 모든 전통과 역사를 존중하는 세계시민으로서 국민의 주권과 타인의 주권에 어떤 우열을 두지 않으며, 오직 노동하는 민중의 역사적인 업적과 정의와 자유,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에 근거하여 자유와 평등, 우애의 원리에 따라 사회의 모든 성원의 삶을 향상시키고, 불의와 차별, 억압에 대항하는 민중의 정당한 권리를 옹호하되 이것이 그 어떤 이념적인 한계와 조건에 앞서는 것임을 분명히 하며, 일체의 삶의 영역에서 민중들 각자가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하고, 사회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고른 삶의 기회를 누리되 이에 어긋나는 어떤 간섭에 앞서 이것이 우선함을 확인하면서 1948년7월12일에 제정되고 9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쓰고 나니, 석연치 않다. 국제법과 헌법의 관계가 애매해지는 시대, 국민과 비시민이 뒤섞여 사는 시대, 주권적인 삶의 기반이 바뀌어버린 시대, 그런 시대에 헌법의 전문을 다시 쓰는 것은 곧 상상의 작업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의 모습에 대한 섬세하고 치밀한 분석을 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계간 황해문화> 2004년 가을호에 기고한 글… 주제는 다시 쓰는 헌법 전문. 헌법전문을 다시 써서 얌전히 바치기는 커녕 기획의도에 대하여 불쾌한 시비를 걸 수도 있는 글이 되어버렸다. 몇 해동안 법률과 사회, 혹은 소송사회에 대한 나의 근심은 커지고만 있다. 언젠가 털어보고 싶은 주제 가운데 하나..

민주주의와 그 너머 – 애도의 문화정치학

애도하는 국민
한국 사회에 대중들이 정치적인 행위에 가담하는 중요한 형식이 애도였다는 점은 서글픈 일이다. 가까이는 김선일씨의 죽음을 향한 애끓는 애도, 미군장갑차에 깔려 죽은 두 여중생을 향한 안타까운 공감의 애도, 그리고 멀리는 이한열, 박종철, 전태일, 김주열로 이어지는 투사들의 죽음을 향한 애도까지, 우리는 (정치적) 애도 행위를 통해 정치의 공간에 참여하여 왔다. 어떤 인물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처리하고 조직하는 의례를 통해 낯선 정치적 공간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드문 일도 아니다. 외려 그것은 마치 평범한 관례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모든 사회의 정치적 사태 안에 스며들어 있다. 왕의 죽음이든 지식인의 살해이든 혁명가의 처형이든 우리는 죽음을 통고하는 소식을 통해 그리고 그 죽음을 애도하는 의례를 통해 정치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기존의 정치적 공동체를 보다 단단히 결속하는 권력의 신화를 만들어낼 수도 있고 반대로 기존의 정치적 공동체를 돌파하는 열정을 끌어내며 근본적인 저항을 창출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정치적인 애도는 직접적인 정치적인 행위와 관계되어 있을 뿐 아니라 기존의 정치 공동체를 조직하는 근본적인 조건 자체에 연관되어 있다.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은 우리의 정수리를 후려치는 충격이었다. 우리는 그 당시 모두 전두환 정권의 잔학한 폭력에 대해 이미 자세히 알고 있었다. 학생들과 지식인, 노동자들이 군사독재에 맞서 투쟁하고 있다는 소식은 더 이상 소문이 아니었다. 연일 계속되는 시위와 매캐한 최루탄 냄새로 우리는 더 이상 현재를 감당할 수 없으며 지금의 정치체제를 용인해서는 안된다는 시대의 기분에 감염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자각이 행위로 곧 정치적인 참여로 전환될 수는 없었다. “더 이상 이럴 수는 없어”라는 막연하고 우울한 확신이 “세상을 바꿔야 해”라는 행위로 비약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윤리적인 긴장이 가로놓여 있다. 애도가 자리잡은 공간은 바로 그 윤리적인 긴장의 자리이다. 정치적 애도는 행위의 망설임 앞에 놓여있는 윤리적인 긴장의 뇌관을 격발한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불에 데인 듯이 그 애도의 공간에 빨려 들어가 진정한 정치적 행위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980년의 광주항쟁의 며칠이나 1987년의 6월 10일은 아마 그런 행위의 날짜였을 것이다. 그 애도의 날들은 더 이상 자신의 주관적인 의도에서 구속되지 않은 채 마치 맹목적인 힘으로 자신을 밀어붙이는 열정에 이끌리는 날들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볼 때 정치적 애도란 정치적인 행위를 가능케 하는 것이 정치적 주체의 선택이 아니라 오히려 이유 없는 윤리적인 강요임을 우리에게 암시한다.
왜 당신은 행위에 가담하지 않는가. 이 물음에 답변하기 위해 우리는 여러 가지 핑계를 내세울 수 있다. 아마 쉽게 들을 수 있는 답변은 “주체의 선택”이란 가정에 근거한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당장 먹여 살려야할 처자식, 나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고생하신 시골의 부모님을 생각하면, 나는 부끄럽지만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내가 운동의 대의에 전적으로 지지하며 공감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에 적극 가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안타까운 인간적 이유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를 서슴없이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면 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여러 가지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겉보기에 선택이라는 형식을 취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선택 이상의 행위이다. 다시 말해 타산적인 이해와 계산으로 환원할 수 없는 윤리적인 차원이 그 안에 담겨있다. 운동에 참여하는 것 혹은 일반적으로 말해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형시키는 정치적 행위에 참여하는 것은 선택의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처벌과 감금, 고문의 희생을 비롯한 불이익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친 것처럼 뛰어드는 것이다. 반란은 분명 계산된 행위, 기획된 실천이지만 그 안에 놓여있는 주체는 의도적인 주체가 아니라 미친 자와 비슷하다. 그래서 반란은 미친 짓이다.
이쯤에서 지금 이 맥빠진 민주화 시대의 “정치적 주체의 윤리”와 근본적인 정치적 행위의 주체의 윤리를 비교하면 어떨까. 만약 NGO에 참여한다거나 자원봉사단체에 참여할 때 우리는 인권이나 민주주의, 생태주의, 공동체의 자기 지배 등의 여러 가지 그럴 듯한 이유를 내세울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정치적 행동에 깔린 윤리적 배경을 자신 있게 부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윤리적인 배경이 곧 변혁적인 행위에 가담하는 정치적 주체의 윤리와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겉보기에 민주화의 요구와 친환경적인 경제성장의 요구는 형식적으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외려 단순히 정치적 제도의 변화에 머문 민주화의 요구보다는 자본주의적 문명의 근본적인 한계를 교정하고자 하는 환경운동이야말로 보다 높은 윤리적인 대의를 지니고 있다고 강변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우리가 그것이 전 시대의 급진 운동(혹은 반자본주의적 운동)이 발휘하였던 것과 같은 강력한 윤리적인 압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군사독재 시대의 급진 운동이 우리를 짓눌렀던 윤리적인 압박과 지금의 시민사회운동이 부과하는 (거북하기까지 한) 도덕적인 설교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다. 분명히 말해 지금의 자유주의적인 민주주의의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변화의 기획이란 것은 윤리-정치적인 차원에서 무력한 것일 뿐 아니라 또한 그다지 유용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당대비평 특별호에 기고한 글. 최종 본은 조금 고쳤다..
반란은 미친 짓이다 – 애도하는 세 가지 방법
우리가 “정치적인 애도”에 관하여 다시 생각해 보려는 것은 이런 점 때문이다. “애도”란 바로 제도화된 정치적 행위(이를테면 선거, 언론의 자유 등)로 환원할 수 없는 정치적 행위의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게 한다. 정치적 애도란 형식적인 민주주의로 통합할 수 없는 요구를 던질 수 있는 “위반”의 가능성을 던질 수 있게끔 한다. 수많은 역사적인 에피소드에서 볼 수 있듯이 왜 지배 집단이 그토록 장례식을 두려워하고 이미 죽은 자의 말없는 주검을 탈취하려고 하는지 그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죽은 자는 실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는 침묵의 말로, 직접 들을 수 있는 투쟁하라는 요구보다 더 뿌리치기 어려운 힘을 발휘하며 우리에게 행위를 호소하는지 알고 있다. 우리는 이를 자신의 이웃, 동료, 시민을 살해한 불법적인 권력을 향한 분노가 낳은 감상적인 반응일 뿐이라고 매도해서는 안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가 어느 시인이 극우 신문에 기고했던 글의 제목처럼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고 비명을 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과 같은 평범한 벗, 아우, 누이를 살해한 즉 자신과 동일한 공동체의 성원을 살해한 권력을 향해 분노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에 머문다면 그것은 정말로 감상적인 파토스에 그칠 뿐이다. 자신과 같은 이웃의 모습으로 죽은 자가 수용될 때,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자신의 상상적인 타자, 자신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공동체의 성원으로 그가 받아들여질 때 우리의 반응은 문자 그대로 감상적인 것이다. 나는 그에게서 나의 또 다른 모습을 볼 뿐이다.
그런 감상은 물론 현존하는 사회적 질서를 변형시키는 데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속한 정치적 공동체의 구조적 질서를 그대로 놓아둔 채 우리의 비루하고 서글픈 처지에 대한 연민, 더 고약하게 말하자면 나르시시즘적인 감상에 빠져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북받치는 흐느낌 속에서 “그래, 잘가라, 친구여, 벗이여” 속삭이고 난 후 다시 이 지긋지긋한 현실 속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여전히 혼곤하고 비루한 삶이지만 우리는 이 삶이 우리의 현실임을 인정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애도”는 여러 가지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첫 번째는 말 그대로 “사망”의 수용이다. 기존에 있던 친밀한 인간관계 혹은 정치적 공동체를 그대로 놓아둔 채 그의 부재를 현실 안에 통합하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를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그에게 “고인”이라는 칭호를 붙여줄 것이고 그 결과 그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지평 안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공식적인 가족사, 정치적 공동체의 역사 안에 기억될 것이다. 두 번째의 애도의 가능성은 죽음을 인정하지만 자신의 심리적 현실 안에서 온전히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감상적인 집착이다. 이런 나르시시즘적인 집착은 나의 벗, 이웃, 가족의 죽음 안에서 자신의 상상적인 타자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때에 애도는 과도한 감상적인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다. 그는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살아가는 현실 안에서 계속 살아있을 수 있다. 나는 내 삶에서 마주치는 자그마한 흔적들 안에서 그를 상기하며 걷잡을 수 없는 감상적인 우울에 휩싸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애도의 세 번째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앞서 언급했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문자 그대로 “죽음의 굿판”이 될 수도 있다. 죽음을 수용하는 정상적인 절차인 죽음을 현실 안에서 부재하지만 그의 상징적인 위치를 마련해 줌으로써 죽음을 현실에 통합해 내는 첫 번째의 애도, 그리고 감상적인 집착에 시달리는 불완전한 형태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인정하며 그것을 현실로 통합해 내는 두 번째의 애도와 달리, 세 번째의 애도는 개인과 사회를 무너뜨리는 폭력이 될 수 있다. 그 때 죽음을 애도하는 과정은 있을 수 없는 듯이 보이는 반대의 것 즉 희망의 축제로 실체변환할 수 있다. 장례의 절차를 통해 죽음을 상징화할 때 그리고 애도자로서 죽음을 수용하기 위해 곡을 하고 분향을 할 때, 그것은 죽음으로부터 개인과 사회를 보호한다. 죽은 사람은 죽은 것이고 산 사람은 산 것이다. 우리“?살아야할 이 세상이 있는 것이고 우리는 죽음에 새겨진 위협을 우리의 상징적 질서 안에 포함시킨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것이 죽음을 애도하는 가능성의 전부는 아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죽음에 부여한 의미에 결코 화해할 수 없을 때, 애도의 과정은 장례가 아니라 미친 짓으로 바뀌게 된다. 다시 말해 죽음의 굿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광주항쟁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광주항쟁은 알다시피 애도의 과정이었다. 그것은 계엄군의 진입과 무고한 학살로부터 비롯된 죽음을 향한 애도의 과정에서 폭발하였다. 그렇지만 이런 애도의 과정은 사회 안에 속해 있음을 나타내는 추모와 장례의 행위로 종결되지 않았다. 그것은 광주항쟁에 관한 열정적인 기록들이 들려주듯이 열흘 밤낮의 황홀한 해방구, 이미 존재하는 정치적 공동체로부터 완벽히 벗어난 새로운 공동체를 창설하였다. 그것은 애도의 대상이 되었던 죽음을 이미 존재하던 정치적 규범에 따라 해석하기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기존의 정치적 상징질서의 바깥으로 과감히 뛰쳐나가는 미친 짓이었다. 광주 학살의 첫날 광주 시민들은 곤봉과 총알 세례에 쓰러진 젊은 청년들의 죽음을 마주하고 즉각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북한의 사주를 받은 반체제 폭도의 진압, 헌정질서를 파괴한 문란한 공적의 소탕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무고한 죽음이었음을 그들은 온 몸으로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죽음을 향한 공포와 형제와 이웃을 잃은 비통함에 머물러 있었다면 애도는 죽은 자와 산 자의 거리를 만들어 놓으며 질식할 듯한 침묵과 흐느낌 속에 파묻혔을 것이다. 그리고 광주의 시민들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죽은 자를 위해 산 자들이 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향해 말을 건네는, 저 유명한 <님을 위한 행진곡>의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라는 노랫말처럼, 산 자들과 죽은 자들 사이의 거리는 사라져 버렸다. 결국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치적인 행위, 즉 반란이 시작되었다.
정치적 애도와 윤리-정치적인 주체
여기에서 우리는 집단적인 죽음이 주술처럼 불러낸 끔찍한 폭력, 자신을 짓밟은 역사의 명령의 불의를 향해 앙갚음을 행하는 피억압자의 광기를 찬미하는 결단주의적인 사고를 끌어들이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인 애도를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죽음에 직면한 주체의 집단적인 심리를 해부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애도 자체의 윤리-정치적인 사건으로서의 성격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왜 그것인 윤리-정치적인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인가를 먼저 해명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이한열의 영결식장에서 울려 퍼진 문익환 목사의 잊혀지지 않는 애끓는 음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날 아침 그가 죽은 자를 추모하는 의례적인 장황한 조사를 읽지 않고 “이한열 열사여, 박종철 열사여, 전태일 열사여…”를 길게 목놓아 불렀을 때, 많은 이들은 걷잡을 수 없는 전율에 휩싸였다. 우리는 왜 그런 전율에 휩싸였을까. 그는 민주화 투쟁의 과정에서 죽은 자들의 숱한 이름을 외쳐 불렀을 뿐인데 왜 우리는 온 몸이 얼어붙는 듯한 감정에 사로잡혔을까. 그 날 분명 문익환 목사는 죽음을 수용하는 장례식의 정상적인 절차에 위배되는 지나친 짓을 하였다. 그는 죽음을 우리의 현실 안에 통합하는 행위,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우리는 그를 어떻게 우리의 가슴에 묻을 것인지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거절했다. 그가 한 것은 장례 치르기를 거부하는 것, 즉 그(와 그를 비롯한 모든 죽은 자들)을 평범한 민주화 운동의 투사로 기념하기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그들의 이름을, 그들의 고유명사를 읽은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정치적인 애도를 윤리-정치적인 측면에서 이해해야 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게 한다. 문익화 목사는 직관적으로 고유명사와 그들을 위해 우리가 마련해 놓은 형식적인 직함, 기존의 정치적인 재현 체계가 부여한 지위인 민주화 운동의 투사라는 정체성 사이에 놓인 간극을 깨닫고 있었던 듯이 보인다. “그렇다, 그들을 민주화 운동의 투사이다. 그렇지만 그들을 그렇게 부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며 노동조합을 결성할 자유와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뽑는 형식적인 권리를 요구했던 시민의 일원으로서 그들을 부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그들의 죽음을 각오한 삶에서 그런 거의 상식적인 요구를 발견하고 만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설령 그들의 드러난 정치적인 요구는 그런 평범한 것으로 제한되어 있었을지 몰라도 그들은 자신이 말했던 것, 말 할 수 있던 것 이상을 요구했다. 그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자신의 시민으로서의 이해를 실현하기 위한 선택을 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 모두 알지 않는가. 그들은 이해관심에 매달리지 않은 순결한 영혼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문익환 목사의 그 조사(弔詞)를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윤리를 모든 세속적인 정치적인 이해를 초월하는 “아름다운 영혼”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노동자계급을 가난한 이웃으로 환원하고 그들의 불운한 처지에 “공감”하며 고생을 마다 않는 자선사업가의 윤리와 그들을 자본주의적 체제의 근본적인 모순에 의해 착취 받는 계급으로 인식하고 반자본주의적인 투쟁에 투신하는 혁명가의 윤리를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정치적인 애도의 과정에서 직면하는 윤리적인 충격은 앞의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도덕이 아니다. 우리가 정치적인 애도의 과정에서 목놓아 부른 “이름”의 주인들은 분명 사회의 변혁을 위한 정치적 투쟁에 참여한 공적인 주체이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의 상징질서가 만들어 놓은 추상적인 정체성, 그의 정치적인 주체-위치를 통해 호명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그들은 열사, 투사, 혁명가, 민주주의자 등이 된다. 그렇지만 문익환 목사가 그들의 고유명사를 호명한 것은 정확한 일이었다. 이 때의 이름은 출석부의 번호 옆에 적혀있는 이름과 다르다. 그 때의 이름은 학급이란 사회에서 자신의 객관적 위치를 가리키는 정체성으로서의 번호(성적의 등수, 반 전체에서 키높이의 순서 등을 측정하고 평가하는 규준)에 부속된 내용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것은 근본적인 이타성으로서의 고유명사를 이야기하는 일부 철학자들의 주장에서 등장하는 그 고유명사와는 다른 이름이다.
고유명사는 상징적인 호명에도 불구하고 그에 소외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무엇보다 소중한 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충만한 나라는 허구의 지표가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고유명사가 자아(self)라는 상상적인 허구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또한 그것이 진정 고유한 이름으로 뛰어오를 수도 있다. 그것은 방금 언급했던 문익환 목사의 호명에 등장하는 고유명사이다. 그 고유명사는 기존의 사회적 상징질서가 부여한 형식적인 지위로 환원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 고유명사는 상징질서로 재현될 수 없는 탈소외된, 너무나 인간적인 그의 개인적인 삶을 가리키는 것도 아닐 것이다. 여기에서 그 고유명사는 매우 독특한 성질을 얻게 된다. 그 고유명사는 레비나스나 데리다같은 이들이 말하듯이 상징질서의 어떤 규정에도 저항하는 근본적인 타자성, 사회로부터 해방된 환원불가능한 고유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고유명사의 고유성은 사회의 위계적 지위에 의해 매개되고 형식적인 정치적 규칙의 담지자로서의 주체가 아니라 사회의 근본적인 적대를 표시하는 주체의 고유성일 것이다.
민주주의와 그 너머 – 애도인가 투쟁인가
그렇지만 우리는 고유명사가 관계 맺는 사회에 대하여 다시 한번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 때에 사회란 제도와 질서의 총체로서의 사회, 그 안에 속한 각각의 주체들의 삶을 상징적으로 매개하고 규제하는 체계로서의 사회가 아니다. 고유명사가 접근하는 사회, 차라리 그 고유명사가 반향하는 사회라 부를 수 있을 그 사회란 역설적인 뜻에서 불가능성으로서의 사회, 즉 다양한 사회적 체계와 구조를 가능케 하는 저변의 근본적인 원리로서의 사회를 가리킨다. 잘 조화된 전체, 통합된 체계로서의 사회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불가능한 사회를 가능케 하는 사회란 바로 사회를 가로지르는 근본적인 적대이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우리는 이를 당연히 계급적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계급투쟁은 사회학적인 주체로서 계급이라는 인격적인 집단 간의 대립과 갈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투쟁이 벌어지는 곳은 계급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를 구조화하는 외부와 자본주의 사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사회는 계급투쟁이라는 사회의 근본적인 적대를 유효하고 실제적인 사회적 질서와 제도의 형식으로 상징화한 결과이다. 따라서 그것은 복지국가적인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 종속적인 국가독점 자본주의같은 다양한 형태로 상징화된다. 물론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사회란 이런 구체적인 권리와 지위, 제도와 질서로 상징화된 사회이다. 그렇지만 이런 사회의 일반적인 질서를 수립하도록 하는 것은 언제나 상징적으로는 불가능한 자본주의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가능성으로서의 사회와 규정적인 실제 세계로서의 사회를 분간해야 옳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고유명사가 공명을 불러일으키는 그 사회란 다름 아닌 전자의 사회 즉 우리의 삶을 구조화하는 근본적인 대립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수많은 민주화 운동의 투사들은 민주주의자인가. 물론 그렇다. 그들은 우리가 살아가던 시대의 정치적 질서와 경제적 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한 요구를 주장했던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또한 그 이상이었다. 우리가 정치적 애도의 자리에서 섬광처럼 마주하게 되는 그들의 위치는 그러한 상징적 질서의 체계를 초과하는 (비)사회에 속해있다. 그들은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요구를 제시하고 투쟁했지만 그래서 바깥으로 드러난 것은 평범하고 단순한 요구였지만 그들은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버팀대를 무너뜨리는 들리지 않는 요구를 제시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요구는 사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노동조합을 결성할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는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자유민주주의적인 요구였지만 그 시대엔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요구였다. 만약 그런 요구가 수용되었다면 우리는 더 이상 한국 자본주의가 전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작업장 안에서 노동자의 계약관계와 정치적 공동체 안에서의 시민의 계약관계는 각기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주체성의 위치를 규정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체성의 다양한 위치를 조정하고 접합하는 자본주의이다. 따라서 그것은 또한 비자본주의적인 삶을 꿈꾸는 요구였던 것이다. 그리고 상징적 요구를 초과하는 요구를 주장하는 주체는 윤리-정치적인 주체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윤리-정치적인 주체의 차원이 개인의 도덕적인 태도나 사회의 질서와 안녕을 위한 상징적인 규범이 아니라 왜 정치와 주체가 만나는 지점인지 깨달을 수 있다. 윤리-정치적인 주체란 도덕적인 개인과 정치적인 주체성이 결합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개별적인 자아와 정치적인 주체성 사이의 만남으로 윤리-정치적인 주체를 간주한다면 우리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전향” 그리고 “과거 청산”이란 문제를 어떻게 조명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전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개인이 다양한 정치적 요구와 대의 가운데 하나를 골라잡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전향이란 어느 한 종류의 객관적인 지식에서 다른 종류의 객관적인 지식으로의 이행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변형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토록 많은 이들이 전향에 저항하고 심지어 전향을 거부하기 위해 목숨까지 내놓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전향을 강요당하는 주체가 다양한 객관적 지식의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 사람이 아니라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요구로서 자신의 이념을 선택한 주체, 즉 윤리-정치적인 주체임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이를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과거 청산의 문제와 연관하여 생각해보자. 우리는 구체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한 다양한 사실을 조사하고 그를 통해 그의 죄과를 해석하고 평가하려 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과거란 행정적인 조사의 업무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는 차라리 민족주의자들이 “민족의 정기”를 주장할 때 포함된 윤리-정치적인 입장을 모방할 줄 알아야 한다. 과거청산이 자유주의적 개혁세력과 극우수구세력 사이의 세력 싸움을 위한 핑계에 머물지 않으려면 진정 잘못을 범한 윤리-정치적인 주체의 고발에 이르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 그 때 우리는 일제의 야만적인 강요와 통제로 인해 모두 부역자일 수밖에 없었다는 동정을 뿌리쳐야 한다. 설령 그것이 거의 모든 사람을 망라하는 공동체 전체의 파국이 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감행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친 김에 수많은 역사적 위원회들의 역할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비롯한 다양한 위원회들이 과거의 역사적 사태를 엄정하게 조사한다는 것은 사망의 원인을 객관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태와 연루된 정치적 주체에게 윤리-정치적 책임을 묻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적인 화해와 진실을 믿어서는 안될 것이다.
시민참여의 민주주의 시대라고 불리는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고들 한다. 그 시대의 자장 안에서 벌어지는 정치적인 애도란 어떤 것일까.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우리에게 새로운 정치-윤리적인 주체와 만나는 순간으로서의 정치적인 애도, 그리고 정치의 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새로운 주체의 출현을 알리는 정치적인 애도는 희박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중생의 죽음과 김선일씨의 죽음을 비롯한 수많은 정치적인 죽음을 애도하면서 우리는 다시 거리로 나갔다. 그렇지만 이런 거리의 애도는 허용된 장소에서의 평화적이고 문화적인 행사가 되도록 강요당했다. 물론 이는 우리 시대의 정치적인 행위를 가로막는 근본적인 위협, 즉 가능한 것만을 요구하라는 협박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유주의적 개혁세력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설교를 하여왔다. 우리에겐 수구세력의 청산과 아직은 성숙하지 않은 즉 충분히 제도화되지 않은 민주주의를 공고히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 그들의 요지이다. 그것은 물론 완벽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약간의 사회안전망, 철저한 신자유주의적 정치개혁과 약간의 다원주의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적 개혁세력의 눈에 거리에서의 애도 역시 바로 그런 민주주의의 불충분함을 보여주는 안타까운 증거로 각색된다. 삶의 요구가 정치적 제도 안에서 공식적인 권리와 요구로 대변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거리에서의 애도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라는 식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민중들이 여전히 정치적 애도를 필요로 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왜 우리는 여전히 정치적인 애도에 참여할까. 우리는 어쩌면 민주화 시대의 시민적 주체로 호명된 우리와 근본적인 사회적 적대에 놓여있는 간격을 의식하고 있는 것 아닐까. 정치적인 애도란 민주주의가 강요하는 현재의 정치적 상징 질서 안에서만 사고하고 요구라는 협박을 부정하려는 시도가 아닐까. 물론 자유주의적 정치세력은 그 정치적인 애도의 공간을 다시금 기존의 상징질서 안으로 통합한다. 그들은 그것이 주체를 흔들었던 윤리-정치적인 차원을 모욕하고 정치적인 애도를 요구와 권리로 전치한다. 따라서 우리는 국회에서 조사위원회를 만들고 배상금을 지불하며 법률을 개정한다. 그렇지만 정치적인 애도의 공간이 여전히 활성화되어 있다는 것은 현재의 정치적 상징질서를 초과하는 윤리-정치적인 요구에 우리가 여전히 호소하고자 함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정치적인 애도의 공간은 한국 사회의 변혁적인 세력들에겐 중요한 희망의 징후이다. 허용될 수 있는 것만을 요구하는 타협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상징적 주체로 전락한 정치적 주체, 보편적인 주체를 거부하고 타자화된 주체, 소수적 주체의 위치를 물신화하는 정치적 주체. 그 곁에 우리는 이 모두와 불화하는 윤리-정치적인 주체의 위치가 아직도 버티고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한국의 변혁적인 세력들은 그 윤리-정치적인 주체에 접근할 어떤 전략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정치적인 애도의 공간에서 느끼는 우리의 슬픔과 패배감은 더욱 깊을 수밖에 없다. ■

지식노동자 – 탈근대자본주의 시대의 주체성과 비판이론



탈근대자본주의의 주체성을 압축 재현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약호는 단연 “지식노동자”일 것이다. 그렇지만 지식노동자를 현 단계 자본주의의 노동자의 역사적 종(種)으로 개념화해서는 안될 것이다. 예를 들어 자유경쟁자본주의 단계의 산업노동자와 독점자본주의단계의 대중노동자같은 유형으로 탈근대자본주의의 지식노동자를 분류하는 것은 그다지 유익한 일이 아니다. “지식기반경제” 혹은 “신경제”의 노동자로서 지식노동자는 전 단계의 노동자와 전연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기술적 구성이나 노동과정의 조직, 그리고 노동하는 주체를 사회적으로 조직하는 형태가 역사적 단계마다 다르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지식노동자란 노동자의 사회적 현실을 표상하는 개념이 더 이상 아니라는 점에서 특유하다. 지식노동자는 길드나 동업조합의 장인, 포드주의적 노동자와 더 이상 유사하지 않다. 지식노동자는 비노동주체와 구분될 수 없다는 점에서, 노동의 세계와 노동이 없는 세계가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노동의 생애단계와 노동으로 입장하고 노동에서 은퇴하는 생애단계의 간격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유령처럼 존재한다. 그것은 이미 네그리와 하트가 푸코의 개념을 빌어 이야기했던 노동의 생정치(biopolitics)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리 멀리가지 않도록 하자. “신지식인 운동”으로, “평생학습체제”로, “학습혁명”으로, “국가인적자원개발계획” 등으로, 지식노동자라는 새로운 주체성의 기획은 우리 주변에 이미 정착하였고 또한 가동 중에 있기 때문이다.
지식노동자는 일관생산라인이라는 직접적인 생산과정, 공장과 사무실이라는 특정한 공간의 배치, 출퇴근 시간과 테일러주의적인 시간동작연구로 상징되는 신체의 통제와 더 이상 상관없다. 노동자를 개별적인 신체로 규정하고 그를 표준과 규범에 따라 통제하고 조정하는 포드주의적인 훈육으로부터 지식노동자는 벗어나 있다. 개별적인 신체로서의 노동자는 이제 집합적인 신체 안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 명의 노동자의 묶음이란 뜻에서의 집합적 신체가 아님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가상사회에서의 정보와 지식의 (재)생산을 말할 때의 “집단지성”처럼 그것은 개별 신체, 지성, 감각의 집행이나 연장이 아니다. 일관생산라인에서 린 생산으로, 팀제로 변화된 탈근대적 노동 과정에서 노동자는 개별적인 신체로서 성과를 발휘하고 생산성의 지표에 의해 측정되고, 동기와 보상의 체계 안에 귀속되지 않는다. 노동자는 일반적인 노동력 안으로 사라진 채 측정될 수 없는 순수한 추상적인 힘으로 등록된다. 이는 거꾸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를테면 신경제의 “부”의 담론의 핵심은 재산이 아니라 자산(asset)일 것이다. 이는 직접적인 생산을 통해 만들어진 물질적 결과로서의 생산물이 아니라 법인기업이 가진 것으로 예측되는 잠재적인 능력 흔히 자산가치이다. 따라서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보유하고 있는 현물과 수익이 아니라 자산을 통해 자본을 평가하는 유령적인 등가(等價)의 세계에 익숙해 있다. 물론 그 유령의 세계는 나스닥과 코스닥, 증권거래소이다. 아마존닷컴과 벅스뮤직의 주식가치와 월마트나 삼성전자의 주식가치 사이의 관계는 더 이상 미스테리가 아니다. 아마존닷컴의 자산가치는 아마존닷컴의 수익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마존닷컴의 자산가치는 곧 그것의 잠재성일 뿐이다.
신경제 이데올로그의 주문같은 말처럼 “유한한 물적 자원에서 무한한 지식의 힘”으로 자본의 힘이 변화되었다면, 이는 노동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다. 노동 역시 그에 대응하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과받는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노동자 없는 노동의 세계를 가리키는 개념에 익숙해져 있다. 그것은 “인적 자원(human resource)”이란 용어일 것이다. “인적 자원 개발”, “인적 자본” 등의 개념은 한 명의 구체적인 심리적인 개인으로서의 노동자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일하는 나, 직장에 다니는 나, 월급을 받고 연금과 보험을 내는 나와 같은 뜻에서의 노동자 역시 잔존한다. 그렇지만 지식기반경제는 지식(그것은 신경제의 이데올로그들에 따라 다중지능, 창의성, 탁월성, 성공하는 사람의 습관, EQ, NQ 등 다양하게 정의되고 세밀화된다)이라는 역량을 요구한다. 이것은 노동자의 신체와 지성 안에 포함되어있는 실체로서의 능력도 아니고 또한 노동자가 판매하며 보상되는 소유물도 아니다. 다시 푸코를 끌어들이자면 그것은 삶(life)이며 생능력(biopower)이다. 투입되는 노동력을 이미 예상하고 규정하는 생산수단(이를테면 미싱은 재봉사, 선반은 선반공과 같은 식으로)과 달리 지식기반경제의 생산은 이미 형식화되고 표준화된 노동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인적 자원이란 개념은 따라서 경직된 직업 교육과 숙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를 실행하고 자신의 능력을 지속적을 개선하고 향상하는 노동력을 요구한다. 이런 점에서 인적자원은 평생학습을 요구하며, 노동하는 주체의 지속적인 자기계발을 강요한다.
한편 노동자는 언제나 해체와 이동을 함으로써 변신한다는 자본의 요구에 따라 혹은 변화를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는 자본의 가속화된 순환에 따라 그 스스로 끊임없이 변형되어야 한다. 이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마 최근 끊임없이 회자되는 “직장인에서 직업인으로의 전환”이라는 담론일 것이다. 지속적인 직업 이동, 동일한 직무와 직종 안에서의 이동이 아니라 다른 직업으로의 이동을 수반한 노동자의 이동은, 노동을 통한 자기(self)의 구성을 파산시킨다. 일의 여정(旅程)을 통해 자기의 생애를 재현하던 사람들은 이제 그 자리에 새로운 주체성의 형식에 사로잡힌다. 평생직장과 철밥통의 세계를 대신하여 이태백, 사오정이라는 유연화된 노동자가 들어설 때, 그것은 불안과 위험 속에 내동댕이쳐진 노동자의 물질적 생존만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또한 끊임없이 스스로를 혁신하고 관리하며 향상시켜야하는 기업가적 주체의 세계로 휩쓸려 들어간다. 이들은 리더십 프로그램과 자기계발 세미나, “아침형” 습관의 중독자, “메모의 기술”의 달인, 자기표현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노동하는 주체에게 단순히 새로운 노동 기율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더 많은 성과, 더 높은 생산성을 요구하는 점에서 다를 바 없지만 그것은 관료적으로 조직된 조직 체계에서 즉 외부로부터 오는 명령이 아니다. 그것은 탈근대자본주의의 주체에게 던져진 최대의 명령인 “자기주도”가 알려주듯이 “자기를 돌보는” 에토스를 실현하는 주체이다.
물론 이러한 새로운 에토스는 노동하는 주체가 공통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던 상징적 동일시의 형식(당연히 이에 해당하는 고전적인 개념은 당파성, 프롤레타리아트적 계급의식, 의사소통적 합리성 등이다)을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노동은 있지만 노동을 수행하는 주체는 사라지고 있고, 노동하는 주체의 정체성을 재현하는 물질적인 제도와 기관(정당, 노동조합, 클럽, 신문, 출판사 등)은 위축되거나 무력해지고 있다. 노동자를 대신하여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기업가(the entrepreneur)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경력경로를 관리하고 다중경력을 체득하며 고용가능성(employability)을 향상시키는 주체이다. 물론 이를 가장 잘 요약하는 것은 신경제의 가장 탁월한 이데올로그인 톰 피터스의 “나-브랜드”일 것이다. 그에게 삶이 어떻게 의미작용의 코드와 사회적 재생산의 네트워크에 의해 규정되는가를 묻는 것은 진부한 일이다. 나의 삶은 일종의 프로젝트이며, 나는 무엇보다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노동하는 주체의 정체성의 변화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무엇인가. 기호학과 정신분석학 그리고 포스트구조주의를 익히며 데카르트적 코기토와 남근로고스중심주의와 투명한 자기의식적 주체와 작별을 고하는 것은 적어도 비판적 학계의 시대정신이었다. 그렇지만 그 시대정신이 잊고 있었던 것은 그러한 변화가 탈근대자본주의의 주체성을 정의하는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힘들의 장이었다는 것이다. 통속적인 경영학 서적에서 데리다가 신경제의 지식경영의 선구자로 칭송받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운 일이 아니다. 디지털정보자본주의를 선구한 예언가로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를 들먹이는 것은 차라리 참신하다 할 일이다. 젠체하는 마케팅서적에서 부르디외의 “아비튀스”와 “문화자본”을 인용하는 것은 이미 관례가 되다시피 하였다. 물론 그 자체 나쁜 일도 좋은 일도 아니다. 담론의 소비를 지식인이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마르크스 역시 월스트리트의 철학자로 둔갑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분석가로서의 마르크스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분석가로서의 마르크스가 다르지 않은 인물이었음을 잊고 있었다. 탈근대자본주의의 주체성을 분석하고 정의하는 일은 정치적인 개입이다. 그런 점에서 탈근대자본주의의 지식인들에게 필요한 일은 근대성과의 단절 혹은 극복이 아니다. 외려 필요한 것은 탈근대자본주의의 주체성을 둘러싼 적대적인 논쟁의 공간을 창출하고 참여하는 일이다. 지식노동자라는 탈근대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대응하는 개념은 무엇인가. 놀랍게도 우리는 그 자리에 컴컴한 공백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확인할 뿐이다. 이는 슬프고도 참담한 일이다.
– 연세대학교 대학원신문에 기고한 글

기관 없는 신체 혹은 신체 없는 기관

기관 없는 신체 혹은 신체 없는 기관 – 신체의 재현과 그 위기


재현의 위기 그렇다면….
<아침형 인간>이란 자기계발서가 최근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자기계발서의 유행은 이제 더 이상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명민한 사회학자라면 이러한 자기지침서(self-help manual) 혹은 자기계발서의 유행을 이른바 후기 자본주의사회의 사회적 증상(social symptom)으로 진단하고 그것을 분석해야 할 것이다. 물론 사회학 혹은 문화이론으로부터 이러한 자기계발서에 대한 분석이 적잖이 등장하고 있다. 사회학자들이 자기지침서를 분석의 대상으로 정의할 때 주로 의지하는 개념은 “자아(self)”이다. “재귀적 근대성(reflexive modernity)”이란 개념으로 후기 근대자본주의의 주체성을 분석하는 앤서니 기든스의 입장 역시 자아 정체성이란 개념의 둘레를 맴돈다. 후기 근대의 자기정체성에 관한 그의 저작의 제목은 <근대성과 자기정체성>이었다.
그가 말하는 후기 근대의 “성숙한 자아”란 재귀적 근대성의 체계 안에 놓여 있다. 재귀적 근대성을 설명하는 한가지 방식은 근대화는 곧 탈전통화라는 것이다. 탈전통화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규정하는 일반적인 규범을 합리적인 반성의 대상으로 옮겨놓는다. 줄여 말하자면 이는 ‘감히 자신의 오성을 사용하여’, 전통이나 미신과 같은 억견을 비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앤서니 기든스는 탈전통화라고 불리우는 근대성의 영향은 정치나 경제와 같은 공식적인 사회적 관계에 머물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탈전통화의 논리는 이제 일상적인 삶의 영역으로까지 흘러들어 미만해 있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우리는 몸에 관한 의료과학의 공식적 지식의 일의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다양한 대체의학을 선택한다, 우리는 친밀성의 유일한 합법적인 형식인 이성애적인 결혼을 상대화하고 있으며 다양한 대안적인 가족을 인정하고 있다 운운). 그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후기 근대이고 성숙한 근대성이다. 이제 탈전통화라는 근대의 비판적 해석학은 바야흐로 결혼과 가족관계, 그리고 사랑이라는 친밀성의 영역까지 침투하고 있다. 그러나 기든스가 예상하는 후기 근대의 성숙한 주체의 모습은 혹시 그 반대의 모습을 취하는 것이 아닐까. “감히” 자신의 정체성과 자유를 개척하는 성숙한 근대적 주체의 재귀성은 거꾸로 뒤집혀져 우리의 삶을 옥죄는 “금지 없는 명령”이 된 것이 아닐까.
– 문학과 경계 봄 호에 기고한 글의 도입부입니다.

<삼국지> 읽는 남자

<삼국지>의 독서공간과 탈근대 자본주의의 자기계발 담론
삼국지 읽는 남자
<삼국지>야말로 우리 시대의 탈근대 자본주의적 대중문학의 가장 탁월한 표본이 아닐까. 혹은 문학적 정전의 전통에 속한 “작품”을 패키지화된 “상품”으로 소비하는 뛰어난 사례이거나. <삼국지>는 알다시피 원본을 정의하기가 불가능한 텍스트이다. 그러나 그 원본으로서의 가치를 나눠 받은 텍스트이든 아니면 <삼국지>를 참고하거나 인용하며 쓰여진 이차적인 텍스트이든, 그것은 모두 <삼국지>라는 텍스트를 구성하는데 참여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삼국지>라는 본래적인 문학적 텍스트 혹은 고전이 따로 있고, 그로부터 파생된 기생적인 문화적 생산물로 나누는 생각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다수의 문학 담론은 원본으로서의 <삼국지>를 특권화한다. 그것은 국내에서 간행되어온 <삼국지>의 저자성을 이야기할 때 고스란히 반복된다. 국내에서 이문열본, 조성기본, 김홍신본, 김구용본 그리고 최근 출간된 황석영본의 <삼국지>를 각기 나눌 때, 그것은 <삼국지>를 해석되고 평가되는 가상의 원본으로 다룬다. 그리고 각기 다른 판본은 그 원본만큼이나 가치 있는 이차적인 저작으로서의 권위에 가담한다. 다시 말해 각기 서로 다른 판본의 저자들은 <삼국지>의 저자와 유사한 저자로 권한있는 주체로 격상되고, 다른 인접한 텍스트들과는 다른 “저자”로서의 지위를 보장받는다. 따라서 그것은 <삼국지>를 문학적 정전의 지위에 안전하게 보존하고 더불어 저자로서의 문학의 주체라는 신화를 유지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가 <삼국지>를 둘러싸고 제작되고 순환하는 다양한 이차적 텍스트로부터의 오염을 막고 자신을 안전하게 격리시켜주는 것은 전연 아니다.

한편 그것이 “독서 시장” 안에서 “스테디셀러”와 “베스트셀러”로 소비되고 있는 문화적 대상으로서의 <삼국지>를 분석하는데 얼마나 쓸모있을지 역시 의문이다. 문학 작품의 읽기의 공간을 한정하고 읽기의 방식을 감독하는 문학제도적 담론은 쇠잔해진지 오래이다. 더욱이 <삼국지>라는 텍스트를 전유하는 독자의 체험을 규정하는데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삼국지>와 삼국지의 주변에 놓인 잡종적 텍스트의 배열을 읽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삼국지>를 다른 텍스트를 규제하는 담론적 진실의 장소로 정의하고 그 곁에 놓여있는 텍스트들을 이차적이고 파생적인 텍스트로 놓는 것은, <삼국지>를 소비하는 하나의 장(문학제도의 장)이 강요하는 특권적인 시점일 뿐이다. 최근 “독서 시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삼국지 열풍’을 이해하는데, 앞에서와 같은 문학제도적 장으로부터의 시점은 별 쓸모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삼국지>를 문학의 보편적인 공간 안에 놓고 이야기하던 경향이 자취를 감추고 특수한 “지역문학” 혹은 “국민문학”의 범주 안에서 분석하는 주장에 의해 대체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모든 거장 소설가들이 도전하고 시도하는 필생의 기획으로서의 “<삼국지> 쓰기”나 아니면 보편적인 문학적 교양의 대상으로서의 <삼국지>가 있었다면, 지금 변화된 문학제도의 장은 <삼국지>를 지역문화적 텍스트로 재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전지구적인 문화의 공간에서 <삼국지> 역시 보편적인 문화적 교양으로부터 지역 문학의 한 예로 간주하려는 문학제도적 담론에 영향을 받고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최근 새로 옮겨진 황석영의 <삼국지>는 정통 중문학자와 한시 전문학자의 감수와 교정을 받았고, 또 번역의 전본으로 삼은 텍스트 역시 지역 내에서 검증받은 권위의 텍스트였음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사정이 어떻든 지금 <삼국지>를 수용하고 소비하는 독자들에게 문학(제도)적 장의 담론의 영향은 잦아들고 있다. 오히려 <삼국지>를 매력적인 독서의 대상으로 선택한 독자들에게 그것은 부차적인 소비의 기준으로 동원될 뿐이다(기왕 읽어야할 <삼국지>라면 누가 번역한 텍스트를 고를 것인가. 이런 단계에서나 <삼국지>를 둘러싼 문학비평적인 평가가 소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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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문학계간지 [Para21]의 2003년 가을호에 실린 글입니다.

대중문화로서의 트렌드 혹은 트렌드로서의 대중문화

(문화방해운동 cultural jamming)의 전위인 미국의 록밴드 네거티브랜드의 앨범 표지)
지식인이나 문화비평가가 시대정신을 대변하고 문화나 문명의 위기를 고발한다는 생각은 어느덧 맥추지 못하게 된지 오래이다. 그들이 맡아하던 역할은 나오미 클라인이 <노로고>라는 책에서 “멋 사냥꾼”이라고 부른 시장조사자들이 떠맡고 있다. 그들은 통신원과 포토저널리스트를 동원하여 청소년들이 모여있는 게토를 누비고 그들의 은밀한 언어 안에 깃들어있는 성향과 감수성을 파악한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소비자 욕구 조사의 거대한 정량기법의 사회통계를 비웃으며 이들은 도시의 인류학자들이 되어 민속지를 쓴다. 과포화된 미디어,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열광적인 정보통신의 네트워크 안에서 우리는 불확실성에 사로잡혀 있다. 시대의 풍경은 갈수록 모호해지고 흐릿해지지만, 다행히 우리는 조각보처럼 기워진 세계의 이미지를 가까스로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시장조사자들과 트렌드 연구자들 그리고 미래예측가들의 덕택이다.
이미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미래생활사전>이나 <클릭 미래 속으로>의 저자이고 조금은 섬뜩하지만 우리 시대의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예언가의 명성을 얻은 페이스팝콘을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 혹은 청소년 시장을 대상으로 한 마케팅의 기상예보관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스푸트니크”라는 회사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이들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마케터 혹은 트렌드 분석가의 모습과 다르다. 그들은 상품의 판매를 위한 아이디어의 제공자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문화분석가이기도 하다. 이는 문화와 경제의 구분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한 단면을 반영한다. 상품은 더 이상 제조품이 아니라 정보와 상징, 기호(sign)가 되어버렸다는 주장은 이미 하나의 상식이 되었다. 나아가 “무게 없는 경제”, “무형의(intangible) 경제”란 용어들은 유행어가 되었다. 상품의 세계는 곧 문화의 세계이고 상품의 판매는 물질적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욕망과 환상의 소비를 위해 이뤄진다.
결국 우리는 트렌드 분석가야말로 우리 시대의 대중문화의 분석가 혹은 시대정신을 분별하고 제시하는 인물이란 인상을 떨치기 어렵다. 노르베르트 볼츠와 다비트 보스하르트란 독일의 문화이론가 겸 트렌드 연구자들은 천연덕스레 트렌드란 “문명 속에 깃들어있는 의례”라고 정의한다. 이 알쏭달쏭한 이야기는 트렌드와 유행의 차이, 또한 트렌드와 사회적 법칙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하여 제안된 것으로 보인다. 유행이란 이미 이뤄진 선택이고 사물 혹은 상품 그 자체이다. 이를테면 남성용 색조화장품은 유행이지만 “메트로섹슈얼”이라는 현상은 트렌드이다. 우리는 메트로섹슈얼이란 트렌드에 따라 남성용 화장품은 물론 새로운 티비 프로그램과 팝 스타, 출판 아이템, 패션 디자인, 장신구 나아가 의료서비스와 자동차 설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행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트렌드는 곧 어떤 유행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습성, 행위의 경향, 심미적인 태도를 아우르는 것이란 뜻이 된다. 우리는 트렌드란 개념에 근접한 어떤 또다른 용어를 이미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라이프스타일 또는 생활양식이란 말이다. 틈새시장과 라이프스타일 마케팅이라는 후기 자본주의의 경제적 활동의 핵심적인 특성은 곧 제조업과 서비스업을 분간하기 어려운 우리 시대의 경제활동을 잘 보여준다. 이미 국내의 어떤 대기업은 자기네를 생활문화기업이라고 명명하였다. 감량경영과 리엔지니어링, 아웃소싱, 유연화, 생산의 정보화같은 말이 범람한지 십여년이 지난 후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상품의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상품의 진열은 문화의 박람회로 바뀌었다.
한편 트렌드는 사회 법칙과도 다르다.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규제된 행위의 규칙을 가리키는 사회 법칙과 달리 트렌드는 매우 우연적이고 자의적인 행위의 문법을 가리킨다. 트렌드란 이미 주어진 규칙에 따라 이뤄지는 행위가 아니라 일련의 연속적으로 행위가 행위기 이어짐으로써 행위 방식과 선택이 결정됨을 가리킨다. 트렌드란 이미 결정된 규칙이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행위들의 시리즈이고 그를 통해 만들어지는 일종의 관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한 행위에 다른 행위가 덧붙여지고 그 행위에 대한 외부의 반응이 추가되고 내면화되면서 또 다음의 행위는 전개된다. 다음에 무슨 행위가 벌어질 것인가는 행위자의 의도, 행위자의 등뒤에서 그를 지배하는 규칙이 아닌 것이다. 물론 그것은 무질서한 것이 아니다. 행위가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반복성과 상대적인 일관성이 결국 행위를 규제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트렌드란 일종의 경향이다(프랑스의 사회학자는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문화를 특정한 심미적인 성향의 체계로 분석하며 아비투스(habitus)란 개념을 제안한다).
예를 들어 보자. 누군가 홍대 앞에서 자신이 흠모하는 영국의 펑크 밴드를 카피하는 연주를 시작하였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부르고 그들의 행위를 해석하기 위해 인디 음악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거나 빌려쓰게 되고, 다시 그것은 인디 음악이라는 일련의 성향을 만들어낸다. 물론 여기에서 우리는 인디 음악의 정신을 반영하고 집행하는 연주자들의 묶음으로 인디 음악을 정의해서는 안된다. 인디 음악은 우발적으로 뒤섞이고 또한 외부의 반응을 수용하거나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에 재투입하면서 만들어지는 연속적인 돌연변이일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진짜 인디 음악과 “짝퉁” 인디 음악을 나누고 가늠하려는 시도가 언제나 반복되겠지만 그런다고 자신을 순수한 인디 음악으로 정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인디 음악의 연주가 되는 것은 인디 음악의 ‘법’에 마침내 다가섬으로써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바로 인디 음악이란 무엇인가를 해석해 냄으로써 어느덧 나는 인디 음악의 연주자가 된다. 줄여 말한다면 해석자와 해석하는 대상의 거리는 없다. 마치 과학철학에서 관찰자와 관찰 대상을 순수하게 분리시켜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트렌드 역시 이렇게 볼 수 있다. 우리는 트렌드를 묘사할 수 있지만 분석할 수는 없다. 아니 그것이 트렌드로 묘사하는 순간 사람들은 그것을 에워싸고 다양한 말을 쏟아내고 행위를 추가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생태계를 만들어 낸다.
문화 산업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수십 년 간 대중 문화의 기류 역시 트렌드의 정착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조용필과 서태지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우리는 조용필을 위대한 대중음악가로 기억한다. 대중음악의 가인(歌人)이자 장인 혹은 거장으로서의 조용필과 신세대 문화의 아이돌로서의 서태지 사이에는 대중음악가란 점을 빼곤 일치하는 점이 없다. 그 사이 한국 대중음악의 정체성이 근본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미소년 보이밴드의 댄스뮤직 일색의 대중음악을 향한 볼멘 푸념과 저항은 음악 문화의 다양성을 해친다는 명분을 들먹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음악을 에워싸고 있는 변화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주장일 것이다. 물론 대중음악의 생산이 소규모의 고도로 분업화되고 전문화된 기획사의 시스템을 통해 제작되고 거대 자본에 의해 집중된 배급 체제와 미디어를 통해 유통된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의 영화 산업의 구조를 보나 음반 산업의 구조를 보나 이는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화산업의 구조가 획일화된 대중 소비자의 시대와 얼마나 다른가는 서태지를 통해 입증된다.
그러나 멀리 거슬러갈 것도 없다. 지난 해 가장 뜬 “비”라는 뮤지션을 생각해보자. 그는 요즘 뜨고있다는 새로운 트렌드인 “메트로섹슈얼”의 전형으로 평가받는다. 남성적이면서 또한 동시에 여성적인 그의 외모와 인상, 분위기. 시중의 평가는 그가 메트로섹슈얼이라는 컨셉의 진정한 재현이라고 한결같이 이야기한다. “꽃미남”의 느끼한 감상적 호소와도 거리를 두고 촌스럽고 멍청한 진짜 사나이와도 무관한 그의 이미지는 물론 제작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그저 진부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것은 HOT와 GOD 모두 분발했던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거대한 자본을 거느린 기업의 생산물이 아니라 작은 기획사의 용의주도한 기획과 마케팅을 통해 시장에 나왔다. “비”를 기획한 회사는 그를 정보경제의 콘텐츠로 가공하고 판매하는데 발군의 능력을 발휘한다고 한다. 그의 음반은 디지털콘텐츠의 쿠폰을 내장하고 있고, 그의 초상은 상품권으로 판매되고 있으며, 그의 뮤직비디오는 간접광고기법을 도입하여 여러 브랜드와 윈윈 전략을 구사한다. 그는 모 치킨회사의 광고에 출연하여 “야마카시”란 익스트림스포츠를 즐기는 분위기를 선사하고 브랜드를 감성화한다. 그의 음반에는 “비의 1일 매니저되기”와 “리니지 무료이용권’이 들어있어 고객관계관리, 멋진 말로 관계 마케팅을 솔선한다. 그렇다면 그는 두루두루 트렌드의 첨단을 걷는다. 그는 정보통신산업의 새로운 변화와 함께 하고 섹슈얼리티와 몸을 둘러싼 우리 시대의 트렌드와 함께 한다.
이처럼 현재의 문화산업은 세분된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혹은 트렌드의 방향에 따라 틈새 시장의 골목을 누비며 제작되고 마케팅된다. 역시 요즘 유행하고 있는 표현처럼 “비”는 뮤지션이 아니라 “콘텐츠”인 것이다. 댄스 음악 일색의 뮤직 비디오형 가수들의 음악과의 차별화 덕택에 라이브 공연이 자신을 유지하고 인디 음악이라는 주변적인 음악 산업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나름의 문화 자본을 가진 부족화된 청중 집단과 만나게 된다. 조용필이라는 대중음악가가 딴따라에서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독창적이고 천재적인 개인, 영웅으로서의 예술가라는 미학적인 신념을 통해 대중음악을 향유하던 시대가 본격적으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청취자로서 FM 음악방송을 열심히 듣고 연주회에 참여하는 전 시대의 대중음악의 향유자들과 지금의 대중음악의 수용자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서태지가 대표하듯이 대중음악은 곧 그 시대를 향한 태도라는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의 차원까지 상징한다. 나와 대중음악가 사이에 연주자와 수용자 사이의 즉 저자와 독자 사이의 거리가 사라지고 서태지는 우리가 된다. 물론 우리는 이를 밥 딜런, 비틀즈와 마돈나, 에미넴의 차이로 풀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록큰롤의 천재적인 아티스트였으며 반항적인 시대의 영혼이었던 비틀즈, 밥 딜런과 달리 마돈나와 에미넴은 동시대를 들여다보는 거울 그 자체이다. 따라서 우리는 록큰롤의 모차르트로 비틀즈를 부른 것처럼 마돈나와 에미넴을 부르지 않는다. 그들은 요즘의 트렌드 분석가의 표현을 빌자면 신화의 제조자이고 생활양식의 창조자들이며 시대의 이야기꾼이고 삶의 연출자이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 대한 가장 손쉬운 비판은 그것이 진정한 체험과 쾌락으로부터 우리를 소외시키고 문화산업이 만들어낸 조작된 욕망에 길들인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경제와 문화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간격이 있다는 가정을 깔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한 이들은 문화산업이 개성의 표현이라는 교환될 수 없는 고유한 삶의 세계를 상품이라는 보편적인 교환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은 이른바 “신경제”의 시대로 불리는 후기 자본주의에서는 계속 설득력을 지니기 어렵다. 따라서 트렌드란 개념이 난데없이 부상하고 그에 관련된 책들이 날개 돋힌 듯 팔리는 현상도 이해할 수 있다. 과연 시장에서 어떤 상품이 잘 팔릴 것인가를 예상하고 소비자의 욕구를 조사하던 시대의 트렌드는 우리 시대의 트렌드가 아니다. 우리 시대의 트렌드란 결국 문화이다. 그렇다면 대중문화 역시 다르지 않다.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의 부상은 새로운 상품 세계의 등장이다. 그렇지만 우리를 따로 분간할 수 없을 것이다. 곧 문화는 상품이고 상품은 문화인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집약하는 말이 있다면 트렌드일 것이다. 쿨(c0ol)에 관한 강박증을 생각해보자. 청소년 하위문화와 대항 문화의 레퍼토리를 모방하고 전용한 이 희대의 트렌드는 곧 상품의 세계이자 문화적 관례의 세계이다. 그것은 의류와 가방, 음반에서부터 심지어 마약과 윤리적 태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망라한다. 그리고 그것은 광고와 마케팅, 홍보에서 교육과 사회운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펑크가 룩이 되고, 그런지가 패션이 되는 세계, 그것은 또한 트렌드의 세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