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 연구> “68 운동” 50주년 특집

 

2018년은 1968년의 ‘운동’의 뜨거운 폭발로부터 50년째 되는 해이다. 이미 유럽에서는 68 운동을 둘러싼 열띤 논쟁과 그를 결산하려는 시도들이 계속되어 왔다. 68 운동은 현대사의 연구의 중요한 주제로 자리잡았고 또 이를 다룬 책들도 다수 소개되고 출간되었다. 그럼에도 68 운동은 여전히 새로운 기억을 촉구하며 그것이 남긴 유산과 과제를 재평가하도록 이끌고 있다. 68운동은 ‘신좌파’의 출현, ‘네오-마르크스주의’의 등장, 새로운 사회운동의 대두 등으로 상징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68운동은 자본주의적 경제구조와 정치제도에 대한 비판과 거부을 주도했던 프로그램인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 정치에 각별한 의미가 있다. 68운동은 그것을 비판하고 개조하고자 한 시도들이 다투어 각축을 벌인 역사적 실험의 무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68운동은 자본주의 비판을 사고하고자 하는 이론적 실천이나 정치적 기획에 있어 피할 수 없는 대상일 것이다. 그러나 68운동의 혼란스러운 성격은 또 다른 접근을 허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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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

Norman McLaren – Pen Point Percussion

좌파세력을 후려치기 위해 고안된 새로운 접두어로 21세기 한국의 정치적 형세를 상징하는 낱말이다. 종북은 종북 좌파 세력이라는 발언 형태로 등장하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북이란 좌파를 가리키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이를테면 과거에 유행했던 용공 좌파란 말을 동시대 버전으로 업데이트한 것이 종북 좌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이 좌파 내부에서 종북으로 지칭되는 정치세력을 견제하고 비판하기 위해 좌파 세력 스스로 만들어낸 말임을 생각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80년대의 급진적인 정치운동을 이끈 주된 세력인 민중민주파와 민족해방파 가운데 민족해방파의 일부를 가리키고자 사용된 종북이란 용어는 훗날 통합진보당의 해산과 그 정당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정치가들과 활동가들의 구속과 탄압의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 종북은 극우 보수세력이 자신과 대립하는 정치세력을 지칭하기 위해 주문처럼 사용하는 낱말이다. 또한 현실에 좌절을 느끼며, 말로만 변화를 부르짖을 뿐 아무런 이렇다 할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자유주의 정치세력을 환멸 하는 ‘일베’ 류의 낙오자적 청년집단이 즐겨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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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말들 그리고 억류된 말들

Gang of Four – At Home He’s A Tourist (Peel Session)

말이 마음을 드러내고 밝힌다고 우리는 믿는 편이다. 그러나 이제 말은 어떤 마음을 먹어야 하는지 다그치는 데 더욱 이바지한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누군가는 터무니없이 낡은 용어라고 정색하겠지만, 오늘날 언어는 세상 어느 때에도 볼 수 없었던 이데올로기가 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알바 천국’이라는 어느 회사의 이름은 어떨까. 나는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어떻게 말의 등뼈가 부러졌는지 목격하는 듯 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알바 지옥은 그럭저럭 말이 된다. 그러나 알바라는 불안정하고, 보상도 형편없으며, 그 일을 해야 하는 이에겐 더욱 끔찍한 하루살이 노동을, 천국이란 말과 천연덕스럽게 이어붙이는 것은 어색하다 못해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오늘도 용감한 알바천국 광고는 알바의 권리를 주장하며 너스레를 떤다. 알바천국이라는 말은 노예나리란 말처럼 속수무책의 거짓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을 용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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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

Men At Work – Down Under

신자유주의 이후 자본주의가 인간을 이해하는데 널리 권장하고 또 사용하며 오늘날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수련해야 할 행위의 덕목을 가리키는 말. 컴퓨터의 성능을 측정하기 위해 업자들이 사용하는 전문용어였던 과거를 물리치고 오늘날 인간을 이해하는 결정적 단서로서, 시대의 낱말이 되었다. CPU속도, 모니터 해상도, 스피커 채널 등을 가리키는 스펙이란 용어는 이제 노동자 나아가 모두의 됨됨이를 역량(competence)으로 환원하고 측정하는 데 두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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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중딩을 아느냐

Siouxsie And The Banshees – Hong Kong Garden

거의 이십여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어느 해 보았던 한편의 영화가 자꾸 기억에 떠오르곤 한다. 그것은 어느 여자중학교 학생들이 만든 영화였다. 그 영화의 제목은 <너희가 중딩을 아느냐>였다. 방송반 학생들이 만든 그 영화는 큰 상을 탔지만, 충격적인 내용에 놀란 학교 측이 문제 삼으면서 논란을 빚기도 했다. 나는 영화를 만든 학생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끼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요즈막 여중생 폭력 사태를 둘러싼 주변의 심상찮은 기운을 생각하면 이 영화가 더욱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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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만으로는 턱도 없다

 

[Charli XCX – Boys]

옷깃을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점점 헤아리기 어려운 시대에 접어들었다. 언제 다시 볼지 모를 사이임을 염두에 두고 허투루 대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는 오랜 속담은 낯선 이를 대할 때 견지할 윤리를 간결하게 전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런 말은 아무런 쓸모 없는 세상의 풍경을 매일 마주한다. 누가 누구를 험하게 대했다는 소식은 거의 매분마다 들려오지 싶다. 막돼먹은 자들로 가득한 지옥에서 사는 듯싶다며 누군가 푸념을 해도 꼼짝없이 대꾸 한마디 못할 지경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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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방 유토피아가 지겹다

LCD Soundsystem – tonite

그래서 장차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어? 이렇게 누가 물어온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답할지, 궁금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다들 그런 꿈을 꾸고는 있는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갑작스레 전직 대통령이 파면되고 새 대통령을 뽑은 지 몇 달이 되어간다. 다들 참을성이 큰 탓일까. 대통령을 몰아낼 만큼 대단했던 기세는 변화를 향한 힘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듯싶다. 다들 팔짱을 끼고 일단 지켜보자는 심산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 해도 그간 쌓였을 변화를 향한 기대가 무엇인지 아직도 아리송하기만 하다. 우리는 무엇을 원했던 걸까. 그 꿈속엔 어떤 세계가 있었던 것일까. 꿈이란 것이 무엇인지 또 그런 것이 오늘날 남아있기나 한 것인지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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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경제 시대의 스펙터클 – 시각예술의 관객/소비자

Guy Debord – 분리 비판 Critique de la séparation 1961

아마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참조점이라고 생각하는 이라면, 잊지 않고 새기는 구절들이 있을 것이다. “스펙터클은 고도로 축적되어 이미지가 된 자본이다”(테제 34)라거나 “현대적 생산 조건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모든 삶은 스펙터클의 거대한 축적물로 나타난다”(테제 1) 등. 그런데 이제 슬슬 그의 비범한 주장에 의심을 품을 때도 되지 않았을까. 이를테면 이런 물음을 던져보면 어떨까. 스펙터클이 스펙터클로서 제 값을 하려면 우리는 얼마나 오래 그것을 지켜보아야 또 그것에 얼마나 관심을 주어야 하는 걸까.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미 포스트-스펙터클의 사회로 진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던지는 것도 바로 이런 질문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목 경제(attention economy) 혹은 관심 경제란 새로운 경제학이나 마케팅 용어는, 오늘날 이미지가 처한 희한한 운명을 약삭빠르게 설명한다. 말 그대로 주목이 오늘날 가장 큰 가치가 되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스펙터클이 스펙터클로서 구실하려면 그것은 무엇보다 주목과 관심을 얻어내기 위한 시련을 통과해야 한다. 이 이미지는 얼마나 오랜 동안 보는 이의 주목을 끌 수 있을까. 쉬이 짐작할 수 있듯이 오늘날 우리는 이미지의 융단폭격에 시달린다. 관람자가 다가서기도 전에 그것을 응시하고 헤아려보기도 전에 이미지는 시야를 급습한다. 혹은 꽁무니를 뺀다. 관람객은 미처 몇 초도 견디지 못한 채 다른 이미지로 이동한다. 과연 누가 스펙터클의 영예를 차지할 것인가. 이제 스펙터클은 자신들끼리 서로의 적이 되어 더 선동적인 스펙터클이 되겠다고 잔인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 건 아닐까. 스펙터클의 적은 그를 응시하는 관람자가 아니라 다른 스펙터클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그리고 스펙터클은 이제 더욱더 희귀한 것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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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코뮤니즘은 어떠신지요

KLEENEX – Nice

구소련의 흐루쇼프 시대에 이런 농담이 유행했다고 한다. 지난해 이름을 떨친 저 유명한 인공지능 컴퓨터 알파고 못잖은 컴퓨터가 소련에서 개발되었던 모양이다. 인공지능 컴퓨터가 사회주의 나라에 왜? 물론 컴퓨터 없는 사회주의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컴퓨터는 경제를 계획하고 조직하는 데 따르는 수많은 복잡한 문제를 처리하는 데 필수적이다. 마침 스탈린주의 적폐에서 벗어나 인간적 사회주의를 꿈꾼 흐루쇼프는 그 대단한 인공지능 컴퓨터가 얼마나 대단히 똑똑한지 알아볼 작정으로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침침한 미래를 감출 요량으로 공상과학은 물론 미래학을 금지했던 스탈린과는 다른 그였지만, 그 역시 그리 앞서 나간 것은 아녔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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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정치적인 문자들

Jim O’Rourke – Simple Songs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인 2013년 겨울, 나는 어리둥절한 낯빛을 띤 그렇지만 또 조금은 스스로를 으쓱해 하는 듯한 희미한 웃음을 얼굴 가득 품은 제자들을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만나게 되었다. 언제 들어섰는지 모를 스케이트장이 시청 앞 광장을 차지하고 있었다. 거리 집회라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을 아이들을 거기로 불러낸 것은 얼마 전 고려대학교에 나붙은 대자보 때문이었다. 줄여 “여러분 안녕들 하십니까” 혹은 더 줄여 그저 “안녕들 하십니까”로 알려진 그 대자보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버린 세상을 지켜보며 안타까워하던 한 대학생이 붙인 것이었다. 2013년 12월 10일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다니던 주현우란 학생은 대학 후문에 그 대자보를 붙였고 이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 신문은 이러한 뜨거운 반응과 대화를 두고 ‘안녕 세대’란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하수상한 시절에 어떻게 우리가 안녕들 할 수 있을지 되뇌며 친구들에게 모두 안녕들 하십니까라 묻는 이 대자보가 왜 그토록 큰 호응을 받았는지 그 연유를 짐작해 보는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사회학적인 분석, 그즈음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세대론적인 담론을 가볍게 들먹이며 그들이 처한 고통과 비참이 그 발언에 전광석화처럼 반응하게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옴에도 불구하고 안녕들하십니까 만큼의 효과를 촉발하는데 이르지 못했는지 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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