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욱국

오늘 은행빚을 갚으러 가는 길에 줏어든 신문에서 백기완 선생의 시와 문득 마주했다. 굵직한 기사를 훑고, 칼럼과 사설을 주루륵 읽다가 눈여겨 보는 일이 없는 오늘의 시같은 칸에 눈이 멎었다. 그가 세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우리가 그를 사모했던 것은 그가 아주 좋은 뜻에서 근본주의자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네 눈 앞에 펼쳐지는 그 숱한 변화무쌍한 일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라.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모순, 분단이라는 근본적인 대립의 결과일 뿐이다”라고 역설하는 아주 비현실적인 현실주의자였다. 그가 바로 그렇게 선지자같은 단호한 말을 함으로써 우리는 그를 현실적인 인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을 박탈당한 자들에게 그 믿음을 채워줌으로써 그는 우리가 세상을 견딜 수 있게 하여주었다. 그런데 온건한 개혁정당의 한 분파로서 현실 정치의 공간 안에서의 좌익일 뿐 근본적인 부정의 상상으로서의 좌익과는 관계가 먼 민주노동당의 대통령 후보와 달리 1987년 그는 분명히 사회주의적 후보였다. 권력을 민중에게라는 슬로건과 부유세를 도입하라는 슬로건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렇게 사회주의를 자리바꿈함으로써 사회주의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변형시켰다. 물론 그렇게 변형된 사회주의는 언제나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불평등과 차별을 교정하는 부수적인 존재로서의 사회주의이다. 따라서 나는 민중후보였던 백기완의 포효를 끝으로 우리는 분단 이후 사회주의적 정치실험을 최종적으로 마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적어도 89년의 동구권의 붕괴와 전지구화의 흐름 이후 사회주의는 더이상 유지되기 어렵다는 조건에서 말이다.
– 오늘 읽은 그의 투덜거림. 혹은 이 시대에 대한 증오를 옮긴다.
아욱국
한여름의 아욱국
그것은 옛부터 얼추 뺏길세라
문을 잠그고 먹어야하리만치 감치는
맛거리라 퍽퍽 퍼먹는데
방송이라는 것이 잔망을 떤다
어느 밥집에서
홈 메이드 푸드라는 걸 파는데 그게
그렇게 날개 돋칠 수가 없다고
홈 메이드 푸드라니 무슨 말일까
저것이 썅(도대체) 우리 말인가 영어인가
가분재기(갑자기) 목다시(목구멍)에 모래가 깔깔
왜 내뱉었더니 아내의 말이다
아이고 아까워라 개나 주어야겠군
멋쩍어 방송을 돌렸다
빗길에 산을 가는 씩씩한 젊은이들의 모습
누군가가 어딜 가느냐 묻는다
엘티 간단다
엘티라니요
리더쉽 트레이닝의 약자 L.T 말입니다
이때 또다시 왈칵 밑두리가 뒤집혀
몽땅 뱉으니 아내의 말이다 아욱국은
사람이나 좋아하지 개는 그렇게 안 좋아하는데
그런들 어쩝니까 개나 주어야지
그러게 말이야 이 아까운 국을
그러는데 또다시 방송이 호들갑을 떤다
요즈음은 웰빙시대, 웰웰빙빙
물끄러미 그림을 보던 아내의 물음이다
여보 웰빙이 무슨 소리지요
글쎄 건강, 안정, 행복 그런 뜻일 거라고 하니
바싹 다가앉으며 묻는다
비가 새는 집에선 건강도 안정도
행복도 몽땅 눈물에 젖는데
그 말을 꼭 웰빙 그래야만 하는거요
맞어 우리말도 있지 넉넉살이라던가, 행복이란 말
그런데 그 행복 말이야
이놈의 벗나래(세상)가 몽땅 썩었는데
한 사람의 행복만 건질 수가 있겠어
그렇다면 입때껏 당신은 뭘 했는데
그 말에 그만 또다시 내 한살매(인생)가 팍싹 무너지는 듯
울컥 이참엔 똥물까지 게우니 아내의 말이다
아욱국이라도 먹을려고 하면 저
범죄궤짝(텔레비전)부터 개를 주어야 하는 게 아니오
범죄궤짝이라니
아, 당신이 그러질 않었소
저 속에는 나오는 소리라는 것은 몽땅 거짓말이라고
이때다 내속 저 밑에서부터 배어나오는 짙은
한숨이 안쓰러워 쫓기듯 정거장엘 다다르니 빼곡한 찻속은
귓속 찢어지는 알도 못할 미국노래로 더 만원이고
대학로 즐비한 간판들도 몽땅 미국말로 범벅을 했고
가분재기 온몸이 거꾸로 뒤집혀 왜거렸지만
더는 나올 게 없는 듯 신물만 나오는 아 나의 건강
나의 안정 나의 행복은 이제 어디에서 찾을거 어적이는데
가분재기 찌…ㄱ 죽씬한 차가 재게(급히) 멎으며 소리친다
“야, 이 늙은 새끼 이거, 정신차려 임마.”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 소장

순결의 경매와 우리시대의 (탈)물신주의


며칠 전 어느 18세 “소년”이 자신의 순결을 경매에 내놓았다고 하여 법석이 벌어졌다(매체에서 한결같이 등장하는 소년이란 표현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그보다 며칠 앞서 자신의 동정을 판다고 내놓았던 소년의 “총각”은 30만원으로 낙찰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런 경매사이트에서의 순결 판매를 두고 등장하는 가장 흔한 푸념과 비난은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세상 만사가 상품화되었냐는 것이다. 이런 조금 젠체하는 “물신 비판”적인 태도는 단지 위선적이어서 잘못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태도 자체가 우리 시대의 교환을 추진하는 원리라는 점을 오인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물신비판적인 태도는 삭막하고 냉정한 사물-상품의 세계와 인간적인 세계를 나눈 다음, 인간적인 세계가 팍팍한 교환가치 즉 돈으로 “소외”되는 데 대해 서글픈 분노를 터뜨린다. 순결 경매에서 우리가 터뜨리는 태도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타산적인 이해관계로 오염된 인간 관계와 달리 낭만적인 사랑이야말로 소외되지 않은 삶의 영역처럼 여겨 왔다. 그리고 성, 특히 순결이야말로 우리가 오랜 동안 상징적인 교환의 세계에 오염받지 않은 “한계”처럼 숭배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볼 때 우리가 순결 경매에 대해 퍼붓는 분노와 반감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다.
모든 것이 상품이 될 수 있는 시대, 지적 재산권과 생명에 대한 특허권을 통해 가장 많은 가치를 생산해내는 시대, 바야흐로 탈근대 자본주의의 시대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런 점을 감안할 때 “순결 경매” 소동은 어쩌면 우리 시대의 중요한 한가지 비밀을 설명해준다. 얼핏 보기에 경매는 거의 직접적인 교환 형태로의 회귀, 추상적인 교환의 세계로부터 어떤 목가적인 물물교환의 세계로의 퇴행을 보여준다. 교환에 관련된 두 당사자의 직접적인 욕구와 상관없이 교환되는 대상을 외부에서 부과된 일반적인 가치에 의해 규정하여 버리는 것, 이것이 자본주의적인 교환 관계의 특성이었다. 물론 이러한 교환관계를 매개하는 보편적인 대상은 화폐이다. 굳이 마르크스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단순한 교환에서 보편적인 등가에 따른 교환으로의 이행에 관하여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경매란 특수한 교환, 맥락과 요구에 따른 자발적인 교환으로의 회귀를 보여주는 탈근대 자본주의 시대의 특성일까. 옥션과 이베이(ebay)라는 경매 사이트로 쉼 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이야기와 추억의 물건들은 보편성의 폭력에 저항하는 탈근대적인 상품 경제 내부로부터의 저항인 것일까.
그렇지만 경매는 추상적인 외적 가치의 척도에 떠밀린 교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아니려니와 또한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잘못 이해된) 물신주의적인 몽매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상황은 정반대에 가까울 것이다. 자본주의적 교환의 운명을 떠맡는 화폐의 예외적인 지위를 떠올려 보자. 모든 것의 가치를 대변하고 중재하지만 정작 화폐 자신은 아무 쓸모 짝에 없는 종이 조각에 불과하다. 이 점에 관하여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그것을 요약한다면 아마 가치를 표현하는 가치로서의 화폐의 지위는 순전히 부정적인 것, 즉 음의 가치라는 것이다. 화폐는 자신은 정작 아무 것도 아니면서 다른 모든 대상을 가치로서 표현될 수 있게 하여준다. 다시 말해 “경제적인 삶”이 실현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그렇지만 그 자체로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예외적이고 선험적인 지위를 떠맡는 것이 화폐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경매는 매우 시사적이다. 그것은 모든 상품이 직접적으로 화폐로서의 지위를 자처하는 즉 화폐로 자신을 도약시키는 시험이 펼쳐지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경매는 교환이 가능한 장을 떠받치기 위해 존재해야하는 예외의 지위를 사라지게 만들고 모든 것이 예외로서의 지위를 떠맡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는 화폐가 가치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가 가능해지는 조건으로서 기능한다는 점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경매는 바로 화폐를 경유하지 않고 그 자체 직접적으로 가치화의 형식을 대행한다. 한편 경매에서 표현되는 가격은 곧 상품의 가치를 재현하는 객관적인 등가물로서가 아니라 경매 대상을 가치화하는 형식 자체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경매는 탈근대 자본주의의 논리학 교실인 셈이다.
경매에 나온 소년의 동정(童貞)으로 되돌아가 생각해 보자. 그것은 상품이 될 수 없는 내밀한 사적인 삶의 측면까지 상품이 되어버린 미친 시대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순결까지 자기 자신이 가치의 규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정확한 뜻에서 소년의 순결 경매는 물신적이다. 이 때 주의할 점은 순결도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이 되었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순결도 자신을 가치의 척도로서 내세울 수 있게 되었다는 뜻에서 그것은 물신적이다. 순결은 이제 엄밀한 뜻에서 고결한 혹은 초월적인 것으로서 등장한다. 그것은 인간의 관계를 사물의 관계로 오인하고 있다는 식의 흔한 이해에서의 물신과도 다르고, 특수한 맥락의존적인 대상을 추상적인 대상으로 둔갑시켰다는 뜻에서의 물신과도 다르다.
우리는 노동가치론이 말하듯이 각 상품의 제작에 투여된 노동으로서도 혹은 신경제론자들이 이야기하는 상상력과 창의, 체험으로서도 가치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 교환은 근본적으로 우연적인 것이고 그것을 규정하는 원리 자체가 없다. 교환이 가능한 것은 교환되는 대상의 숨은 속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교환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내는 외적인 형식에 있다. 따라서 자본가는 타산적인 이해에 따라 살아가는 물질주의적 세계관에 병든 인물일지 모르지만 실제 그는 무엇보다 사변적인 관념론자처럼 행동한다고 했던 마르크스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 대목에서 우리는 경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왜냐면 경매는 바로 바로 그 외적인 형식을 직접적으로 체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매는 모든 것을 사고 팔 수 있는 세속적인 대상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화폐라는 숭고한(?!) 정신적 형식을 통해 세상의 모든 대상을 규정한다. 순결은 물론이려니와 자신의 탯줄, 수십 년 기른 손톱, 이별의 편지, 외과 수술의 흔적까지, 모두 경매의 대상이 되었을 때, 그것은 그 모든 대상에서 보편성의 차원을 발견하려는 편집증적인 관념론자의 모습과 겹쳐질 수밖에 없다.
분명 경매는 탈근대 자본주의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것은 금본위제가 몰락하고 뒤이어 달러본위제마저 사라진 뒤의 세계, 이른바 법정 화폐의 세계를 대신하여 들어선 “법이 부재하는 교환”의 세계를 상징한다. 우리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탈물신화된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는 교환의 세계를 중재하고 규제하는 화폐의 권위를 간단히 비웃으며 교환은 근본적으로 자의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역설할 수 있다. 그리고 국제적인 교환은 몇몇 가진 자들의 손에 의해 농락되는 편파적인 명령에 불과할 뿐이라고 분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미국 연방준비위의 결정에 따라 세계 경제가 동요할 때 그것은 화폐가 교환의 투명한 매개자이기는커녕 근본적으로 외부에서 삽입된 폭력이란 점을 입증한다. 알다시피 주식시장은 더 이상 법인자본가가 상품의 제조를 위한 자본을 충당하는 보충물이 아니라 곧 그 자체 기업활동을 위한 목적이 되었다. 여기에서 주식시장에서 기업의 가치는 곧 주식경매인의 경매를 통해 결정되는 것임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환의 이러한 외적인 성격에 눈뜸으로서 물신주의적 미망에서 벗어난 것일까. 물론 대답은 전연 그렇지 않다. 물신주의자는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소중한 삶의 세계를 파괴하는 사람이 아니다. 진정한 물신주의자는 시시하고 반복적인 삶의 세계와 그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가치의 세계로 세계를 분간하는 사람이다. 종교는 인간적인 삶의 세계의 소외된 모습이라 비판했던 포이에르바하 식의 물신-종교 비판을 상기하여 보자. 이런 물신주의 비판에 관하여 마르크스는 종교는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삶의 세계를 인간적인 삶의 세계라는 이상으로 소외시키고 이를 다시 종교로 소외시킴으로써 소외를 소외시켰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종교가 민중의 아편인 것은 현실의 모순을 은폐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인지하는 조건을 생산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로써 자신이 세계를 인식하는 틀 안에 머무르는 한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혁명 혹은 구원을 가로막는다는 것이었다. 거칠게 말하자면 종교는 구원의 근본적인 외부로부터의 출현, 거칠게 말하자면 메시아적인 성격을 포착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경매는 우리 시대의 종교이자 화폐이다. 경매는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교환의 성격을 마치 경매에 참여하는 자들이 경매에 내놓은 대상의 숨겨진 가치에 대한 적극적인 발견과 선언에서 찾아내려 한다. 따라서 경매는 국가가 교환의 비율과 원칙을 결정하던 전 단계의 화폐적 교환의 세계보다 더욱 물신적이다. 따라서 자신의 순결을 상품으로 내놓는 것은 “이마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돈을 밝히는” 패덕한 모습이 아니다. 순결이란 극히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환상일 뿐이다. 순결을 가진 그 소년이 제공하는 것은 고작해야 형편없이 서투른 성적인 서비스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물론 그가 제공하는 것은 바로 순결의 가치라고 믿는다. 그러나 순결이란 것은 처음부터 없다. 혹은 신체란 순결을 모른다. 신체는 순결이라는 의미망에 끌려들어감으로써 가치화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순결이 30만원에 팔린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의 가격은 어차피 자의적이기 때문이다. 외려 핵심은 그것이 가치를 지닌 대상이 된다는 사실 자체에 있는 것이다. 창의적이고 독특한 관념이 어떻게 상품이 될 수 있는가. 자신이 살아가는 대지와 환경과의 체험이 녹아든 종자가 어떻게 특허가 될 수 있는가. 어떻게 생명의 초월적인 가치가 지적 재산권이 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탈근대 자본주의의 답변은 “그럴 수록에”에 있다. 그럴 수록에 그것은 더욱 가치가 있는 것이고 결국 그것이 교환의 세계를 떠받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흔해 빠진 “인간적 존엄”을 들먹이며 탈근대 자본주의의 흡혈귀적인 성격을 비판하는 고매한 탈물신주의적 비판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것은 탈근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척하지만 곧 그것은 탈근대 자본주의의 경매의 원리와 부합하는 것이다. ■
– 컬티즌에 기고한 글.
– 쓰려고 했던 글에서 빗나간 횡설수설하는 글이 된 듯 해서 마음이 쓰이는 글이 되었다. 메모를 보면 재산압류할 때 최저생계비는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정부의 발표, 인터넷 쇼핑 시장에 범람하는 싸구려 브랜드 티셔츠(로고만 새겨진 지극히 평범한 획일적인 흰색 혹은 검정색 반팔 셔츠), 지적재산권과 탈근대자본주의 등등이 메모되어 있다. 미메시스 대 재현의 이분법 비판하기 등등..이 쓰여있다. 도대체 이 모두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생각하여 끄적여 두었을까. 요즘의 글쓰기가 계속 이런 곧 지나면 맥락을 잃은 메모로 부터 출발한다. 대개 너무나 긴 글을 써야 하는 것인데 글을 쓰다보면 당장 떠오르는 몇가지 착상을 요약하는 수준에 머무른다. 인용을 하지 않는 글을 쓰며 글을 쓸 때 책을 보아두는 버릇도 잃은지 오래이다. 그런데 이게 좋은 버릇인지 나쁜 버릇인지 잘 모르겠다. 글을 쓸 즈음에 읽은 책의 문체와 어투 혹은 발상까지 옮아와 글을 쓸 즈음의 생각에서 빗나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튼 발레에 관한 글 한 조각을 쓰면 대충 글쓰기 숙제는 끝. 오랜만에 지젝의 글을 키들거리며 읽고 논문을 쓸 준비를 해야겠다.]

법이 없는 세계의 패러디 – 풍자와 비판




민중미술에서 패러디까지 – 정치와 욕망

한나라당 대표인 박근혜 패러디 사건을 둘러싼 정치적인 공방으로 어수선하다. 열린우리당은 “그냥 웃자고” 한 것인데 한나라당이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정치적으로 악용한다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반면 한나라당은 국가대표기관인 청와대가 그것도 자신의 대표적인 미디어 가운데 하나인 공식웹사이트 안에서 제1야당의 대표가 그렇게 모욕을 당하고 있는데도 모른 채 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며 연일 성토하고 있다. 한술 더떠 한나라당은 조만간 “청와대 저질 패러디 진상규명 및 재발근절 대책 특별위원회”라는 굉장히 심각한 이름의 기구를 만들어 강력 대응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그러나 이런 두 정당의 소란스런 입씨름과 상관없이 패러디 현상을 이끄는 장본인들은 “똑똑한” 대답을 늘어놓으며 패러디의 무죄를 강변한다. 요지인 즉슨 패러디는 대중들이 자신을 소외시키는 정치적인 현실에 참여하는 훌륭한 미학적인 방편이라는 것이며 정치라는 냉담하고 중립적인 이해의 공간을 대중들의 구체적인 관심과 열정으로 되찾으려는 민주적 충동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문제가 되었던 패러디 “작품”의 출처인 인터넷 사이트 “라이브이즈”는 최근 자신의 사이트를 통해 공식입장을 발표했다. 이야기인 즉슨 “행정수도 이전문제에 대한 작가의 고민과 견해는 휴지조각처럼 날려버리고 작품 끝 부분에 삽입된 영화포스터의 합성된 한 정치인의 얼굴만이 문제가 돼 저질이다, 저급하다, 외설이다, 음란작품이다 등으로 왜곡했다…풍자와 해학, 여유와 포용이 있을 때 민주주의 기본가치인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보장받고 존중되는 것(이며)….아무리 정치가 인정사정 없다해도 주제와 작품 맥락을 도외시한 매카시즘적 반응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라이브이즈는 아울러 이 “작품”을 발표한 작가가 “충격을 받아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 있으며, 매우 심각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고 한다. 패러디 역시 일종의 저자의 관심과 사고, 정서가 표현된 미적인 생산물인 한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패러디가 그러한 미적인 생산물을 만들어내는데 사용되는 일종의 심미적인 양식이라는 것 역시 분명하다. 그러므로 패러디를 발표했던 작가를 비난하고 처벌하는 것은 부당할뿐더러 황당한 일이다. 그렇지만 신학철의 <모내기> 그림에서 김일성 생가의 환영을 보고 그를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한 것과 패러디 작가의 가벼운 풍자를 사법적으로 처벌하는 것 사이의 거리를 무시한 채, 사상과 양심, 표현의 자유를 들어 둘을 동일한 것으로 놓는 것은 너무나 안이한 일이다.
물론 우리는 과거의 민중적인 사실주의와 지금의 포스트모던한 패러디 사이에서 어느 것이 더 진정하고 가치있는 일인가를 따질 필요는 없다. 민중미술이나 패러디나 모두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정치적 현실을 재현하려는 욕망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다. 그렇지만 그것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현실을 재현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전연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오히려 문제는 민중미술이든 패러디이든 그것이 어떻게 정치적 현실을 제대로 재현하느냐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는 정치적 현실에 관한 어떤 허구를 만들어내느냐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패러디를 둘러싼 논란에서 한걸음 비껴서서 우리는 패러디가 우리 시대의 정치에 관한 환상을 어떻게 엮어내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치의 (불)투명성과 패러디
알다시피 우리 시대의 정치는 그 어느 시대보다 투명해지면서 동시에 그 어느 시대보다 불투명해져 가고 있다. 수많은 시민단체와 위원회, 여론집단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살고있는 지역사회의 소소한 현안에서부터 세금과 연금, 교육과 복지, 국방과 외교에 관련된 세부적인 정책에 이르기까지 감시하고 간섭할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이는 거버넌스란 이름의 신종 정치학의 용어로 장려되기까지 한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정치란 국민의 삶의 질을 돌보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과 절차, 제도 그리고 그에 관련된 수많은 전문적인 조사와 발언, 청원, 압력행사 등의 행위에 다름 아니다. 결국 정치란 평범하고 시시한 일상적인 행위들의 집합체로 축소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 주요한 정치적 현안에 관련된 토론회와 공청회를 구경하고 여론조사에 참여하며 게시판에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 그런 점에서 정치는 이제 무슨 대단한 근본적인 이념, 추상적인 윤리적 가치에 얽매이지 않은 실제적이고 타산적인 행위로 변형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더없이 우리의 눈앞에 투명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정치와 마주하고 있다.
그렇지만 과연 그렇기만 한 것일까. 외려 우리는 정치가 갈수록 애매하고 불투명한 베일에 가려진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접어든 것은 아닐까. 예컨대 “노사모”를 둘러싼 끊임없는 소문과 시비에서 엿보이듯이 배후와 음모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은 정치를 둘러싼 우리의 시야가 더욱더 불투명해지고 흐릿해지고 있음을 반증하여준다. 최근 한국 사회뿐 아니라 어느 사회에서나 거의 병적일 정도의 관심을 보이는 부정부패의 스캔들 역시 정치의 불투명성이라는 우리 시대의 망상을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청탁을 비롯한 부정부패에 대한 대대적인 관심은 공적인 지위를 남용하여 특권을 챙기려는 관료제도의 한계를 교정하려는 의지로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오히려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혼란스러워진 우리가 스스로 그 어지럼증을 가리기 위해 만들어낸 구실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음모와 독직(瀆職)이라는 추문의 시나리오를 끊임없이 작성함으로써 정치에 대한 자신의 환상을 계속 유지하려고 한다.
“우리는 분명히 정치적 권력에 의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결정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 정치적 권력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무엇에 의해 조종되는가”. 이런 물음에 답하기 위한 우리의 절망적인 시도 가운데 가장 성행하는 것이 바로 음모론일 것이다. 따라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청문회와 특별검사제, 고발과 진정은 결국 시민의 감시를 통해 보다 투명하고 합리적인 정치를 이루려는 시도라 보기 어렵다. 오히려 명백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규정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상징화해낼 수 없는 미지의 정치에 관한 우리의 불안과 혼란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려는 강박적인 몸짓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설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즉 “권력 없는 정치” 즉 잡다한 이해관심으로 잘게 쪼개진 사회 안에서 각 집단과 지역 사회의 이해관심을 매개하고 처리하는 중립적인 기술적인 절차로 축소된 정치 그리고 전능한 권력에 의해 규정되는 정치, 즉 정치를 규정하는 어떤 보이지 않는 음험한 초월적인 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좌우될 것이라는 끈질긴 집착에 의해 상상된 정치. 이 양립불가능한 정치에 대한 인식이 공존하는 역설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아마 이런 물음에 답하는 한가지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가 패러디의 해부일 것이다. 우리 시대의 대중적인 “해학과 풍자”가 깃든 “민중적인 정치 비판”의 형식으로 간주되는 패러디는 과연 이러한 우리 시대의 정치적 역설과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패러디의 견딜 수 없는 가벼움
이미 말했듯이 패러디에 대한 가장 흔한 옹호와 지지는 대개 이렇다. 패러디란 정치라는 공간으로부터 배제되어왔던 수동적인 대중들이 자신의 정치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실천이란 것이다. 패러디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엄숙한 권위에 싸여있던 정치로부터 후광을 걷어내고 대중들이 자신의 정치적인 욕망을 대담하게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패러디의 미덕은 패러디되는 정치 혹은 권력을 향해 일종의 숨겨진 가정을 품고 있다. 그것은 바로 법으로서의 권력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패러디란 항상 법 앞에서 행해지는 몸짓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법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거칠게 말하자면 정당성을 따지는 물음이 불가능한 초월적인 권위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이러한 권력의 예는 잘 알고 있듯이 아버지의 권위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것은 아버지의 명령과 요구가 충분히 정당하는 것을 검토하고 그것을 인정했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맹목적인 힘으로 나에게 강요되는 것이다. 패러디의 모습은 이러한 아버지와의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계약을 조롱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법이 없으면 패러디도 없다. 그런 점에서 패러디란 자신의 삶을 지배하고 규정하는 중심을 항상 전제한다. 그렇지만 우리 시대에 성행하는 에토스는 법의 권위를 부정하거나 삭제하는 데 있다. 우리 시대에 무조건적인 명령과 권위로서의 법은 사라지고 법은 사라지거나 무기력한 공식적인 규칙과 협약으로 대체되어가고 있다. 우리에겐 자의적이며 맥락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 소소한 규칙이 있을 뿐이다. 그런 연유로 패러디가 우리 시대의 엄숙한 권위를 조롱하고 비판하는 것은 별반 충격적이지도 않고 또한 비판적이지도 않다. 따라서 유신독재 시대의 어느 시인이 했던 “풍자냐 해탈이냐”와 같은 말에서처럼 패러디로부터 어떤 정치적인 비판의 힘을 찾아내기가 어렵다. 알다시피 우리시대의 대중문화는 온통 금기에 대한 도전과 당연시되었던 명령을 위반한다는 선언과 과시로 가득 차있다. 그런 점에서 패러디가 우리 시대의 해학과 풍자를 가리킨다는 주장은 지지되기 어렵다. 오히려 거꾸로 패러디는 우리 시대의 정치를 향한 가장 순응적인 태도의 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더불어 우리 시대에 넘쳐나는 수많은 패러디는 법이 없는 시대, 이미 말한 바대로라면 권위 없는 정치, 잡다하고 사소한 형식적인 절차와 법령, 계약으로 둔갑한 정치가 자아내는 불안으로부터 탈출하려는 퇴행적인 환상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당연시된 명령으로서의 법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 패러디는 허깨비같은 법 혹은 권위의 형상을 만들어낸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알 수 없는 힘을 그것에 투사하고 그것을 조롱함으로써 권위가 없는 세계에서 비롯된 불안을 처리하려 한다.
패러디의 ‘명가’ “딴지일보”를 생각해보자. 딴지일보의 패러디가 주는 쾌락은 무엇보다 법을 ‘구제’함으로써 얻게 되는 쾌락이라 생각할 수 있다. 딴지일보에서 우리가 느끼는 쾌감은 법의 허위성, 편파성을 감지한 탓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없는 법의 존재를 허구적으로 상연함으로써 얻는 “자유로운 주체”라는 환상의 쾌감 아닐까. 딴지일보를 읽으면서 흘리는 웃음과 흥분은 권위적이고, 관료적이며, 가부장적이고, 반공주의적인 신화적 권위를 비판하고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연유한다. “딴지일보”의 패러디는 이데올로기적인 비판으로서, 우리의 심리적인 사고를 규정하는 법의 허구를 폭로하는 것으로 믿어진다. 지난 총선과정에서 한겨레신문에 연재된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의 인터뷰 기사는 그런 패러디의 정수를 보여준다. 예컨대 그는 고상하고 위엄있는 공적인 장면의 주체를 세속적이고 실제적인 이해에 오염된 인물로 격하시키고, 예의 딴지체로 그들을 묘사한다. 따라서 “DJ보다 이쁜 한화갑”이거나 “선수들과 잔 적이 없는 홍준표” 식의 표현은 공적인 정치적 주체(직업적인 정치가란 뜻에서가 아니라 “정치”라는 상징적 장을 규정하고 집행하는 상징적 주체라는 점에서의 정치가)를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속물스런 이기적인 개인으로 탈바꿈시킨다.
풍자냐 해탈이냐 그도 아니라면…..
그렇지만 패러디의 풍자성 그리고 그것에 결부된 이데올로기적 비판은 더 이상 효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점은 풍자로서의 패러디를 그 정반대인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애착의 신화적인 태도를 비교해 보면 쉽게 간파할 수 있다. 한나라당이 총선 과정에서 초반의 낮은 지지율에서 벗어나 반전을 이룬 데에는 당대표인 박근혜가 국모의 딸이자 박애주의자 영부인의 딸로서 신화적인 이미지를 획득한데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박근혜를 끔찍한 억압적인 근대화를 이끈 독재자의 딸이 아니라 신비한 모성적 여성으로 신화화한 것은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에서 비롯된 이데올로기적인 무지의 결과가 아니다. 수많은 정치 패러디는 정치적 권위를 의심하고 그것을 각각의 세속적이고 평범한 이해의 표현일 뿐으로 추락시킨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박근혜의 지지를 낳은 것은 권위를 향한 맹목적인 집착이라는 낡은 이데올로기적 태도인 반면 딴지일보의 패러디 혹은 풍자는 권위의 미망에서 벗어나 그것의 허위성을 자각한 탈이데올로기적인 비판이란 생각은 옳지 않다. 알다시피 권위의 세계가 무너진 자리에서 정치를 규정하고 좌우하는 것은 여론조사와 토크쇼, 정치인의 이력과 소소한 사생활, 그의 인간적 자질과 매력 따위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딴지일보의 패러디와 박근혜의 이데올로기적인 신화화는 모두 동일한 우리 시대의 문화적 배경에 기대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공적인 정치적 주체를 세속적인 이해에 오염된 개인으로 풍자함으로써 이미 존재하는 권위가 있는 양 허구적으로 상상하는 것과 잡다한 일화와 기억, 이벤트를 통해 한 명의 개인을 숭고한 권위로 신화화하는 것 사이에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겉보기와 달리 전연 대단한 차이가 아니다. 둘다 우리 시대의 정치에 대한 상상을 만들어내는 동일한 힘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힘이란 다름아니라 스펙터클이 되어버린 정치 그 자체이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정치란 앞서 말했듯이 불가해한 역설에 사로잡힌 정치이다. 정치에 관한 우리 시대의 핵심적인 환상은 아마 “거버넌스”란 이름의 포스트정치적인 정치와 음모적인 권위에 의해 조종되고 통제되는 정치 사이에서의 동요일 것이다. 거버넌스란 국가의 통치가 아닌 지역사회와 개인의 선택과 참여에 의한 통치로의 변화를 가리킨다.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는 곧 정치를 규제하는 일반적인 이상이 없는 정치의 세계, 곧 정치가 사라지고 자유로운 선택을 하는 개인들과 지역사회만이 있을 뿐임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정치란 수많은 국가기구에 속한 위원회와 시민단체, 자문기구, 국제기관 등에서 제기하는 요구와 그것을 중재하는 복잡한 관료적 장치의 활동으로서의 정치이다. 그러나 그 뒤에는 또한 은밀하게 정치를 향한 불안한 환상이 흘러다닌다. 그 환상이란 자신의 삶을 규정하는 권력을 음모적인 이해, 어떤 보이지 않는 권위를 발견하려고 하는 우리의 편집증적인 집착이다. 물론 이것이 우리 시대의 정치에 대한 어떤 문화적 상상을 구성하는 절박한 시도란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그것이 패러디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상투적인 주장처럼 대단한 비판적인 함축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엔 어렵다. 오히려 패러디는 우리 시대의 삶을 규정하는 권력을 비판적으로 분절하려는 시도를 가로막는 장애물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패러디가 아닌 비판은 무엇일까. 아니 웃음과 풍자를 상실하지 않은 비판은 어떻게 가능할까. 아마 그것이 패러디 앞에서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물음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패러디의 비판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권력을 향한 새로운 비판적인 에토스를 탐색하는 것에서 찾아질 것이다. ■
[월간 문화예술 8월호에 기고한 글]

拔齒_7.1.

– 오늘 마지막으로 치과엘 가 사랑니 하나를 뽑았다. 두시간째 충실하게 나는 의사의 권고대로 거즈를 앙다물고 있었다. 입을 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커다란 바이스가 목 위에 걸터앉은 느낌이었다. 교대 근처를 지나는 2호선에서 입안에 물고있던 거즈를 뱉으며 문득 심란했다. 옆자리에 앉은 심란한 표정의 여대생이 무언가 책을 펴놓고 분홍 형광펜을 밑줄을 긋고 있었다. 무슨 문학론의 교재였던 듯 하다. 그녀가 읽는 책을 힐긋 대다 김춘수의 <처용단장>이라는 시에 눈이 닿았다. 고등학교 시절 읽은 연후 더이상 읽지 않은 그의 시들(김종삼이나 김영태, 오규원의 시를 읽은 지 까마득하다)을 우연히 다시 마주했다. 가슴이 뭉클했다. 정말 그의 수사학은 가끔 전율하게 만든다.
– 오늘 새로운 버스 노선이 시작되었다. 친구인 어느 대학교수가 내일자 한겨레에서 이명박의 신개발주의를 성토한다. 토건주의였던가. 그가 들먹인 한국 사회의 나쁜 반사회적 이기주의의 한가지(다른 한가지는 학벌주의였다)가 자못 심각했다.
– 변호사와 만나 태훈이 2심에 관해 상의하고 장어구이를 먹었다. 맘씨 좋게 생긴 순하고 친절한 여자 변호사와 오래 알고 지낸 이처럼 이야기를 나눴다. 고추장을 바른 채 다정하게 누워있는 장어를 내팽겨쳐 둔채 와야 했던 게 억울하다.

<트레이시 에민의 어느 설치 작품>
– 방학 중에 완결해야할 일들에 대한 플랜을 짜야겠다. 참여관찰에 자신이 없으면서도 문헌분석과 담론연구에 멈추고 싶지 않은 나의 오기 사이에서 계속 오락가락하는 듯 하다. 리처드 세넷 같은 조금은 촌스럽지만 질박한, 그런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이 아직 떠나지 않는다. 리서치를 할 기업 측으로부터 아직 연락이 없다. 오늘 내일 중으로 그 기업을 리서치할지 여부를 결정해야 겠다.
– 읽다 만 앙드레 지드의 <코리동>을 오늘 다시 꼼꼼이 읽어야겠다. 역시 젊은 시절에 읽은 감상적인 지드와 다시 읽는 지드는 다르다. 나는 그가 그토록 대단한 파스칼주의자였는지 몰랐다. 코리동은 아마 가장 엄격하고 섬세한 동성애에 관한 보고서일 것이다. 그의 이 노후한 텍스트는 동성애적 욕망을 찬미하는 수많은 지겨운 문학서적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인다. 그는 여기에서 동성애를 인정될 수 있는 한가지 삶으로서 옹호하기 위해, 동성애의 반대편에 놓인 이성애를 해부한다. 이는 긍정되어야할 동성애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애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면서 동성애 역시 불가능한 것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주장한 뒤에 남는 삶은 동성애가 아니라 어떤 이의 습관, 그러나 어느새 그의 천성처럼 되어버린 혹은 자연처럼 되어버린 삶의 반복적인 모습 만이 있다. 내가 읽었던 알튀세르나 들뢰즈의 어떤 글의 대목을 연상시키는 지드의 단호하고 치밀한 글에 매료되었다. 그를 더 읽어야 겠다. 지금 내가 읽는 글은 세로쓰기로 된 1967년판의 앙드레 지드 전집이다. 그의 글을 다시 재출간할 수 없을까.

그 남자의 잔인한 말버릇

말은 재현의 권력이다. 이때 일컫는 말의 재현적 권력이란 무엇보다 말을 주고 받는 짝패 관계를 정의하는 권력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런 관계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 권력을 나눠준다.
말을 듣는 상대가 있건 없건, 언제나 말은 너와 나 관계 사이에서 흘러다닌다. 말이 통한다는 것은 말을 통하게 하는 여건 속에서 가능한 것이고, 말은 그런 점에서 말을 주고받는 상대들 사이의 관계를 정의하는 힘이다.
“이 깜둥이 놈아”라고 백인이 부를 때 그것은 대단히 인종차별적인 말이지만, 아프리카계 미국인 혹은 흑인들 사이에서 불릴 때 그 말은 당신과 나는 같은 편이며 이심전심이라는감정적 유대를 확인하는 말이 된다.
“이 망할 년아” 라는 말을 부부싸움 도중에 남편이 내뱉는다면 그것은 언짢고 공격적인 폭언이지만 오랜만에 만난 여고 동창끼리의 말이라면 그 어느 말보다 돈독한 우정을 드러내는 말이 된다.
이처럼 말은 어떤 뜻을 가리키기에 앞서 말을 주고 받는 상대 사이의 관계와 그 권력을 빚어낸다. 따라서 어떤 말을 헤아린다는 것은 그 말뜻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말을 주고받는 관계를 헤아리는 것이다.
그럼 이 대목에서 남자의 말과 여자의 말이란 것이 따로 있을 수 있을까하는 물음을 던져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말은 남자의 몫이었다. 여자의 몸을 정의하고 판별하며 규정하는 것은 언제나 남자들의 의학과 생리학이었다. 여자들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고 분배하고 결정하는 것 역시 언제나 남자들의 법학이었고 경제학이었다. 설마 산부인과학을 여자들이 만들었으며 가정법과 호주상속법을 여자들이 만들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가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고 쏟아내는 말이란 것도 결국에는 남자들의 말을 빌려쓰는 셋방살이이다. 그래서 여자들이 말을 둘러싸고 대단한 감수성을 보이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말꼬리 잡길 좋아하고 별말 아닌데 삐치고 수다라면 사족을 못쓰는’ 여자들에 대한 세간의 곱지 않는 눈길은 그래서 반쯤은 일리 있는말이다. 적어도 그런 푸념과 비난을 여성의 말을 둘러싼 감수성으로 고쳐 읽는다면 그런 여성의 수다와 말버릇은 전연 나쁜게 아니다. 그것은 여성들이 가진 말의 영역이고 남성들이 장악한 말의 공간으로부터 달아나고 또 끼어드는 여성의 전략이자 실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자들의 그런 말버릇 혹은 말의 실천을 남자들이 불쾌해하고 비난하는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알다시피 남자들이 제일 질겁하는 여자는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여자이다.
그렇다면 여자들이 말의 숨통을 튀면서 자신의 말을 드러내는 공간을 무작정 축복하고 예찬할 일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군소리’이자 ‘소음’으로 머물러 있을 뿐이다.
여자들의 잔소리와 바가지와 수다와 말꼬리가 ‘나라’의 말이 되고 ‘가족’의 말이 되고 ‘회사’의 말이 될 수는 없다. 그런 말들은 계모임과 동창회와 드라마를 본 뒤의 잡담 자리에서 오가는 말이며, 고작해야 사랑하는 사이에서나 용기를 내어 내어 뱉어낼 수 있는 말이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말은 여전히 남자들의 말이고, 여자들은 말이 건네지는 대상일 뿐이다.따라서 우리가 속한 말의 세계에서 언제나 말은 곧 여성에게 가해지는 통제와 지배의 그물을 엮어 낸다. 굳이 우리말로 번역할라 치면, ‘보지의 혼잣말’로 될 ‘버자이너 모놀로그’같은 연극이 꿈꾸는 세상은 아마 그런 말의 공간으로부터 해방된 여자끼리의 말의 지대일 것이다. 그러나 혼잣말을 흉내낸 그 무대의 말들이 여성들에게 희열과 감동을 주었을 때 그것은 여성의 억압된 진실을 폭로하고 무언가 새로운 교휸적 사실을 알려 주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 혼잣말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져 여자들의 마음을 흔들었을 때, 그 말의 힘은 남성이 독점하고 있던 말을 제 스스로 통제하고 결정하는 권력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었으리라.

그렇다면 남자들의 말의 폭력이란 것도 달리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국의 평균적인 남성이라면 그의 계급적 지위와 교양의 수준을 불문하고 부부싸움의 절정에서 걸핏하면 토해내는 “화냥년” 운운과 “갈보” 운운의 욕설은 그리 대단한 폭력이 아니다. 그 말은 관습적인 이성애적 부부관계에서 여성의 성을 아내-어머니로 더이상 묶어 둘 수없음을 깨달은 남자들의 무력한 비명에 불과하다. 그는 신의 아내가 제 스스로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부릴 수 있으며 자신의 몸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음을 깨닫는 순간, 더없이 불안해지고 혼란스러워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말을 들어 유쾌할 여자는 세상에 한 명도 없다 . 그러나 ‘조신하고 정숙하게’ 살아온 자신에 대한 모욕이자 배신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저만 상처받는 일이다. 남편과 애인의 질투와 억측은 둘 사이의 구체적인 관계의 현실에서 비롯된 말이 아니기 떄문이다. 그것은 남자인 자신과 여자인 “당신, 여보, 자기” 사이에 놓은 관계의 문법 주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간다.

알다시피 남자들의 가장 ‘잔인한’ 말버릇은 그가 나와 구체적인 관계를 맺는 현실적인 자기의 모습을 벗어 던지고 관계 자체를 분석하는 중립적인 판관의 몸짓을 취할 때이다. 갑자기 친밀한 관계에서 오가던 모습을 안면몰수 하고 진리와 규범을 대변하는 발언자의 자리에 선 채 끈덕지고 집요하게 여자에게 말을 건넬 때, 대게 우리는 거의 질릴듯한 기분에 사로 잡힌다. 그것은 오히려 낯을 붉히거나 , 찌푸린 채 쏟아져 나오는 욕설보다 더 잔인하고 난폭하며 숨막히게 한다. 이 때 물론 남편의 위치는 당신과 나 사이의 관계를 둘러 싼, 대화의 자리가 아니라, 무식하고 버릇없는 자신의 여자를 심문하고 벌하는 아버지 혹은 선생님의 자리이다. 그는 자신의 고통과 불편을 고하고 그것으로부터 아내와 자신의 관계를 조정하려는 의지라곤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한 그럴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는’그건 싫어요’라는 말을 언제나 ‘당신은 틀렸어요’라고 밖에 들을 수 없는 반편짜리 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자들의 말의 폭력은 여자들에게 가해진 구체적인 말의 질에 달려 있는게 아니다. 여성들을 비하하고 모욕하는 말들은 빈약하게나마 성별을 둘러싼 권력관계를 들춰내고 그 관계에 묶인 주체들의 위치를 폭로한다. 적어도 그 말들은 난폭하고 비겁하긴 하지만, 둘 사이에 관계와 작용의 흔적을 지우지 않으며 비뚤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소통을 향한 욕망을 품고 있다.
반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남자의 말은 그런 용기와 정직마저 인정하지 않으려 발뺌하는 폭력이다. 그 말이 진정 폭력적인 것은 무엇보다 관계를 맺는 타인의 자리를 지워버리고 그녀를 영원히 허깨비처럼 만들어 버린다는 데 있다

– 나눔터 2003년 봄 제44호에 기고했던 글. 이런 글을 쓴 줄 잊고 있었는데 우연히 어느 블로그에서 읽고 퍼나름. 아, 이런 글을 이렇게 읽는 이들이 있구하는 발견의 기쁨.

파병반대


– 얼추 채점이 끝나간다. 뒤숭숭한 몇 날, 아이들이 낸 글을 읽으며 내내 신경이 뻐근했다. 도대체 어쨌길래 애들이 이런 글을 썼나, 하는 푸념과 자조. 그리고 아이들이 고자질하는 자신들의 은밀한 욕망을 향한 적의. 소비에 관한 그들의 가공할만한 정보와 탐닉. 그리고 이라크 소식에 나는 어쩔 줄 모른채 덫에 갇힌 쥐처럼 신음했다. 가끔 밥을 끓여 먹고, 하루 종일 YTN을 켜놓은 채 가끔 고개를 들어 기웃대고, 몇 사발의 커피를 들이키고.. 문득 드는 생각, 누군가 내게 대단한 측은지심을 지녔다고 동정했는데, 그건 아닐 거란 생각. 외려 나는 모두와 동일시한다. 윤리적인 자의 에고이즘을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거꾸로 나는 모두에게서 내가 있다고 믿는 병신일지 모른다.
– 지난 주에 일찌감치 시작했어야할 채점을 늦춘게 화근일 터. 종내 읽지 않던 책을 몇 권 집어들고 소일한 것이 이렇게 일의 체증을 불러일으켰다. 그렇지만 에드먼드 화이트의 <게으른 산책자>를 읽은 건 정말 잘 한 일이다. <어느 소년의 고백>이 기적처럼 번역되어 슬그머니 서가에서 사라진 후 – 나도 이 책을 어딘가에서 잃어버렸다. 고향집의 책상자 안에 쳐박혀 있을까 – 나는 불과 한두달 전에 란 책을 통해 그의 젊은 시절의 글을 다시 접했다. 그는 60년대의 성혁명의 hedonism을 만끽한 20세기의 가장 행복한 양키 게이이다. 그의 는 Safe Sex에 관한 의학적인 조언과 지침으로 가득찬 에이즈 위기 이후의 게이 섹스북과 전혀 다른 화려하고 풍요로운 텍스트를 보여준다. 그것은 섹스에 관한 송가이며 더 행복해지려는 욕망을 향한 불쏘시개이다. 성혁명의 原-텍스트라고 할 만한 이 글에서 그는 섹스에 물린 모든 멍에를 걷어내고 그것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에 관해 시를 쓴다. 그것은 아마 다음 세대의 질투와 분노를 자아낼만큼 무책임하고 화려하다.
– <게으른 산책자>는 파리지엥이자 양키인 그의 여행기이다. 이 책은 일종의 여행지침서같은 책이다. 현대 게이 문학의 가장 출중한 저자이자 장 주네의 가장 탁월한 권위자인 그의 교양은 대단하다. 그는 만보객이라는 벤야민의 테마와 모데르니떼에 관한 보들레르의 테마를 끌어들이며 파리에 관한 그의 견유록을 제시한다. 그 점에서 그는 세련되고 또한 교양있다. 그렇지만 나는 파리에 관한 그의 글보다 파리를 섹슈얼리티의 지리학으로 읽는 그의 상상에 동참하는 것이 훨씬 즐거웠다. 공중화장실, 간이 휴게소 그리고 퍼블릭 파크로 가득찬 미국의 게이 하위문화에 관한 기억은 이미 구스 반 산트로 충분하다. 나는 게이 메트로폴리스에 관한 글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그것은 마치 나의 기억인 듯 여겨진지 오래이다. 그렇지만 화이트가 소개하는 파리의 게이 공간은 전연 다른 것이다. 그것은 게이라는 종족의 신화의 근원을 찾아나서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온전히 그 말 뜻대로 상궤에서 벗어난 삶, 허용받지 않은 고유하고 특별한 욕망, 곧 도착의 세계를 유영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그는 하위문화 혹은 어떤 공통의 속성을 통해서만 자신의 동성애적 욕망을 서술하는 미국적 호모와 개별적인 욕망의 특별함을 애호하는 프랑스적인 도착을 대비한다. 물론 나는 후자를 지지한다. 게이로서의 삶, 동성애자로서의 연대감, 또다른 부족으로서의 동성애자는 거북하고 지겹고 단조롭다. 그것은 권리의 정치학을 위해 고안된 집단적 상상에 자신의 환원불가능한 예외성을 빈곤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나는 화이트의 동요가 매우 흥미로웠다. 에이즈에 관한 프랑스의 무관심, 푸코적인 도착을 옹호하는 전 세대의 리베르탕(libertine) 게이들과 집단적인 삶의 권리를 향유하여야 한다고 믿는 새로운 세대의 프랑스 게이들의 반목.
– 새로 영역되어 미국에 나온 들뢰즈의 미간행 앤솔로지를 주문했다. <사막의 섬과 다른 글들>이란 제목으로 나온 이 책의 후반에 지상 최대의 전투적인 호모일 “기 오캥갬”의 책에 붙인 들뢰즈의 서문이 영역되어 있다. 그의 글은 정말 매력적이다. 그는 동성애를 정체성을 부수는 정체성, 순수한 부정성의 정체성으로 흠모한다. 나는 그런 그의 태도가 조금 의아스럽긴 하다. 그와 푸코의 각별한 교분도 또한 의아하다. 그러나 그게 왜 문제이겠는가. 어쨌거나 속성없는 정체성, 언제나 속성에 의해, 모든 술어의 원인으로서의 속성에 의해 정의되는 정체성이건만 그것을 결한 정체성으로서 동성애적 욕망. 이를 그는 질투한다. 역시 옳은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인가. 이 욕망의 정체는 무엇인가, 과연 이 속성을 공유하는 자들은 있는가라는 물음에 기만당하지 말아야 했다. 게이 정치학에 관한 나의 상상은 언제나 어긋난 수신자들을 만난다. 언제나 오해받는 주체. 그게 나라는 것이 영 탐탁치 않다.
– 공화주의의 놀라운 개별성의 옹호. 민주주의의 개별성의 사생활로의 변용. 이런 생각으로 나는 며칠 즐겁게 들썩였다. 생각한지 오랜 만이다. 생각하지 않고 학습했던 시절이 부끄러웠다.
– 문득 일본의 게이포르노그라피에 관해 오랜동안 미루어 두었던 글을 쓰고 싶었다. 공유하는 삶의 양식을 증빙하는 미국 게이 포르노와 삶의 세계는 없고 투명한 욕망의 기교만이 있는 일본 게이 포르노는 전연 다르다. 전자가 인간적인 척 하지만 훨씬 더 투박하고 잔인하며 폭력적이다. 후자는 기계적이고 잔인하며 맹목적이고 더럽지만 우아하고 평등하다.

신촌에서 상상하는 전지구적 떠돌이들의 오아시스


1985년 대학에 갓 입학한 새내기이던 내게 신촌은 만국박람회장같은 곳이었다. 로마다방, 파리다방, 워싱턴미용실..영문을 알 수 없지만 다방과 맥주집, 그리고 미장원등은 모두 이국적인 도시의 이름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2004년인 올 해 내게 신촌에서 이곳과 다른 곳의 거리는 사라지고 없다. 파리 다방이 파리와 여기의 거리를 가리키고, 바깥에 있는 불가해한 세상의 매력을 알려주었다면, 신촌은 시쳇말로 어디에도 없는 곳(nowhere)에 가깝다. 신촌 안에는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만화를 보는 놀이방과 이태리 커피전문점, 베트남 국수집, 태국 요리점이 모두 함께 있다. 그러나 이제 신촌은 청담동보다는 후지고 싸구려이며, 홍대 앞보다는 너무 속물스럽고 천박하다. 신촌은 이제 한심해졌거나 아니면 눈길조차 끌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간다.
신촌은 원주민이 없는 장소이다. 한국에서 대학은 언제나 원주민들이 엘리트 국민으로 선발되어 훈련받는 곳이었다. 따라서 신촌에 있는 명문대의 대학생들은 또한 한국 사회 안에서 장소로부터 벗어난 문화를 만들어내는 주역들이었다. 그들은 문화를 근대화하고자 하였고, 그것은 촌티를 벗는 것이었고 또한 유행에 민감해진다는 것이며 또한 국제적인 감각을 터득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신촌이 대표하던 그러한 국민문화의 경계 안에서의 특권은 사라지고 없다. 전지구적인 문화의 흐름 안에 신촌 역시 흡수되었고 다른 모든 장소들도 역시 그 안으로 빨려들었다. 그리고 장소는 그 흐름을 운반하는 사람들의 복잡한 삶의 리듬과 속도에 따라 펼쳐졌다 오므라들었다 하기를 반복한다. 물론 불행한 일이지만 그런 흐름은 언제나 상품의 흐름이고 정보와 지식의 흐름이다.
전지구적인 문화의 풍경으로부터 신촌을 따로 떼어내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신촌이 아무런 문화도 없는 곳이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신촌이 좋은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곳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고 아마 지금도 있을 것이다. 신촌의 문화적 생태계를 조금만 더 유심히 관찰한다면 우리는 놀라운 일을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붙박이 주민이 없는 마을, 장소가 아닌 공간, 상품의 교환과 소비만 있는 거리에, 역설적인 일이지만 사람들은 무엇보다 어떤 절박한 문화적 갈망을 싣고 온다. 그렇다면 신촌에서 우리는 전지구적인 떠돌이들이 만들어내는 문화적 공간을 실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신촌의 부동산, 신촌의 교통 순환, 신촌의 유행의 흐름, 신촌의 학벌, 신촌의 섹스, 신촌의 음악, 이 모두를 분석해 보는 것은 어떨까. 아마 그것은 한국 사회에서 문화가 움직이는 회로를 찾아내는 일이 될 것이다. 또한 그 회로에 새로운 전류를 공급하고 그 안에서 순환하는 나쁜 흐름-자본의 흐름, 권력의 흐름-을 바꾸는 길을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 수업을 듣는 어느 학부생이 만드는 신촌문화관련 신문에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끄적여 본 글…

치통…


– 어영부영 논문 프로포절 발표를 끝나고 난 연후 이제 종강 준비를 하고 있다. 갑자기 들이닥친 몇 꼭지의 원고를 처리해야 하고 성적 처리를 해서 넘기면 올 상반기의 내 스케줄은 마감된다. 그리고 이제 바야흐로 논문의 초안을 몇 챕터라도 써놓아야 가을에 편해질 것이다. 연락해둔 몇 곳과 만나 인터뷰를 본격적으로 할 것이고, 이미 수집한 데이터들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일도 손을 대야할 것이다. 갈수록 늘어나는 자료들 때문에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다. 거의 매주마다 정부나 기업의 문서, 보고서, 그리고 이미 출간된 다양한 경영학의 텍스트북들을 사모으고 있다. 다들 작정하고 뜯어볼 가치가 있는 중요한 문서들이긴 한데 느긋이 자료들을 읽어볼 여유가 없었다. 이젠 좀 시간이 나려나..그 많은 문서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읽을 수도 없어 이 끔찍한 먼지더미와 소음에 파묻힌 집에 틀어 박힌 채 읽어야 한다니 그것도 기가 막힌 일이다. 어찌나 동네에 공사장 먼지가 많이 꼈는지, 공사현장에서 살수차를 불러 집들을 모두 닦아준단다. 제길. 그건 큰 공사장 이야기고 앞치에서 하던 아파트 공사장이야 그런 여력이나 있겠지 옆구리에서 하는 빌라 공사는 그런 엄두도 못낼 것이다. 장마나 길어지면 조금 나을려나.. 이럴 줄 알았으면 청주행을 좀 더 일찍 준비하고 저축이라도 해 둘 것을..여름은 어쨌거나 빈궁기이다. 빙수를 적게 먹고 아이스커피를 탐내지 말 것..!! 냉면은 일주일에 한번만..!!
– 황홀한 치통 때문에 프로포절 발표를 엉망으로 마치고 기분이 꿀꿀하다. 무슨 대단한 걸 하는 자리도 아니었고, 절차와 의례를 성실하게 통과하는 것이었는데, 치통의 발작을 걱정해서 미리 꾸역꾸역 먹은 진통제가 고열에 현기증에 별 해괴한 증세로 날 괴롭혔다. 드문드문 기억나는 건 준비해간 문서를 읽으면서 지금 내가 뭐라 지껄이는거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기분..코멘트를 들으면서 그걸 메모해보려는데 무슨 말인지 귀에 들어오지 않아 멍하니 백지 위에 펜끝을 누르고 정말 땀이 비오듯 하네 속으로 혼잣말하던 기억..이런 것 뿐이다. 거의 끝나갈 즈음에서야 식은 땀을 한 대야쯤 쏟고 머리가 맑아진 듯 하다. 그리고 술먹으러 가고…그리고 본격적으로 치통으로 몸부림쳤다.
– 밤을 꼬박 샌 채 공포스런 치과 치료의 체험을 강변하는 인터넷의 글들을 읽으며 뭐 심리적 준비운동을 했다고나 할까. 거의 빈속으로 버텼던 하루가 지나고 진통제로 부대낀 속에 멀겋고 뿌연 피로만 몸에 걸치고 있었다. 새벽에야 잠깐 눈붙이고 간 병원에서도 고역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괘씸한 치과병원의 행태도 못마땅했고, 1800만원의 견적을 들이밀며 대공사에 필요한 할부와 할인의 흥정을 벌이는 코디네이터인가 하는 직원의 기겁할 상담도 정나미가 떨어졌다. 무성의한 스캘링에 나와보니 거의 두 개의 이빨을 뭉개놓고 거기에 석회질인가 먼가를 벽공사하듯이 덕지덕지 발라놨다. 임플란트를 하라고 윽박지르는데 그건 다른 데서 해야할 일이다. 곧 낼모레면 들러야할 치과 가기가 영 괴롭다..
– 주말에 잠시 외출, 근사한 식사 대접받고 술마시고 그리고 또 한바탕 벼랑 끝으로 갔다. 정말 이젠 불귀점을 지나가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구 지치기도 한다. 더 북적대며 갈등하는 것조차 힘들어지고 눈치가 보일 때면 손을 놓아야 할 것이다. 하물며 그 고통이 치통만 할까..후후
– 혼자 밥을 입안에 들여놓기란 참 쉬운 일이 아니다. 늦잠을 자고선 대충 국수를 말아먹고 나서 안먹을 핑계를 찾다 결국 며칠 전부터 냉장고에서 뒹굴던 아욱을 꺼내 밤늦게 국을 끓여 저녁을 먹었다. 어차피 시원찮은 입사정을 생각하면 국에라도 말아 먹으면 조금 목구멍을 넘어가줄까 하는 기대에서 였다. 조만간 누군가를 초대해서라도 즐겁게 푸짐하게 밥상을 벌여놓고 밥을 먹어야 겠다. 생선도 구워먹고 일전 눈여겨보았단 닭고구마 찜도 해먹어야지. 올 여름엔 잘 먹어두어 이 푸석한 살갗에 조금이라도 윤기를 돋워야 겠다.
– 오즈를 보지 못한 건 역시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 아마 결국 일본에서 나온 오즈 전집을 구해서 보거나 아니면 크리테리온에서 나올 예정인 다른 오즈의 작품들을 알음알음 구해서 보겠지. 그를 극장에서 공손하게 보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원통할 텐데…

명상산업의 세계, 탈근대자본주의의 자기의 테크놀로지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은” 다중인격장애는 아마 21세기를 대표하는 마음의 병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물론 그 병은 더 이상 “다중인격정애”라는 비과학적인 명칭에 따라 불리지 않는다. 그것은 “해리성 정체 장애”같은 거창한 이름을 선사 받으면서 그 안에 깃든 약간의 신비하고 주술적인 후광마저 벗어 던졌다. 귀신들림이나 빙의(憑依)에 가까운 다중인격장애는 – 저 유명한 공포영화 <오멘>에서 거의 완벽하게 재현되었던 – 이제 모든 개인들에게 열려있는 평범한 그러나 불행한 심리적 성장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합리적인 근대 물질 문명 세계에서 추방되었던 신비함의 화신으로서든 아니면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소외된 삶의 이면에 놓인 본연의 자기의 표상으로서든 “귀신들린 주체”는 대중문화의 중요한 정치적 상징이었다. 그렇지만 심리치료사와 신경정신과 의사들이 대면하고 있는 “해리성 정체 장애”를 겪는 개인들은 더 이상 귀신들린 주체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심리적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보다 나은 자아-이미지를 만들어내야 할 평범한 개인들일 뿐이다.

물론 이런 마음의 병은 알콜의 소비가 줄 생각을 않고 항우울증 약이 날개돋힌 듯이 팔리는 대다수의 서구 사회에서나 크게 회자되는 일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것이 곧 서구 사회에만 특유한 일일 성 싶지는 않다. 당장 우리 주변에 범람하고 있는 명상산업을 둘러보자. 아이러니하지만 신비한 동양의 명상은 동양인들의 관념과 수행이 아니라 언제나 캘리포니아를 경유하여, 전지구적인 문화의 회로 속에서 순환하는 문화적 상품이 되어 우리에게 도착한다. 그것도 이번에는 다가서기 어려운 불가해한 말씀으로서가 아니라 매우 간편하게 소비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주어진다. 얼마 전 모 신문사가 주최한 “웰빙 페어”에 출품되었던 상품 가운데 인기를 끈 것 중 하나는 “명상편의점”이었다. 알다시피 깊은 우울과 자기를 향한 분노가 무엇 때문인지 속 시원히 설명하고 처방하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산업을 이루고 있다. 제약산업이 항우울제로 벌어들이는 돈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그러나 처방과 치료의 약속은 의학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좌절감, 자기모멸감, 무기력감 등을 치료하고 “자아혁명”을 선물하며 성공과 행복을 안겨다주겠다는 자기계발 산업도 성장과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개인주의 혹은 나르시시즘에 물든 서구 자본주의의 사정만은 아니다. 또 나와는 좀 다른 별난 사람들의 별난 생활방식도 아니다. 자기계발계의 원조, 맥스웰 몰츠의 말처럼 “정신의 성형수술”을 받으려는 사람들은 꼬리를 물고있고, 이미 한국 사회에서도 평범한 일상이 되었다. 자기계발이라는 문화상품을 가장 잘 팔아치우는 곳은 뭐니뭐니해도 한국에서 “명상산업”이라 부르는 것이리라. 웰빙이라는 트렌드가 소비문화의 황금률로 자리 잡으면서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사람들을 겨냥한 상품들이 넘쳐난다. 물론 남들은 굶어죽는데 저 혼자 배불리 살겠다는 못된 심보로 웰빙을 폄하는 것은 시대착오임에 분명하다. 20 대 80의 극악한 불평등의 사회를 호도하는 나쁜 이데올로기의 모범으로 웰빙을 규탄하는 것은 편협할뿐더러 잘못된 생각이다. “삶의 질”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믿음과 기대는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그들이 퍼뜨린 선동이 아니라 오랜 동안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변화시키려 했던 수많은 자유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의 신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진정한 본질로부터 소외되지 않은 삶을 향한 욕망, 기계의 부품처럼 되어버린 테일러주의적인 산업 세계의 악몽에서 해방되려는 의지, 표준화된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의 여정을 “탈영토화하려는” 꿈이 바로 “웰빙에의 의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이제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설명해주던 구 시대의 모든 보증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고향이 어디인지 알면 출신학교가 뭔 줄 알면 직장이 뭔지 알면 그의 삶을 짐작할 수 있던 사회적 캐릭터의 시대-소설의 세계이던-는 슬슬 자취를 감추고 있다. 탈근대 자본주의의 시대는 전처럼 신분이나 계급 혹은 가족과 직장이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해주고 보증해주던 시대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구속으로부터 정체성이 떼어지고 그것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고 역설한다. “자기를 찾아가는” 패키지 관광 상품, 아로마요법, 명상 프로그램이 나날이 번창한다. 웰빙에의 의지가 상품을 사서 쓰는 소비자의 의지이지 탈자본화된 새로운 사회적 주체가 품은 삶의 의지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제는 삶의 시간의 일부를 노동으로 빼앗아 가는 것도 모자라 그 바깥에 있던 삶의 힘 마저 자본이 포섭하고 동원하려 한다고 강변하는 것은 일면적이다. 억압받는 민중이란 삶의 자리에 명상을 하는 개인이 들어선 것은 불행한 일도 다행스런 일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self)라는 삶의 주체를 만들어내는 방식이 바뀐 것뿐이기 때문이다.
잘살아보려는 의지가 극히 평범한 본능이자 인간의 정신의 프로그램이라면 모를까, 그것이 하필 요즈막에 갑자기 등장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유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거창한 문명론이나 삶의 가치의 변화 따위의 공허한 입씨름에 휘말리고 말 것이다. 명상산업은 무엇보다 탈근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세계가 바뀌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에 불과하다. 그것은 “나”라는 개인적인 자기를 빚어내는 세계의 틀과 사회적인 주체를 생산하는 틀 사이의 새로운 관계가 등장했음을 알려주는 전조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가 신용불량자와 청년실업과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와 명상산업의 번창 사이에 놓인 도착적인 관계를 해명해야 한다는 것을 요청한다. 물론 그것에 눈뜨지 않는 한 자본주의 외부에서의 삶을 꿈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컬티즌에 기고한 글입니다>

명상산업과 자기라는 상품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은” 다중인격장애는 아마 21세기를 대표하는 마음의 병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물론 알콜의 소비가 줄 생각을 않고 항우울증 약이 날개 돋힌 듯이 팔리는 대다수의 서구 사회에서의 일이기는 하다. 그 깊은 우울과 자기를 향한 분노가 무엇 때문인지 속 시원히 설명하고 처방하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산업을 이루고 있다. 제약산업이 항우울제로 벌어들이는 돈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그러나 처방과 치료의 약속은 의학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좌절감, 자기모멸감, 무기력감 등을 치료하고 “자아혁명”을 선물하며 성공과 행복을 안겨다주겠다는 자기계발 산업도 성장과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개인주의 혹은 나르시시즘에 물든 서구 자본주의의 사정만은 아니다. 또 나와는 좀 다른 별난 사람들의 별난 생활방식도 아니다. 자기계발계의 원조, 맥스웰 몰츠의 말처럼 “정신의 성형수술”을 받으려는 사람들은 꼬리를 물고있고, 이미 한국 사회에서도 평범한 일상이 되었다. 자기계발이라는 문화상품을 가장 잘 팔아치우는 곳은 뭐니뭐니해도 한국에서 “명상산업”이라 부르는 것이리라. 웰빙이라는 트렌드가 소비문화의 황금률로 자리 잡으면서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사람들을 겨냥한 상품들이 넘쳐난다. 잘살아보려는 의지가 극히 평범한 본능이자 인간의 정신의 프로그램이라면 모를까, 그것이 하필 요즈막에 갑자기 등장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으리라. 그것은 아마 자기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던 구 시대의 모든 보증들이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전처럼 신분이나 계급 혹은 가족과 직장이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해주고 보증해주던 시대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구속으로부터 정체성이 떼어지고 그것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고 역설한다. 그렇지만 그 자유로운 선택이 진짜 나를 찾기 위한 방황을 낳고, 그 방황이 시장에서 상품-정체성을 사들이는 행위로 끝난다면, 이는 즐거운 일은 아니다. “자기를 찾아 가는” 패키지 관광 상품, 아로마요법, 명상 프로그램이 나날이 번창할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비분강개할 일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시대에 자기라는 정체성을 무엇이 결정할지를 두고 벌어지는 갈등의 한 편린을 보여줄 뿐이기 때문이다.
[서울경제에 기고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