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의 세계, 가족의 세계 – 딩크족과 듀크족 그리고 가족의 생활세계

우리 시대의 인류학자는 마케터들이다. 20세기에 원시부족사회를 헤집고 다니며 현지조사를 벌이던 말리노프스키, 프란츠 보아스, 마가렛 미드같은 인류학자들이 있었다면 21세기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발명하고 취향의 만화경을 섭렵하는 시장조사자들이 있다. 이들은 천편일률적인 질문지를 들고 전화번호부를 뒤지는 1950년대 시장조사자들의 모습과 닮은 데가 거의 없다. 이들은 마치 인류학자처럼 디지털 카메라와 노트북 컴퓨터를 들고 도시의 뒷골목을 뒤지며 청소년들의 하위문화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한다. 그리고 MTV와 나이키, 디젤같은 첨단 기업들에게 트렌드라고 불리우는 우리 시대의 신화를 판매한다. 인류학자들이 식민주의 정부와 커넥션을 맺었다면 이제 시장조사자들은 전지구적인 기업과 커넥션을 맺고 있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쨌든 우리 시대의 부족민들은 라이프스타일의 부족들이다.
시장조사자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얼개를 분석하며 명명하는 역할을 전담하고 있다. 과거에 인류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이 맡고 있던 이같은 역할은 이제 시장조사자들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이를테면 다가올 시대의 예보자들은 누구인가. 물론 그것은 트렌드 분석가들이다. 미국의 유명한 일간지가 트렌드 분석가인 페이스팝콘을 일러 “우리 시대의 노스트라다무스”라고 칭했던 것은 전연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갈 사회의 모습은 곧 어떤 상품을 소비했는가에 의해 표현된다. 어느 문화이론가가 더 이상 역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만약 그것이 존재한다면 아마 그것은 노스탤지어적인 상상력에 따른 역사일 뿐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그를 정확히 최근의 한국 영화와 티비 드라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적어도 서태지 세대 이후 우리에겐 역사는 중요한 정치적 사건을 통해 제시되지 않는다. 역사는 그 당시에 우리가 소비했던 소소한 상품들에 의해 표현된다. 당시에 우리가 신었던 신발의 브랜드, 당시에 우리가 먹었던 우유의 상표, 당시 우리가 즐겨들었던 대중음악 등이 그 시대를 보여주지 않는가.
이런 점에서 우리 시대의 가족사회학자들 역시 시장조사자들이다. 딩크족이나 듀크족같은 새로운 우리시대의 부족들 역시 모두 시장조사들이 발견하고 명명한 것들이다. 딩크족(Double Income No Kids)은 자녀 없이 부부 생활을 보내려는 새로운 가족 형태를 가리키고 듀크족(Dual Employed With Kids)은 맞벌이를 하면서 자녀를 가지고 아이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는 새로운 가족형태를 가리킨다. 딩크족이면서 아이 대신에 애완동물을 기르며 그들에게 감정적인 애착을 보이는 가족 형태는 딩펫족(Double Income No Kids+Pet)이라고 한단다. 여기에 조금 우울한 버전인 딘스족(Double Income No Sex)도 있다. 이들은 말 뜻 그대로 부부이지만 섹스를 하지 않는 커플을 가리킨다.
이런 새로운 가족 형태들이 지닌 특성은 겉보기엔 우리 시대의 가족 형태의 변화 추세를 예리하게 분석하는 듯이 보인다. 그렇지만 가족의 분석은 가족을 분석하는 자의 관점과 태도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화씨 9.11>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미국의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라면 어떻게 생각할까. 사실 그는 <볼링 포 콜롬바인>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찍어 참혹한 청소년 총기 난사 사건의 원인을 매우 설득력 있게 분석한 바 있었다. 그가 찾아낸 결론은 무엇보다 가난한 가족들의 비극이었다. 그가 찾아낸 미국의 평범한 가족들의 모습은 자녀에게 관심을 보이려 해도 해고의 위협 혹은 빈곤의 공포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가난한 가족들일 뿐이다.
이는 비단 미국에 한정된 일은 아닐 것이다.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한국의 부부 가운데 절반 이상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듀크족에 가깝다. 그러나 이들이 듀크족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뿐이다. 그들은 소비자 가족으로서 시장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딩크족이든 듀크족이든 그것은 모두 소비주의라는 렌즈를 통해서만 자신의 삶을 해석하고 정의하는 시대가 만들어낸 가족의 모습일 뿐이다. 따라서 딩크족과 듀크족의 특성은 곧 그들이 소비할 수 있는 상품의 목록을 통해 나타날 뿐이다. 밤늦은 시간까지 아직 끝내지 않은 일이 있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산만하게 서성이는 미국 가정 주부의 모습은 한국의 주부들의 모습에 투영되지 않을 수 없다. 자녀를 향한 관심은 값비싼 육아상품들을 소비하는 일일뿐이고 정작 자녀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줄어들고 가족과의 관계는 서먹해지고 낯설어질 뿐이다.
자녀들과의 관계를 매개하는 것은 육아상품이고, 부부관계를 매개하는 것은 레저상품이며, 자신과 가족의 관계를 확인하고 즐기는 것은 외식과 여행일 뿐인 세계. 그런 세계가 행복한 세계일리 만무하다. 그렇지만 딩크족과 듀크족은 포스트모던한 자본주의가 상품의 세계와 친밀한 삶의 세계인 가족의 세계를 용해하는 용광로일 뿐일까. 그런 냉소주의에 빠질 때 우리는 절망에 빠질 뿐이다. 전통적인 가족의 신화에 현혹되어 가족적 가치를 내세우는 보수적인 선택은 좋은 대안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주어진 일은 딩크족과 듀크족이 포착한 가족의 변화가 소비자로서의 가족임을 간파해야 한다. 그리고 가족의 삶을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고 명명하는 노력에 뛰어들어야 한다. 새로운 가족이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고 새로운 상품의 세계일 뿐일 때 우리가 가족을 이해하고 상상하는 틀은 빈곤해지고 불행해진다. ■
사보에 기고한 글. 약간의 이데올로기적 검열이 있어 싱겁다.

욕망의 해방, 그리고 새로운 성혁명

결혼전문가 혹은 커플매니저야말로 우리 시대의 중요한 사회학적 증상일 것이다. 모든 사회이론은 만남 자체를 괄호친다. 만남을 성사시키는 조건은 묻지 않은 채 만남이 이뤄진 뒤의 공식적인 사회적 계약 요컨대 결혼과 가족, 연인 등을 분석한다. 따라서 그런 만남이 이뤄지도록 만들어주는 조건을 분석하는 것은 망각되거나 포기된다. 그런 점에서 커플매니저와 결혼전문가는 사회학자들이 방만하게 무시했던 중요한 영역, 즉 만남에 관하여 분석하고 종합하는 우리 시대의 숨은 사회학자들이다. 그들은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분석하며 그것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중요한 상징적 지식을 생산한다. 물론 그것을 통해 꽤 많은 돈까지 벌어들인다.

(제프 쿤스, <블로우 잡(카마수트라)>)
접대 혹은 손님을 맞이하는 정신적 태도가 제3자 혹은 이방인과의 만남이라면, 결혼이나 연애는 내부에서의 만남에 해당될 것이다. 전자의 경우 제법 많은 사회이론가들이 분석을 시도하였다. 예를 들어 호텔은 전문화되고 상업화된 접대의 공간이다. 나날이 번창하는 컨벤션 센터류의 접대 공간과 파티서비스업과 캐터링 산업 등이 선도하는 접대 행위의 산업화는, 만남의 행위가 어떻게 변형되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는 가능한 손님을 집으로 맞이하길 꺼린다. 푸짐한 성찬과 과시적인 증여로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던 과거의 접대의 에토스는 사라진지 오래이다. 우리는 가능한 집을 밀실화하고 있으며 “둥지”와도 같은 집이 바깥에 드러나길 꺼린다. 탈근대적 주거문화의 표본이자 “한국판 상류층의 신주거문화”의 상징인 “타워팰리스” 아파트는 아예 입주자를 찾는 손님을 재울 게스트룸을 따로 만들어놓았다고 한다. 타워팰리스 아파트의 입주자들을 취재한 어느 신문의 기사는 “그들의 생활양식”에 관해 흥미로운 소식을 전해준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정의하는 태도는 한마디로 말하면 “예절과 매너”라는 것이다. 동네 수퍼마켓을 갈 때라도 츄리닝을 입어선 안되는 예절이 바로 그들의 에토스이다. 그렇지만 접대의 문화적 정체성이 이렇게 바뀌어가듯이 만남의 정체성 역시 상당히 바뀌었다.
일전 누가 서평을 게재한 적이 있는 미셀 우엘벡의 소설 [소립자]은 우리 시대의 만남의 불가해한 성격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보고서일 것이다. 그는 놀랍게도 욕망의 철학을 비판하는 과격한 선언을 제출한다. 그는 이미 노환에 시달리고, 그 자신의 잦은 표현에 따르면 망령이 들은 노인들의 헛소리에 불과한 것으로 “욕망의 철학”을 규탄한다. 물론 그가 말하는 그 염병할 노인들이 누구일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들은 분명 들뢰즈와 가타리, 푸코 나아가 욕망과 쾌락을 예찬한 모든 철학자들일 것이다. 우엘벡의 이야기를 따르자면 욕망의 철학과 생활양식은 미국에서 건너온 비트족과 히피족의 정신적인 에토스를 흡수하고 욕망에서 자유와 행복을 찾다가 스스로 파멸했으며 나아가 그 뒤를 잇는 세대를 파멸시킨 자들이다(따라서 들뢰즈와 푸코가 미국에서 복잡계이론과 초끈이론, 분자생물학을 뒤섞은 희한한 히피들 사이에서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예찬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들은 나체 해수욕장과 뉴에이지 풍의 레저시설의 주인이 되었으며, 불감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병자들이다. 그들은 사회의 비판을 자신의 욕망을 확보하기 위한 저열한 경쟁과 아집으로 몰아넣은 자들이다. 무엇보다 나쁜 것은 바로 이러한 68 세대의 철학 아래에서 황폐한 삶을 살아야 했던 그의 아들, 딸들이다. 그들이 근사한 아파트의 테라스에서 스와핑을 즐기고, 저녁 식사에서 욕망의 철학을 회상하며 쭈글해진 뱃가죽을 쓸어 내릴 때, 바로 그들이 번식시킨 두 아들, [소립자]의 주인공인 브뤼노와 미셸은 우울증과 편집증 속으로 하염없이 빠져든다. 그런데 우엘벡의 [소립자]나 [플랫폼]같은 소설이 들려주는 하염없이 서글픈 20세기를 향한 부고는 또한 우리에게도 더없이 해당된다.
그러나 우엘벡의 소설이 환기하는 것은 만남에 대한 음험하고 도저한 향수이다. 그것은 낭만적 사랑, 진실한 사랑을 향한 안타까운 열망을 제외하곤 만남의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우엘벡은 실증주의와 무성생식의 세계를 꿈꾸는 미셸과 결국은 미쳐버린 채 자발적으로 정신병원에 수감된 섹스중독자인 브뤼노로부터 지극히 애매하고 반동적인 주장을 암시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잃어버린 사랑의 재발견이다. 그들이 죽기 직전 마침내 진정한 사랑인 듯한 운명적인 그녀들과 재회하고, 잠시 행복을 맛본 후 곧 끔찍한 죽음으로 그녀들을 잃어버릴 때, 그들은 각자 파멸적인 선택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그러나 우리는 우엘벡의 싱겁고 시시한 결론의 암시로부터 가정의 가치를 일깨우고 진정한 헌신과 맹세에 바탕한 결혼을 강조하는 통일교와 모르몬교의 복음을 들을 뿐이라고 강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실, 우엘벡같이 총명한 작가가 주장하려 한 바는 바로 섹스를 둘러싼 “풍속의 해방”이 가져온 파국적인 결과, 사이비 절대 자유주의의 감당할 수 없는 결과에 대한 반성의 시도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우엘벡의 주장 따위는 아랑곳 않을 것이다.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옹호하며 기꺼이 안전하고 쾌적한 SM을 즐길 것이고, 애널 섹스를 둘러싼 공포를 극복하고자 애쓸 것이며, 스와핑을 둘러싼 논쟁에 참여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사이버네틱스를 통해 추출된 상대와 수백 번이 넘게 미팅을 할 것이다. 또한 자신의 가장 안전하고 훌륭한 만남을 성사시키기 위해 기꺼이 요금을 지불하고 데이터베이스 속에 자신의 자질구레한 신상명세를 넘길 것이다. 또한 “동쪽에서 오는 귀인을 만나게될 것이다”는 따위의 점괘를 얻고자 복채를 지불할 것이며, 타로카드와 사주궁합을 보는 데 아낌없이 주의를 집중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싸구려 행동심리학과 뉴에이지 풍의 사이버네틱스, 허접한 동양학이 뒤섞여 만들어낸 만남의 과학을 통해 만남의 “기적”을 통제하고 지배하려 한다. 그러나 이같은 “만남”을 둘러싼 인식의 증대가 어느 사회학자의 말마따나 “친밀성의 구조변동”을 가져오고 한결 “자기성찰성”이 증대된 “순수한 관계”, “조형적인 섹슈얼리티”로의 진화를 가져오는 것일까. 물론 우리는 그런 주장에 한치도 동의할 수 없다. 우엘벡의 주장처럼 우리는 사랑을 더욱더 지혜롭게 통제할 수 있는 세대가 되기는커녕 만남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한 인류 최초의 세대가 되었다. 여기에서 벗어날 탈출구는 무엇일까. 그것에 대한 답을 찾느라 우리는 또 수십 년을 허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바야흐로 또 한번의 성혁명이 있을 것이다. 부디 그것이 극우가족주의자에 의한 반혁명이 아니길 학수고대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