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페미니즘 – 페미니스트 지식인이 두루두루 살피는 삶의 세계

“목숨은 처음부터 오물이었다.”(최승자)

그러니까 있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 무엇보다 페미니스트로서…
페미니즘을 제 아무리 간편하게 지식으로 먹고 뱉기를 다반사하는 남성 지식인 가운데 끼어있다 해서 ‘채식주의자 뱀파이어’란 아이러니한 괴물처럼 되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 자신의 남성적 욕망을 배반하면서 여성주의적 담론 근처를 배회하는 수컷 지식인들이 있고, 다른 이성애자 남성과 자신을 차별화시키며 남다른 자신의 자신의 상징 자본을 챙기려한다고 고깝게 볼지라도 그들이 페미니즘에 구애하는 일을 막을 길은 없다. 임옥희의 재치 있는 표현을 빌자면,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살려는 의지에서 자신을 “거식증”에 걸린 수컷으로 만드는 수척한 남성 지식인이 있다면 아마 그것은 페미니즘의 목소리에 경청하는 이일 것이다. 그런 어정쩡한 위치에 자리 잡고 나 역시 페미니즘과 대면했다 말해야 옳을 것이다.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의 대표 선수 가운데 한 명인 임옥희의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에 대한 글을 써보라는 부탁을 받고, 나는 그저 자신을 대화상대로 불러주었다는 호들갑스런 기분에 선뜻 응낙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글을 얼추 읽고 난 지금 나는 시쳇말로 대략 난감한 기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왜 빙충맞게 미리 글을 눈여겨보고 부탁에 응하지 않았을까 뒤늦게 책해보지만 그래봤자 이미 때는 늦은 셈이다.
왜 그녀의 글에 대하여 글을 쓰는 것이 난처한 일인가를 헤아리자면 단연 어떻게 쓰더라도 그것이 밑지는 장사가 될 것이라는 얕은 계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임옥희의 글은 잘 읽힌다. 그녀의 글을 열독한 이들이라면 모두 잘 알겠지만 그녀는 달변이고 능변이며 다변이다. 그만큼 그녀는 세상 정보에 훤하고 그것을 읽어볼 딱 안성맞춤의 페미니즘적 분석 도구를 여물게 자신의 연장통 속에 챙겨둔 것처럼 보인다. 1장을 여는 [자본]에서부터 마지막 장인 14장의 [채식]에 이르는 그녀의 글의 마디들을 훑으면서 우리는 콧노래를 부르며 재봉틀을 밟는 이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언어의 바구니에 담긴 알록달록한 실패들을 골라 재봉틀에 얹고 페달을 밡는 듯 보인다. 사통팔달의 페미니즘적 지식이 있다면 이는 단연 임옥희의 섬세하고 어쩌면 너무나 잘 마감질이 이뤄진 글의 세계일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주눅이 들지 않겠는가. 그녀와 같은 ‘말빨’의 여전사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여간한 내공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더럭 앞서는 건 다른 이였다 해도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페미니즘적인 주체란 무엇인가
그렇지만 ‘채식주의자 뱀파이어’를 읽는 독자로서의 쾌락을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의 글은 시원하다. 그녀는 페미니즘적인 시좌를 통해 포착된 현실을 족집게처럼 집어내고 그것을 해독할 수 있는 혹은 요령부득의 현실을 의식적인 반성의 대상으로 빚어내는 말들을 찾아낸다. 아쉽다면 각장의 끝마다 그녀가 던지는 처방과 조언은 적잖이 겸손하다고 하기엔 소박하고 또 무던하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각 장의 말미를 장식하는 글들은 적잖이 밍밍하다.
“사람은 나무처럼 한 곳에 뿌리내리고 살지 않는다. 심지어 나무도 여행한다. 이처럼 지구 지역적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떠도는 시대 한 겨레 한 민족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다민족 다문화 가족으로 살아야 하는 시대에 이르러 불청객을 손님으로 환대하고 공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과제일 것이다.”(91쪽)
“탈식민의 시대라고 하지만 이제는 전지구촌적인 금융자본주의가 세계의 얼굴을 사막화하고 있는 시대다. 그로인해 세계가 파산되었다. 하지만, 파산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면 그 지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기회도 열리게 된다. 어디서든지 간에 시작할 지점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막의 얼굴에서부터 생존의 발걸음을 다시 옮겨놓기 시작할 때다. 주체와 타자가 조우하는 것이 비록 신기루에 불과할지라도 사막 어딘가에 우물은 있을 것이므로.”(230쪽)
등등. 물론 이런 싱거워지고만 맺는 글에 대한 책임을 저자 탓으로 귀착시키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다르게 생각하고 달리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은 오롯이 어느 출중한 지식인의 사유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닌 탓이다. 사유를 촉발하는 힘은 사유 자체의 섬세함과 완고함이 아니라 그것을 강요하는 힘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사유는 사유 자체로부터 출현하지 않고 사유를 강제하는 어떤 외압으로부터 촉발된다. 더욱이 페미니즘적 사유는 모든 급진적인 사유가 그렇듯이 당연 외부적인 사유라고, 나는 믿는다. 사유를 추동하는 그러한 힘은 집단적인 실천에서 혹은 사회적인 투쟁에서 말미암는다. 그렇다면 페미니스트 지식인이 우리에게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안할 때 그것은 실은 그것은 그녀의 의식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덮치고 짓누른 힘으로부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사회적 실천, 여기에서라면 페미니스트 운동으로부터 강요된 것이었을 것이다. 실은 나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페미니즘은 나에게 가부장제에 대한 부적으로서의 일종의 페티시였다”(342쪽)고 그녀가 말할 때, 그것은 보다 강하게 읽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연물(戀物)로서의 페미니즘, 자신의 물신이 되어버린 페미니즘은 흔한 독법을 거슬러 읽어야 제격일 것이다. 이를테면 여기에서 저자가 말하는 페티시는 자기가 품은 진정한 욕망의 원인을 망각하도록 하고 욕망의 대상을 감춰버리는 데 이바지하는 그런 허깨비로서의 페티시가 아닐 것이다. 여기에서의 페티시는 내밀한 의식적 반성의 주체로서의 나를 저지하며 혹은 압도하며 나를 사유케 하는 외부적인 힘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저자가 자주 참조하는 라캉의 말을 빌자면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페미니즘적인 사유에 더 적절한 말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페미니즘적인 사유가 한결같이 그러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 어불성설이다. 저자가 여러 번 거듭하여 말하듯이 지난 수십 년간 페미니즘의 자리는 크게 바뀌어 왔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페미니즘의 현기증 나는 성공이 어떤 쓸쓸한 결과를 낳았는지 잘 알고 있다. 여성 주류화 프로그램을 통해 효과적인 통치의 지식과 기술이 된 국가페미니즘을 꼽든, 아니면 자아실현의 윤리에 유별나게 휘둘리다 끝내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이란 자조까지 내뱉게 된 영 페미니즘을 돌아보든, 정치로서의 혹은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은 거의 방향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 탓에 갑자기 실현가능한 정책 대안을 마련하는데 골몰하고 가부장적인 이성애자 남성들의 반페미니즘적인 행패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페미니즘이 소소해지고 어쩌면 적잖이 한심스러워지기까지 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사내 녀석’이 나서서 할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페미니즘으로부터 다르게 생각하기를 한 수 배운 많은 남자들에게 페미니즘이 그런 섬뜩한 힘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는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에 반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권력의 게임 속에 자신을 밀어 넣은 채 그 권력 게임의 언어에 갇히고 만 처량한 처지의 페미니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를 극력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성이 있다는 것, 여성이 사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러니까 사회학적인 여성, 세상에 몇 명이나 살고 있고 그들이 살아가는 객관적인 삶의 처지가 어떠하다는 수많은 사실 속에서 분절된 여성, 그런 여성을 우리는 누구나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고 또 달리 그에 관해 더 깊이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여성의 존재가 그냥 그저 그렇고 그런 세계 속의 사실 속으로 환원할 수 없다고 말하는 난데없는 목소리로부터 사실성 속에서는 부재하는 여성이 묵직한 현존 속의 여성으로 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그것은 미처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눈으로 들어오겐 이미 실존하던 여성, 미발견된 여성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우리 시야 속으로 들어온 여성은 여성의 몰골을 한 유령일 것이다. 다시 한 번 저자인 임옥희가 참조하는 데리다의 표현을 빌자면 그 어떤 실정적 규정도 미결정성의 지평으로 회부하고,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을 확정하기 위해 끊임없이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증언을 찾게 만들며,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내부적인 기원을 찾기보다는 자신을 언제나 자신이도록 밀어붙이는 힘과의 부정적 관계만을 자신의 유일한 (비)정체성으로 갖는 주체 말이다. 그러한 “대리보충”적인 논리 속에서 자신을 되새김질 하는 주체가 여성이라면 여성은 실은 타자 가운데 타자라는 자리를 차지하는 데 손색이 없다.
타자, 그것이 여성인가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우리는 갑자기 망설이게 된다. ‘채식주의자 뱀파이어’를 읽노라면 우리는 이 저작을 가로지르는 윤리-정치적 프로그램이 바로 “타자-환대” 임을 손쉽게 눈치 챌 수 있다. 실은 이 책에서 저자가 나누는 꼭지는 대개 경험적 현실의 종류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가 구분하는 세계의 각 부분, 그러니까 “자본”에서 섭생 즉 “채식”까지, 우리는 여성이 중개되는 혹은 여성이 내재하는 현실을 한 땀 두 땀 따라가게 된다. 그렇지만 “타자”와 “환대”라는 꼭지는 바로 그런 경험적인 세계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이 두 가지가 전적으로 행위의 세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다른 장들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여성의 삶이 기재되어있는 현실이라면 이 두 개의 장은 바로 그것과 상대하는 정치적 주체성을 다룬다. 물론 그 정치적 주체란 당연히 여성일 것이다. 먼저 타자만 해도 그렇다. 그것은 어떤 객관적인 삶의 호칭이 아니다. 그것이 무슨 대상이든 타자는 저기 저 편에 있는 객체의 이름이 아니라 주체의 편에서 본 대상, 주체가 관련을 맺지 않는 한 어떤 무엇도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저 현실적 객체에 머물지 않고 타자가 되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저자 역시 이를 세심하게 분석한다. 타자는 나와 상대하는 것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가 아니라 내가 총체화하려고 아무리 애써도 그것을 벗어나는 대상, 심지어 내가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나의 부정성을, 저자가 자주 빌어 쓰는 최근의 비판이론에서 선용되고 있는 그 개념대로라면 “비체”, 내가 날 유지하기 위해 게워낸 나의 내부도 아니고 외부도 아닌 그 배설물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타자는 순전히 주체의 편에 서있다. 물론 그런 주체가 자신과의 연관 속에서만 파악되고 매개되는 대상을 위해 취할 정치적 몸짓이라 할 “환대”가, 역시 주체성에 속한다는 점 역시 두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불만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다. 과연 페미니즘적인 주체는 환대하는 주체일 수 있을까. 그렇다고 선뜻 동의하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타자의 환대라는 윤리학이 보편윤리가 되어버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의문이다. 알다시피 타자의 환대란 윤리학은 우리 시대에 가장 선호하는 윤리학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계급투쟁의 윤리보다는 덜 특정적이다. 계급이라는 사회적 현실의 주체보다는 타자라는 보편적 호환성에 개방된 주체가 훨씬 융통성 있게 들란다. 정치를 윤리화하는 자선과 연민의 시대에 적절하게 부합하는 서정적인 정의(正義), “포에틱 저스티스”야 말로 타자의 윤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물며 여성을 특정한 사회적 주체로서 고정하는 순간 우리를 옭아매는 시시콜콜한 트집, 이를테면 당신은 어떤 여성 주체의 입장에서 말하는가, 서구 백인 중간층 이성애자 기혼 여성의 입장에서 말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당신은 당신의 입장을 다른 여성을 재현할 수 있는 입장으로 특권화 하는가, 같은 집요하고 성가신 추궁을 생각하여 보자. 이런 정치적으로 올바른 골치 아픈 물음을 피하는 방법은, 다시 말해 그로부터 자신을 어떤 주체성의 자리에 놓아야 할지 불안하게 곤구하는 여성 주체에게 그 시름을 잊게 하는 길은, “타자”란 효과적인 처방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정치적으로 가장 올바른 여성이 흑인 레즈비언 채식주의자 여성으로 간단히 한정될 수 있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체 하는 여성주체의 아둔함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있다. 어떻게? 여성은 무엇보다 타자이므로?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불길한 냄새를 맡지 않을 수 없다. 왜냐면 하필 타자란 주체가 딱히 여성 주체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주체의 이름에는 수많은 주체의 이름이 자리할 수 있다. 마치 정치적 인도주의가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불행한 낯을 한 이들을 죄다 ‘내셔널지오그라픽’ 풍으로 혹은 CNN 풍으로 밤새도록 나열하듯이 말이다. 타자는 저 악명 높은 근대의 데카르트적 주체로부터 벗어나려는 기획으로부터 출현하였다는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그것을 빼다 박은 몰골을 하고 있다. 어쩌면 근대적인 데카르트적 주체는 손쉽게 그 역사적 출처를 샅샅이 규명할 수 있는데 반해 후기근대적 타자라는 이름을 내건 주체는 그 비특정성 때문에 마치 실종된 심해의 블랙박스처럼 거의 모든 주체를 망라하는 이름으로 행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타자는 근대의 보편적 주체보다 더 잡식(雜植)적이고 더 전방위적인 주체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렇기에 우리 시대의 가장 압도적인 보편적인 주체의 이름을 꼽자면 타자라는 주체가 청약 1순위인 것처럼 보인다, 해서 누가 토를 달 것일까. 내가 어떻게든 가닿아야 할, 헤아려야 할 주체가 타자라면 그것은 하버마스의 농담같은 의사소통적인 보편성의 주체보다 더 적나라하게 보편적이다.
객관적인 여자
사실 타자적 보편성은 보편윤리적 주체의 보편성과 다른 것이었음에 분명하다. 보편성을 어떤 구체적인 사회적인 내용에 구속시키려는 시도에 반대하기 위하여, 보다 엄밀하게 말하여 보편성이 어떤 특수성 속에 자신을 정박시키면서 보편성입네 허세를 부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보편성에 대한 집요한 감시를 하여 왔다. 그 탓에 또한 우리는 보편성이란 누가 담지하고 있느냐는 물음 앞에서 언제나 쩔쩔맨다. 그리고 서둘러 그런 질문은 보편성을 실체화한다고, 그것을 다시 실정적인 특수성 속에 감금한다고 역정을 내며 대답 아닌 대답을 하느라 분주히 떠든다. 그런데, 나는 실은 그것은 답변이 아니라 지능적인 알리바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알리바이를 엄격한 뜻에서 인식론적 범주로 간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알리바이는 객관성으로부터 벗어나 주체의 편에 숨으려는 소심한 잔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뚜렷한 현실에 눈감은 채 자신의 화행을 통해 객관성의 부재를 선언하려는 몸짓이 알리바이가 아니라면 대관절 알리바이는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환대하는 타자란 객관적인 삶의 세계를 헤아리지 못한다는 무능을 가리키는 표지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누구인가란 물음을 강박처럼 던지면서 정작 그 물음을 촉발한 외적인 삶의 세계, 즉 주관성의 물질적인 삶에 대한 반성을 할 수 없는 무력함을 잠재우려는 것. 다시 말해 무지한 주체가 그를 부인하려는 물신주의적 거부가 찾아낸 대상이 타자라면. 그럴 때 타자란 객관적인 세계의 보편성을 회피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특수화하는 몸짓에 매달리는 주체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젠더연구가 페미니즘을 편협성과 협소함으로부터 구출하는 출구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런 방향은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페미니즘의 확산은 젠더당파성을 희석시키는 대가를 지불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의 운동성을 일회적으로 소비해버리는 극장, 시장, 군중이라는 우상으로부터 어떻게 정치성을 계속 확보해 낼 수 있을 것인지가 앞으로 페미니즘의 관건이라고 볼 수 있다.” (302쪽)
그렇다면 위에서 인용한 “젠더당파성”을 다시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당파성이 경험적 특수성이 아니라 언제나 보편성을 좌절시키는 한계, 어떤 특수한 사회적 주체의 이름으로 발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보편성의 모순을 표지하는 것이라면, 젠더당파성은 보편윤리가 아니라 보편적 객관성이어야 하지 않을까. “극장, 시장, 군중”이라는 우상, 보편성을 특수한 주체들끼리의 힘의 협상으로 상연하는 극장, 모두 각자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처럼 둔갑시키는 시장, 거짓 보편성의 이름으로 자신을 지배하는 위치에 놓은 권력이 착취받는자를 호명하는 이름인 군중. 이 우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구원해야 할 것은 보편적인 객관성이 아닐까. 실은 이런 생각으로 나를 몰아넣은 것도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의 힘일지 모른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최종적인 보편성의 심급이 사유한다는 것이라면, 나는 사유하는 페미니스트를 만났고 그녀와의 대화로부터 이런 생각 한 더기라도 건졌을 것이므로, 말이다.
– 여성/이론에 기고한 글

생각하는 페미니즘 – 페미니스트 지식인이 두루두루 살피는 삶의 세계

“목숨은 처음부터 오물이었다.”(최승자)

그러니까 있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 무엇보다 페미니스트로서…
페미니즘을 제 아무리 간편하게 지식으로 먹고 뱉기를 다반사하는 남성 지식인 가운데 끼어있다 해서 ‘채식주의자 뱀파이어’란 아이러니한 괴물처럼 되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 자신의 남성적 욕망을 배반하면서 여성주의적 담론 근처를 배회하는 수컷 지식인들이 있고, 다른 이성애자 남성과 자신을 차별화시키며 남다른 자신의 자신의 상징 자본을 챙기려한다고 고깝게 볼지라도 그들이 페미니즘에 구애하는 일을 막을 길은 없다. 임옥희의 재치 있는 표현을 빌자면,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살려는 의지에서 자신을 “거식증”에 걸린 수컷으로 만드는 수척한 남성 지식인이 있다면 아마 그것은 페미니즘의 목소리에 경청하는 이일 것이다. 그런 어정쩡한 위치에 자리 잡고 나 역시 페미니즘과 대면했다 말해야 옳을 것이다.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의 대표 선수 가운데 한 명인 임옥희의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에 대한 글을 써보라는 부탁을 받고, 나는 그저 자신을 대화상대로 불러주었다는 호들갑스런 기분에 선뜻 응낙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글을 얼추 읽고 난 지금 나는 시쳇말로 대략 난감한 기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왜 빙충맞게 미리 글을 눈여겨보고 부탁에 응하지 않았을까 뒤늦게 책해보지만 그래봤자 이미 때는 늦은 셈이다.
왜 그녀의 글에 대하여 글을 쓰는 것이 난처한 일인가를 헤아리자면 단연 어떻게 쓰더라도 그것이 밑지는 장사가 될 것이라는 얕은 계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임옥희의 글은 잘 읽힌다. 그녀의 글을 열독한 이들이라면 모두 잘 알겠지만 그녀는 달변이고 능변이며 다변이다. 그만큼 그녀는 세상 정보에 훤하고 그것을 읽어볼 딱 안성맞춤의 페미니즘적 분석 도구를 여물게 자신의 연장통 속에 챙겨둔 것처럼 보인다. 1장을 여는 『자본』에서부터 마지막 장인 14장의 『채식』에 이르는 그녀의 글의 마디들을 훑으면서 우리는 콧노래를 부르며 재봉틀을 밟는 이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언어의 바구니에 담긴 알록달록한 실패들을 골라 재봉틀에 얹고 페달을 밡는 듯 보인다. 사통팔달의 페미니즘적 지식이 있다면 이는 단연 임옥희의 섬세하고 어쩌면 너무나 잘 마감질이 이뤄진 글의 세계일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주눅이 들지 않겠는가. 그녀와 같은 ‘말빨’의 여전사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여간한 내공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더럭 앞서는 건 다른 이였다 해도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페미니즘적인 주체란 무엇인가
그렇지만 ‘채식주의자 뱀파이어’를 읽는 독자로서의 쾌락을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의 글은 시원하다. 그녀는 페미니즘적인 시좌를 통해 포착된 현실을 족집게처럼 집어내고 그것을 해독할 수 있는 혹은 요령부득의 현실을 의식적인 반성의 대상으로 빚어내는 말들을 찾아낸다. 아쉽다면 각장의 끝마다 그녀가 던지는 처방과 조언은 적잖이 겸손하다고 하기엔 소박하고 또 무던하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각 장의 말미를 장식하는 글들은 적잖이 밍밍하다.
“사람은 나무처럼 한 곳에 뿌리내리고 살지 않는다. 심지어 나무도 여행한다. 이처럼 지구 지역적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떠도는 시대 한 겨레 한 민족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다민족 다문화 가족으로 살아야 하는 시대에 이르러 불청객을 손님으로 환대하고 공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과제일 것이다.”(91쪽)
“탈식민의 시대라고 하지만 이제는 전지구촌적인 금융자본주의가 세계의 얼굴을 사막화하고 있는 시대다. 그로인해 세계가 파산되었다. 하지만, 파산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면 그 지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기회도 열리게 된다. 어디서든지 간에 시작할 지점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막의 얼굴에서부터 생존의 발걸음을 다시 옮겨놓기 시작할 때다. 주체와 타자가 조우하는 것이 비록 신기루에 불과할지라도 사막 어딘가에 우물은 있을 것이므로.”(230쪽)
등등. 물론 이런 싱거워지고만 맺는 글에 대한 책임을 저자 탓으로 귀착시키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다르게 생각하고 달리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은 오롯이 어느 출중한 지식인의 사유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닌 탓이다. 사유를 촉발하는 힘은 사유 자체의 섬세함과 완고함이 아니라 그것을 강요하는 힘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사유는 사유 자체로부터 출현하지 않고 사유를 강제하는 어떤 외압으로부터 촉발된다. 더욱이 페미니즘적 사유는 모든 급진적인 사유가 그렇듯이 당연 외부적인 사유라고, 나는 믿는다. 사유를 추동하는 그러한 힘은 집단적인 실천에서 혹은 사회적인 투쟁에서 말미암는다. 그렇다면 페미니스트 지식인이 우리에게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안할 때 그것은 실은 그것은 그녀의 의식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덮치고 짓누른 힘으로부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사회적 실천, 여기에서라면 페미니스트 운동으로부터 강요된 것이었을 것이다. 실은 나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페미니즘은 나에게 가부장제에 대한 부적으로서의 일종의 페티시였다”(342쪽)고 그녀가 말할 때, 그것은 보다 강하게 읽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연물(戀物)로서의 페미니즘, 자신의 물신이 되어버린 페미니즘은 흔한 독법을 거슬러 읽어야 제격일 것이다. 이를테면 여기에서 저자가 말하는 페티시는 자기가 품은 진정한 욕망의 원인을 망각하도록 하고 욕망의 대상을 감춰버리는 데 이바지하는 그런 허깨비로서의 페티시가 아닐 것이다. 여기에서의 페티시는 내밀한 의식적 반성의 주체로서의 나를 저지하며 혹은 압도하며 나를 사유케 하는 외부적인 힘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저자가 자주 참조하는 라캉의 말을 빌자면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페미니즘적인 사유에 더 적절한 말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페미니즘적인 사유가 한결같이 그러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 어불성설이다. 저자가 여러 번 거듭하여 말하듯이 지난 수십 년간 페미니즘의 자리는 크게 바뀌어 왔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페미니즘의 현기증 나는 성공이 어떤 쓸쓸한 결과를 낳았는지 잘 알고 있다. 여성 주류화 프로그램을 통해 효과적인 통치의 지식과 기술이 된 국가페미니즘을 꼽든, 아니면 자아실현의 윤리에 유별나게 휘둘리다 끝내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이란 자조까지 내뱉게 된 영 페미니즘을 돌아보든, 정치로서의 혹은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은 거의 방향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 탓에 갑자기 실현가능한 정책 대안을 마련하는데 골몰하고 가부장적인 이성애자 남성들의 반페미니즘적인 행패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페미니즘이 소소해지고 어쩌면 적잖이 한심스러워지기까지 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사내 녀석’이 나서서 할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페미니즘으로부터 다르게 생각하기를 한 수 배운 많은 남자들에게 페미니즘이 그런 섬뜩한 힘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는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에 반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권력의 게임 속에 자신을 밀어 넣은 채 그 권력 게임의 언어에 갇히고 만 처량한 처지의 페미니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를 극력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성이 있다는 것, 여성이 사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러니까 사회학적인 여성, 세상에 몇 명이나 살고 있고 그들이 살아가는 객관적인 삶의 처지가 어떠하다는 수많은 사실 속에서 분절된 여성, 그런 여성을 우리는 누구나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고 또 달리 그에 관해 더 깊이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여성의 존재가 그냥 그저 그렇고 그런 세계 속의 사실 속으로 환원할 수 없다고 말하는 난데없는 목소리로부터 사실성 속에서는 부재하는 여성이 묵직한 현존 속의 여성으로 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그것은 미처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눈으로 들어오겐 이미 실존하던 여성, 미발견된 여성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우리 시야 속으로 들어온 여성은 여성의 몰골을 한 유령일 것이다. 다시 한 번 저자인 임옥희가 참조하는 데리다의 표현을 빌자면 그 어떤 실정적 규정도 미결정성의 지평으로 회부하고,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을 확정하기 위해 끊임없이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증언을 찾게 만들며,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내부적인 기원을 찾기보다는 자신을 언제나 자신이도록 밀어붙이는 힘과의 부정적 관계만을 자신의 유일한 (비)정체성으로 갖는 주체 말이다. 그러한 “대리보충”적인 논리 속에서 자신을 되새김질 하는 주체가 여성이라면 여성은 실은 타자 가운데 타자라는 자리를 차지하는 데 손색이 없다.
타자, 그것이 여성인가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우리는 갑자기 망설이게 된다. ‘채식주의자 뱀파이어’를 읽노라면 우리는 이 저작을 가로지르는 윤리-정치적 프로그램이 바로 “타자-환대” 임을 손쉽게 눈치 챌 수 있다. 실은 이 책에서 저자가 나누는 꼭지는 대개 경험적 현실의 종류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가 구분하는 세계의 각 부분, 그러니까 “자본”에서 섭생 즉 “채식”까지, 우리는 여성이 중개되는 혹은 여성이 내재하는 현실을 한 땀 두 땀 따라가게 된다. 그렇지만 “타자”와 “환대”라는 꼭지는 바로 그런 경험적인 세계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이 두 가지가 전적으로 행위의 세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다른 장들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여성의 삶이 기재되어있는 현실이라면 이 두 개의 장은 바로 그것과 상대하는 정치적 주체성을 다룬다. 물론 그 정치적 주체란 당연히 여성일 것이다. 먼저 타자만 해도 그렇다. 그것은 어떤 객관적인 삶의 호칭이 아니다. 그것이 무슨 대상이든 타자는 저기 저 편에 있는 객체의 이름이 아니라 주체의 편에서 본 대상, 주체가 관련을 맺지 않는 한 어떤 무엇도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저 현실적 객체에 머물지 않고 타자가 되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저자 역시 이를 세심하게 분석한다. 타자는 나와 상대하는 것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가 아니라 내가 총체화하려고 아무리 애써도 그것을 벗어나는 대상, 심지어 내가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나의 부정성을, 저자가 자주 빌어 쓰는 최근의 비판이론에서 선용되고 있는 그 개념대로라면 “비체”, 내가 날 유지하기 위해 게워낸 나의 내부도 아니고 외부도 아닌 그 배설물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타자는 순전히 주체의 편에 서있다. 물론 그런 주체가 자신과의 연관 속에서만 파악되고 매개되는 대상을 위해 취할 정치적 몸짓이라 할 “환대”가, 역시 주체성에 속한다는 점 역시 두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불만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다. 과연 페미니즘적인 주체는 환대하는 주체일 수 있을까. 그렇다고 선뜻 동의하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타자의 환대라는 윤리학이 보편윤리가 되어버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의문이다. 알다시피 타자의 환대란 윤리학은 우리 시대에 가장 선호하는 윤리학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계급투쟁의 윤리보다는 덜 특정적이다. 계급이라는 사회적 현실의 주체보다는 타자라는 보편적 호환성에 개방된 주체가 훨씬 융통성 있게 들란다. 정치를 윤리화하는 자선과 연민의 시대에 적절하게 부합하는 서정적인 정의(正義), “포에틱 저스티스”야 말로 타자의 윤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물며 여성을 특정한 사회적 주체로서 고정하는 순간 우리를 옭아매는 시시콜콜한 트집, 이를테면 당신은 어떤 여성 주체의 입장에서 말하는가, 서구 백인 중간층 이성애자 기혼 여성의 입장에서 말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당신은 당신의 입장을 다른 여성을 재현할 수 있는 입장으로 특권화 하는가, 같은 집요하고 성가신 추궁을 생각하여 보자. 이런 정치적으로 올바른 골치 아픈 물음을 피하는 방법은, 다시 말해 그로부터 자신을 어떤 주체성의 자리에 놓아야 할지 불안하게 곤구하는 여성 주체에게 그 시름을 잊게 하는 길은, “타자”란 효과적인 처방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정치적으로 가장 올바른 여성이 흑인 레즈비언 채식주의자 여성으로 간단히 한정될 수 있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체 하는 여성주체의 아둔함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있다. 어떻게? 여성은 무엇보다 타자이므로?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불길한 냄새를 맡지 않을 수 없다. 왜냐면 하필 타자란 주체가 딱히 여성 주체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주체의 이름에는 수많은 주체의 이름이 자리할 수 있다. 마치 정치적 인도주의가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불행한 낯을 한 이들을 죄다 ‘내셔널지오그라픽’ 풍으로 혹은 CNN 풍으로 밤새도록 나열하듯이 말이다. 타자는 저 악명 높은 근대의 데카르트적 주체로부터 벗어나려는 기획으로부터 출현하였다는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그것을 빼다 박은 몰골을 하고 있다. 어쩌면 근대적인 데카르트적 주체는 손쉽게 그 역사적 출처를 샅샅이 규명할 수 있는데 반해 후기근대적 타자라는 이름을 내건 주체는 그 비특정성 때문에 마치 실종된 심해의 블랙박스처럼 거의 모든 주체를 망라하는 이름으로 행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타자는 근대의 보편적 주체보다 더 잡식(雜植)적이고 더 전방위적인 주체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렇기에 우리 시대의 가장 압도적인 보편적인 주체의 이름을 꼽자면 타자라는 주체가 청약 1순위인 것처럼 보인다, 해서 누가 토를 달 것일까. 내가 어떻게든 가닿아야 할, 헤아려야 할 주체가 타자라면 그것은 하버마스의 농담같은 의사소통적인 보편성의 주체보다 더 적나라하게 보편적이다.
객관적인 여자
사실 타자적 보편성은 보편윤리적 주체의 보편성과 다른 것이었음에 분명하다. 보편성을 어떤 구체적인 사회적인 내용에 구속시키려는 시도에 반대하기 위하여, 보다 엄밀하게 말하여 보편성이 어떤 특수성 속에 자신을 정박시키면서 보편성입네 허세를 부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보편성에 대한 집요한 감시를 하여 왔다. 그 탓에 또한 우리는 보편성이란 누가 담지하고 있느냐는 물음 앞에서 언제나 쩔쩔맨다. 그리고 서둘러 그런 질문은 보편성을 실체화한다고, 그것을 다시 실정적인 특수성 속에 감금한다고 역정을 내며 대답 아닌 대답을 하느라 분주히 떠든다. 그런데, 나는 실은 그것은 답변이 아니라 지능적인 알리바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알리바이를 엄격한 뜻에서 인식론적 범주로 간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알리바이는 객관성으로부터 벗어나 주체의 편에 숨으려는 소심한 잔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뚜렷한 현실에 눈감은 채 자신의 화행을 통해 객관성의 부재를 선언하려는 몸짓이 알리바이가 아니라면 대관절 알리바이는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환대하는 타자란 객관적인 삶의 세계를 헤아리지 못한다는 무능을 가리키는 표지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누구인가란 물음을 강박처럼 던지면서 정작 그 물음을 촉발한 외적인 삶의 세계, 즉 주관성의 물질적인 삶에 대한 반성을 할 수 없는 무력함을 잠재우려는 것. 다시 말해 무지한 주체가 그를 부인하려는 물신주의적 거부가 찾아낸 대상이 타자라면. 그럴 때 타자란 객관적인 세계의 보편성을 회피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특수화하는 몸짓에 매달리는 주체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젠더연구가 페미니즘을 편협성과 협소함으로부터 구출하는 출구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런 방향은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페미니즘의 확산은 젠더당파성을 희석시키는 대가를 지불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의 운동성을 일회적으로 소비해버리는 극장, 시장, 군중이라는 우상으로부터 어떻게 정치성을 계속 확보해 낼 수 있을 것인지가 앞으로 페미니즘의 관건이라고 볼 수 있다.” (302쪽)
그렇다면 위에서 인용한 “젠더당파성”을 다시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당파성이 경험적 특수성이 아니라 언제나 보편성을 좌절시키는 한계, 어떤 특수한 사회적 주체의 이름으로 발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보편성의 모순을 표지하는 것이라면, 젠더당파성은 보편윤리가 아니라 보편적 객관성이어야 하지 않을까. “극장, 시장, 군중”이라는 우상, 보편성을 특수한 주체들끼리의 힘의 협상으로 상연하는 극장, 모두 각자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처럼 둔갑시키는 시장, 거짓 보편성의 이름으로 자신을 지배하는 위치에 놓은 권력이 착취받는자를 호명하는 이름인 군중. 이 우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구원해야 할 것은 보편적인 객관성이 아닐까. 실은 이런 생각으로 나를 몰아넣은 것도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의 힘일지 모른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최종적인 보편성의 심급이 사유한다는 것이라면, 나는 사유하는 페미니스트를 만났고 그녀와의 대화로부터 이런 생각 한 더기라도 건졌을 것이므로, 말이다.
– 여성/이론에 기고한 글

생각하는 페미니즘 – 페미니스트 지식인이 두루두루 살피는 삶의 세계

“목숨은 처음부터 오물이었다.”(최승자)

그러니까 있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 무엇보다 페미니스트로서…
페미니즘을 제 아무리 간편하게 지식으로 먹고 뱉기를 다반사하는 남성 지식인 가운데 끼어있다 해서 ‘채식주의자 뱀파이어’란 아이러니한 괴물처럼 되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 자신의 남성적 욕망을 배반하면서 여성주의적 담론 근처를 배회하는 수컷 지식인들이 있고, 다른 이성애자 남성과 자신을 차별화시키며 남다른 자신의 자신의 상징 자본을 챙기려한다고 고깝게 볼지라도 그들이 페미니즘에 구애하는 일을 막을 길은 없다. 임옥희의 재치 있는 표현을 빌자면,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살려는 의지에서 자신을 “거식증”에 걸린 수컷으로 만드는 수척한 남성 지식인이 있다면 아마 그것은 페미니즘의 목소리에 경청하는 이일 것이다. 그런 어정쩡한 위치에 자리 잡고 나 역시 페미니즘과 대면했다 말해야 옳을 것이다.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의 대표 선수 가운데 한 명인 임옥희의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에 대한 글을 써보라는 부탁을 받고, 나는 그저 자신을 대화상대로 불러주었다는 호들갑스런 기분에 선뜻 응낙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글을 얼추 읽고 난 지금 나는 시쳇말로 대략 난감한 기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왜 빙충맞게 미리 글을 눈여겨보고 부탁에 응하지 않았을까 뒤늦게 책해보지만 그래봤자 이미 때는 늦은 셈이다.
왜 그녀의 글에 대하여 글을 쓰는 것이 난처한 일인가를 헤아리자면 단연 어떻게 쓰더라도 그것이 밑지는 장사가 될 것이라는 얕은 계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임옥희의 글은 잘 읽힌다. 그녀의 글을 열독한 이들이라면 모두 잘 알겠지만 그녀는 달변이고 능변이며 다변이다. 그만큼 그녀는 세상 정보에 훤하고 그것을 읽어볼 딱 안성맞춤의 페미니즘적 분석 도구를 여물게 자신의 연장통 속에 챙겨둔 것처럼 보인다. 1장을 여는 「자본」에서부터 마지막 장인 14장의 「채식」에 이르는 그녀의 글의 마디들을 훑으면서 우리는 콧노래를 부르며 재봉틀을 밟는 이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언어의 바구니에 담긴 알록달록한 실패들을 골라 재봉틀에 얹고 페달을 밡는 듯 보인다. 사통팔달의 페미니즘적 지식이 있다면 이는 단연 임옥희의 섬세하고 어쩌면 너무나 잘 마감질이 이뤄진 글의 세계일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주눅이 들지 않겠는가. 그녀와 같은 ‘말빨’의 여전사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여간한 내공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더럭 앞서는 건 다른 이였다 해도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페미니즘적인 주체란 무엇인가
그렇지만 ‘채식주의자 뱀파이어’를 읽는 독자로서의 쾌락을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의 글은 시원하다. 그녀는 페미니즘적인 시좌를 통해 포착된 현실을 족집게처럼 집어내고 그것을 해독할 수 있는 혹은 요령부득의 현실을 의식적인 반성의 대상으로 빚어내는 말들을 찾아낸다. 아쉽다면 각장의 끝마다 그녀가 던지는 처방과 조언은 적잖이 겸손하다고 하기엔 소박하고 또 무던하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각 장의 말미를 장식하는 글들은 적잖이 밍밍하다.
“사람은 나무처럼 한 곳에 뿌리내리고 살지 않는다. 심지어 나무도 여행한다. 이처럼 지구 지역적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떠도는 시대 한 겨레 한 민족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다민족 다문화 가족으로 살아야 하는 시대에 이르러 불청객을 손님으로 환대하고 공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과제일 것이다.”(91쪽)
“탈식민의 시대라고 하지만 이제는 전지구촌적인 금융자본주의가 세계의 얼굴을 사막화하고 있는 시대다. 그로인해 세계가 파산되었다. 하지만, 파산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면 그 지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기회도 열리게 된다. 어디서든지 간에 시작할 지점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막의 얼굴에서부터 생존의 발걸음을 다시 옮겨놓기 시작할 때다. 주체와 타자가 조우하는 것이 비록 신기루에 불과할지라도 사막 어딘가에 우물은 있을 것이므로.”(230쪽)
등등. 물론 이런 싱거워지고만 맺는 글에 대한 책임을 저자 탓으로 귀착시키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다르게 생각하고 달리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은 오롯이 어느 출중한 지식인의 사유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닌 탓이다. 사유를 촉발하는 힘은 사유 자체의 섬세함과 완고함이 아니라 그것을 강요하는 힘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사유는 사유 자체로부터 출현하지 않고 사유를 강제하는 어떤 외압으로부터 촉발된다. 더욱이 페미니즘적 사유는 모든 급진적인 사유가 그렇듯이 당연 외부적인 사유라고, 나는 믿는다. 사유를 추동하는 그러한 힘은 집단적인 실천에서 혹은 사회적인 투쟁에서 말미암는다. 그렇다면 페미니스트 지식인이 우리에게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안할 때 그것은 실은 그것은 그녀의 의식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덮치고 짓누른 힘으로부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사회적 실천, 여기에서라면 페미니스트 운동으로부터 강요된 것이었을 것이다. 실은 나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페미니즘은 나에게 가부장제에 대한 부적으로서의 일종의 페티시였다”(342쪽)고 그녀가 말할 때, 그것은 보다 강하게 읽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연물(戀物)로서의 페미니즘, 자신의 물신이 되어버린 페미니즘은 흔한 독법을 거슬러 읽어야 제격일 것이다. 이를테면 여기에서 저자가 말하는 페티시는 자기가 품은 진정한 욕망의 원인을 망각하도록 하고 욕망의 대상을 감춰버리는 데 이바지하는 그런 허깨비로서의 페티시가 아닐 것이다. 여기에서의 페티시는 내밀한 의식적 반성의 주체로서의 나를 저지하며 혹은 압도하며 나를 사유케 하는 외부적인 힘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저자가 자주 참조하는 라캉의 말을 빌자면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페미니즘적인 사유에 더 적절한 말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페미니즘적인 사유가 한결같이 그러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 어불성설이다. 저자가 여러 번 거듭하여 말하듯이 지난 수십 년간 페미니즘의 자리는 크게 바뀌어 왔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페미니즘의 현기증 나는 성공이 어떤 쓸쓸한 결과를 낳았는지 잘 알고 있다. 여성 주류화 프로그램을 통해 효과적인 통치의 지식과 기술이 된 국가페미니즘을 꼽든, 아니면 자아실현의 윤리에 유별나게 휘둘리다 끝내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이란 자조까지 내뱉게 된 영 페미니즘을 돌아보든, 정치로서의 혹은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은 거의 방향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 탓에 갑자기 실현가능한 정책 대안을 마련하는데 골몰하고 가부장적인 이성애자 남성들의 반페미니즘적인 행패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페미니즘이 소소해지고 어쩌면 적잖이 한심스러워지기까지 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사내 녀석’이 나서서 할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페미니즘으로부터 다르게 생각하기를 한 수 배운 많은 남자들에게 페미니즘이 그런 섬뜩한 힘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는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에 반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권력의 게임 속에 자신을 밀어 넣은 채 그 권력 게임의 언어에 갇히고 만 처량한 처지의 페미니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를 극력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성이 있다는 것, 여성이 사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러니까 사회학적인 여성, 세상에 몇 명이나 살고 있고 그들이 살아가는 객관적인 삶의 처지가 어떠하다는 수많은 사실 속에서 분절된 여성, 그런 여성을 우리는 누구나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고 또 달리 그에 관해 더 깊이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여성의 존재가 그냥 그저 그렇고 그런 세계 속의 사실 속으로 환원할 수 없다고 말하는 난데없는 목소리로부터 사실성 속에서는 부재하는 여성이 묵직한 현존 속의 여성으로 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그것은 미처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눈으로 들어오겐 이미 실존하던 여성, 미발견된 여성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우리 시야 속으로 들어온 여성은 여성의 몰골을 한 유령일 것이다. 다시 한 번 저자인 임옥희가 참조하는 데리다의 표현을 빌자면 그 어떤 실정적 규정도 미결정성의 지평으로 회부하고,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을 확정하기 위해 끊임없이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증언을 찾게 만들며,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내부적인 기원을 찾기보다는 자신을 언제나 자신이도록 밀어붙이는 힘과의 부정적 관계만을 자신의 유일한 (비)정체성으로 갖는 주체 말이다. 그러한 “대리보충”적인 논리 속에서 자신을 되새김질 하는 주체가 여성이라면 여성은 실은 타자 가운데 타자라는 자리를 차지하는 데 손색이 없다.
타자, 그것이 여성인가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우리는 갑자기 망설이게 된다. ‘채식주의자 뱀파이어’를 읽노라면 우리는 이 저작을 가로지르는 윤리-정치적 프로그램이 바로 “타자-환대” 임을 손쉽게 눈치 챌 수 있다. 실은 이 책에서 저자가 나누는 꼭지는 대개 경험적 현실의 종류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가 구분하는 세계의 각 부분, 그러니까 “자본”에서 섭생 즉 “채식”까지, 우리는 여성이 중개되는 혹은 여성이 내재하는 현실을 한 땀 두 땀 따라가게 된다. 그렇지만 “타자”와 “환대”라는 꼭지는 바로 그런 경험적인 세계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이 두 가지가 전적으로 행위의 세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다른 장들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여성의 삶이 기재되어있는 현실이라면 이 두 개의 장은 바로 그것과 상대하는 정치적 주체성을 다룬다. 물론 그 정치적 주체란 당연히 여성일 것이다. 먼저 타자만 해도 그렇다. 그것은 어떤 객관적인 삶의 호칭이 아니다. 그것이 무슨 대상이든 타자는 저기 저 편에 있는 객체의 이름이 아니라 주체의 편에서 본 대상, 주체가 관련을 맺지 않는 한 어떤 무엇도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저 현실적 객체에 머물지 않고 타자가 되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저자 역시 이를 세심하게 분석한다. 타자는 나와 상대하는 것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가 아니라 내가 총체화하려고 아무리 애써도 그것을 벗어나는 대상, 심지어 내가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나의 부정성을, 저자가 자주 빌어 쓰는 최근의 비판이론에서 선용되고 있는 그 개념대로라면 “비체”, 내가 날 유지하기 위해 게워낸 나의 내부도 아니고 외부도 아닌 그 배설물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타자는 순전히 주체의 편에 서있다. 물론 그런 주체가 자신과의 연관 속에서만 파악되고 매개되는 대상을 위해 취할 정치적 몸짓이라 할 “환대”가, 역시 주체성에 속한다는 점 역시 두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불만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다. 과연 페미니즘적인 주체는 환대하는 주체일 수 있을까. 그렇다고 선뜻 동의하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타자의 환대라는 윤리학이 보편윤리가 되어버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의문이다. 알다시피 타자의 환대란 윤리학은 우리 시대에 가장 선호하는 윤리학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계급투쟁의 윤리보다는 덜 특정적이다. 계급이라는 사회적 현실의 주체보다는 타자라는 보편적 호환성에 개방된 주체가 훨씬 융통성 있게 들란다. 정치를 윤리화하는 자선과 연민의 시대에 적절하게 부합하는 서정적인 정의(正義), “포에틱 저스티스”야 말로 타자의 윤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물며 여성을 특정한 사회적 주체로서 고정하는 순간 우리를 옭아매는 시시콜콜한 트집, 이를테면 당신은 어떤 여성 주체의 입장에서 말하는가, 서구 백인 중간층 이성애자 기혼 여성의 입장에서 말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당신은 당신의 입장을 다른 여성을 재현할 수 있는 입장으로 특권화 하는가, 같은 집요하고 성가신 추궁을 생각하여 보자. 이런 정치적으로 올바른 골치 아픈 물음을 피하는 방법은, 다시 말해 그로부터 자신을 어떤 주체성의 자리에 놓아야 할지 불안하게 곤구하는 여성 주체에게 그 시름을 잊게 하는 길은, “타자”란 효과적인 처방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정치적으로 가장 올바른 여성이 흑인 레즈비언 채식주의자 여성으로 간단히 한정될 수 있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체 하는 여성주체의 아둔함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있다. 어떻게? 여성은 무엇보다 타자이므로?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불길한 냄새를 맡지 않을 수 없다. 왜냐면 하필 타자란 주체가 딱히 여성 주체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주체의 이름에는 수많은 주체의 이름이 자리할 수 있다. 마치 정치적 인도주의가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불행한 낯을 한 이들을 죄다 ‘내셔널지오그라픽’ 풍으로 혹은 CNN 풍으로 밤새도록 나열하듯이 말이다. 타자는 저 악명 높은 근대의 데카르트적 주체로부터 벗어나려는 기획으로부터 출현하였다는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그것을 빼다 박은 몰골을 하고 있다. 어쩌면 근대적인 데카르트적 주체는 손쉽게 그 역사적 출처를 샅샅이 규명할 수 있는데 반해 후기근대적 타자라는 이름을 내건 주체는 그 비특정성 때문에 마치 실종된 심해의 블랙박스처럼 거의 모든 주체를 망라하는 이름으로 행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타자는 근대의 보편적 주체보다 더 잡식(雜植)적이고 더 전방위적인 주체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렇기에 우리 시대의 가장 압도적인 보편적인 주체의 이름을 꼽자면 타자라는 주체가 청약 1순위인 것처럼 보인다, 해서 누가 토를 달 것일까. 내가 어떻게든 가닿아야 할, 헤아려야 할 주체가 타자라면 그것은 하버마스의 농담같은 의사소통적인 보편성의 주체보다 더 적나라하게 보편적이다.
객관적인 여자
사실 타자적 보편성은 보편윤리적 주체의 보편성과 다른 것이었음에 분명하다. 보편성을 어떤 구체적인 사회적인 내용에 구속시키려는 시도에 반대하기 위하여, 보다 엄밀하게 말하여 보편성이 어떤 특수성 속에 자신을 정박시키면서 보편성입네 허세를 부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보편성에 대한 집요한 감시를 하여 왔다. 그 탓에 또한 우리는 보편성이란 누가 담지하고 있느냐는 물음 앞에서 언제나 쩔쩔맨다. 그리고 서둘러 그런 질문은 보편성을 실체화한다고, 그것을 다시 실정적인 특수성 속에 감금한다고 역정을 내며 대답 아닌 대답을 하느라 분주히 떠든다. 그런데, 나는 실은 그것은 답변이 아니라 지능적인 알리바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알리바이를 엄격한 뜻에서 인식론적 범주로 간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알리바이는 객관성으로부터 벗어나 주체의 편에 숨으려는 소심한 잔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뚜렷한 현실에 눈감은 채 자신의 화행을 통해 객관성의 부재를 선언하려는 몸짓이 알리바이가 아니라면 대관절 알리바이는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환대하는 타자란 객관적인 삶의 세계를 헤아리지 못한다는 무능을 가리키는 표지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누구인가란 물음을 강박처럼 던지면서 정작 그 물음을 촉발한 외적인 삶의 세계, 즉 주관성의 물질적인 삶에 대한 반성을 할 수 없는 무력함을 잠재우려는 것. 다시 말해 무지한 주체가 그를 부인하려는 물신주의적 거부가 찾아낸 대상이 타자라면. 그럴 때 타자란 객관적인 세계의 보편성을 회피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특수화하는 몸짓에 매달리는 주체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젠더연구가 페미니즘을 편협성과 협소함으로부터 구출하는 출구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런 방향은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페미니즘의 확산은 젠더당파성을 희석시키는 대가를 지불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의 운동성을 일회적으로 소비해버리는 극장, 시장, 군중이라는 우상으로부터 어떻게 정치성을 계속 확보해 낼 수 있을 것인지가 앞으로 페미니즘의 관건이라고 볼 수 있다.” (302쪽)
그렇다면 위에서 인용한 “젠더당파성”을 다시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당파성이 경험적 특수성이 아니라 언제나 보편성을 좌절시키는 한계, 어떤 특수한 사회적 주체의 이름으로 발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보편성의 모순을 표지하는 것이라면, 젠더당파성은 보편윤리가 아니라 보편적 객관성이어야 하지 않을까. “극장, 시장, 군중”이라는 우상, 보편성을 특수한 주체들끼리의 힘의 협상으로 상연하는 극장, 모두 각자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처럼 둔갑시키는 시장, 거짓 보편성의 이름으로 자신을 지배하는 위치에 놓은 권력이 착취받는자를 호명하는 이름인 군중. 이 우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구원해야 할 것은 보편적인 객관성이 아닐까. 실은 이런 생각으로 나를 몰아넣은 것도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의 힘일지 모른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최종적인 보편성의 심급이 사유한다는 것이라면, 나는 사유하는 페미니스트를 만났고 그녀와의 대화로부터 이런 생각 한 더기라도 건졌을 것이므로, 말이다.
– 여성/이론에 기고한 글

미술의 금융화 혹은 신경제에서의 미술의 운명


The XX, Crytalised

현대미술의 암호해독법, 메이-모제스 미술품 지수
현대 미술을 재생산하는 체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변화를 꼽자면 단연 미술의 금융화(financialization)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상품으로서의 미술이란 측면에서의 변화에 머물지 않고 현대 미술을 에워싼 많은 요인들을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변화를 가져왔다고 말할 수 있다. 증권이나 채권에 대한 투자를 뒤잇는 투자대상으로서이든 아니면 조세 회피를 가능케 하는 유력한 투자수단으로서이든 미술이 주목할 만한 보상을 가져다주는 자산이 되었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금융화된 경제 체제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상품으로서의 미술이란 것에 머물지 않고 미술가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의하도록 이끌고 미술을 전유하고 체험하는 방식을 변모시키며 미술을 사회적으로 위치시키는 다양한 제도와 정책을 변형하고 있다면 문제는 다르다. 그런 점에서 미술의 금융화란 곧 미술을 제작하고 전유하는 사회적 체계 자체의 변화를 가리킨다고 말해야 옳다.
아마 미술의 금융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징후를 꼽자면 ‘메이-모제스 미술품 지수 Mei Moses Art Index’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주요 미술 옥션에서의 미술품 거래의 동향을 추적하고 그것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미술품이 어떤 가격으로 거래되었는지를 알려준다. 이 때 메이-모제스 지수는 미술이 지금 금융화된 경제에서 어떻게 투기적인 상품으로 출현하고 활약하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1970년대 이후 서구를 비롯하여 많은 자본주의 국가가 겪은 경제적 변화를 금융화로 풀이할 때 이는 흔히 금융부문이 생산부문이나 임금의 희생을 대가로 하여 부를 추구하는 경제, 생산이나 통화당국의 개입 능력을 넘어 금융영역이 상대적 자율성을 획득하여 고삐풀린 채 움직이는 경제, 여느 사회의 경제적 대리인 혹은 대표자의 역할을 금융 자산을 운용하는 이들이 떠맡게 된 경제, 누군가의 말을 빌자면 ‘채권자의 독재’가 맹위를 떨치는 전대미문의 자본주의를 가리키는 것으로 말할 수도 있다. 물론 이는 많은 이들이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새로운 정치경제적 체제가 등장한 것과 떼어놓은 채 이해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예술 역시 그와 함께 변신하여 왔다.
미술 시장은 증권이나 다른 금융상품에 비해 주변적인 시장일 뿐 그것이 거래하는 대상이 자산(asset)이란 점에서, 그리고 그런 연유로 금융화되어야 할 것이란 점에서 다른 모든 것과 다르지 않다. 메이-모제스 미술품 지수는 겉보기에 미술이 상품으로서 어떻게 거래되었고 그것은 어떤 가격 변동을 겪었는지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메이-모제스 미술품 지수는 그것을 초과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미술을 자산으로서 표상한다. 따라서 우리는 인상주의자들의 회화를 “블루 칩(blue chip)”이라 부르고, 이중섭이나 박수근을 두고 서슴없이 “한국 미술의 영원한 블루칩”이라 일컬으며, 다미엔 허스트(Damien Hirst)같은 이를 “아트 스타(art star)”라 부른다 해서, 그다지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 메이-모제스 지수의 창안자들이 단언하듯이 미술품이 가진 아름다움 가운데 단연 큰 아름다움은 그것의 재정적 성과(financial performance)이다. 따라서 미술에서 아름다움을 완상하려면 그것은 바로 그것의 또 다른 아름다움, 즉 보이지 않게 아른거리는 그것의 재무적인 성과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크리스티나 소더비같은 유명한 미술경매기관이 운영하는 교육기관에서 말하는 “감식안(connoisseurship)”의 필수 성분인 것이다. 그러나 물론 그런 말은 금융화된 신경제의 세계에서 기만에 가깝다. 어느 콜렉터의 솔직한 말처럼 사람들은 눈으로 그림을 사는 것이 아니라 투자가치를 둘러싼 소문을 듣고 그림을 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림을 사는 것은 귀를 통해서이다.
후기자본주의 미술의 문화적 논리, 미술의 금융화?
그렇지만 미술의 금융화는 변화된 자본주의가 생산하는 문화적 논리에 비추어 이야기되어야 한다. 미술이 자산으로서 시장 안에서 취급되는 것, 미술품을 구매하는 것이 더 이상 미술 애호가나 그것의 공적인 전시를 위한 공공미술관이 아니라 미술펀드이거나 아니면 미술품의 시장가치를 증대시키고 그것을 통해 수익을 증대시키려는 옥션의 몫이 되었다는 것. 그 역시 미술의 금융화를 가리킨다. 그렇지만 금융화를 새로운 자본주의에 기반한 문화적 논리로서 받아들인다면 미술의 금융화는 그 이상의 이야기를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단지 우리는 두 가지만 꼽아보도록 하자.
먼저 현대미술의 가장 중요한 제도가 되어버린 비엔날레를 생각해 보자. 비에날레의 부상은 금융화된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지구화의 효과를 헤아리지 않는 한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일 것이다. 탈식민화가 초래한 의미심장한 변화 가운데 하나는 보편적인 문화에 등록된 인간과 나머지 세계의 원주민이라는 구분을 지우고 모두를 인구학적으로 평등한 삶의 주인으로 만들어냈다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변화는 취향의 국제화(우리는 모두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코카콜라를 마시며 크리스마스를 경축한다 등)는 물론 문화적 리터러시의 일반화를 초래한다. 그러나 이것은 위계적인 지구적 질서가 상실한 것이 아님은 지구화가 잘 보여준다.
금융 자본은 직접적인 생산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경제적 삶의 리듬이 아니라 투자와 수익이라는 원리에 따라 순식간에 이동한다. 따라서 생산과 판매, 호황과 불황 등의 리듬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다양한 지수의 변화에 따라 거의 자동적으로 이동하는 자본의 리듬으로 대체된다. 이는 미술의 세계에서도 다르지 않다. 비엔날레는 이제 지역적인 것과 지구적인 것의 관계를 새롭게 구성하며 현대 미술의 지리학을 새롭게 마름질한다. 비엔날레는 특정한 미술 운동이나 유파가 결집되고 발언하는 심미적-정치적 행위의 공간이 아니라 강박적으로 지역적인 것을 추켜세우고 동시에 지구적인 것을 강변한다. 마치 초국적 기구나 금융자본이 경제의 지역성을 강조하며 지역을 넘나들 듯이 비엔날레는 지구적인 미술의 세계에서 수많은 지역의 미술적 실천을 호혜적인 공존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대상인 것처럼 제시한다. 그런 점에서 미술의 금융화를 보여주는 가장 두드러진 사례가 비엔날레라고 말한다고 해서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한편 우리는 또한 어느 평론가가 말한 대로라면 문화적 기업가주의(cultural entrepreneurialism) 혹은 어느 미술상품 투자분석가가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것처럼 “미술기업가(Artpreneur)”의 등장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이는 미술의 금융화가 미술가의 정체성을 어떻게 근본적으로 바꾸는지를 역력히 보여준다. 아방가르드이든 반사회적인 주변인이든 아니면 또 다른 지식인으로서의 예술가이든 미술가를 둘러싼 한 세기 동안 끈덕지게 지속되었던 환상은 이제 소멸하였다.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다미엔 허스트나 제프 쿤스같은 이른바 “블루칩”으로 알려진 미술가-기업가-명사들이다. 그들은 작게는 수억원에서 수십억원대의 상품을 판매하는 기업가이며 이미 작품이 나오기도 전에 구매 대기자 명단을 거느리고 있는 투자기관이고 100명이 넘는 종업원이 일하는 독립적인 기업의 최고경영자이다.
물론 월스트리트의 브로커 출신인 약삭빠른 제프 쿤스나 미술가는 무엇보다 자신을 상품으로서 포장하는 법을 알고 그것을 보여주는 명사여야 함을 자신이 다닌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통달한 데미안 허스트같은 이들만이 거기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대형산업공단처럼 보이는 베이징 근교의 아트사이드에 입주하여 작업을 하는 중국의 현대미술가들 역시 다르지 않다. 그들은 수조원에 달하는 미술시장에서 자신을 명사로서 제시하기 위하여 아트페어, 옥션, 비엔날레, 그리고 수많은 파티와 사교모임, 티비쇼, 잡지 인터뷰에 출몰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금융화된 미술의 세계 역시 다른 금융화된 경제에 유령처럼 버티고 있는 ‘리스크’를 잠재워줄 하나의 신뢰할만한 가치로서 자신을 제시하려 애쓸 것이다. 이것이 금융화된 미술이 생산하는 미술가의 정체성이라면, 다른 것들은 또 어떻게 바뀌고 있을까. 아마 이를 결산하기 위하여 며칠을 이야기하여야 할지 모를 것이다.
_아트프라이스에 기고한 글. 예전에 쓴 글을 조금 손 보았다.

사랑 혹은 혁명


Al Green, Tired of Being Alone

자기를 파괴하는 자의 사랑
낭만적 사랑의 시대가 저물었음을 알리는 과격한 반-로맨스 영화 혹은 반-멜로영화라고 할 수 있는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를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까. 여기서 우리는 이자벨 위페르가 아주 훌륭하게 연기한 난데없고 섬뜩한 장면 하나에 적잖이 당황해 하였다. 그것은 아마 잘 기억하겠지만 어느 날 욕정으로 가득 찬 그녀가 황급하게 집으로 돌아와 욕실에서 샅을 베어 피를 흘리는 장면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 여성들이 가장 애호하는 자위방식이 되었다는 이 비린내 나고 섬뜩한 쾌락의 기술은, 어딘가 그에 대응하는 남성적 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를 꼽으라면 단연 우리는 척 팔라닉이라는 우리 시대의 찰스 디킨스라 할 만한 소설가가 쓰고 데이빗 빈처가 영화로 만들었던 <파이트클럽> 속의 사내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패고 맞으며 자신의 육체 속으로 되돌아가려 분투하는 남자들의 모습은 당연 쾌락을 쫓는 이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그 쾌락을 쫓는 주체의 모습은 역사적으로 변형되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낭만적 사랑이라는 것과 결부되어있던 신체적 쾌락이 어떻게 변화 중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엉뜡하게도 일본에서 섹스 산업을 표현하는 용어는 “사정산업(射精産業)”이다. 나는 그 표현을 들을 때마다 낭만적 사랑이라는 근대적인 친밀함의 관습과 성욕이라는 것이 순조롭게 만나지 못하는, 사랑과 섹스를 동조시키는데 실패한 사례를 보는 것 같아 흥미롭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포르노그라피를 제작하고 소비하는 나라이다. 그것을 두고 일본인들이 별나게 “킹키(kinky)”하다고 지레짐작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탓에 가끔 전문가들이 나서 포르노그라피를 비롯한 사정산업의 성행 때문에 “섹스리스(sexless)” 커플이 늘어나고 이것은 곧 일본 사회에 “재앙”(출산율 감소, 결혼 기피 등)을 낳을 것이라 진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본인들이 굳이 섹스가 아니라 적나라한 “사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그것을 굳이 특정한 생리적 행동에 한정하는지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섹스가 사랑이라는 환상을 실어 나르는 전도체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어권에서처럼 사랑을 나누는 것(making love)을 섹스를 한다는 표현으로 치환시킬 여지가 없다. 영화의 상투적 장면들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는 연인들이 서로의 열정적인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을 때 다음 장면에서 으레 침대에서 뒹굴거나 적어도 정열적인 키스를 나누는 장면을 볼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일본이라면 우리는 둘이 서로의 깊은 사랑을 확인한 후에 각자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포르노를 보며 자위를 하는 장면을 떠올리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부자연스러운 것은 전연 없다. 낭만적 사랑을 이루는 환상이 똑같이 섹스라는 것 속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면 둘은 서로 다른 환상을 통해 움직이면 되는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섹스에게서는 가장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의 자기파괴적인 인물에게서 이런 일본의 섹스와 같은 모습을 보는 것 아닐까. 물론 그것은 너무나 뻔 한 답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옳지도 않다. 그것은 온전히 낭만적 사랑의 세계가 유효한 한 시대적 경계 내부로부터 분기되어 나온 하나의 특수한 경우일 터이기 때문이다. 낭만적 사랑의 환상을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것에 간섭하는 섹스를 분리시키고, 섹스에게 정확히 자신 만의 선명한 목표, 즉 사정 혹은 오르가즘을 할당하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불어 우리는 사랑을 제대로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앞에서 우리가 본 인물들은 다른 모습을 취한다. 자신의 샅을 면도날로 베고 피를 흘리며 쾌락에 떠는 여자와 피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으며 낄낄대는 남자가 가지는 문화적 의미에 관하여 우리는 “문화비평적” 분석이라 할 만한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유행하는 학술 담론을 빌자면 이는 점점 더 신체를 상징화하는 세계로부터 어떻게 소외된 신체를 되찾으려 사람들이 어떻게 절망적으로 발버둥 치는지 보여주는 것일지 모른다. 다시 말해 성형, 화장, 다이어트, 신체단련, 의료적 행위 등을 통해 신체가 자아의 가장 내밀한 세계를 담아내는 물질적 실체가 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과격한 신체의 출현, 피나 분비물로 가득 찬 신체, 멍과 상처로 뒤덮인 신체야말로 신체의 귀환을 위한 몸짓 그 자체 아닐까. 그러나 여기에서 좀 더 세밀한 눈길을 보낼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다시 말해 서둘러 그 신체를 훼손하는 장면에 주의를 고정시키기 전에 환상이 이동하는 바로 그 틈새를 눈여겨보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랑의 열정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왜 우리의 주인공은 갑자기 자신을 해치는 몸짓으로 도약하는 것일까. 낭만적 사랑에 관한 흔한 정의는 사랑이 전적으로 불가사의하다는 것에 있다. 나는 그/그녀를 사랑하지만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그녀를 사랑하게 만드는지는 언제나 불명료하다. 그/그녀가 가진 이러저러한 구체적인 속성이 나로 하여금 사랑에 빠지게 하였다면 그것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들릴 뿐 아니라 심지어 그것은 사랑을 배반하는 무례하고 불쾌한 말로 들리기 십상이다. 사랑은 외려 어떤 미지의 요인이 있어 나를 그/그녀에게 빠지게 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상대의 구체적인 속성이란 고작해야 그 미지의 요인을 보상하기위하여 혹은 그것을 대신하기 위하여 잠시 역할을 맡는 가면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를 분명 불편하게 하고 고통에 빠져들게 만들더라도 우리는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앞에서 본 주인공은 바로 그 미지의 요인과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것을 감당하려는 몸짓,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대로라면 무엇이 나를 그와 사랑에 빠지게 할까 물으며 저항할 수 없는 생각에 골몰하지 않는다. 문득 자신이 사랑에 빠졌음을 알게 되었을 때, 멜로에서 흔히 보는 혼란스러운 고민의 장면이 여기에는 없는 것이다. 당신의 무엇이 나를 사랑에 빠지게 하는지 물으며 결국 그 무엇도 알 수 없지만 나는 감히 당신을 사랑하겠다고 결단하는 상투적인 그러나 아주 극적인 윤리적인 결단이 거기에는 없다.
알다시피 우리 시대의 사랑은 거의 비즈니스가 되어가고 있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시쳇말로 “작업”을 거는 것이고, 사랑을 위한 상대는 “어장 관리”의 대상이 되어 내가 선호하는 속성을 가진 그룹의 일원이 되며, 그를 위해 우리는 ‘유혹의 기술’이니 ‘설득의 심리학’이니 하는 지침서를 읽어야 하는 일이 되었다. 그것은 결국 낭만적 사랑이 생산했던 바로 그 사랑의 대상이 소멸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일이다. 이를테면 “짐승남”이나 “골드미스”와 사랑에 빠진다는 말이 지금엔 가능하다. 그러나 낭만적 사랑은 그런 것에 대하여 장님이다. 그것은 상대의 어떤 속성과도 관계없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충분히 “눈 뜬” 사랑을 할 수 있고, 그것은 전적으로 권장되는 일이 되었다. 물론 그것의 훌륭한 사례는 앞서 든 영화의 반대 사례인 <섹스 앤 시티>를 보면 될 것이다. 아무튼 낭만적 사랑과 같은 맹목적인 사랑은 위험하며 파괴적이고 자신을 배려하지 않는 후진 일로 취급받는다.
그렇다면 완벽하리만치 삶의 평정 속에 놓여있던 <피아니스트>의 여주인공에게 느닷없이 들이닥친 혼란스러운 사랑, 그것도 매력적인 젊은 사내의 게임과도 같은 유혹에 대하여 주인공이 응수하는 방식은 흥미롭고 또 아주 윤리적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윤리적인 이유는 사랑을 일종의 자기에게 더 쾌적하고 윤택한 생활을 제공하는 일로 여기지 않고 사랑의 난폭하고 불합리한 성격과 대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 사랑을 난폭하게 철회하는 몸짓을 동반하는 것이기에 또한 윤리적이다. 그 몸짓은 바로 그 미지의 요인을 문자 그대로 자신의 신체를 통해 상징화하는 행동을 통해 나타난다. 그녀의 샅에서 흘러나와 욕조로 흘러내리는 핏방울들이 어쩌면 그 미지의 요인 아닐까. 그녀는 자신에게 난폭하게 들이닥친 그에 관한 사랑을 간단히 친교의 “작업”으로 축소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는 그를 미지의 대상으로 온전히 승인하면서 그를 향한 사랑을 감당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그를 향한 숨 막히는 열정을 말 그대로 게워낸다. 슬프게도 사랑은 불가능하다. 혹은 부인함을 통해 사랑을 위한 공간을 유지한다.
자기계발이라는 윤리적 쟁투의 세계
……….[중략]………
따라서 내가 장차 어떻게 건강하고 안전하게 잘 먹고 살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는 개인들이 떠맡은 소관사항이 아니라 사회를 통해 주재되고 조정되는 것이 되어 주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예가 보험이나 연금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장 내게 닥친 위험도 아닌 일에 꼬박꼬박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복잡한 회계적인 셈법을 동원하고 평화와 안전 같은 세속적인 도덕으로 둘러싸이면서 어느 새 자연스러운 삶의 문법이 되었다. 특히 먹고 사는 문제를 다루는 삶의 습속은 더욱 그러하였다. 경기가 좋고 나쁜 정도에 따라 또 고용주의 변덕에 따라 일에 대한 보상이 다를 수는 있어도 그것이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쳐주는 만큼의 것과 큰 격차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보이지 않는 계약이 있었다. 그리고 임금에서 공제되는 몫을 통해 적립되는 자산, 이를 다시 말한다면 사회라는 상상적인 실체가 떠맡게 되는 “보장”의 금고를 통해 나는 갑작스런 위험이나 먼 미래의 노후를 보장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믿을 만한 것이었고 또 사람들은 당연히 신뢰를 보냈다..
그렇지만 재테크란 그런 사회란 것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말한다. 영국의 철혈 수상 대처 여사가 말했대서 악명 높은 “사회 같은 건 있지 않다”는 말은 그런 점에서 곱씹을 만하다. 이는 사회라는 상상의 세계와 그것을 구체화하는 다양한 정책과 제도, 장치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사람들은 이제 새로운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야할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어쨌든 재테크하는 인물은 그런 점에서 큰 일이 없다면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과 퇴직금, 연금, 의료보험, 저렴한 교육비 등의 세계로부터 추방되어 자신의 생존을 말 그대로 자기가 발휘하는 “(財)테크닉” 속에 고스란히 옮겨놓아야 하는 인격체이다. 여기에서 물론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이 스스로를 돌보아야 한다는 책임이라는 새로운 윤리적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이 윤리적 프로그램을 가리키는 이름이 바로 “자기계발”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투잡스(two jobs)”이든 아니면 온갖 방편을 통한 재테크이든 자신의 경제적 생존을 스스로 설계하고 관리하는 인물은 분명 새로운 역사적인 인간형에 다름 아니다. 고용과 노동을 통해 자신을 “연대”라는 이름의 사회적 세계에 등록하고 이로부터 자신의 경제적 생존을 “사회화”할 수 있었던 인물은 이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대신에 자기계발이라는 윤리 내부를 배회하며, “책임, 주도, 관리, 설계” 운운의 말들이 끌어내는 가치에 득달당하는 측은한 개인들이 우두커니 서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계발 담론이 권유하는 다양한 테크닉을 구사하며 자신에게 들이닥칠 리스크(risk)를 셈하고 이를 길들일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찾는다.
그러나 재테크하는 인물과 유혹의 기술을 연마하는 인물이 먼 자리에서 닮았다고 한다면, 앞에서 본 사랑을 철회하는 인물은 누구일까. 나는 그가 자기계발이란 윤리와 대적하는, 우리 시대에 아주 희귀하게 찾아볼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경제적 삶의 세계에서 자기계발하는 주체가 온전히 개인의 자기의식이 아니라 바로 그를 규정하는 보다 큰 구조적 변화의 효과이자 또한 그것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면 사랑 역시 그렇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우리는 개인적 친교를 규제하는 구조적 변화를 겪고 있다. 비록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고 해도 말이다. 그리고 앞서 본 인물을 통해 자기계발하는 자의 또다른 변용인 자기계발적 주체의 사랑에서 벗어난 어떤 인물의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그는 자기계발하는 인물과 투쟁하는 새로운 윤리적 얼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나는 그/그녀를 지지하지 않는다. 자신을 파괴할지도 모를 사랑에 저항하기 위하여 역설적이게도 자신을 파괴하는 인물, 즉 자신을 파괴하는 인물을 새로운 윤리-정치적인 영웅으로 추어올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온전히 낭만적 사랑을 자기계발하는 자의 사랑 속으로 길들이지 않고 새롭게 변혁시킬 수 있을까. 아마 그 대답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다른 세계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사랑은 전적으로 강한 의미에서 “세계”의 풍속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쾌적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몸짓으로 사랑을 전락시키지 않을 생각이라면, 그리고 자신을 혼란과 격변 속에 무너뜨리는 사랑의 행위에 다시 들어가고자 한다면, 그것은 “세계”의 차원에서도 동일한 일이 일어날 때 가능하다. 그것을 가리키는 이름이 무엇일지 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것의 이름은 혁명일 것이다. 자신을 송두리째 바꾸는 것이 사랑이라면 사회를 또 그만큼 바꾸는 일은, 적어도 내가 알기론, 혁명이란 것밖에 없다.
– 저널 1/n에 기고한 글. 상당히 낭만적이고 다분히 과격한 글을 썼다. 오랜 만에 치기를 부린 글! 봄 바람에 그만 삐긋했던 때문일까. 날씨 탓이다

자유를 동원한 지배, 자아를 통한 지배


Papa M – Over Jordan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란 책의 바탕이 된, 역시 같은 제목으로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에서, 나는 이 글의 문제의식을 이렇게 요약한 바 있었다. “1980년대 이후 한국 자본주의는 장기적인 그러나 심원한 변형을 겪어왔다. 그리고 이런 변형의 과정은 단지 경제적 삶의 영역을 변화시키데 머물지 않고 새로운 ‘주체성의 체제’를 형성하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줄여 말해, 자본의 구조조정은 ‘노동하는 주체’의 구조조정이었고, 경제적 삶의 리엔지니어링은 또한 주체성의 리엔지니어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은 한국 자본주의의 정체성의 변화와 분리시킬 수 없는 상호구성적인 과정으로서 새로운 주체화의 과정에 관심을 둔다. 그리고 이를 ‘자기계발하는 주체’라는 주체화의 정치학으로 정의하고 분석한다.” 글을 쓰기 시작한 즈음, 외환위기를 전후하여 구조조정이라는 말이 성행하고 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 리엔지니어링이니 개혁이니 하는 유령같은 말들이 떠돌아다녔다. 이미 10년도 지난 일이지만 이런 추세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당분간 그 위세는 여전할 것이다.
물론 이는 비단 한국 사회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어느 학자의 말을 빌자면 자본의 새로운 문화적 회로라고 부르는 것과 함께 지구화는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첨단 이동통신사업체가 중국에 들어갈 때 그것은 자본과 함께 일을 조직하고 관리하는 방식은 물론 노동하는 삶의 인격을 구성하는 새로운 원리 역시 함께 가져간다. 줄여 말해 지구화와 더불어 순환하는 자본은 자신의 경제적 가치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장된 문화적 가치 역시 운반한다. 그것은 다양한 원천에서 비롯된다. 초국적 기관이니 매체니 하는 것이 경제 현실을 가리키고 묘사하는 새로운 언어들을 만들어낸다. 지금은 국내 유수 대학들이 앞 다투어 설립에 애쓰는 MBA니 하는 과정을 통해서든 아니면 글로벌 기업이 조직하고 개최하는 포럼, 컨퍼런스, 연수같은 프로그램들 역시 자본의 새로운 운동방식에 조율된 삶의 형태를 생산한다. 그렇지만 비단 이런 것들이 굳이 직접적인 경제적 표상을 취할 필요는 없다. 가장 심미적이고 윤리적인 삶의 세계로 간주될 만한 곳에서도 역시 자본의 삶에 동조된 삶의 형태가 생산되고 조형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말이 있다면 바로 자아, 특히 흔히 자기계발, 자기주도, 자기책임, 자기경영, 자아존중감 등의 말로 끊임없이 변주되는, 자기를 향상시키고 자기를 돌보는 주체일 것이다. 그것은 복지국가이든 아니면 개발국가이든 조직된 사회적 노동자 혹은 성장과 발전을 통해 부의 분배를 수취하는 국민으로서 자신의 경제적 삶을 이해하던 노동자들을 자기의 행위와 성취를 통해 보상을 받는 사람으로 재구성하는 일을 한다. 월급쟁이에서 연봉생활자나 재테크를 하는 주체가 되었다고 할 때 그것은 단순히 보상의 형태나 경제적 생존 방식이 바뀌었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경제적 삶을 대하는 주관적 세계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변형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거울을 비추는 것처럼 서로 다른 삶의 영역에 놓인 주체들의 모습을 통해 다시 반영된다. 이를테면 획일적인 내용과 엄격한 기율을 통한 교육으로 상징되는 ‘학교사회’를 자율적인 선택과 책임을 통해 스스로 학습하는 주체를 길러내는 ‘학습사회’로 바꾸자는 주장은, 얼핏 듣기엔 매우 그럴 듯하게 들린다. 그렇지만 실은 거기에서 요점은 학생이라는 정체성을 교육의 장 안에서 전연 새로운 모습으로 변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윤리를 자신이 자신에 대하여 맺는 관계와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자신을 어떻게 표상할 것이고 또 자신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관한 것들을 아우르는 것이라면, 지금의 자본주의는 새로운 윤리적 주체를 생산하고 동원한다. 그 윤리의 이름은 물론 자기계발이다.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가 말하는 ‘자기계발하는 주체’란 크게 세 가지의 차원을 아우른다. 그것들은 각기 담론, 테크놀로지, 그리고 규범을 가리킨다.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란 그를 구성하는 사회, 경제적 삶에 관한 표상을 재구성하며 현실을 새롭게 문제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장, 발전, 생산성, 능률과 효율 등의 개념은 전연 자명하지 않다. 그것은 비규정적인 경제적 현실을 일관된 담론적 대상으로 변형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와 기준을 획득한다. 나아가 경제적, 사회적 삶을 새롭게 문제화하는 것은 그에 적합한 주체란 무엇인가에 관한 담론을 생산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터에서의 노동하는 삶이든 학교에서의 교육받는 삶이든, 새로운 담론은 주체가 좇아야 할 이상을 생산하고 그에 관련된 다양한 지식을 형성한다. 노동자에서 인적자원으로, 국민에서 능동적 시민으로, 학생에서 자기주도적 학습자로 각각의 사회적 삶의 주체를 가리키는 용어들이 바뀔 때, 이는 그저 이름만 갈아치우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런 삶에 속한 모습들을 객체화하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데도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해당되는 사회적 삶의 내용과 성격을 새롭게 규정할 뿐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일하고 배우며 살아가는 삶이 적합하고 올바른 것인가에 관한 지식과 규범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는 그와 짝을 이루는 잡다한 테크놀로지를 동원한다.
나는 이런 분석을 위해 마르크스의 편에서 푸코를 읽고 또 푸코의 편에서 마르크스를 읽는 작업을 염두에 두었다. 최근 많은 이들이 부쩍 관심을 갖는 70년대 중후반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푸코가 진행한 세미나는, 자유주의적 국가의 등장과 그 특성에 대한 풍부한 분석을 담고 있었다. 또 그 세미나에 참석한 제자들에 의해 여러 가지 분석의 기획이 이뤄졌다. 그것은 지금 한참 유행하는 생정치 담론과 이어져 있기도 하고 또 보이지 않는 부정적 정치철학의 형태로 랑시에르나 바디우같은 포스트-알튀세르주의적 철학자들의 사유 속에 스며들어 있기도 하다. 이 글에서 내가 염두에 둔 것은 흔히 통치성이라고 부르는 푸코의 분석틀로부터 찾아낼 수 있는 자본주의적 주체화의 계보학적 분석이었다. 푸코라면 ‘권력’이라고 불렀을 그 명목론적인 개념을 나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지배란 개념으로 고쳐 읽으며 한국사회에서 자본주의적 변화와 주체성의 변형 사이에 놓인 관계를 추적하려 했다. 그러나 그 분석이 반쪽에 불과한 것이라는 점 역시 강조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면 그렇게 권력이 겨냥하고 조형하는 주체로부터 분리된, 즉 사회적 삶 속에 놓인 주체로부터 탈출하는 정치적 주체의 모습은 이런 분석에서 결코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 <교수신문>의 신간 소개를 위해 쓴 글. 일종의 내 책을 말한다와 같은 기사를 부탁받아 쓰게 되었다.

과연 공화국 만으로 충분한가

– 애국주의 논쟁을 읽는 마르크스주의적 개입

국가를 사랑한다는 수수께끼
일전 어느 신문 지상에서 애국주의 논쟁으로 왁자했던 적이 있다. 진보세력도 애국주의를 무작정 백안시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잘 써먹을 길을 찾자는 취지의 주장이 등장했다. 당연 반론도 꼬리를 물었다. 진보적 애국주의니 공화적 애국주의란 이름을 내세운 이 특별한 애국주의는, 국가에 대한 사랑이 인권을 비롯한 보편적 가치와 결합하는 한 민주주의를 추진하고 확장하기 위한 꽤 괜찮은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부터 부쩍 유행하는 대한민국 열풍을 무조건 배척할 일이 아니라 외려 우파 세력이 농단하게 내버려두지 않고 진보운동이 이를 잘 활용해보자는 것이다. 당연 그를 둘러싼 의구와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제 아무리 단서를 달아도 애국주의는 어쨌거나 태생적으로 나쁜 이데올로기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제한을 통해 좋은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면 역으로 인권의 억압이나 개인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나쁜 이데올로기로 전환할 가능성도 활짝 열려있다. 그리고 알다시피 역사적 교훈은 후자 쪽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더 크다는 점을 증언한다.

국가는 항상 서로 반대편을 향해 달리는 비판 속에서 추궁되고 규탄 받아왔다. 그간의 정황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먼저 하나는 단연 자유주의자들의 국가 비판이 있다. 국가는 사회에 기생하는 괴물이며, 그것이 시민사회이든 개인이든, 모든 자율적 의지와 선택을 제한하는 나쁜 실체라는 비판이다.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 이후’의 정치적 기획을 주도했던 좌파자유주의자들은 다양한 이름으로 즉 ‘파시즘’비판이나 ‘국가폭력비판’같은 이름으로 이런 생각을 끈질기게 주도하여 왔다. 다음으로 우리는 이른바 신자유주의니 세계화니 하는 흐름들 이후에 국가를 소생시키려는 시도를 본다. 그것은 개발국가이든 복지국가 혹은 사회적 국가이든 자본주의적 경제의 맹목적인 메커니즘을 규율하면서 공공성이나 사회적 연대을 실현하는 힘으로서의 국가에 다시 호소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어느 베스트셀러 경제학자의 유명한 주장처럼 최악의 신자유주의보다는 차악의 발전국가가 낫다는 식의 솔직한 생각이 그런 데 해당될 것이다.
국가와 정치적 보편성
애국주의 논쟁도 그런 논쟁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논쟁이 혼란스러운 점은, 논쟁에 참여한 이들도 인정하듯이, 애국주의란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성과 국가라는 정치적 공동체를 향한 반성이 뒤섞여 있다는 점이다. 물론 둘을 뒤섞을 수 없다. 이 둘을 뒤섞을 때 우리는 국가라는 정치신학에 대한 비판에서 맴돌고 말기 때문이다. 진보적 애국주의에서 정작 문제는 애국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옹호한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편에 보편성의 역할을 부여하는 정치적 시점을 도입한다는 점에 있다 해야 옳다. 그것은 특수한 이해 속에 분열된 시민사회를 매개하고 규제하는 그리하여 보편적인 이해를 담지하는 사회적 심급으로 국가를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이런 주장은 여러 가지 갈래로 나뉜다. 사회계약론에서 말하는 주권적인 국가, 공화적 애국주의자들이 호소하는 국가가 있을 수 있다. 주권적인 국민들이 자신의 일반의지를 결집하여 설립한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국가가 아마 그들이 생각하는 국가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국가란 얼핏 보면 ‘일반의지’란 개념이 환기시켜주듯이 보편성을 가진 듯 보여도 그것은 어떤 사회적 내용도 비운 형식적인 규범에 불과하다. 그래서 헤겔 같은 이는 사회계약론을 단호하게 비판한다. 헤겔에게서의 국가는 ‘가족-시민사회-국가’란 관계 속에서의 국가이다. 헤겔식 사고에서 국가란 개인의 자율적인 의지와 선택을 통해 나오거나 아니면 역으로 그에 반해 부과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부르주아적 시민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등장한 것에 불과하다. 사실 그렇지 않은 국가란 불가능하다. 그도 그럴 것이 전근대적인 사회에서 국가란 전연 자율적인 심급이 아니고 따라서 반성될 대상으로서 존재하지도 않는다. 국가가 사회 그 자체와 외연을 같이 한다면 국가는 무엇인지 인식할 수 있는 무엇으로 현상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헤겔에서 국가는 추상적인 형식이 아니라 부르주아사회의 모순을 매개하고 또 지양하는 그리하여 인륜성이란 모습으로 실체화해야 하는 국가였다. 즉 행정적인 제도와 장치로서의 국가, 즉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수준으로서의 국가가 아니라 특수한 것과 보편적인 것을 매개하는 국가가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헤겔에게서 우리는 처음으로 보편성을 담지할 수 있는 유효한 정치적 공동체의 형식으로서의 국가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는 곧 마르크스에 의해 곧 격렬한 조롱을 받는 운명이 될 것이다.
자본의 보편성인가 국가의 보편성인가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애국주의 논쟁을 되짚어보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일까. 그것은 애국주의 논쟁을 가로지르는 전제, 즉 국가는 유효한 정치적 공동체일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그로부터 보편성의 정치를 생각해 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저변의 물음 때문일 것이다. 진보적 애국주의자들이 국가에 대한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하는 것 또한 어떤 국가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왜 국가가 그러한 정치적 보편성을 효과적으로 담지하는 정치적 공동체이냐는 것이다. 물론 어떤 역사적인 국가이냐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팬덤 국가’, 즉 ‘대한민국, 사랑해요’를 외칠 때의 국가가 파시즘에서의 국가와 같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민족의 모성적 대지로서의 국토와 관광지화된 구경거리로서의 국토가 다르듯이, 또 숭고한 맹목적인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국가와 마케팅 대상이 되어 적극적으로 제조되어야 하는 이미지로 간주되는 국가가 다르듯이, 근래의 애국주의를 과거의 애국주의와 동렬에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상품적인 교환관계를 기반으로 하여 모든 세계, 모든 사물과 삶의 형태를 등가화한다. 이런 자본주의적 보편성은 상당 기간 동안 민족국가라는 허구를 통해 혹은 혹자의 말을 빌자면 ‘상상의 공동체’를 통해 굴절된 모습으로 자신을 실현하였다. 그것은 나/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건네는 이들에게 당신은 무엇보다 민족의 성원이며, 민족국가의 국민임을 일깨우고 또 그를 통해 자신을 에워싼 삶의 현실을 체험하고 공감하며 또한 반성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물론 그 바탕에는 국민과 계급 사이의 긴장이 놓여있다. 자본주의적 적대가 계급투쟁이란 형태로 현상하지 못하도록 했던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는 국민국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국가는 모든 자연적 배경이나 유구한 전통으로부터 혹은 일차적인 소속집단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내고 국민 혹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동등하게 대하려고 했던 점에서 보편주의적 충동으로 충만해 있었다고 보는 것 역시 옳다. 그렇기에 어떤 민족주의도 특수주의적 환상이기에 선험적으로 유죄라는 주장은 민족주의에 유령처럼 달라붙어있는 보편주의적 충동을 고려하면 지지하기 어렵다. 차라리 민족주의는 언제나 정치적, 윤리적으로 애매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한편 민족주의는 친족집단이든, 직업적 배경이나 출신 지역이든 심지어 자신의 성별 정체성같은 일차적 정체성을 ‘비워내고’ 그것을 ‘개인’을 만들어내는 과정으로 전환시킨다. 다시 말해 민족주의는 ‘개인화된 개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때문에 민족주의에는 또 다른 방향에서 보편주의를 실현할 계기가 담겨있다. 다시 말해 국가란 바로 개인화된 개인을 만들어내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라고 부를 수 있다. 국가의 성원으로 등록됨으로써 우리는 또 하나 제거하기가 불가능한 보편주의적 차원이 발생한다는 점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생활과 개인적 양심을 자율화시킴으로써 자연적인 소속이나 일차적인 문화들이라고 할 만한 것을 국가 아래에 복속시키고 변형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은 국가나 공적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자신의 직접적인 소속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커다란 틈새를 확보할 수 있다. 노동자이든 여성이든 동등하게 자신들의 투쟁을 조직하고 갈등적인 주체로서 자신을 정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오직 그들 각자가 개인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정치신학으로부터 벗어나기
그렇다면 애국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국가에 대한 사랑을 우리가 적극 옹호하자는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국가를 정치적 보편성의 심급으로 실체화하는 것은 그것이 부르주아 사회 혹은 자본주의적 시민사회의 적대 혹은 구성적 분열로부터 국가가 출현한다는 것을 괄호쳐 버린다. 사실 진보운동에게 더 익숙한 것은 주권적 개인의 결사체로서의 국가 혹은 공화주의적 국가가 아니라 계급적인 국가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배계급의 이해를 도구적으로 대변하는 국가를 재탕하는 것이 아니다. 계급적 국가란 법률적으로든 인격적으로든 자유로운 개인들 사이의 관계를 보편화함으로써 착취관계를 효과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국가를 가리키는 이름일 뿐이다. 그러므로 국가가 유효한 정치적 공동체로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내부로부터 파괴하는 자본주의적 적대 관계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해 국가로 하여금 자신을 보편적인 정치적 공동체처럼 현상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 할 자본주의적 사회관계 즉 적대와 불평등의 보편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이한 운명에 처하지 않을 수 없다. 착취와 불평등을 고발하고 개선하기 위하여 우리는 더 많은 권리 더 좋은 법에 호소하고자 한다. 그러나 국가는 그럴수록 효과적인 정치적 공동체로 구실하지 못한다는 점을 드러낸다. 그래서 국가를 제거한다면? 놀랍게도 그것은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국가가 없이는 자본주의도 가시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자본주의적 보편성과 정치적 공동체로서 국가가 갖는 보편성은 전적으로 서로에게 의존하면서도 또한 근본적으로 모순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와 평등은 공화국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해야 한다. 무엇에 대한 자유와 평등인가. 그것을 묻지 않고 그 투쟁을 개시할 수는 없다. 국가가 정치적 공동체로서 보편성을 담지 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결국 자본주의와의 대결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오직 공화국만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공화국이 더 이상 아니다. 그것은 그냥 정치를 추방한 사회일 뿐이다.
– Le Monde Diplomatique에 기고한 글. 당연한 말이지만 한국어 판

‘통치성’ 메스로 신자유주의를 해부하다


Carsic Cars – 中南海

니컬러스 로즈(62)는 현재 영국의 런던 정경대학의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생명과학, 생명의학, 생명공학과 사회 연구 센터’의 소장을 맡고 있는 사회학자다. 유대계 후손으로 대학에서는 생물학을 전공한 뒤 대학원에서 사회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줄곧 사회학 분야에서 이론적 작업을 펼치고 있다. ‘영국 통치성 학파’의 좌장으로 ‘현재의 역사’라는 그룹을 조직해 푸코의 통치성 개념에 바탕한 서구 자유주의 권력의 분석에 진력하여 왔다. 최근에는 생정치, 다시 말해 생명에 관한 새로운 과학적 지식과 기술들이 생산하는 효과와 권력에 이론적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니컬러스 로즈는 흔히 통치성 연구로 알려진 푸코주의적 사회이론을 대표하는 학자로 알려져 있다. 미셸 푸코가 1970년대 후반 콜레주 드 프랑스의 세미나에서 발표했던 강의노트에 등장한 ‘통치성’이란 개념은 일종의 이론적 프로그램처럼 받아들여졌고, 영국을 중심으로 독특한 푸코주의적 사회이론 그룹이 만들어진다. 통치성 학파라고 알려진 이론가들은 실은 ‘현재의 역사’라는 연구자 네트워크에 참여한 이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의 공동작업의 결과는 여러 저작으로 출간됐고, 이는 현재 ‘통치성 연구’라고 불리는 흐름의 바탕을 닦은 작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로즈는 이 그룹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로즈는 영국에서 특히 강력했던 알튀세르 마르크스주의의 영향 속에서 이론적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 정신병리학과 정신의학에 관한 푸코 초기 저작에 영향을 받으면서 <심리학 복합체>, <영혼을 통치하기>와 같은 초기 주요 저작을 완성한다. 이는 영국의 정신병리학 기관이던 타비스톡 연구소에서 민속지적 방법을 통해 정신병리학 제도의 권력과 작용을 분석했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렇지만 로즈의 이론적 관심을 전환하도록 이끌었던 것은 푸코의 통치성에 관련된 글과 그의 세미나를 통해 발표된 제자들의 논문들이었다.
그는 ‘현재의 역사’라는 그룹을 조직하고 그가 편집장을 맡고 있던 저널 <경제와 사회>를 통해 그 성과를 소개했다. 이 시기 그의 이론적 성과를 묶은 것이 피터 밀러와의 공동 저술 논문을 묶은 <현재를 통치하기>와 그의 신조어인 ‘선진자유주의’란 개념을 통해 서구의 새로운 자유주의적 권력을 분석하고자 시도한 <자유의 권력들>이다. 아마 로즈의 이론적 성과를 집약하고 있을 <자유의 권력들>은 신자유주의라 알려진 정치권력을 분석한 데 그치지 않는다. 여기에서 그는 자유주의 권력의 계보학적 분석을 통해 통치성 개념을 권력 분석의 이론적 도구로 다듬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푸코의 통치성 개념은 근대 국가의 계보학적 분석이라는 이론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돌출한 개념이다. 그것은 정치철학의 주권론과 국가론 혹은 경제적 결정을 은폐하는 허구적 상부구조로서의 국가권력이라는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한 탐색 과정에서 출현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왕의 목을 베기’라는 푸코의 유명한 표현은 점차 ‘국가의 통치화’에 관한 분석으로 다듬어졌고 그는 이를 자신의 작업을 망라하고 조직할 수 있는 개념이라 공언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엄밀한 의미에서 이론적 개념이라 할 수 있을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어쨌든 통치성을 통해 푸코는 권력을 지식과 주체화라는 개념을 통해 재구성하고 이를 근대 자유주의 권력의 분석을 통해 해명하고자 시도했다. 로즈의 작업 역시 바로 이 지점에 위치해 있다. 그에게서 특기할 점은 푸코의 통치성 개념을 이론으로서 체계화하고 이를 동시대 자유주의 권력의 해부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정련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는 통치성 혹은 그가 선용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정치적 합리성’을 크게 세 가지의 성분으로 나눈다. 그것은 첫 번째 지식과 언어,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은 무엇보다 그것이 행사되는 대상을 구성하고 창안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디까지가 경제적인 삶의 세계이고 무엇이 사적인 삶의 세계인지는 전연 자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경제적인 삶이라 할 때, 성장·효율·능률·합리성·진보·성과·이득 같은 것 역시 무엇을 가리키고 그것은 어떻게 판별되고 측정하며 평가해야 할지 전연 분명하지 않다. 따라서 무한히 다양한 삶의 세계들은 그것을 읽고 분석하고 경험하고 해석할 수 있는 대상으로 빚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권력은 다양한 지식과 언어를 생산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테크놀로지를 들 수 있다. 권력은 단순히 관념이나 이념이 아니라 특정한 효과를 겨냥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다양한 장치·도구·계산방식 등을 만들어낸다. 이는 성장·진보·안녕·안전·교정·개선 같은 다양한 목표를 충족하고 실현하는 데 필요한 전문적 지식들을 생산하고 그에 관련된 인물·기관·제도·자격·보상 같은 것들을 끌어들인다. 세 번째로 권력은 윤리 혹은 주체화라고 할 만한 것으로 이뤄진다. 그것은 자유주의 권력의 결정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인데 이는 권력은 무엇보다 자유를 동원하면서 작동하는 것임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행복·안전·건강·성공 등 다양한 포부와 욕구를 가지고 다양한 삶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이때 사람들은 그런 목표를 충족하기 위해 어떻게 처신하고 타인들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관련된 다양한 규범과 행위의 코드에 관련을 맺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윤리 혹은 주체화라고 할 수 있다.
로즈는 이 세 가지의 성분으로 구성된 권력의 해부학적 도구를 이용하여 근대 자유주의 권력의 역사적 변전을 분석한다. 그는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를 크게 자유주의·복지주의·선진자유주의라는 단계로 나눈다. 자유주의란 18세기에 형성된 초기 서구 자유주의 권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된 특징은 권력이 초월적인 원리나 임의적인 의지를 통해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통해 즉 그것이 행사되어야 하는 대상에 대한 지식(특히 정치경제학)을 배경으로 신중하고 또한 효과적으로 행사되어야 함을 가리킨다. 더불어 권리를 행사하는 법적 주체라는 겉모습에도 실제 삶의 세계에서는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며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가는 개인들을 통치받는 대상 혹은 주체로 만들어낸다.
이런 초기 자유주의는 사회주의의 등장, 개인주의의 만연과 같은 위험에 직면하면서 혹은 로즈가 강조하는 개념을 빌리자면 숱한 ‘문제화’를 통해 복지주의로 변이하게 된다. 복지주의의 핵심적인 특징은 ‘사회를 통한 통치’라고 말할 수 있다. 복지주의는 무엇보다 ‘사회’를 발명하고 그를 통해 권력이 행사하는 대상과 주체를 전연 다른 방식으로 구성한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는 핵심적인 기술로서 사회보험과 사회복지를 동원한다. ‘연대’란 개념을 통해 권력이 행사하는 대상은 공통의 운명을 짊어지고 동일한 목표를 향해 의무와 책임을 나눠 가지는 사회적 시민 혹은 국민으로 변형된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혹은 로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선진 자유주의’는 무엇이며 어떻게 다른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사회의 종말’이란 것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연대라는 이상 속에서 책임과 의무를 나눠 가진 사회적 시민은 이제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책임지는 개인들 그리고 무엇보다 특정한 친화성과 정서적 유대에 기반한 ‘공동체’로 변신한다. 그리고 이는 위험의 관리를 둘러싼 테크놀로지 역시 감사, 책무성, 성과 측정과 같은 것으로 바꾼다. 이를 살펴볼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예는 복지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복지로부터 노동 연계 복지로 혹은 능동적 복지로 표현되기도 하는 이런 변화는 자신을 돌보는 개인을 겨냥하고 그들의 책임 부여를 요구한다.
신자유주의 분석을 위한 유용한 이론적 틀로 통치성 개념이 각광을 받으며 1990년대에 서구 학계에 일약 통치성의 이론적 붐이라 부를 만한 것이 일어나고 로즈와 동료들의 작업 역시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그렇지만 그 작업은 자유주의 권력에 관한 치밀한 분석에도 권력이란 개념을 특권화하면서 현실에 관한 통치를 분석하는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정치의 위상을 제거하고 정치를 사회학화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그것은 로즈의 책임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푸코를 경유하여 정치를 사고하려 했던 이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한겨레신문 21세기 진보지식인 지도에 기고한 글

신세계의 어린이 문학, 자기계발 문학


PJ Harvey & John Parish – Black Hearted Love

“빅뱅”이 누가 뭐래도 지금 가장 잘 나가는 한국 최고의 팝스타이다. 그들이 일종의 자기계발서라 할 ‘세상에 너를 소리쳐!'(쌤앤파커스, 2009)를 내놓았다. 책이 나오기도 전에 예약이 폭주하고 급기야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진입했다. 수십만 부가 넘게 팔렸다는 소식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던 일이니 놀랍지 않다. 빅뱅에 열광하는 팬들이 아니라 그 아이돌 밴드가 누군지 눈, 귀가 어두운 어른들마저 다투어 권하는 책이 되었다는 소식 역시 그리 정색할 일은 아니다. 그 책에서 그들이 읽고 들으려는 것은 딱히 빅뱅의 이야기가 아니라 빅뱅을 통해 울려 퍼지는 우리 시대의 세속적 복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들도 선뜻 그 책을 택했을 것이다. 어떤 책을 읽힐 수 있는 책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저자의 목소리와 독자의 귀 사이에서 이뤄지는 고독한 대화가 아니다. 책을 읽힐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무엇보다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모두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가 되게끔 해주는 독서의 공간 안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읽을 수 있는 책, 나아가 잘 읽히는 책은 저자와 독자라는 인물들 사이에 놓여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책과 독자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공간에 놓여있다.
그에 비추어 ‘세상에 너를 소리쳐’란 책의 명성과 그 문화적 효력을 가늠하는 방식 역시 달리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조금이라도 눈여겨 본 이들이 있다면 수월성을 위한 교육이든, 몰입교육이든, 그간 교육 정책과 제도를 둘러싸고 회자되었던 신조어들이 모두 자기계발 문학이 걸쳐있는 문화적 형세와 떼어놓기 어렵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수월성은 물론 개성, 자기주도성, 창의성같은 말로 얼마든지 풀이될 수 있는 말이다. 물론 그것이 거리를 두고 거부하려는 것들도 줄줄이 말해볼 수 있다. 주입, 획일성, 암기식, 선택의 부재 등등. 몰입 역시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수월성이든 몰입이든 이 모든 말 속에서 들어있는 사람은 당연 두 말할 것 없이 “자기”이다. 그것은 일터에서 자신의 인적 자본을 적극적으로 관리하는 직장인의 모습으로 등장할 수도 있다. 직장인이 되기 위하여 자신의 “스펙”을 관리한다는 것이나 이직이나 승진을 위하여 “포트폴리오”를 관리하는 직장인들도 모두 알고 보면 ‘자기’와 관련을 맺고 있다. 더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더 많이 웃으라는 기업 광고의 윽박질이나 ‘대학민국’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면 ‘긍정의 힘’을 역설하는 따위의 광고 속에 나오는 웃기지 않는 협박 역시 모두 ‘자기’를 상대하는 개인에게 말을 건넨다. 그리고 이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자리라면 어김없이 출현한다. 그것이 초등학교 어린이이든 아니면 대한민국 국민이든 그 상대가 누구인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는 누구의 이야기든 모두 “자기를 대하는 나”의 이야기로 바꾸어낸다. 이런 이야기하기를 일컫는 말은 ‘윤리’이다. 따라서 ‘자기의 윤리’란 것이 현 시대가 만들어내고자 하는 사람의 꼴이자 이야기하기의 으뜸가는 방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계발에서 초점은 ‘계발’이 아니라 ‘자기’란 말에 놓여있다. 그러므로 아래와 같은 어느 신문 기사는 조금 고쳐 읽어볼 필요가 있다. “‘어린이 처세술’이 성행하고 있다. 서점에는 어른들의 처세술을 동화로 꾸민 ‘어린이 자기계발서’가 넘치고, 어린이 캠프에서는 ‘재테크’를 가르친다. 사회가 처세와 성공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며 나라의 미래인 동심을 멍들게 하고 있다.” 얼마 전 어느 신문에 난 기사이다. (‘경향신문’, 2009년 3월 24일 치) 그 기사는 어느 출판평론가의 쓴 잔소리도 덧붙였다. “1등만 살아남는 승자독식의 사회구조에 조급함을 느끼는 부모들과 이에 편승한 출판업계가 아이들을 자기관리와 처세에 나서도록 조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아이들에게는 단편적인 지식과 이해타산적인 자기계발서보다 다양한 인문서를 통해 인간과 세상을 통합적으로 보는 안목을 키워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모두 맞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해타산적인 자기계발서가 아닌 다양한 인문서가 사실 더 지독한 자기계발서라면 어떨까. 이를테면 언젠가 세월이 흘러 폴 오스터와 무라카미 하루키같은 지금의 명망 높은 소설가들이 죄다 은밀한 자기계발 문학의 저자들이었음으로 판명된다면 어떨까. 그렇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자기를 실현하고자 방황하는 개인들의 자아를 그려내는 우리 시대의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어린이 문학에서 가장 흥미로운 변화 가운데 하나를 꼽자면 그것은 명사 문학이 위인전을 대체했다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명사 문학이란 말 그대로 대중문화의 스타나 유명 스포츠 선수, 혹은 기업가들이 쓴 전기문학을 가리킨다. 언제부터인가 그들이 갑자기 본받아야 할 인물로 꼽히고 그들이 이런저런 기회를 통해 쓴 자서전 혹은 대담집, 전기같은 것이 어른들은 물론 어린이를 위한 읽을거리로 등장하고 득세하여 왔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위대한 사람에 관한 글이니 위인전이지 않은가. 누군가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위인전 속의 인물과 명사 문학 속의 인물들이 전연 다른 사람인데다 그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방식 역시 두드러지게 다르기 때문이다. 위인전 속의 인물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덕목이나 가치에 비추어 조율된 삶 속에 놓여있다. 그래서 그가 들여다 본 그 자신은 우리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의 삶은 우리가 위대하고 본받을만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가치를 보여주는 일화로서 등장할 뿐이다. 그렇지만 명사 문학 속에 나오는 인물은 전연 다르다. 그는 오직 자신을 대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시대의 정신 혹은 가치를 연기하는 위인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의 앞길을 선택하고 그 선택을 실현하기 위하여 분투하는 영웅적인 개인이 명사 문학의 주인공이다. 그렇다면 자기가 가진 개성이나 독특한 기질이라 해봤자 그저 시대의 가치를 보여주는 사례로서만 취급될 뿐이기에 위인전 속의 인물은 그저 당대의 가치를 보여주기 위한 꼭두각시에 불과한 칙칙한 개성 없는 인물인 것일까. 반면 명사 문학 속의 인물은 끊임없는 도전과 선택, 변신의 과정으로 가득 찬 화려하고 풍부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일까. 역설적이지만 결론은 정반대이다. 위인전은 같은 가치와 덕목이라도 얼마나 끊임없이 다양한 변주 속에서, 즉 얼마나 변화무쌍한 인생 속에서 펼쳐지는지를 보여준다. 반면 명사문학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더 없이 지루한 동어반복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나는 나다”는 자폐적이고 질식할 듯한 세계 속에 갇혀있는 인물들의 판박이 같은 삶을 보여준다.
이는 ‘세상에 너를 소리쳐!’에서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아이돌이라기보다는, 본인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발전하는 ‘자가발전형 아이돌’이라고 할 수 있다”(41면)라거나 “남들이 ‘스탠더드(Standard)’라고 부르는 노-bf란색 포장도로에서 벗어나, 나는 수풀이 우거지고 어디로 뻗어 있을지 모를 ‘와일드 로드(Wild Road)’를 선택했다”(73-4면), “‘나 자신’이란 건 없다. 나는 오로지 내가 만들어가는 대로 만들어진다. 인간이 가지는 욕심 중에 선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진정한 욕심은 ‘내가 만들어가고 싶은 대로 나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196면) 운운. 이런 이야기는 어째 많이 듣던 이야기지 않던가. 이는 거의 모든 명사들이 끊임없이 반복재생되는 어떤 기계 속의 녹음된 목소리처럼 들린다. 거기에 더해 우리는 “웃음 10계명”, “긍정적 사고방식”, “칭찬하기”같은 자기계발과 관련한 경영학 혹은 심리학적인 지식들이 쏟아내는 테크닉들이 뒤섞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기획된 아이돌 밴드가 기획된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참담한 것은 태양이 공병호가 되고, 승리가 구본형이 되며, 탑이 스티븐 코비가 되고, 대성이 황수관이 되며, 지 드래곤이 탐 피터스가 되어 변신한다는 일이다. 자기계발서가 위험한 것은 바로 새로운 경제체제가 자신에게 걸맞은 사람의 꼴을 빚어내고자 만들어낸 대표적인 글쓰기의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 글쓰기에 우리 시대의 대중음악의 스타까지 저자로 참여하는 일을 보는 것은 우울한 일이다.
– 창비어린이에 기고한 글

촛불, 그리고 “운동”의 정치를 생각한다


M. Ward, Hold Time

이명박 정권의 패악이 날로 더해가고 있다. 이를 낱낱이 꼽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그저 우리가 할 말은 “더 말 해 무엇해” 정도일 것이다. 이에 더해 우리는 현 정권의 무능에 마치 숨이 멎을 것같은 기분이다.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폭발한 신자유주의적 금융위기가 세계를 뒤덮은 연후 한국 사회는 거의 비명을 지를 지경에 이르러있다. 당연 경제 살리기를 제 소명으로 내세웠던 현 정권이 어떤 능력을 발휘할지 기대할 만도 하다. 그러나 현 정권이 내놓는 정책과 대안은 무엇 하나 변변한 것이 없다. 현재의 경제적 위기를 수습할 능력은 차치하고라도 과연 이 정권이 한국 사회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 지조차 불투명하다. 분배보다는 일단 성장이 우선이라는 애용하던 한국 보수 세력의 논리가 이번엔 통할 처지도 아니다. 이미 마이너스 성장이란 예측이 분분하고 함께 견뎌보자고, 긍정의 사고를 하자고 아무리 독려하고 설레발을 쳐도 불안과 낙담을 이길 재간이 없어 보인다. 그에 한 술 더 떠 이 저열한 정권은 제 귀에 거슬리는 이야기를 했단 이유로 과격한 운동가도 아닌 인터넷의 경제평론가를 찾아내 구속하는 짓까지 저질렀다. 그가 내놓은 경제적 예보가 옳고 그름이 문제가 아니라 매체를 통해 발언한 시민을 구속했다는 것이 더 문제라는 것을 현 정권은 내내 모르쇠 한다. 따라서 용산 참사를 전후하여 청와대에서 흘러나왔다는 신종 보도지침은 놀랄 일도 아니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이명박 정권의 등장은 역설적으로 좋은 일이다. 이명박 정권이 등장했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역사적 퇴행이겠지만 그 퇴행이란 것도 역시 한국 사회의 민주화의 효과겠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투표라는 행위를 통해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정치적 절차를 마련했고 이명박 정권은 바로 그 투표를 통해 집권하였다. 그와 그를 후보로 내세운 한나라당의 정치적 반동 혹은 역주행은 반민주적인 쿠데타도 정변도 아닌 어떤 정치권력을 선택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주권적 행위를 통해 이뤄진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선택이었다는 것 때문에 더 수치스럽고 굴욕스럽다 개탄한다 해도 그것이 엄연히 1980년대 민주주의적 투쟁과 그것의 성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것까지는 부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니 우리는 더욱 과감한 주장을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명박 정권은 무능한 좌파 정권을 심판한다는 터무니없는 데마고그를 통해 집권하였다. 그것은 어쨌거나 선거가 ‘정치적’인 행위라는 점을 보여주는 증좌이다. 그렇기에 외려 역설적으로 그것은 아주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 사실일지 모른다. 그것은 선거가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는, 즉 어떤 정치적 선택도 운반하지 못한 채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훌륭한 ‘국가적’인 통치 행위 가운데 일부로 전락하지는 않았음을 보여주는 징후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서 프랑스의 철학자 바디우가 사르코지 정권의 등장을 두고 내놓았던 짧은 분석을 떠올린다. 그는 사르코지 정권의 등장을 프랑스의 정치적 역정 속에서 하나의 이변에 해당한다고 아니 과감하게 말하자면 어쩌면 프랑스에서 정치의 종말에 가까운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것은 거칠게 말하자면 이럴 것이다. 종래엔 어떤 선거였다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제 아무리 희박하게 투영되는 것이었다 해도, 선거는 ‘정치적’ 절차, 즉 좌인가 우인가를 선택하는 것, 다시 말해 어떤 세계에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행위에 육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르코지는 바로 그런 정치적 절차로서의 선거가 이제는 순전히 ‘국가적’ 절차로 환원되는 것, 바디우 스스로의 말을 빌자면 “국가적 형식, 자본주의적 의회주의의 형식에 편입”을 알리는 사태이다. 바디우가 보기에 사르코지 정권은 그가 신패탱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냈다. 그것의 특징은, 거칠게 옮기자면, 불안과 공포를 정치적 경험의 감각 속으로 대량 투여하면서, 정치를 제거한 정치, 다시 말해 불안과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우리 사회를 지켜야 하는 일로서의 정치가 바로 정치라는 반정치적인 정치의 세계를 열어놓았다. 따라서 그가 보기에 사르코지를 선출한 선거는 더 이상 정치적 선택이 아닌 것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가 묻듯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합법적인 정치적 절차가 선거뿐이라면 그리고 그 선거가 더 이상 정치가 아닌 국가의 품 안에서 움직이게 된다면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정치적 행위의 길은 무엇일까. 과연 ‘해방적 정치’를 위한 길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이 점에서 우리는 이명박 정권의 등장에서 앞서 말한 것과는 전연 양립하기 어려운 특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명박 정권은 어쨌든 민주화의 효과라는 것 속에서, 여전히 선거가 정치적인 선택과 결정의 절차로 작용한다는 조건 속에서 등장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우리는 조금 시선을 비틀면 그것이 또한 반대의 모습 속에서 포착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명박 정권은 그간의 선거에서 비록 실패와 좌절을 거듭했다하더라도 언제나 관류하던 특성, 즉 정치적 절차로서의 특성을 완전히 제거한 선거를 통해 등장했다. 무능한 좌파 정권을 심판하는 보수 정치세력임을 자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경제 살리기”라는 신화적인 주문(呪文)이었다. 그것은 사회적 삶의 세계를 조절하고 규정하는 원리라고 해야 할 정치는 존재하지 않는, 만약 그래도 정치란 것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 사회를 온갖 불안과 공포로부터 보호하는 일이 되어버린, 그런 정치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 정권의 등장은 민주화 이후에 우리가 확보한 민주주의적 행위, 그것의 또 다른 이름일, 정치적 절차로서의 선거가 마감되는 하나의 역사적 계기일지도 모른다.
사회의 효율적인 경영이란 이름으로 둔갑해 버린 정치,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국가 경영의 CEO를 뽑는 일로 전락해 버린 선거가 우리 손에 쥐어진 전부라면 결국 우리는 한국 현대사에서 참으로 유례없는 정치의 황혼기에 놓인 셈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낙망할 일 만은 아닐 것이다. 헌법을 통해 혹은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법률적인 합의와 보장을 통해 마련된 절차, 즉 선거를 경유하여 온전히 정치를 실행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한국 현대사 속에서는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외려 우리가 더 익숙해 있고 심지어 더 능통한 것은 바로 ‘운동’, 즉 정치 없는 정치를 정치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정치가 정치로서 구실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운동을 통해 해방적 정치를 지속하였고 정치가 사회의 경영과 관리란 역할 속으로 봉쇄되지 않도록 투쟁하였고 그 결과 운동권이란 영예로운 이름을 만들어 냈다. 운동권 혹은 민중운동은 국가가 국민 혹은 시민을 호명할 때 민중이란 이름을 내세우며 어떤 체제 속에서 살 것인가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주체로서의 자리를 점유하고자 분투하여 왔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탈국가화시키면서 동시에 선거를 비롯한 일련의 민주적 절차들이 온전히 정치적 행위의 공간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위력을 발휘하여 왔다. 그리고 아마 이는 1987년의 ‘민주화’를 되새기는 방식 가운데 하나일 수 있을 것이다. 민주화는 바로 정치가 국가 경영이란 이름으로 정치를 추방할 때 국가가 집행해야 하는 결정적인 일이 바로 자신을 영원한 선택의 대상으로 되돌려 놓는 일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를 통해 국가와 정치 사이에 어떤 일치도 있을 수 없음을 규정하는 일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민주화 이후’의 세계에서, 무엇보다 이명박 정권이 등장하면서, 우리는 민주화의 효과가 중단되는 역사적 계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눈길이 ‘운동’으로 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운동은 민주주의와 국가 사이에 거리를 만들고 국가의 행위로 민주주의가 유괴되지 않도록 하는 결정적인 힘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치(권)과 운동(권) 사이에 놓인 긴장과 거리는 선거를 비롯한 사법적인 민주주의적 절차가 겪는 운명보다 더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몫이다. 그리고 그러한 절차가 구성하는 정치적 활동의 형식인 대표의 정치, 정당 정치 같은 것보다 우리가 응당 정치적 사유라고 할 만한 것을 경주해야할 영역도 바로 운동의 정치이다. 그렇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촛불 시위’가 문제적이다.
또 다시 촛불이냐고 푸념할 이들이 많을 것이다. 1987년 이후 가장 강렬하고 심지어 화려했다 할 정치적 동원인 ‘촛불 시위’가 정작 아무런 정치적 효과도 만들어내지 못한 데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을 우리라고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짜증과 혐오를 견뎌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특히 정치적 사유를 지속시키고자 한다면, 더욱이 더 이상 정치엔 희망이 없다는 체념적인 반동적인 유혹에 굴복하지 않으려면, 고통스럽지만 ‘촛불 시위’에 대하여 사유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다. ‘당비의 생각’ 두 번째 권이 마련되면서 견뎌야 했던 심리적 긴장이 있다면 바로 그것일 것이다. 다른 주제를 놓고 고심했지만 우리는 ‘촛불’에 대한 면밀한 반성 없이 우리의 정치적 사유가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우리는 촛불 시위를 ‘운동의 정치’의 위기 속에서 사유할 필요를 절감했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한국 민주주의와 정치의 관계를 사유하기 위한 필수적인 질문을 구성한다.
1부에서 우리는 촛불을 ‘운동의 정치’로서 분석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촛불을 민주주의적 사태로 무조건적으로 단언하려는 암묵적인 주장에 거리를 두려는 것이다. 촛불을 민주주의적 사태로 확정하려면 그것이 충족시켜야 하는 조건을 따져보아야 한다. 물론 이는 가장 크게 촛불의 주체를 정치적 주체로서 반성하는 일이다. 그들은 과연 민주주의의 정치적 주체인가. 먼저 우리는 ‘촛불 좀비’의 일원이자 촛불 현장에서 가장 뜨거운 발언자였던 한윤형의 글을 볼 수 있다. 그는 금기의 선, 폭력과 비폭력이란 망상이 어떻게 민주주의적 투쟁으로 촛불시위가 진화하는 것을 제약했는지 분석한다. 그리고 촛불이 어떤 세계에 살 것인가를 선택하는, 정치적 결정의 행위로 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촛불 시위가, 이데올로기적인 코미디 속으로 즉 뜻밖에도 지배 질서가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인 플롯(폭력인가 평화인가)에 통합되어갔음을 고발한다. 한편 백승욱은 운동의 정치로서 촛불 시위에 관하여 준열한 반성을 시도한다. 축제적인 열정 속에 사로잡혔으면서도 해방적인 정치의 주체로 스스로로 전화할 문턱을 넘지 못하는 주체, 더 없이 신자유주의적인 삶의 문법을 쫓는 소비적 개인이었으면서 수평적인 연대를 가능케 하는 자기전화 앞에서는 가로막힌 주체, 바로 그것이 촛불에 참여한 주체의 초상이었을 해부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모순적인 주체를 변형하고 전화시키는 운동의 정치가 없다면 촛불은 해방의 정치를 만들어가는 계기로 구실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이택광은 촛불을 욕망의 정치란 점에서 분절하고자 한다. 그것은 한국 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욕망의 기제 속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부르주아적 욕망의 구조와 동일시한 시민 주체가 자아낸 욕망의 환등상이란 것이다. ‘쾌락의 평등주의’라는 욕망에 에워싸인 주체가 촛불의 스펙터클에 유혹당하며 만들어낸 그림자 극장이 촛불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그는 이렇게 불쑥 묻는다. 마지막으로 유영주는 촛불이 ‘거리의 정치’에 머물 뿐 ‘운동권 정치’로 전환하지 않은 이유를 따진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반문한다. 그것이 제 아무리 운동권이 만들어낸 ‘정치문화’를 뛰어넘었다는 찬사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운동권 ‘이상(以上)’이 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권력을 향한 선택을 할 수 있는 대안을 만들어내야 하지 않을까. 그는 이런 자신의 주장을 다듬기 위해 우리 모두 익숙했던 촛불을 둘러싼 네 가지의 장면을 파헤치며 그것이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낼 선택, 그리고 그것을 부를 또 다른 이름인 ‘대안’을 제출하지 못한 채 ‘현존하는 질서’를 옹호하는 사태로 전락해 갔음을 토로한다.
2부는 촛불의 ‘문화 정치학’을 짚는다. 촛불은 다양한 문화적 감성과 의례, 상징과 지식들이 동원된 실천이었다. 통속적이거나 전문적인 과학 지식과 정보들이 투입되고 괴담과 학술적 논쟁이 공존하며 직접적인 욕구가 분출하면서도 공동체적인 열광을 조직하는 도덕적인 열기가 뒤덮기도 하는 복잡한 문화적 역학이 촛불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상길은 촛불의 ‘모랄’을 읽으면서 촛불이 어떻게 자신의 정치적 효력을 제한했는지 분석한다. 그는 촛불의 모랄이 순수성에의 집착이라는 모랄을 내세우며 ‘불결한 것으로서의 정치’, ‘오염된 것으로서의 현실정치’라는 부정적 상상 속에서 정치의 현실적 세계와의 만남을 회피하고 거부하였음을 꼬집는다. 한편 앞서의 이상길과 궤를 달리하는 탈근대적 종교 현상으로서 촛불의 성스러움을 읽는다. 그는 사회적 요구를 제기하는 시민이길 멈추고 정치적 주체로 도약하기 위한 계기를 촛불의 시민종교적 특성에서 찾아보고자 입론을 제시한다. 한편 김정한은 촛불 직후 이뤄진 서울시교육감 선거의 결과를 짚어보면서 이를 지난 20년간 한국에서 전개된 사회운동과 정치의 관계 속에서 반성한다. 그리고 폭발적인 사회적 저항이 ‘선거’를 제외하면 효과적인 정치적 행위로 이어지지 못하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아나키즘적인 유혹에서 벗어난 새로운 사회운동의 모델이 도래해야 함을 역설한다. 과학은 현대의 신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불안과 공포를 촉발하는 원천으로서 또는 그것을 길들이고 내면화하는 처방으로서 도처에서 소비된다. 오철우는 촛불에도 예외 없이 등장한 과학적 지식의 대량 소비를 분석하면서 이것이 괴담과 진실의 프레임 아래 어떻게 사회적 쟁점을 탈색하고 제거하였는지 비판한다. 이재현의 글은 최근 우리를 경악케 한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구속 사건을 통해 촛불이 만들어낸 대항적 헤게모니 혹은 그것을 구성하는 주체의 문제를 짚는다. 애매하고 막연한 불만과 공감을 통해 형성된 촛불이 효과적인 정치적 행위로 이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물론 거기에 참여하는 주체가 자신을 지배받는 주체로 스스로를 의식화하는 것이다. 이재현은 미네르바를 의식화의 모범적 선생 혹은 유기적 지식인으로 꼽으며 촛불 이후의 정치적 주체화에 관한 토론에 흥미로운 논점을 마련한다.
마지막으로 3부는 촛불에 참여한 주체들의 정체성을 보다 섬세하게 짚어보고자 시도한다. 김영옥은 촛불의 70퍼센트를 차지했다는 여성 주체에 관하여 은수미는 ‘내 새끼 이기주의’라는 욕망 속에서 촛불을 달군 중산층에 관하여 그리고 김보경은 배제된 사회적 주체들 속에서 구성된 촛불 주체의 보수적인 정체성에 관하여 각기 날카로운 분석과 성찰을 던진다. 김영옥은 생명권력(biopower)을 동원함으로써 움직이는 신자유주의적 국가 형태와 삶권력적인 역량을 배가하게 된 여성 주체가 대립하는 역사적 국면을 짚어내며 여성이 정치적 주체로서 국가와 어떻게 상대하여야 할지 질문한다. 은수미는 촛불집회가 비정규직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배제한 채 이뤄진 중산층적인 욕망의 무대가 아니었는지 조심스럽게 따지며 연대의 정치를 가능케 하는 촛불 이후의 운동을 탐색한다. 김보경은 촛불 이후 우리가 마주친 가장 경악스런 사건일 ‘용산 참사’를 떠올리며 선량한 시민이자 안정된 사회성원으로서 자신을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촛불을 관통한 것은 아닌지 그리고 이것이 연대의 정치로서 촛불이 진화하는 것을 가로막지 않았는지 짚는다.
‘당비의 생각’이 두 번째로 마련한 이 책이, 앞서 앞에서 던졌던 물음에 온전히 그리고 확정적인 해답을 제시한다고 너스레를 떨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시도하려 했던 것은 무엇보다 어떻게든 지금 우리는 어떤 식으로 정치를 사유하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조망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더 화급하게 물어야 할 일은 정치적 정세보다 우리가 그것을 반성하고 비판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사고의 정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사유하고 반성하고 있는가를 묻는 일보다 우리에게 더 절실한 일은 없다고 믿는다. 우리가 이 때늦은 책에서 시도하려 했던 것도 사유의 특성 가운데 하나라고 해 마땅할 필연적인 뒤늦음, 시쳇말로 사유한다는 것의 ‘뒷북치기’를 기꺼이 떠맡으려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반성하고 판단하고 있는지 윤곽을 그려보려는 작업보다 지금 우리에게 더 필요불가결한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유의 책임을 함께 나누어 가질 필자들을 초대하였고 그들에게 우리가 던질 질문을 함께 다듬어갈 것을 부탁하였다. ‘당비의 생각’의 뒤늦은 그리고 적잖이 삐딱한 뒷북과 공명하며 날카로운 비판과 토론이 이뤄지길 기대하여 본다.
– 당비의 생각 2번째 권의 서문으로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