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힌 여인>. 볼 수 없는 것을 위하여

샹탈 아커만의 <갇힌 여인>은 보는 이를 찍어누른다. 이 영화가 압도적인 이유는 뭘까. 아마 여러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가 나를 숨죽이게 했던 것은 아마 가시성의 유혹에 반대하는 혹은 그것과 집요하게 싸우는 의지에 있지 않았을까 싶다. 알다시피 영화는 볼 수 없는 것을 가시화한다. 촌스럽게 말해 우리는 해를 볼 수 있지만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영화는 “해가 뜬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점은 우리가 고전 허리우드 영화를 볼 때이다. 적어도 내게 그 영화들의 경이로운 업적은 바로 그것이 “사랑한다”, “두렵다”, “즐겁다”를 보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정동(情動)에 속하는 피사체, 그에 속하는 본래적인 재현의 대상은 없다. 그러나 고전 허리우드 영화는 그것을 보여준다. 영화는 그런 점에서 보여주려는 욕망에 항시 조정되어 왔다.
샹탈 아커만의 영화는 보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아니 볼 수 없음을 보여준다고 말해야 더 옳지 않을까. 물론 우리는 그 영화의 줄거리를 요약할 때 그러하듯이, 보이는 것, 보았던 것에 관하여 말할 수 있다. 이를테면 “부유한, 어쩌면 대단한 계급 출신인 듯한 남자 주인공 시몬은 자신의 저택에서 할머니와 하녀,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아리안느와 함께 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연인 아리안느가 여자 친구인 앙드레를 사랑한다고 믿는다. 그녀가 레즈비언임을 확신하는 그는 번민을 거듭하고 결국 그녀와 결별을 결심한다”, 운운. 물론 이것은 우리가 보았던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볼 수 없는 것으로 인하여 비롯된 것일 뿐이다. 이 영화의 충격적인 결말은 그런 점에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을 여전히 유일하게 사랑한다는 말에 마음을 바꾼 주인공은, 연인 아리안느와 파리로 돌아오는 길에 어느 호텔에 묵는다. 그리고 우리는 불길한 마음을 지우지 못한 채 수영을 하겠다고 떠나는 아리안느를 배웅한다. 그들을 위한 식사가 배달되고, 사납게 바람이 들이치는 창문을 닫고, 샴페인을 따서 마시는 롱테이크 속에서, 우리는 불길하게 고조되는 음악으로 인해 짓눌린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보는 것은 사실 화면이 전달하는 정보가 아니라 볼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곧이어 우리는 갑자기 돌연 어떤 것에 생각이 미쳐 바다로 뛰어드는 시몬의 모습과 담요에 싸여 공포에 질린 낯으로 모터 보트에 실린 채 먼 바다로부터 화면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그의 모습을 본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불가해한 타인인 자신의 연인을 이해하기 위하여 스스로 고통스럽게 만들어낸 ‘이론’이 있지만 그것은 결국 실패한다. 그녀는 결국 자신이 만들어내는 모든 표상 바깥에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우리에게 볼 수 없는 것과 끊임없이 대면하는 인물로, 자신이 보았다고 믿은 것에 의하여 파국을 초래한 자가 되고 만다.
히치코크의 어떤 영화에서 보았을 법한 이 장면에서, 그러나 우리는 히치코크와는 사뭇 다른 무엇을 본다. 히치코크가 어쨌든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으로 변용하는 능력을 보여준다면, 아커만은 정반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아커만의 이 영화가 매우 반시대적인 영화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 영화가 반시대적인 영화란 점은 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려는 지금의 세계와 절대적으로 반목하기 때문이다. 얼핏 생각하기에 이 영화는 낭만적인 사랑의 신화에 깃들어 있는 연인의 본래적인 모습, 즉 자신이 사랑한 그 혹은 그녀가 자신의 나르시시즘적인 투사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하여 자신이 끊임없이 공들여 완성했던 자신의 연인의 모습과 근본적으로 어긋난 연인의 정체와 직면하게 되었을 때의 충격, 자신의 연인의 절대적인 이타성과 해후하였을 때의 경악을 고통스럽게 보여주는 영화일 뿐이라고 코웃음 치며 깎아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알고 있던 그 혹은 그녀와 절대 다른 타인이었던 그 혹은 그녀에 관한, 시시하고 진부한 이야기. 그러나 나는 아커만의 영화가 그런 점에 머물지 않는다고 믿는다. 나의 상상적인 인상 속에 있는 그 혹은 그녀는 어쨌거나 보여진다. 그러나 <갇힌 여인>은 집요하게 그것을 볼 수 없는 것으로 고집한다.
그 고집은 분명 반시대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영화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동시대적인 영화로 꼽을 수 있는 것과 대조한다면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시대적인 영화의 범례로서 나는 단연 하네케의 <피아니스트>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 역시 우리 시대의 사랑에 대하여 저돌적인 비판과 공격을 퍼붓는다. 거의 모든 것이 가능해진 시대, 금기의 대상이 되었던 모든 섹스를 마음껏 시장에서 살 수 있는 시대, 아시아적 가치를 자랑하는 유교적(!) 사회의 심야 케이블텔레비전에서 반신불수인 남편과 오르가즘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실물 크기의 딜도를 사용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여주는 사회.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피아니스트>는 근본적인 박탈을 이야기한다. 그 영화에서 우리는 견딜 수 없이 비루한 모습으로 심야 드라이브-인 극장에서 자신의 욕정을 발산하며 오줌을 싸는 여주인공을 본다. 우리는 그 영화에서 그 무엇으로도 충족될 수 없는 근본적인 공백을 채우기 위하여 자신의 허벅지를 칼로 베고 혈흔을 보고서야 안도하는 여주인공을 본다. 이 모두는 고통스럽다. 나아가 우리를 미칠 지경에 이를 만큼 우울하게 만들어버린다.
이는 우리가 누리는 쾌락의 진실, 그것이 허위에 불과하다는 체념적인 절망감을 던져주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녀가 보여주는 몸짓은 갖은 해괴한 성적 유희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박탈당한 듯이 느껴지는 쾌락의 부재를 ‘보여준다’. 우리는 금지를 거부하며 수많은 오르가즘과 관계의 형태를 찾았지만 우리가 만나게 된 것은 금지의 뒤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눈뜸이다. 물론 <피아니스트>는 그런 자각으로부터 현재의 파국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낸다. 그것은 포스트모던 궁정식 사랑이라 할 법한 트릭이다. 모든 쾌락의 너머, 모든 현실적인 이득 저편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가치로 추켜올려진 타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이 영화가 보여주었던 반성, 그 뒤에 찾을 수 있는 다양한 선택의 종류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처럼 궁정식 사랑의 트릭에 빠져 타인을 접근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자신의 쾌락을 지연시키는 잔꾀를 쓰는 것 역시 선택의 한 가지이다. 우리는 그말고도 다른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우엘벡의 소설인 <소립자>같은 것에서 이미 두루 볼 수 있었다.
문제는 이런 선택을 가능케 했던 반성, 다시 말해 우리 시대의 성적 쾌락을 향한 반성에 있다. 분명히 역사적인 과거를 갖고 있는, 즉 성혁명 이후의 관용적인 섹스의 시대에 대한 반성이야말로 더 중요하다. 그리고 그 반성의 몸짓은 포르노그라피가 극대화하였던 “이것이 쾌락이다”(알다시피 포르노산업의 핵심적인 코드 가운데 하나는 사정이 반드시 질과 항문 외부에서 이뤄져야하며 그것을 포르노의 콘텍스트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를 “이것은 쾌락이 아니다”로 뒤집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피아니스트>의 주인공에게서 본다. 절대적으로 흥분이 고조된 쾌감의 장면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너무나 적나라하고 징그럽고 더러운 한 점의 행위이다. 따라서 그 장면들에서 보는 것은 없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거의 모든 것을 본 셈이 된다. 쾌락의 물질적인 표상으로서의 포르노로부터 한걸음 더 나아가 쾌락이 추구하였던 금지 뒤편의 공백, 그리고 그것의 표현으로서 더럽고 우울한 동물적인 행위까지. 따라서 <피아니스트>는 보여준다. “그래, 없는 것은 이것이다. 부재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보여지는 그것이다.”
그러나 본다는 것과 볼 수 없다는 것의 차이가 무엇 그리 대단한 것인가. 그러나 나는 그것이 대단하며 근본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 시대의 질식할 듯한 윤리, 당신은 왜 당신이 누릴 수 있는 쾌락을 마다하며, 그것을 금지하는 권위에 복종하는 쪼다같은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공갈협박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볼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알 수 없다는 것이기에 자신을 무지로 몰아넣는 것이 아니다. 이제 적나라한 섹스가 상연되는 모습을 볼 때 우리가 얻어내는 것은 고작 역겨움과 지루함 뿐이다. 거의 모든 것을 보여줄 때 우리가 보는 것은 무언가 보여주는 것을 상실한 모습이다. 타인의 낯섬, 그의 근본적인 매력은 바로 그것의 위험스럽고 고통스러운 낯섬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을 가시화하고자 한다. 낯선 타인과의 만남이 항상 자신에게 던지는 거북함과 불편함, 차라리 폭력이라고 불러야 할 그것을 우리는 견디지 못한다.
알다시피 우리 사회에서 가장 나쁜 악인은 어떤 모임과 친교의 자리에서 폭력적인 사람이다. 자신이 그리고 있는 상상적인 타인이 아닐 때, 그가 낯설고 불편할 때, 우리는 그를 서슴없이 폭력적이라고 비난한다. 그 가운데서 가장 비극적이고 애매한 예는 무엇보다 성폭력일 것이다. 위험과 오해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우리는 그것이 자신의 상상적 타자가 아니었던 이를 비난하기 위해 마련된 이름인 것인지 아니면 불균등한 권력관계에 무지한 채 무구한 본능과 욕구란 핑계 속에서 저질러졌던 착취를 고발하는 이름인 것이지, 자꾸만 헷갈려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그것은 이런 변화가 볼 수 없는 것을 가시화하려는 충동에 끈질기게 사로잡혀있다는 것이다. 타인은 내게 완전히 드러나야 한다는 믿음, 온전히 가시적이어야 한다는 믿음. 그런 믿음은 타인의 폭력을 감당하지 않으려는, 다시 말하자면 만남 자체를 불구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빚어낼 뿐이다. 모든 것이 드러나도록 종용받은 타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만남의 경이를 잃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의례와 상품들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대신하여 보여주게 될 것이다. 발렌타인데이에서부터 크리스마스까지, 우리는 자신을 대신하여 자신을 보여줄 수많은 이벤트를 찾는다. 그리하여 이제 만남은 언제나 둘 사이에 벌어지는 기적이 아니라 셋이서 만나는 일상적인 소비행위의 일종이 되어갈지 모른다. 이를테면 “커플매니저”라는 놀라운 직업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좋은 만남을 매개하는 우리 시대의 3자 아닌가. 그들은 좋은 만남의 비결을 알고 있고 우리는 그들의 조언과 지시대로 만남의 근본적인 폭력성을 완전히 제거한 채 만날 것이다. 그들에게 물어보라. 당신이 보여지기 위해 답해야할 항목이 몇 개나 되는지.
컬티즌에 기고한 글

한 줌의 도덕 – 자선의 문화를 넘어

올 해의 스타, 장애인
연말이면 잊지 않고 찾아오는 문화적 의례가 있다. 이를테면 “올 해의 무엇” 등으로 시작하는 성대하고 시끌벅적한 잔치이다. 올 해의 뮤지션에서부터 올 해의 히트 상품에 이르기까지, 한 해를 빛낸 무엇을 뽑아 그것을 시상하고 축하하는 시끌벅적한 이벤트는, 그 즈음의 들뜬 기분을 더욱 돋워준다. 이렇게 한 해가 저물거나 시작되는 시점에 마련되는 문화적 의례들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의례의 가장 중요한 차원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믿음, 우리가 공통적인 삶의 세계에 속하여 있다는 생각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연말이면 TV 채널 어디에서나 마주치는 이런저런 시상식에서든, 아니면 연초의 주간지 표지에서 쉽사리 마주치는 올 해의 인물 따위의 기사에서든, 우리가 마주치는 것은 바로 그런 우리의 흩어진 삶을 묶어주는 사회의 결속 그리고 그 결속을 표현하는 상징적 행위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중요한 의례의 하나인 연말연시의 이벤트가 가리키는 “우리의 세계”는 무엇일까. 그것을 그려보기 위해 조금은 삐뚜름한 상상을 펼쳐보고 싶다. 이를테면 “2005년 올 해의 한국인”은 누구이며, 그는 어떤 세상을 보여주는 것일까. 나는 아마 2005년 올 해의 인물로 꼽혀야 마땅할 인물은 단연 장애인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해 영화 <말아톤>의 성공이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주인공이었으면서도 드라마의 배우와 진배없는 인기를 누렸고 또한 그 덕에 스타와 유사한 대접을 받았던 어느 정신지체장애인 수영선수를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 이뿐이겠는가. 저녁 시간대의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면 우리는 거의 빠짐없이 장애인의 모습과 마주칠 수 있다. 자신의 신체적 혹은 정신적 장애의 역경을 극복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진력하는 장애인들의 삶은 뭉클하고 또한 교훈적이다. 사지가 없으면서도 그 누구보다 밝은 낯으로 살아가는 어린 아이에서부터 손가락 네 개만으로도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는 어린 피아니스트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변엔 장애인을 향한 연민과 배려를 이야기하는 볼거리들이 넘쳐난다.
안타까운 처지에 놓인 불행한 사람을 향한 우리의 억누를 수 없는 연민은 분명 가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측은지심”이 우리의 순수한 본능적 감상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라는 점 역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불행한 삶을 향한 우리의 눈길은 그 불행을 어떻게든 사회의 정의와 관련시켜보려는 생각을 가로막기 때문에 위험하다. 나아가 그것은 사회의 불평등을 향해야 할 관심을 “자선의 문화”라 부를 만한 것으로 모두 휩쓸어버리고 만다는 점에서 마땅히 해롭다고 여겨야 한다.

“자선의 문화”에서 벗어나자
무엇보다 장애인이 불행한 삶을 집약하는 표본으로 부상하게 된 연유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자. 왜 장애인은 차별과 배제를 삶을 대표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 사회적 약자란 개념이 전에 없이 커다란 호소력을 떨치게 된 상황을 가리킨다. 물론 조금만 주의하면 알 수 있겠지만 사회적 약자란 용어는 앞선 시대에 그와 대응하는 자리에 있던 어떤 개념을 대신하거나 교체하는 것이다. 그것은 흔히 “억압받는 이” 혹은 “민중”같은 말에 해당한다. 이를테면 한국 사회에서 많은 이들이 음울한 역사적 시대로 기억하는 박정희 시대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난폭하고 잔인했던 반공독재의 시대에 민중은 금기이거나 불온한 말이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 말은 전연 감금될 수 없었다. 오히려 거꾸로 그 말은 뒤집혀진 채 혹은 자리바꿈을 하여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번영하는 국민”같은 말은 언제나 “민중” 혹은 “억압받는 이”라는 말의 이면이자 혹은 그에 대한 대꾸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억압받는 민중은 번영하는 국민이란 말로 바꿔치기되어 체제의 말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민중과 같은 불온한 말은 단순히 억압받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연상시키는 삶의 세계를, 사회적 통치의 질서 안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어떤 말은 단순히 사라지고 지워지지 않고 그것을 반영하는 다른 개념 속에서 다시금 등장한다.
그렇다면 사회적 약자란 개념이 새로운 사회체제의 등장을 알리고 또한 그것이 관리하고자 하는 사회적 삶을 가리킨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변은 매우 쉬어 보인다. 그것은 간단히 신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신자유주의란 정치적 질서나 경제적 제도의 체계를 가리키는 딱딱한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삶을 이해하고 그려내는 상상의 규칙을 가리킨다. 그런 상상의 규칙으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자신이 만들어가는 사회를 정당화하고 지지하는 이념이나 가치가 아니다. 신자유주의란 것도 자신이 낳는 불행과 폐해에 대하여 극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또 그것을 해결하기위한 대안을 내놓는다. 그런 점에서 신자유주의가 내놓은 여러 가지 대안 가운데 하나가 “인권의 문화”나 “자선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장애인은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최대의 노력을 발휘하고 자신의 욕구를 실현하기 위하여 최선의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을 대표한다. 무엇보다 장애인은 사회적 효과에서 벗어나 자신의 자연스런 삶, 자신의 생물학적인 운명(장애)과 대면하고 있을 뿐인 사람을 가리킬 것이다. 따라서 장애인은 단순히 신체적 능력의 차이를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장애인이란 자신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분투하는 개인들의 세계를 대표한다. 이런 세계에서 가난한 이나 차별받는 이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효과가 아니라 자신들의 책임과 자유를 짊어진 낱낱의 개인이 된다. 그리고 그 개인에게 자신의 삶은 오직 자신이 돌보고 관리해야 하는 일로 된다. 나아가 불행한 이들의 삶을 나아지게 만드는 일은 이제 역시 개인들의 서로를 향한 배려와 존중으로 둔갑한다. 그리고 자선의 문화란 바로 평등의 정치가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새로운 대용품이 되어버린다.
세계 최대의 투기전문가가 세계 최대의 자선단체를 이끌고 신경제를 대표하는 마이크로소프트는 미국 최대의 공익단체이기도 하다. 사회적 정의를 고민하고 발견하는 자리에 들어선 것은 자신의 행복과 자유를 위하여 스스로 책임지는 개인들의 눈물겨운 현장이다. 그렇지만 그 현장에서 구경꾼이 되어 평범한 신파적 감정에 홀려 눈물을 쏟고 있을 때, 놀라운 것은 그런 불행을 낳는 사회는 더욱 의기양양하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자선의 문화란 본능적 감상이 아니라 제조된 감정이다. 또한 그것은 새로운 사회 체제가 자신을 지탱하고 자신의 갈등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도록 하는 좋은 탈출구일 뿐인 셈이다.
– 어느 기관의 사보에 기고한 글

정치와 사회 – 좌파 정치의 근본적인 재구성을 위한 물음

포스트정치학의 시대, 민생정치의 시대
이른바 “제국”을 강타한 허리케인의 참화 앞에서 부시 정권은 매우 수치스런 상황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이는 단지 허리케인이 낳은 재난을 효과적으로 예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능하게 대처하고 말았던 통치의 과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강타하고 난 뒤 현장에서 전해진 메시지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그것은 이라크 전쟁과의 대조 속에서 파악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지난 주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벌어진 반이라크전 시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구호는 “무기 대신에 제방을” 이었다. 무엇보다 츠나미가 급습하여 참혹한 재해를 초래했던 태국과 인도같은 나라를 생각해 보라. 그곳에서 벌어진 침착하고 순조로운 복구와 구호의 과정과는 달리 미국에서 전해진 풍경은 어떤 것이었던가. 이재민들이 몰려있던 “슈퍼돔”에서의 약탈과 강간, 그리고 폭력으로 얼룩진 참담한 사태는 제국의 이면이자 그것의 대가인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제 나라 국민의 살림살이조차 변변히 챙기지 못한 채 더러운 전쟁을 일삼은 미국 정부의 행적은 손쉬운 신자유주의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과연 뉴올리언스는 이라크전의 이면인가. 이라크전은 과연 안전과 복지라는 사회적 이해를 도외시한 반사회적인 행위이기에 규탄받아야 하는가. “신국제질서”를 위한 더러운 전쟁은 공공복지의 삭감, 재해와 위험의 방치, 안전의 포기, 실업과 빈곤의 양산이라는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던가. 이에 대한 우리의 답변은 당연히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대답을 내놓을 때 우리는 얼마간 단서를 달 필요가 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비판을 보다 사회적 삶에 충실하지 못한 정치 체계로 환원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가 단순히 통치의 잘못이나 이해의 편파성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정치의 위기가 아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신자유주의는 정치 자체의 위기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사회적 삶과 정치적 삶
적어도 동구권의 붕괴를 정점으로 좌파 정치의 전반적인 위기가 일반화된 이래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대안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로 이른바 본연의 정치로 알려진 정치, 즉 현재의 사회적 삶을 구조화하는 원칙과 그 비판으로서의 정치란 가정을 거부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꼽을 수 있다. 역사의 종말이란 이름으로 선언된 것이든 아니면 거대 서사의 몰락이란 이름으로 주장된 것이든 그런 주장의 내용은 간단하다. 한마디로 사회적 삶을 규제하는 초월적인 원리로서의 정치라는 가정은 비실재적인 것일뿐더러 또한 위험하기까지 하다는 것이었다. 일례로 현실 사회주의가 초월적인 정치적 이념으로 새로운 세계를 기획하려던 시도는 결국 잔인하고 황폐한 전체주의의 악몽을 낳았을 뿐이라는 주장을 우리는 익히 들어왔다. 이런 생각의 귀결은 한마디로 줄여 말하자면 “정치의 사회로의 흡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우리는 “현실 정치(Real Politik)” 혹은 한국 사회에서 흔히 하는 말로 “민생정치”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주장은 사회를 규제하는 초월적인 항으로서의 정치를 거부하라는 주장이며 사회의 다양한 실제적인 삶, 즉 인민 혹은 시민의 실제적인 욕구와 이해, 삶의 질 혹은 안녕을 살피고 관리하는 행위로서의 정치만이 존재할 수 있을 뿐이라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많은 좌파들은 이에 동의하였으며 이의 가장 세련된 형태는 이른바 “제3의 길” 혹은 “참여정부” 따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개념을 동원하든 그것은 사실상 정치의 소멸을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포스트정치의 시대에 살고 있다 말할 수 있다. 사회의 실제적 삶을 관리하는 행위로서의 정치란 사실상 행정 혹은 푸코의 표현을 빌자면 통치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정치의 사회로의 완전한 흡수에 소극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가정할 수 있다. 이는 부쩍 붐을 일으키고 있는 시민권의 담론이나 공중 혹은 주권성(sovereignty)의 담론을 상기하면 될 것이다. 이런 류의 입장이 전개하는 논리를 예시한다면 이렇지 않을까. 예컨대 이주노동자의 삶을 구호하고 그들의 약자 혹은 희생자로서의 지위를 지원하기 위한 수많은 “사회적” 기부와 운동을 생각해보자. 그렇지만 이주노동자의 “사회적 권리”를 규정하고 그들의 실제적인 삶의 세부적 권리와 매개하는 것이 “정치적 권리”라는 것임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아부 그라이브와 관타나모 기지에서 서슴없이 능욕과 고문의 대상이 되었던 이라크인과 일전 장갑차를 동원하여 수많은 살상을 자행하며 구출되었던 영국군 병사 사이에 놓인 차이는 무엇일까. 이는 몰정치적인 생명체로서의 삶과 주권적인 주체로서의 국민이 누리는 정치적 삶 사이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삶”과 “사회적 삶”(다시 푸코의 말을 빌자면 행복, 건강, 장수, 안전, 부를 추구하는 생물학적인 삶) 사이에 놓인 근본적인 차이를 지운다는 것은 곧 사회적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궁지에 머무르도록 만들어 버린다. 따라서 정치는 언제나 사회로 환원할 수 없는 이타성의 영역에 속한다. 따라서 두 번째의 입장을 무리를 무릅쓰고 요약하자면 본연의 정치를 사회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렌트 식으로 표현하여 (욕구의) 필연성의 영역에 해당하는 사회와 그로부터 구분되는 정치의 영역은 각각 무엇일까. 물론 이런 물음에 대한 답변은 이미 주어져 있다. 그것은 사적인 삶의 총체로서의 사회와 그것에 것은 결국 국가나 주권성, 시민권 등으로 집약되는 정치의 영역을 나누는 좌파 정치의 논의 안에서 스스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의 약점은 이미 자명하다. 사회적 삶으로 환원할 수 없는 정치적인 삶의 자율성과 이질성을 강조하지만 이런 입장은 정치를 곧 실체화하여 버린다. 여기에서 정치적인 삶의 공간이란 당연히 주권성이나 국가와 같은 기성의 정치 체계와 법률로 객관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우선 현실적으로도 지지하기 어렵게 되어있다. 국가의 소멸이나 위기를 주장하는 입장들이나 초국가적 주권성을 주장하는 입장들은 그런 정치적 공간의 위기와 한계를 고지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주장의 난점은 정치적인 삶의을 실체화하고 있다는데 머물지 않는다. 이런 입장은 암묵적으로 정치 자체의 소멸을 주장하는 길로 나아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근년 많은 좌파 이론가들이 칼 슈미트의 “예외상태”의 이론에 매혹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상적인 삶의 행정에 속한 삶이 “헐벗은 삶”이라면 그것과 다른 정치적인 삶은 무엇인가를 묻는 아감벤의 음울한주장이 선동적인 매력을 지니는 이유란 무엇일까. 어쩌면 그 이유는 이들이 정치 자체의 공간이란 불가능하다는 점을 비통하게 폭로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들은 각기 주권성의 근본적인 가능 조건으로서의 예외상태(슈미트), 주권성과 생물학적인 삶의 관리 사이의 구분불가능성(아감벤)을 역설한다. 이런 주장은 그저 주어져있는 삶의 상태를 가리키는 생명의 주체와 정치적 주체 혹은 시민적 주체 사이에 어떤 거리가 존재하지 않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아감벤이 근대 민주주의의 비밀은 곧 홀로코스트라는 무시무시한 선언을 제출할 때 우리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를 가르는 어떤 구분선도 불가능하다는 이런 선언은 결국 정치의 복원이 아닌 정치의 소멸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정치를 다시 사유한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런 곤경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정치를 사회로 흡수하거나 아니면 정치의 공간을 재실체화하거나 아니면 정치 자체의 불가능성이란 회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정치를 회복할 수 있는 대안은 없는 것일까. 이런 물음은 당연히 정치의 주체란 누구인가란 물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사회의 주체가 인구(푸코)이거나 가난한 이들(아렌트)이라면 그것과 구분되는 정치의 주체, 즉 민주주의의 주체로 널리 가정되어온 데모스(the demos)는 과연 누구인가. 그들은 시민인가? 인권의 주체인가? 다중인가? 물론 좌파 정치는 이 물음 앞에 아직 이렇다 할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관용적인 다문화주의적 자유주의가 정치를 대신하여 다양한 사회적 집단, 정체성의 집단들의 협상과 관용의 관계를 정치로 내놓을 때, 물론 정치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를 대신하여 공적인 영역의 회복과 강화, 전지구적인 시민권을 역설하는 입장 역시 보수적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아있는 대안은 바로 정치와 사회의 관계를 재사유하는 길 밖에 없다. 사회적 삶의 관리로 환원된 통치(police)로서의 포스트정치적 정치가 아니면서, 동시에 사회적 삶으로부터 해방되거나 분리된 정치 고유의 영역을 실체화하지 않으면서, 정치를 사유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에 이를 때 우리는 신자유주의 비판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연세대학교 대학원신문에 기고한 글

어느 폭력애호가 모임 회원의 자술서?

우리 시대의 악을 순수하게 증류한다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폭력이란 말로 모아지지 않을까. 학교폭력, 군대폭력, 성폭력, 가정폭력, 국가폭력… 폭력이라는 “자명한 악”에 대하여 반대한다는 것은 무모할뿐더러 미친 짓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우리는 아직도 폭력의 목록을 충분히 작성하지 못했다는 초조감에 어쩔 줄 모르는 듯하다. 그래서 끊임없이 폭력을 수색하고 적발하며 규탄하고 처벌한다. 그리고 반성한다. “왜 우리는 그토록 폭력에 무감각했던가, 왜 우리는 그토록 폭력에 휘둘렸던가”. 그러나 폭력이 악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인지 간단히 규정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서구의 내로라하는 철학자들이 그동안 그 비슷한 주장을 잇달아 내놓았다. 그들은 고통스럽게 그리고 장황하게, 폭력과 그것의 반대편에 속한 것, 즉 폭력이라는 독(毒)과 그것의 해독으로서의 법을 나누는 구분은 명확하게 결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폭력은 권력의 부산물, 겉으로 드러난 찌꺼끼일 뿐이라는 주장에 수긍할 수 있지만 우리는 폭력이라는 것이 불러일으키는 명징한 공포와 분노에 먼저 반응할 수밖에 없다. 구타, 고문, 살인, 대량학살 그리고 가스실. 과연 이보다 더 분명한 악이 어디 있을 수 있는가! 설령 그것이 자유와 민주주의, 그 어떤 이념의 이름으로 행사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에 저항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폭력 비판에 관하여 판단중지를 요구해야 한다. 법과 폭력의 동일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폭력과 대항폭력의 악순환적인 관계를 상기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단지 폭력 비판이 우리 시대의 정치적인 비판의 자리를 차지하고 종국에는 정치적 상상력을 삼켜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얼마 전 왁자지껄하게 논란을 불러일으킨 “일진회” 사건만 해도 그렇다. 왜 우리가 지금 그것을 새삼스럽게 우리 시대의 악의 화신으로 급상승시키며 근절할 대상으로 삼게 되었을까. 그러므로 조심스럽게 물어야 할 것이다. 과연 폭력이 자명한 악일까. 이런 물음이 절박한 이유는 분명하다. “폭력 비판”이 정치적 비판을 대신할 때 그것은 폭력을 구성하는 정치 자체를 시야에서 지우기 때문이다. 폭력 비판은 정치의 영도, 정치는 불가능하다는 순순한 자백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문제는 폭력 비판이 아니라 친절과 배려의 비판이라 해야 도리어 옳지 않을까. 사실 우리는 폭력의 정반대에 압도당해 있다. 그런 점에서 폭력 비판의 이면에 놓인 강박적인 상냥함의 명령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친절함 또는 배려의 말과 몸짓들이 우리를 질식할 듯한 기분에 몰아넣고 있기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에서부터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무개 님”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호의와 아량으로 가득 찬 말들에 푹 잠겨서 살고 있다. 소비자가 고객이 되었을 때, 근로자가 파트너가 되었을 때, 변태가 게이-시민이 되었을 때, 계집년이 여성이 되었을 때, 그 자리바꿈에 끼어있는 것은, 알다시피, 그냥 “친절” 뿐이다. 친절함의 무조건적인 분명함을 거부하기란 어렵다. 그렇지만 그것을 거부할 수 있다면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시대의 대중영화들, 예를 들어 <파이트 클럽>이나 <피아니스트>같은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흥미롭게도 폭력애호가들의 모습이다. <파이트클럽>의 “폭력애호가 모임”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모더니스트들의 탐미적인 폭력예찬과 전연 다른 것이다. 그들이 문명화된 질서 이전에 존재하는 삶의 생생한 실체로서의 폭력을 상상하였다면, 우리 시대의 대중영화에 등장하는 폭력은 “질서 너머의 세계”가 아니라 질서에 대한 확인이고 발견이다. 자신이 예속된 삶을 삶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상징화하는 것이 금지된 주체. 그 주체를 미치게 만드는 것은 당연히 시치미를 떼고 있는, 혹은 보이지 않는 권력의 질서일수밖에 없다. 지금 권력은 자신에게 반말을 지껄이라고, 서로 친구처럼 대하면서 지내자고 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방불케 한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의 모습은 자신의 권위를 벗어던진 아버지가 아니라 결국엔 더욱 잔인하게 권력을 즐기는 아버지에 불과하다.
따라서 폭력을 애타게 찾는 폭력애호가의 모임, 멍든 생생한 신체 속으로 돌아옴으로써, 자해적인 상처를 만들어냄으로써, 비로소 살아있다는 실감을 느끼는 주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아니 거꾸로 예찬해야 차라리 옳을 것이다. 그들은 예외적이고 병든 매저키스트가 아니라 삶 속으로 악착같이 들어가려는, 미치지 않기 위하여 발버둥치는, 온전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들이야말로 속박당한 삶을 증언하려는 의지를 굽히지 않고 건강한 히스테리를 감당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들은 친절과 존중이 홀연히 증발시켜버린 권력의 모습을 계속 불러내고, 스스로 피멍이 듦으로써 혹은 따뜻한 피의 온기를 느낌으로써 속박당한 삶의 현실을 스스로 창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윤리적인 악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아존중감”의 결여, “동기부여”의 빈곤, “자기주도성”의 박약이란 점을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폭력애호가들은 누구인가. 바로 그 모든 “시민의 덕”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들은 과연 누구이겠는가. 거의 불가능해져버린 저항을 어두운 지하실에서 펼쳐 보이는 가여운 저항의 유령들이 아니라면 그들은 누구인가.

어느 정신분석학자가 재치 있게 말한 바 있는 “디카페인된 세계”로서의 탈근대자본주의야 말로 이를 가리키는 것 아니었을까. 카페인 없는 커피, 니코틴 없는 담배, 접촉이 없는 가상섹스, 이 모든 쾌락의 몸짓은 폭력 없는 쾌락을 발견하려는 가련한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폭력 없는 권력에의 욕망과 모든 유해한 실체가 제거된 욕망은 어쩌면 같은 동전의 양면 아닐까. 폭력과 강제는 나쁜 것이므로, 사랑의 매조차 폭력이므로, 우리는 모든 장소에서 폭력을 추방하고자 분투하여 왔다. 평범한 실제 삶의 세계를 돌아보라. 그곳에서 권력을 상징화하는 모든 것들이 떨어져나간 채, 노동자는 파트너로, 학생은 고객으로, 통치받는 자는 능동적인 시민으로 평면화되어있다. 물론 권력은 바로 그곳에 있다. 학생을 벗처럼 대하라, 사원을 동반자로 대하라, 통치받는 사람을 능동적인 시민으로 대하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권력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때문이다. 복종은 이제 권력의 폭력과 강요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꺼운 마음과 자발적인 동기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는 것, 복종의 테크놀로지가 자기실현의 테크놀로지와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탈근대자본주의의 정치적 합리성이라면 당연히 폭력은 권력이 가장 증오하는 적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저 악명 높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권력의 이미지를 상상하여온 우리들에게 지금 우리 시대가 펼쳐 보이는 “두 주인”의 그림자놀이는 삶의 현실감을 빼앗아 버리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의 비판을 강제와 동의의 변증법,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야 한다. “폭력 없는 권력”은 동의와 헤게모니, 이데올로기적인 회유가 완전히 성공에 이른 권력이란 말로 오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자본주의사회의 권력을 설명하며 들뢰즈는 “사형은 폐지되는 경향을 보이고 학살은 같은 이유로 증가한다”고 말한 바 있다. 생명과 안녕, 안전을 보장한다고 말하며 권력은 더욱 잔인해진다는 그의 말이 옳다면 강제가 없고 폭력이 없는 세계를 종용하며 권력은 더욱 난폭해진다고 말하는 것 역시 옳지 않을까. 그렇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우리는 지금 권력을 폭력과 동의의 이미지 속에서 상징화하는데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폭력애호가들이 절망적이고 자학적인 몸짓으로 권력을 상징화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오직 정치의 개입뿐이다. 그것은 근대적인 정치학이 권력을 상징화하면서 특권화시켰던 이訣? 폭력의 이미지로부터 정치를 분리시키는 것이다.
컬티즌(/연세대대학원신문)에 기고한 글. 조금 버전이 다르다.

<발레교습소>와 영화의 윤리

– 이 좋은 “탈훈육시대”의 청춘들에게, 구질구질한 현실을, 그것도 두시간 가까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은 환영받을 짓이 아니다. 변영주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인 <발레교습소>는 딱 그 짓을 한다. 이 영화에는 민재와 수진이 그리고 정말 ‘기타 등등’이라고 해야 옳을 수많은 인물들이 장황하게 등장한다. 그리고 거의 모든 인물들이 에누리 없이 제 이야기를 배출하고 나서야 화면 바깥으로 사라진다. 우리 시대의 “훌륭한” 영화란 것의 상투적인 모습은 이런 것 아닐까. 폐소공포증에 걸린 듯한 인물이 한 두 명 등장하여 내면이라는 디제시스적인 환영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금욕적일 만큼 침묵하는 뻘 짓의 영화. 그에 견준다면 <발레교습소>는 차라리 상스러운 영화이다. 부르디외 식으로 말하자면 추상 사진을 좋아하는 쁘띠 부르주아에게 잔칫집 사진은 너무 사실적이어서 하층계급의 취향에 어울리는 것이듯이, <발레교습소>는 하층계급 취향의 영화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취향의 문제이겠는가.
한마디로 이 영화는 시대착오적이고 너무 “구리다”. 더욱이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보수적이다. 이는 지식정보자본주의의 시대에 더 이상 노동자는 없다고 젠체하는 거듭난 ‘제3의 길’ 좌파들 앞에 작업복 차림으로 나타나, 촌스럽게(!) 고용안정과 복지보장을 외치는 육체노동자의 보수성과 같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보수성이 아마 그런 것이라면 나는 그에 동조한다. 그리고 그런 고루한 주관적인 정치적인 취향으로 역시 나는 <발레교습소>를 사랑한다. 우리 시대의 청춘을 압축하는 것은 차라리 “20살의 자유, TTL”이라고 해야 옳다. 아니 이마저 지금엔 별 실효가 없을 것이다. 요즘 어느 청춘이 자신을 세대의 정체성과 더불어 생각할 것인가. 여전히 스무 살 언저리의 나이를 사는 청춘들이 있지만 그들은 더 이상 훈육사회의 학생이란 정체성에 매달려있지 않다(고 믿는다). 교육인적자원부 버전으로 말하자면 “자기주도적인 학습에 힘쓰는 자율과 책임의 나”가 있을 뿐이다. 이런 때에 지나간 가부장적-관료적-훈육 자본주의시대의 악몽을 연상시키는 가족, 학교, 입시, 가난을 들먹이다니! 그리고 더욱이 그 자리에서 가장 멀리 도망친 청소년들을 불러 앉히다니! <발레교습소>는 그런 핀잔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

<씨네21>에 기고한 글. <발레교습소>에 관한 리뷰이다. 일전 출판 전에 올렸다가 씨네21의 편집진 눈에 확인되어 물의를 빚은 글. 지상논쟁이란 틀 안에 놓인 글인데 누구와 논쟁을 해야는지 모른다. 아직 씨네21을 읽지 않았는데 아마 황진미 아닐까. 사실 나는 그녀의 비평을 꼼꼼히 읽어본 적도 없지만 그녀는 비평보다는 자신의 도덕적인 주장을 외삽하는 시사평론가에 가깝다는 생각한다. 어쨌든 그간의 비평적인 비난에 맞서 일종의 반론을 던지는 글로 썼다. 글을 쓰면서 <발레교습소>를 사랑한다는 착각과 확신에 빠졌다. 친구에 대한 의리를 실천하고 애정에 답하려고 쓴 글이었지만 나는 그것이 허위적인 자기최면 탓은 아니었으리라 믿는다. 영주야, 잘했다~!

<발레교습소>는 “지금 여기에서 산다”는 것의 꼬락서니에 관하여, 처량하다 싶을 만큼, 중언부언 그리고 아주 시시하게 늘어놓는다. <엘리펀트> 식의 지독한 우아함도 없고, <트레인 스포팅> 류의 신랄한 스타일도 없다. <고양이를 부탁해> 식의 달콤쌉싸름한 페이소스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화가 영화 스스로에 복종하려는 욕망을 거부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재현하는 대상에 逆피狗졍?윤리적인 몸짓을 고집하고 있음을 인정해 주어야 옳다. “좋은 영화”로 불리는 것들이 가장 따분하고 상투적인 작위만을 반복하며 예술이든 영화이든 둘 다를 파산시키고 있는 지금, 나는 차라리 <발레교습소>같은 영화야말로 영화에 충실하려는 역설적인 몸짓을 밀고 간다고 확신한다. 자신이 재현하려는 대상에 관한 윤리적인 헌신을 고집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영화가 잃어버린 것 아닐까.
<발레교습소>는 로맨스와 우정 그리고 가족의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통과하면서 쾌락을 던져주지만, 군데군데 거북한 장면들로 얼룩져 있다. 이를테면 민재와 수진이 마침내 사랑을 나눌 때의 장면은 적잖이 불안하고 불편하다. <지구를 지켜라>를 함께 보다 그 짓을 하려는 둘의 서툰 몸짓은 낭만적이기는커녕 조금 기이하다. 퉁명스럽게 둘의 몸을 잡는 화면도 그렇지만 계속하여 들려오는 성가신 소음(민재의 성마른 호흡, 소파가죽의 적나라한 마찰음 등) 때문에 도무지 거슬리기만 하다. 클라이맥스의 열정을 끌어올려야 할 구민회관에서의 발레 공연은 놀랄 만큼 초라하고 심심하며 나아가 황당하기까지 하다. 이야기는 우리를 박진감으로 죄어오는데 정작 눈에 보여지는 것은 우리를 배반한다. 아무런 수사학적인 스타일도 고려함이 없이, 시야의 길이와 깊이 만을 의식한 평범한 숏들이 교대하여 등장한다. 아마 관객은 실망감을 넘어 내심 분노할 수도 있다. “에이, 영화를 왜 이 따위로 못 만드는 거야”
그러나 나는 이 대목에 가서야 감독이 거의 통제불능의 상태로 영화를 막 만들었다는 인상을 접었다. 아니 나아가 <발레교습소>는 어떤 숨겨진 논리적인 공정을 거치며 만들어진 영화일 것이라는 망상까지 품게 되었다. 예를 들어 대중영화의 상투적인 플롯이란 것은 모두 수집하여 연결한다. 그리고 그것에서 자동연상될 수 있는 아름답고 쾌적한 모든 시각적인 풍경을 지우고 다른 것, 즉 현실의 것으로 대체한다. 아마 이는 나의 착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잘난 체 하는 영화들 사이에서 “못난 체” 하는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윤리적인 용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감독은 그걸 그냥 자신의 주관적인 진정성에의 집착 탓이라고 주눅든 채 말한다. 그러나 그건 너무 겸손한 짓이다. 당신은 한국의 영화 자체를 위해 아주 좋은 짓을 했다. <발레교습소>는 못 만들려 애쓰는 안타까운 몸짓으로 좋은 영화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영화에서 윤리를 구제하려는 보기 드문 몸짓을 실현했다.

기부의 문화와 동냥의 윤리

– 아마 우리 시대의 가장 참담한 윤리적인 풍경은 대개 티비 속에서 득실대고 있을 것이다. 먼저 우리는 빈곤에 허덕이는 이들을 향해 연민과 공감을 호소하는 휴먼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본다 그리고 우리는 그후 곧장 “김치도 건강해야 한다”는 김치 냉장고 광고와 마주해야 한다. 김치의 건강, 김치의 삶. 부조리한 유머를 즐기는 일본의 컬트 만화 제목같지 않은가. 물론 우리는 이런 광고가 우리 시대의 “과학적인 진실”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다. 코미디에 가까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뉴에이지적인 관념은 이제는 거의 과학적 진실이 되어가고 있다. 예를 들어 당신 집의 화초를 생각하라. 그것도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당신에게 반응한다. 그 여린 꽃과 작은 잎이 당신과 교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이런 생물학적인 지식이 세간의 통속적인 과학 서적을 채우는 내용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물며 김치인들 왜 우리와 대화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이 좋은 생명의 윤리의 시대에 김치라고 건강하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물론 이런 모습에 우리는 더없이 절망적인 슬픔에 빠질 수 있다. 당장 이주노동자의 뼈저린 가난과 장애자의 참담한 굴욕을 우리는 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의 삶을 김치의 건강과 맞바꿀 수 있다는 말이냐. 인간을 이렇게 막 대하는 미친 사회를 향해 우리는 분노하고 나아가 고약하게 생명의 물신으로 군림하는 것들을 향해 더없이 전율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으로 충분하지 않다. 인간의 생명이 김치의 건강보다 존엄하다는 상식조차 농락하는 현실은 기괴하다 못해 역겹기까지 하지만 그것은 매우 패배적인 생각이다. 왜 그럴까. 마침 성탄절이 다가왔으므로, 가난한 이웃에게 따뜻한 온정의 손길을 뻗쳐야 하는 시절이 돌아왔으므로, 그것을 두고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하여보자. 알다시피 빈곤이 “사회문제”화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서구사회라면 우리는 이를 복지국가 혹은 사회적 국가의 몰락에 따른 결과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서구의 좌파들이 경악한 낯으로 외치는 “유럽의 브라질화” 즉 극단적인 빈부격차와 빈곤의 대량화에 대한 놀라움은 분명 20세기의 역사가 부정당한 데 있을 것이다. 왜 그것이 매우 우연하고 구체적인 사회적인 현상으로 이해되지 않고 역사의 궤도 이탈이라는 고통스런 체험으로 받아들여질까. 왜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폭발적인 확산과 네트워크화된 경제의 도래, 지식과 정보를 통해 가치를 창출하는 새로운 상황의 출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역사를 체험하는 자신들의 지평 자체가 뒤흔들리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까.
컬티즌에 기고한 글입니다.
사실 서구에서 빈곤은 사회문제가 아니라 곧 정치였기 때문일 것이다. 신경제의 도래 이후 빈곤이 양적으로 많아졌다거나 사회의 대다수가 빈곤 계급의 나락에 빠져들고 그 위에 상상할 수 없는 부를 누리는 “하이퍼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는 그냥 현상에 대한 서술에 불과할 뿐이다. 물론 끔찍한 상황 그 자체만으로도 그들은 충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충격의 외상은 다른 데 있을 것이다. 부의 분배를 둘러싼 문제는 바로 어떤 사회에서 살 것인가의 문제를 결정하는 유일한 행위,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실천을 이름짓기 위해 마련된 근대 사회의 개념인 “정치”의 문제였다. 그렇지 않다면 근대 정치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이름 가운데 하나인 사회주의를 과연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러나 이제 빈곤은 어떤 사회에서 살 것인가를 둘러싸고 투쟁해야 하는 근본적인 물음의 대상이 아니게 된다. 즉 정치를 향한 물음이 아니게 된다. 이제 빈곤은 범죄, 안전, 오염, 성차별같은 다양한 사회문제의 하나로 취급되며 정치를 압박하고 규정하는 문제의 지위에서 해방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빈곤이 “사회문제화” 되었다고 할 때, 그것은 그저 저널리즘적인 표현을 흉내낸 것이 아니다. 이는 빈곤한 삶을 표현하는 새로운 시대적 논리 그 자체를 반영하는 것이다. 정치가 물러난 자리에 혹은 퇴각한 자리에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알다시피 “거버넌스(governance)”라는 새로운 용어이다. 디지털 거버넌스에서부터 글로벌 거버넌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 우리는 거버넌스란 용어가 부착되어 있음을 본다. 그러나 이는 거칠게 말하자면 어떤 사회에서 살 것이란 물음을 던지고 결정을 행하는 정치가 사라지고 곧 사물의 관리, 비정상적인 상황의 처리를 뜻하는 것일 뿐인 행정이 만연하게 되었음을 알릴 뿐이다.
그러나 이는 물론 서구 사회에 국한된 일이 아닐 것이다. 정치의 공간인 국회에 관하여 생각해보자.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진짜 정치를 하지 않는 국회를 질타하는 상투적인 비난에 질릴 만큼 익숙해져 있다. 9시 티비 뉴스가 끝날 즈음 앵커들은 거의 표준적인 멘트를 덧붙인다. 추문과 욕설 그리고 폭력에서 벗어나 진짜 삶의 문제를 다루는 국회로 거듭나라는 식의 주문이 그것이다. 민생 국회와 정쟁 국회를 나눌 때 우리는 그것이 삶의 구체적인 문제를 다루지 않고 공허한 이데올로기만을 내세우는 선량을 향해 비판을 보내는 것이라고 자꾸 오해한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일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가 지금 실업 문제보다 뭐가 중요한가, 과거사 청산이 지금 빈곤 문제보다 뭐가 중요한가. 이제 공허한 이념의 정치에서 삶의 정치로 돌아가야 하지 않는가. 이런 논리에 우리가 설득 당하는 순간 우리가 돌아가게 되는 곳은 당연히 삶의 정치가 아니라 정치가 없는 행정의 공간, 우리가 살 수 있는 세계란 자유주의적 전지구적 자본주의일 뿐이라는 어처구니없게 한계 설정된 세계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요구해야 할 진짜 정치란 어떤 사회에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 즉 국가보안법을 따를 것인가 어길 것인가라는 선택이 달려있던 문제일 뿐이다. 국가보안법이 무엇인가. 한국 사회에서 바보가 아니라면 누구나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그것은 다른 사회를 꿈꾸는 희망에 족쇄를 채우는 질서의 폭력이다.
과거 급진적인(?) 정치조직에 몸담았던 한 국회의원을 향해 노동당원이었다는 협박을 들이대며 국회에 간첩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가공할 코미디를 펼치는 한나라당은, 어찌 보면 진짜 정치가들이다. 그들이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내세우는 열린우리당이 정작 그것을 탈냉전 시대에 걸맞지 않은 악법이란 이름으로 폐지를 주장할 때 그리고 사실상 한국 사회에서 정치란 없고 서로가 정책이란 이름으로 상생의 경쟁을 펼치는 사회적 관리의 파트너일 뿐이라고 주장할 때의 포스트정치적인 입장보다 투박하게 그러나 온전하게 정치적이다. 물론 우리는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하여 과거사 청산에 대하여 열린우리당보다 더 나아가야 한다. 열린우리당 혹은 노무현 정권의 비열한 기회주의, 즉 책임내각제를 운영하며 이헌재라는 경제전문가에게 모든 경제적인 문제를 맡긴다는 식의 주장은 그야말로 정치를 정치에서 해방시킨다. 이러한 정치와 경제의 분리, 민생의 정치와 이념의 정치의 분리야말로 우리 시대의 빈곤이 차지하게 될 위치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오직 사회문제일 뿐이지 우리가 살아야할 사회, 노동은 어떻게 측정되고 평가되어야 할 것인가, 부는 어떻게 관리되고 분배되어야 할 것인가의 논리를 결정하는 정치의 문제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투명한 경영, 소유자 자본주의 그리고 이에 더한 기부의 문화가 “경제정의”란 이름을 뒤집어쓰고 등장할 때, 아직도 그것을 지킬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면 정의란 개념을 그 모욕스런 처지에서 구제해야 한다. 옷깃에 빨간 열매를 달고 고통받는 삶을 향한 연민 따위에 정치를 희생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의 자본주의가 가난한 자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두 가지일 것이다. 첫째 그들은 승자 독식의 세계에서 실패한 패배자들이란 것이고 둘째 그들은 측은하고 불쌍한 희생자들이란 것이다. 첫 번째의 패배자를 위한 사회적인 배려는 “청년 실업 극복”을 위한 사기 진작 쇼의 연출이며,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라고 노래를 틀어주는 “힘내라 한국” 식의 코미디 보급이다. 두 번째의 희생자를 위한 사회적인 배려는 “러브하우스”를 통해 디즈니랜드를 방불케 하는, 이웃공동체로부터 완전히 떼어내어진 못살 집을 지어주고 다함께 울음에 북받치는 것이다. 아니면 사회공헌도 경영전략이며 윤리경영, 책임경영이 살 길이라며 “아름다운 가게”에 거액을 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꽤 인간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런 몸짓의 사악함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자신이 언제나 실패하도록 규칙이 입력된 게임의 룰 때문에 우리는 패배자일 뿐이다. 우리는 패배자가 아니라 사기를 당한 것이다. 또한 우리는 희생자도 아니다. 우리는 지배당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쩌자는 말인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소박한 실험은 이런 것이다. 그것은 기부가 아니라 동냥의 권리를 무조건적으로 보장하자는 것이다. 알다시피 기부를 위한 바자회는 따뜻하고 분위기 좋은 백화점과 호텔에서 이뤄지지만 동냥질은 찬바람 부는 길바닥에서 하는 짓이다. 그러나 거지들에게 따뜻한 지하철 역사, 북적대는 멀티플렉스, 분위기 좋은 호텔 로비에서 동냥을 할 수 있게 하자. 물론 우리는 곧 걷잡을 수 없는 입씨름에 사로잡힐 것이다. 주변사람들을 불편하고 어색하게 만들기 때문에 곤란하다는 둥, 공공공간이 아니라 사유지이므로 동냥을 할 수 없다는 둥의 갖은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 우리에게 정치에 다가서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얼마 전 고인이 된 데리다의 타자성의 윤리를 빌려쓴다면 진정으로 윤리적인 행위(그가 “환대”라고 불렀던)를 복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부와 동냥은 어떻게 다른가. 기부의 대상은 불쌍해진 나의 또 다른 거울이미지이지만 적선의 대상은 견디기 어려운 거북하고 불편한 심지어 그들이 거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공격적으로 느껴지는 “그들”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부와 동냥은 전연 다른 윤리적인 태도를 보인다. 기부란 것이 인간은 약한 자를 돌보아야 한다는 평범한 규범을 쫓는 시늉을 하면서 그 안에서 나르시시즘에 빠져버리는 것이라면 동냥은 말 그대로 가난한 자들을 가난한 자들로 표시하는 조건 자체가 풍기는 거북함을 자각하고 그들을 타인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그저 타인을 타인 그대로의 온전한 모습으로 인정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태도 역시 나의 일관되고 안정적인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또 다른 몸짓에 불과하다. 내가 그를 그 스스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당신”이란 이름의 자리에 그를 앉히는 것, 즉 나의 타인으로서 그를 자리바꿈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궁지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가능한 그를 추상화하는 것이다. 물론 그를 추상화한다는 것은 그를 사회의 질서, 그들의 삶을 규정하는 관계의 한 항(項)으로 그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와 나는 서로의 삶을 규정하는 질서의 체계에 속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 그것은 그를 객관화시키거나 대상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그것은 그를 자신이 살아가는 삶에 맞서 주체화하도록 이끄는 조건을 던진다. 겉보기에 이는 매우 건조하고 냉정한 행위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윤리적인 몸짓은 본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윤리란 마오쩌뚱 식으로 말하자면 조사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

포스트정치시대의 정치학 – 미국식 민주주의여 영원하라


마침내 미 대선이 끝났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부시가 사실상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받은 충격 가운데 하나는 아마 뜻밖의 뒤늦은 자각이었을 것이다. 그 자각이란 더 이상 정치적인 사건으로서의 어떤 내용도 담고있지 않은 포스트정치적인 이벤트를 두고, 순진한 청맹과니처럼 진정한 정치적 결정의 행위가 이뤄지는 줄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시의 당선에서 기분 나쁘고 우울한 것은 가장 반동적인 정치적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있는 매파가 당선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저 그런 것이라면 전보다 더 열심히 투쟁하면 될 뿐이다. 그가 4년 동안 연장하는데 성공한 위임받은 주권을 제한하기 위해 우리는 더 많은 평화의 비둘기를 날리고 더 많은 저항의 장미꽃을 던지면 된다. 그리고 부시의 당선이 모호한 정치적, 군사적, 사회적 공약으로 일관했던 케리의 당선보다 훨씬 유익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어쩌면 “요새 미국”의 악몽에 맞서 싸울 새로운 정치적인 연합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정작 우리를 정작 슬프게 하는 것은 우리가 바보처럼 미국 대선을 정치적 사건으로 믿었다는 것, 마치 진정한 사회적 운명을 결정하는 정치적인 사건인 양 천치처럼 믿어버렸다는 었다는 깨달음 때문에 비롯된다. 우리를 당황스럽게 한 것은 레이건 정권이래 거의 상식처럼 알려져 있던 도덕적 다수파(moral majority)의 위력에 대해 우리가 왜 기억상실에 빠졌었냐는 것이며, 미국의 민주주의가 감정과 관습의 민주주의였다는 점, 우리 시대의 정치가 문화 전쟁(culture wars)로 끝없이 번역되고 있음을 왜 우리가 까맣게 잊은 척 했냐는 것이다.
아마 그런 착각에 빠지게 된 것은 9.11 테러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미국이 9.11 테러를 통해 마치 진지하게 정치적 공간에 참여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버렸다. 그렇지만 그것은 미국의 바깥, 특히 다극적인 체제를 유지하고 사회주의 붕괴이후 새로운 유라시아적 제국을 건설하려는 유럽 국가의 환상이거나 아니면 동북 아시아에 속한 몇몇 사회가 자기의 개꿈을 제멋대로 투영한 환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알다시피 미국이 걱정하는 것은 침략과 점령이라는 정치적인 행위가 아니라 여론을 나쁘게 만들 수 있는 약간의 인권적인 문제일 뿐이다. 예컨대 관타나모 기지에 수용된 이라크 병사들에 관한 처우 등. 물론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 그리고 잇단 “악의 축” 파문은 세계시민적인 사태이고 전지구적인 정치 의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 몇몇 사람의 믿음 속에서 정의된 것일 뿐이다. 우리는 많은 양심적이고 비판적인 세력들이 미국과 다른 주권 국가들 사이에서 협력과 조정을 위한 정치적 공간을 만들어내길 요구하였다. 그러나 역시 같은 말이지만 그런 필요가 있었다는 우리의 기대와 믿음이 그런 정치적 공간을 상상 속에다 지은 것이지 그런 공간이 현실 속에 있었던 적은 한번도 없으며 미국 역시 진지하게 그에 책임을 지는 정치적인 행위자로 등장한 적은 한번도 없다.
미국은 9. 11 테러 이후 자신을 “비상사태 국가”, “안전 국가”로 자신을 규정하였다. 그것은 전쟁이 더 이상 정치적인 결정의 문제에 해당하지 않음을 선언하였다. 근대 국가에서 국가는 전쟁에 관한 권리를 독점한다. 혹은 오랜 그러나 여전히 올바른 맑스주의의 명제대로 말하자면 국가는 조직화된 폭력이다. 그렇지만 그 때의 폭력과 국가의 관계는 언제나 정치적 공간에 의해 매개된다.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장하는 주권을 갖는다는 뜻에서 전쟁은 주권의 결정이다. 따라서 그것은 언제나 주권의 대리인들이 결정해야 하는 문제가 된다. 적어도 우리는 양차 대전까지 참전론과 반전론을 둘러싼 격렬한 갈등이 벌어졌던 의회에서의 시끌벅적한 논쟁을 기억한다. 그러나 이제 미국에서 전쟁은 더 이상 정치적 공간과 상관없는 일이다. 고작해야 미국의 의회가 하는 일이란 대량살상무기가 있었느냐에 대한 조사와 청문회, 전쟁 포로 수용소에서 반인권적인 처우가 있었느냐에 대한 항의를 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9. 11 테러가 우리에게 극명하게 알려준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미국은 더 이상 국민을 정치적 주권을 지닌 폴리스의 성원으로 상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민이란 이제 순전히 생명으로 환원된 삶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실체(substance)를 박탈당하고 순전히 생명의 활동으로 환원된 삶, 9. 11 테러 후의 미국의 권력은 바로 그런 대상을 지배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미국에서 벌어지는 대통령 선거가 주권적인 국민이 참여하는 정치적인 행위의 공간이라 상상하는 것은 넌센스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이번 대선에서 9. 11 테러 이후의 이라크 전쟁의 문제가 미국민들의 주요한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을 이유가 없다. 동성애자의 결혼, 배아줄기세포의 의학적인 활용 등을 둘러싼 “사회적 가치의 논쟁”이 미국 유권자(?!)들의 주요한 관심사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이를 寬?진짜 중요한 정치적 사안, 즉 전쟁, 부의 분배와 같은 이슈들이 소외되었던 것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될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간단하게나마 9. 11 테러 이후 전쟁은 더 이상 주권적인 정치적인 결정이 아니라 순수한 삶-생명의 보호와 유지를 위한 도구적이고 행정적인 활동으로 환원되었음을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탈규제와 구조조정 이후의 경제적인 사안, 고용과 분배의 문제는 어떨까. 더 이상 과거의 사회주의에 머물러서 안된다고 주장하는 블레어가 이끄는 신노동당의 제3의 길처럼, 클린턴 정권 역시 더 이상 미국 민주당의 이상이었던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에 연연하지 않은 신민주당이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뉴딜 정책으로 대표되는 풍요와 기회의 나라인 미국적인 꿈을 포기함으로써 20세기의 민주당과 작별을 고한 바 있었다. 아마 그런 전환을 압축하는 핵심적인 사건을 꼽자면 바로 “개인의 책임과 노동기회에 관한 법률”을 수용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공화당의 압력과 강요로 수용한 것이었긴 하지만 이 법안은 또한 “국민의 부”라는 규범을 포기한 것이란 점에서 충격적인 것이었다. 근대의 자유주의 국가는 경제 정책과 다양한 제도적 절차를 통해 부의 분배를 관리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맡아왔다. 이 때 국가란 금융과 통화의 관리, 교육, 보건, 주거, 교통, 통신 등의 사회적 서비스의 관리, 직업교육과 훈련, 고용을 통해 주민들의 경제적인 삶을 살펴야 했다. 결국 국가는 주민의 경제적인 삶을 국민의 부라는 이름으로 다루었고 그것은 언제나 정치적인 공간을 통해 매개되어야 했다. 그렇지만 “개인의 책임과 노동기회에 관한 법률”은 그 이름이 상기시켜주듯이 부란 개인의 책임과 자율의 문제일 뿐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국민의 문제로서 정치적 결정에 의해 매개될 필요가 없다. 고작 국가가 해야할 일은 바로 그런 자기 스스로에 대해 책임을 지는 개인이 되도록 후원하는 역할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성애자 결혼이나 배아줄기세포 같은 이슈를 둘러싼 관심과 이라크 전쟁, 실업과 분배 정책에 대한 관심 사이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것은 더 이상 정치적인 주체가 아닌 자기 자신을 책임지는 포스트정치적인 시민, 자기책임의 개인이 참여하는 새로운 미국식 민주주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선거를 가족적 가치와 기독교 문명의 사명을 외치는 도덕적 다수파 그리고 그들이 대표하는 신보수주의에 의해 미국의 정치적 공간이 왜곡되거나 오염되었다고 한탄해서는 안된다. 신보수주의적인 환상에 현혹 당하지 않았더라면, “계몽된” 이해와 판단을 펼칠 수 있었을 본연의 정치적 공간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거듭 말하지만 지금의 미국식 민주주의는 그런 정치적 공간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물론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현상을 두고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 사이의 구분이 사실상 사라져버렸으며 국가와 시민사회의 구분이 흐릿해져버렸다고 한탄하며 다시 한번 그러한 비판적인 구분을 되살리자고 요구하는 퇴행적인 꿈에 빠져들어선 안될 것이다. 지금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이 정치의 소멸이 아니라 정치의 또 다른 모습으로의 실현, 더 심하게 말하자면 정치의 완성이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이 들 정도로 새로운 모습으로, 정치가 실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주권적인 국민이라는 정치적 주체의 형식으로가 아니라 자신을 책임지고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돌보는 개인이라는 주체성의 형식으로 미국은 새로운 민주주의를 명하?왔다. 그것이 바로 포스트정치적인 정치의 모습이고, 더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 시대의 신자유주의적 정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의 중요한 정치적, 법률적 결정은 과연 어떤 것들인가. 캘리포니아주에서는 호텔숙박객이 객실 안에서는 오렌지 껍질을 벗겨선 안된다. 버몬트주에서는 물 안에서 숨을 쉬는 것이 법률로 금지되어있다. 뉴저지주에서는 공중들이 모인 앞에서 옷을 벗어선 안된다. 그래서 미국에 의해 자유가 제한되어있는 자유의 후진국이라고 낙인찍힌 나라의 국민들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받는 인상은 한결같다. 놀랍게도 자유민주주의국가인 미국이야말로 질식할 듯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라는 것이다. 일상생활을 둘러싼 수많은 금지와 처벌, 단속 그리고 끊임없이 이를 둘러싼 논쟁과 소동이 벌어지는 나라, 그리고 그것이 정치적인 공간을 채우는 나라. 따라서 미국에서 “자율(autonomy)”과 “책임(responsibility)”의 개인을 내세우는 신자유주의적인 보수세력에 맞서 자유주의적인 좌파 혹은 진보세력이 내세우는 대안이 “존중(respect)”과 “관용(tolerance)”의 개인이라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식 민주주의는 미국이라는 대륙에서만 서식하는 지역적인 풍토병일까. 당연한 말이지만 그럴 리 없다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고 어느 정치학자가 말한 한국의 민주주의가 미국식 민주주의와 다르다고 말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참여정부의 “참여”가 혹시 국민의 주권을 소외시킨 과거의 비민주적 정권을 반성하고 극복하기 위한 아름다운 슬로건이라고 믿지는 않기를. 그 참여란 다름 아닌 정치적인 주체로서의 시민이 아니라 자율과 책임의 개인이기 때문이다. 기업가적 정부의 소비자적인 시민, 우리가 참여정부의 정책에서 마주하는 정치적인 매트릭스는 대개 이런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미국식 민주주의의 가장 나쁜 형태를 충분히 실험하였고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
컬티즌에 기고한 글입니다.

– 슬라보예 지젝의 미국 대선 결과에 관한 글이 떴군요. The Liberal Waterloo (Or, finally some good news from Washington!)이란 제목의 글입니다. 부제인 마침내 온 워싱턴 발 희소식이라는 반어적인 제목에서 암시하듯 부시정권이 제 무덤을 파기 시작한 것이니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조금은 자포자기적인(?) 위안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별 차이도 없고 다른 나라들에겐 더 불리하기까지 했던 멍청한 민주당 케리보다 현실 국제정치의 면에서 훨씬 좋은 자극이 되어줄(?!) 부시의 당선이 외려 다행이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조금 엉뚱하다 싶습니다. 이 잡지에 실린 다른 대선분석글들도 재밌습니다. 참고하시길..

스타가 아닌 시민을 위한 교육

스타가 아닌 시민을 위한 교육 – 청소년문화예술교육에 관한 몇 가지 생각
요 몇 년 청소년 영화제에서 심사를 볼 일이 자주 있었다. 어제 마침 또 하나의 청소년 영화제가 있어 심사를 보게 되었다. 출품된 작품을 보면서 또 한번 심란해졌다. 한두 해 전부터 청소년 영화제에서 작품을 고를 때 견지하는 원칙이란 게 생겼다. 수시로 바뀌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고수하는 게 있다면 “입시 영화는 안된다”는 것이다. 수시나 특차 전형을 위한 발판으로 영화를 찍고 출품하는 친구들이 많아지면서 진짜 자기 영화를 찍은 친구들을 가려내기 위해 나름대로 굳힌 원칙이다. 그런 영화들이 보여주는 공통점이 있다면 “심사위원 선생님 앞”으로 보내는 편지라는 점이다. 나는 학교나 청소년수련관에 더 많은 영상 동아리가 만들어지고 동네마다 청소년들의 시네클럽이 생겨나길 바란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만들어지는 영화가 미지의 심사위원 선생님의 맘에 들기 위한 메시지여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그 영화는 언제나 보이고 입씨름할 친구들과 함께 해야 한다. 자기의 관객이 보이지 않고 그래서 말을 건네려는 욕망이 없는 영화는 결국 시시하고 지루해지기 마련이다. 물론 감동도 안준다. 그리고 그런 영화들을 보아야하는 어른 심사위원들도 역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나는 이런 영화를 만드는 청소년들은 “모범생 영화 키드”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대개 왕따 당한 친구, 학교 폭력, 장애우나 성정체성이 모호한 친구들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들과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친구들이 으레 그런 취급을 받을 때 그를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하는 자신의 무력감, 타인을 괴롭히는 친구들을 볼 때 느껴지는 교묘한 쾌감 따위의 복잡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자기 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소년들이 만든 다큐멘터리는, 솔직히 말하자면 언제나 최악이다. 청소년들이 만든 다큐멘터리를 볼 때마다 느끼게 되는 곤혹스러움과 실망을 위안하려 핑계를 둘러대지 않는 건 아니다. “방송 다큐가 애들을 버렸어, 쯔즛!”. 그렇지만 범람하는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의 영향을 탓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청소년 다큐멘터리는 거의 한결같이 보이스오버로 메워져 있다. 삶이 말하기도 전에 찍는 이가 말을 다 해버린다.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논술시험 정답같은 이야기를 참고화면을 통해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삶보다 정답을 보고 만드는 다큐멘터리는 착한 청소년들이 꾸미는 연극에 불과하다.
청소년 영화제에 참견하면서 드는 생각은 또한 청소년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생각으로 번지지 않을 수 없다. 알다시피 청소년을 길러내고 교육하는 방식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지난 십 년 간 한국 사회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런 관심과 더불어 “공부해!”라는 슬로건을 내던지고 “잘 놀아!”라는 슬로건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변화가 있었다. 그런데 획일적이고 표준화된 지식을 머리 속에 주입하는 학교 사회가 규탄을 받게 된 것이 꼭 자유를 꿈꾸고 개성을 실현하며 자기를 되찾으려는 욕망 때문만은 아니다. “매일 아침 일곱시 삼십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리 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막힌 꽉 막힌 사방이 막힌 널 그리고 덥석 모두를 먹어 삼킨/이 시꺼먼 교실에서만 내 젊음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 십년도 더 전에 서태지와 아이들은 <교실 이데아>란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학교 사회를 향해 직격탄을 날렸고 우리는 학교라는 끔찍한 감옥과 공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상식처럼 받아들였다. 명령과 통제, 훈육과 규율의 대명사였던 학교 사회가 맥을 못추게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생각을 조금 달리한다. 그렇다고 청소년들을 억누르던 명령과 압력이 사라진 것은 절대 아니란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잘 놀아!”라는 슬로건은 부드럽고 달콤하다. 그렇지만 동기를 부여하고 스스로 주도하며 자기가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은 자유이지만 사실 한꺼풀 벗겨놓고 보자면 그것은 전보다 더 스트레스를 주는 명령일 수 있다. 따라서 자유가 주어질 때 그것이 자유를 길들이는 명령과 어떻게 만나고 결합하는지 눈여겨보아야 한다. “잘 노는 청소년”이 칭찬 받고 추켜올려지게 된 데에는 그만한 사회적 변화가 배경에 깔려있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식정보사회에서 국가경쟁력은 지식강국, 두뇌강국이 되는 것에서 나온다는 말이 부상하고, 이는 다시 평생학습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교육정책과 청소년정책의 변화로 이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정부는 교육과정을 바꾸기 시작했고 서구 사회에서 이미 시작했듯이 역동적인 한국, 창조적인 한국을 만들기 위해 문화예술이 중요하다는 믿음이 퍼져나갔다. 이제 세상에서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은 지식과 정보, 감성과 라이프스타일이라는 말을 몇 년 사이 지긋하도록 들어왔다. 웰빙신드롬을 통해 여실히 체험했듯, 이제 물건을 팔아도 우리는 감성을 팔아야 하는 사회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감성적인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감성 경영, 감성 조직, 감성 교육, 감성 개인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요란한 충고에 주눅들지 않을 수 없다.
청소년 문화예술교육이 갈 수 있는 길은 여러 갈래이다. 청소년 문화예술교육은 이성과 지식을 전부인 줄 알던 시대의 편협한 교육에서 벗어나려는 괜찮고 멋있는 기획이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의 자율성과 가치를 실현하고 다양하고 자유로운 삶의 기회를 북돋울 수 있는 교육이 되지 못한 채 더 많은 청소년들을 우울증에 빠뜨릴 수도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잘 노는 것, 감성이 풍부해지는 것, 문화에 대한 안목이 느는 것은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 수 있다. 또한 몇 명만 스타가 되고 나머지는 모두 패배자가 되는 대중문화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문화예술교육이 어떻게 잘 버티고 싸울 것인지 궁리하지 못한다면 기죽고 절망한 아이들만 만들어낼지 모른다. 주눅 든 아이들에게 자기주도적이고 자율적인 아이가 되라고 윽박지르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힘들면 우거지상이라도 지을 수 있었던 옛날보다 거짓으로라도 씩씩한 척 신난 척 해야하는 지금이 더 힘들 수 있다. 자기가 찾는 삶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폭넓은 문화적 경험과 교육을 쌓도록 지원해주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매일 시험대에 올라 자신의 끼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지치고 말 것이다. 청소년 문화예술교육이 새로운 사회의 능력있는 시민을 길러내는 교육이 되고자 한다면 챙겨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런 조심과 지혜를 피해서는 안된다. 그런 수고를 마다 않을 때에만 청소년 문화예술교육은 말대로 삶의 질이 높아진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
선배의 부탁을 받고 청소년문화예술교육 사이트인 arte(http://www.arte.ne.kr)에 기고한 글. 이 곳 어딘가에 끄적였던 “망할 청소년”이란 글을 둘러싼 경계와 비난 때문이었는지 완곡하고 온건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글쎄, 그게 그런 글이었나? “감성자본주의사회적 청소년되기”의 논리에 질질 끌려다니는 아이들에 대한 연민에 가까운 글이었던 것 같은데…여튼 부탁대로 좋은 시민인 척, 기왕 하시는 것 잘하시란 식의 글을 썼다. 그간 내 글 중에 가장 쉬운 글이었다는 칭찬을 들었다. 쩝, 글쓰기 수업을 받든가 해야겠다.

제발 도롱뇽이 되지 말자 – 생명의 윤리학 비판


아마 우리 시대에 가장 거룩한 성자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 며칠 전 58일간의 단식을 끝낸 지율 스님이 아닐까. 이름 없는 미물, 작은 짐승 한 마리에도 생명의 고결함을 발견한 사람, 도롱뇽의 삶을 파괴하고 살해하는 “막개발”을 고발한 외롭고 거룩한 영혼. 그는 천성산을 관통하는 공사를 막기 위해 목숨을 건 단식을 결행하였고 마침내 문재인이라는 청와대 청지기의 방문으로 단식은 해제되었다. 6조원을 투입한 국가의 대 역사(役事)에 맞서 외롭게 분투하느 스님의 고집과 결의는 충분히 충격적이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한 마리의 도롱뇽에게서 문명의 잔인한 폭력, 죽음에의 위협을 발견하고 생명의 위엄을 방어하려는 이, 그가 던져주는 깊은 울림에서 벗어나기란 어렵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자꾸 짓궂은 그러나 이유 있는 물음을 던지고 싶은 유혹에 빠져든다. 전신이 마비될 듯한 숭고한 윤리적 장면 앞에서 불경한 의구가 자꾸 꼼지락거린다.
괘씸한 일이겠지만 나는 개고기를 먹지 말라고 떼를 쓰는 프랑스의 어느 여배우의 이유 있는 “윤리적인” 주장과 천성산 도롱뇽을 지켜야한다고 주장하는 지율 스님의 “윤리적인” 주장 사이에서 어떤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개고기를 먹는 타자의 풍속을 무시하고 비난하는 서구 숙녀의 신경질적인 무례와 무지를, 우리는 매우 손쉽게 비난하다. 그렇지만 도롱뇽 사건(?)은 그런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물론 이는 그런 시시한 문화적 사안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것은 22분 빨리 가겠다고 누억년 동안 이뤄진 장엄한 자연의 업적을 간단히 파괴하는 문명의 힘에 대항한 투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단식을 해제한 후에 지율 스님이 천성산 닷 컴에 올린 글처럼 이미 이긴 게임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긴다. 왜냐면 우리는 바로 그 생명의 위대함이란 편에 서있기 때문이다.” 이 비슷한 글을 지율 스님은 게시판에 올렸다.
그렇지만 개에게서도 역시 삶의 위엄을 발견하는 브리짓 바르도는 왜 성스러우면 안 되는가. 물론 여기에는 윤리적이고 뭐고를 떠나 우리는 개의 생명의 위엄이란 것이 서구의 우아한 숙녀의 허영스런 삶을 치장하는 장식으로 전락한 것 때문에 불쾌하고 분개했을 것이다. 번지르한 서구 부르주아적 라이프스타일의 편에 서있음이 너무나 노골적으로 드러났기에 그녀는 결국 진 게임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개발 문명을 향한 비판이든 타자의 야만적 풍속에 대한 비판이든 두 입장은 자신의 근거로 생명의 존엄을 끌어들이는데 있어 일치한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 공명하는 윤리적인 태도를 문제삼고 싶어진다. 그래야 우리는 천성산 막개발에 맞선 지율 스님의 결단을 제대로 도울 윤리적인 입장을 찾을 수 있다. 그래야 “부안”에서 벌어졌던 투쟁에 제대로 개입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 혹은 현자가 되어버린 전직 혁명 시인의 말을 빌자면 “살림”의 세계관. 이것이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윤리-정치적인 지상명령이 되어있다. 그러나 생명 혹은 삶의 존엄이라는 명령이 근대사회의 핵심적인 권력의 윤리였음을 즉 자본주의적 삶의 일차적인 원리였음을 망각해선 안될 것이다. 생사여탈권을 쥐고 타인을 직접적인 인격적 예속 상태에 두었던 봉건 사회는 근대인에게 언제나 죽음의 이미지로 떠오른다. 반면 모든 인격적인 예속에서 벗어난 채, 신민, 노예의 지위에서 벗어난 근대의 자유인에게서 우리가 떠올리는 근본적인 형상은 삶의 이미지이다. 이를 두고 푸코같은 이는 말년에 전근대 사회란 죽게 하고 살게 내버려두는 사회라면 근대 사회란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 사회라고 규정했다. 이런 그의 생각을 압축하는 유명한 도식이 바로 지금은 거의 우리 시대의 상투적인 현학적 용어가 되다시피한 “생권력(bio-power)”이다.
푸코의 생각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자본주의 사회는 인민들을 살게끔 한다(살게 하는 권력). 잘 먹고 잘 사는 것,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 국민의 장수와 건강을 목표로 삼는 것, 이것이 근대의 생권력의 목표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즉 죽음과 분리된 삶의 시간을 극대화하는 사회, 삶의 가치와 행복을 정점으로 밀어 올리는 사회, 포드주의적 복지국가에서 절정을 이루었던 이 사회는 생권력을 통해 지탱되는 자본주의였다. 그리고 후기 자본주의가 등장했다. 유전공학과 생명공학으로 대표되는 시대, 생물학의 시대인 후기 자본주의가 생권력 자체로 움직이는 사회라고 달리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푸코가 결코 미완의 유산으로 남겨놓은 후기의 모든 작업은 바로 이런 생권력의 비판에 할애되어 있었다. 말년의 푸코가 저항은 권력에 내재적이라는 절망적인 결론에서 탈출하기 위해 “존재의 미학”을 꿈꾸는 하찮은 자유주의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항간의 비난은 옳지 않다. 그에게 붙여준 권력의 미시물리학의 해부학자라는 명칭은 생명의 존엄이라는 윤리에 따라 행사되는 권력을 비판하는 기획을 인식할 때 오직 온당한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박정희 체제는 생권력의 화신이다. 박정희는 국민이 따뜻한 쌀밥을 배불리 먹게 하는 꿈을 꾸었던 도착적인 모습의 근대 군주였다. 그가 도착적이었던 것은 파시즘의 핵심적인 특성이 그렇듯이 살리기 위해 마음껏 죽였다는 점에 있다. 아리아 인종의 삶, 독일 국민의 생명을 위해 생식과 번식이라는 생물학적인 논리(우생학과 사회위생학 등)를 동원했던 나치즘은 생명, 삶에 미친 권력이었다. 이처럼 박정희 체제도 역시 국가의 부강과 국민의 안녕을 위해 마음껏 죽일 수 있었다. 긴급조치와 반공법이라는 죽일 수 있는 군주적 권력은 번영과 행복이라는 근대적 생권력과 함께 회전하였다. 우리가 박정희 체제를 그토록 오랜 동안 극복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 그는 애꿎은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 살해하고 고문한 독재자였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를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았는가. 그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우리는 인권의 이름으로 박정희 체제를 비판하는 것이 왜 불충분하고 불가능한지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인권의 이름으로 장식된 추상적인 민주주의와 삶의 권리란 내용으로 충만한 “한국적 민주주의” 사이에서 엉거주춤 서있다. 그래서 박정희 체제의 유령은 죽지 않고 살아 날뛴다.
대학살, 홀로코스트의 권력이 삶의 권력, 생명의 권력이라는 이 기묘한 역설을 깨트릴 때 진정 나치즘을 비판할 수 있다고 주장하듯이, 우리 역시 생권력으로서의 박정희 체제를 비판할 수 있을 때 지금 문제가 되는 “현대사 바로잡기”에 역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무고한 생명을 죽인 권력이란 점에서 좌익과 우익은 다를 바 없다! 그래 친일부역자, 민족의 삶을 팔아먹은 반역자를 고발하라! 그러나 동시에 역시 생명을 죽인 또 다른 악인 좌익도 고발하라! 우리는 지금 이런 어처구니없는 공갈에 맞닥뜨려 있다(최근 한나라 당은 이런 협박을 내놓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물러나선 안 된다. 전체주의와 살육, 전쟁이라는 모든 역사적인 악의 기원에는 생명을 향한 위협이라는 악의 윤리가 있다는 협박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그래 그들도 삶에 대한 존중, 인간의 얼굴이 없었다고 뇌아림으로써 둘을 은근슬쩍 뒤섞어선 안 된다. 인간적인 모습을 덧붙임으로써 더 나은 해방의 전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만큼 패배적인 것은 없다. 한 포기의 풀에서도 지고한 생명의 향기를 느낀다는 윤리적인 농담에 현혹되어선 안 된다. 생명의 존엄이란 이름으로 파업할 권리를 가까스로 방어하고, 인권이란 이름으로 정치적 항변을 가까스로 보호하는 이 지긋지긋한 생명의 사회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야 한다. 생명의 존엄은 초월적인 윤리적 명령이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권력의 논리이다.
지율 스님에게 우리는 간곡히 부탁해야 한다. 도롱뇽에게서 불성을 발견하기에 앞서 해방자 붓다의 모습을 발견하자고. 삶의 덧없음을 알려주며 자유를 추구하기를 설법하는 캘리포니아 선사들의 붓다가 아닌 붓다, 도롱뇽에게서 인간과 다름없는 생명의 위대함을 발견하도록 이끄는 생태철학의 붓다가 아닌 붓다. 지상 최대의 인도주의자에 불과했다면 붓다는 어느 사회에서나 흔하디 흔한 생명지상주의의 도덕군자에 불과하다. 동물학대반대운동론자를 우리 시대의 성자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살고 죽는 생명의 차원으로 전락한 인간, 즉 죽는 존재로서의 동물-인간이 아니라 불사(不死)의 존재, 억겁을 거쳐도 결코 죽지 않는 인간, 자연의 흐름을 교란하며 분리되어 있는 예외적인 존재를 옹호한 붓다를 되찾아야 한다. 우리는 도롱뇽이 되어선 안된다. 우리는 이미 삶의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사회,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사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럼 사회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천성산의 도롱뇽, 시화호의 지네, 서해 갯벌의 지렁이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로부터 분리된 인간이 되기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당연히 천성산의 막개발을 막아야 한다. 설악산의 산양을 지켜야 한다. 나아가 이라크의 전쟁을 막아야 한다. 이주노동자의 착취를 막아야 한다. 생계형 자살을 막아야 한다. 이에 맞서 투쟁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생명의 위엄, 삶의 존엄이란 이름으로 막을 수는 없다. “삶의 질”을 끌어올리고, 국민의 행복과 안녕을 도모하는 사회적 권력의 윤리와 악착같이 웰빙에 매달리고 무병장수의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소비자본주의적 개인의 윤리, 그 모두와 같은 차원으로 변화의 윤리를 내동댕이칠 수 없다. 알다시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윤리를 저버리기 시작했는가. 스웨덴형인지 네덜란드형인지 노사정 대타협을 향한 꿈이 이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에서 벗어날 유일한 꿈이라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더욱 악착같이 고용유연화를 하여 노동하는 삶의 질을 제고하고 (물론 그것은 대량실업과 고용불안정이라는 삶의 위협을 낳을 수 있으므로) 부디 죽지 말라고 덧 얹어주는 약간의 “사회안전망”, 그런 것이 우리의 윤리가 될 수는 없다. 빈사상태의 윤리를 소생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진과 수양이 아닐 것다. 오히려 죽음을 무릅쓴 인간되기,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컬티즌에 기고한 글. 또 욕먹을 글을 썼다는 핀잔에도 불구하고 만용을 부렸다. 일전 당대비평의 특집호에 써먹으려했던 메모에서 한꼭지를 끄집어냈다. 확답이 있는 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를 심문하는 글이라 해야 할 것이다. 스스로도 불안하게 묻고 있는 물음, 그러나 분명히 확인된 물음, 답은 예비되어있지 않지만 피할 수 없는 물음을 자꾸 던지며, 무책임해진다. 그럴 수록 초조감만 깊어간다. 며칠 이상한 두통에 시달렸다. 머리 전체에 열기가 가득한 편두통. 머리 전체가 바이스에 물려있는 듯한 멍청한 상태. 지난 원고를 쓰고 난 후유증같다. 어제는 작정하고 글을 읽지 않고 편히 쉬겠다 생각하고선 영화를 보고 맥주를 마시고 잠을 청했다. 조금은 나아진 듯?

상품의 세계, 가족의 세계 – 딩크족과 듀크족 그리고 가족의 생활세계

우리 시대의 인류학자는 마케터들이다. 20세기에 원시부족사회를 헤집고 다니며 현지조사를 벌이던 말리노프스키, 프란츠 보아스, 마가렛 미드같은 인류학자들이 있었다면 21세기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발명하고 취향의 만화경을 섭렵하는 시장조사자들이 있다. 이들은 천편일률적인 질문지를 들고 전화번호부를 뒤지는 1950년대 시장조사자들의 모습과 닮은 데가 거의 없다. 이들은 마치 인류학자처럼 디지털 카메라와 노트북 컴퓨터를 들고 도시의 뒷골목을 뒤지며 청소년들의 하위문화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한다. 그리고 MTV와 나이키, 디젤같은 첨단 기업들에게 트렌드라고 불리우는 우리 시대의 신화를 판매한다. 인류학자들이 식민주의 정부와 커넥션을 맺었다면 이제 시장조사자들은 전지구적인 기업과 커넥션을 맺고 있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쨌든 우리 시대의 부족민들은 라이프스타일의 부족들이다.
시장조사자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얼개를 분석하며 명명하는 역할을 전담하고 있다. 과거에 인류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이 맡고 있던 이같은 역할은 이제 시장조사자들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이를테면 다가올 시대의 예보자들은 누구인가. 물론 그것은 트렌드 분석가들이다. 미국의 유명한 일간지가 트렌드 분석가인 페이스팝콘을 일러 “우리 시대의 노스트라다무스”라고 칭했던 것은 전연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갈 사회의 모습은 곧 어떤 상품을 소비했는가에 의해 표현된다. 어느 문화이론가가 더 이상 역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만약 그것이 존재한다면 아마 그것은 노스탤지어적인 상상력에 따른 역사일 뿐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그를 정확히 최근의 한국 영화와 티비 드라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적어도 서태지 세대 이후 우리에겐 역사는 중요한 정치적 사건을 통해 제시되지 않는다. 역사는 그 당시에 우리가 소비했던 소소한 상품들에 의해 표현된다. 당시에 우리가 신었던 신발의 브랜드, 당시에 우리가 먹었던 우유의 상표, 당시 우리가 즐겨들었던 대중음악 등이 그 시대를 보여주지 않는가.
이런 점에서 우리 시대의 가족사회학자들 역시 시장조사자들이다. 딩크족이나 듀크족같은 새로운 우리시대의 부족들 역시 모두 시장조사들이 발견하고 명명한 것들이다. 딩크족(Double Income No Kids)은 자녀 없이 부부 생활을 보내려는 새로운 가족 형태를 가리키고 듀크족(Dual Employed With Kids)은 맞벌이를 하면서 자녀를 가지고 아이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는 새로운 가족형태를 가리킨다. 딩크족이면서 아이 대신에 애완동물을 기르며 그들에게 감정적인 애착을 보이는 가족 형태는 딩펫족(Double Income No Kids+Pet)이라고 한단다. 여기에 조금 우울한 버전인 딘스족(Double Income No Sex)도 있다. 이들은 말 뜻 그대로 부부이지만 섹스를 하지 않는 커플을 가리킨다.
이런 새로운 가족 형태들이 지닌 특성은 겉보기엔 우리 시대의 가족 형태의 변화 추세를 예리하게 분석하는 듯이 보인다. 그렇지만 가족의 분석은 가족을 분석하는 자의 관점과 태도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화씨 9.11>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미국의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라면 어떻게 생각할까. 사실 그는 <볼링 포 콜롬바인>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찍어 참혹한 청소년 총기 난사 사건의 원인을 매우 설득력 있게 분석한 바 있었다. 그가 찾아낸 결론은 무엇보다 가난한 가족들의 비극이었다. 그가 찾아낸 미국의 평범한 가족들의 모습은 자녀에게 관심을 보이려 해도 해고의 위협 혹은 빈곤의 공포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가난한 가족들일 뿐이다.
이는 비단 미국에 한정된 일은 아닐 것이다.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한국의 부부 가운데 절반 이상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듀크족에 가깝다. 그러나 이들이 듀크족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뿐이다. 그들은 소비자 가족으로서 시장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딩크족이든 듀크족이든 그것은 모두 소비주의라는 렌즈를 통해서만 자신의 삶을 해석하고 정의하는 시대가 만들어낸 가족의 모습일 뿐이다. 따라서 딩크족과 듀크족의 특성은 곧 그들이 소비할 수 있는 상품의 목록을 통해 나타날 뿐이다. 밤늦은 시간까지 아직 끝내지 않은 일이 있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산만하게 서성이는 미국 가정 주부의 모습은 한국의 주부들의 모습에 투영되지 않을 수 없다. 자녀를 향한 관심은 값비싼 육아상품들을 소비하는 일일뿐이고 정작 자녀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줄어들고 가족과의 관계는 서먹해지고 낯설어질 뿐이다.
자녀들과의 관계를 매개하는 것은 육아상품이고, 부부관계를 매개하는 것은 레저상품이며, 자신과 가족의 관계를 확인하고 즐기는 것은 외식과 여행일 뿐인 세계. 그런 세계가 행복한 세계일리 만무하다. 그렇지만 딩크족과 듀크족은 포스트모던한 자본주의가 상품의 세계와 친밀한 삶의 세계인 가족의 세계를 용해하는 용광로일 뿐일까. 그런 냉소주의에 빠질 때 우리는 절망에 빠질 뿐이다. 전통적인 가족의 신화에 현혹되어 가족적 가치를 내세우는 보수적인 선택은 좋은 대안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주어진 일은 딩크족과 듀크족이 포착한 가족의 변화가 소비자로서의 가족임을 간파해야 한다. 그리고 가족의 삶을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고 명명하는 노력에 뛰어들어야 한다. 새로운 가족이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고 새로운 상품의 세계일 뿐일 때 우리가 가족을 이해하고 상상하는 틀은 빈곤해지고 불행해진다. ■
사보에 기고한 글. 약간의 이데올로기적 검열이 있어 싱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