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정치적인 문자들

Jim O’Rourke – Simple Songs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인 2013년 겨울, 나는 어리둥절한 낯빛을 띤 그렇지만 또 조금은 스스로를 으쓱해 하는 듯한 희미한 웃음을 얼굴 가득 품은 제자들을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만나게 되었다. 언제 들어섰는지 모를 스케이트장이 시청 앞 광장을 차지하고 있었다. 거리 집회라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을 아이들을 거기로 불러낸 것은 얼마 전 고려대학교에 나붙은 대자보 때문이었다. 줄여 “여러분 안녕들 하십니까” 혹은 더 줄여 그저 “안녕들 하십니까”로 알려진 그 대자보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버린 세상을 지켜보며 안타까워하던 한 대학생이 붙인 것이었다. 2013년 12월 10일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다니던 주현우란 학생은 대학 후문에 그 대자보를 붙였고 이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 신문은 이러한 뜨거운 반응과 대화를 두고 ‘안녕 세대’란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하수상한 시절에 어떻게 우리가 안녕들 할 수 있을지 되뇌며 친구들에게 모두 안녕들 하십니까라 묻는 이 대자보가 왜 그토록 큰 호응을 받았는지 그 연유를 짐작해 보는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사회학적인 분석, 그즈음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세대론적인 담론을 가볍게 들먹이며 그들이 처한 고통과 비참이 그 발언에 전광석화처럼 반응하게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옴에도 불구하고 안녕들하십니까 만큼의 효과를 촉발하는데 이르지 못했는지 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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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적 사실이 뭐 어때서


David Fenech ‎- D’Une Illogique Placable

‘대안적 사실’이란 낱말이 어쩌면 내년 즈음 대기업 시사 상식 시험 문제로 출제될지 모를 일이다. 잽싸게 시사상식사전에 오른 이 낱말은, 트럼프 대통령 이후의 세계에 대한 풍자화처럼 보인다. 사실을 둘러싼 증언이 경합을 벌일 때 달리 증언된 사실을 가리키고자 만들어졌다는 전문 법률 용어라는 대안적 사실이란 용어는 졸지에 흔치 않게 듣는 시대의 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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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와 사회”, 어게인


James Brown – It’s a Man’s World(Paris 1967)

“그의 노동은 경험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밀봉 처리되어 있다.
즉 그의 노동에서 연습은 그 권리를 상실했다.
놀이공원에서 다양한 놀이기구를 통해 표현되는 것은
비숙련공이 공장에서 받게 되는 기계적 훈련을 시험해 보는 것에 불과했다.
… 포의 텍스트는 야만성과 규율 사이의 진정한 상관관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가 묘사하는 행인들은 마치 기계장치에 적응되어 단지 자동적으로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들의 행동은 충격에 대한 일종의 반응 양식이다. ‘서로 부딪힐 경우 사람들은 자기를 밀친 상대방에게 깊숙이 머리 숙여 인사했다.” W. 벤야민,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제정기의 파리/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외, 김영옥, 황현산 옮김, 길, 2010, 218쪽.(강조는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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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찮은 일일까? 잘은 모르겠다. 2017년이라는 한 해는 한국에서 문학 저널리즘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숨 가쁘게 바뀐 해이다. 어떤 역사적인 풍파에도 끄떡없던, 아니 아랑곳하지 않던 문학잡지들이 거듭나거나 변신을 꾀하는 시늉을 했다. 세계의 문학은 릿토르 Littor라는 격월간지로 변신하였고, 문학과사회는 재 창간에 가까운 혁신을 꾀하였고, 문학동네는 새로운 편집진을 꾸림으로써 이전과 다른 문학 저널로 변신하고자 했음을 기별하였으며, 창작과비평은 제3문학이라는 자매지를 창간함으로써 어쨌든 새로운 문학저널리즘이 필요하다는 요구에 부응하고 있음을 피력했다. 문학잡지를 챙겨보는 일이 시들해진 내게도 이런 동정이 알려질 정도라면 문학 저널리즘에 가까이 있는 이들에겐 큰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변신의 풍경은 대중 매체를 통해 많이 알려진 일이라 그것을 달리 복기하는 짓은 불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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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만들어내는 민주주의

다카다 와타루(高田渡)-자위대에 들어갑시다 自衛隊に入ろう
반전포크송,  1969 포크캠프(フォークキャンプ)

출구조사가 발표되면 본격적으로 시작될 개표 방송을 즐기자며 친구들과 먹고 쓰러질 만큼 넉넉히 술을 사고 안주를 골랐다. 그렇지만 출구조사가 발표되고 후보들의 동정을 전하는 화면을 보면서,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기분이 눅눅해지는 눈치가 완연했다. 심드렁하게 몇 마디를 하고는 다들 딴전을 피우는 기색이었다. 나 역시 그런 분위기를 거들며 따분한 기분에 술만 홀짝였다. 그토록 괴물 같은 정치집단이 몇 달 먼저 권좌에서 물러난 것은 정신 건강 상 좋은 일었다. 그러나 딱히 유쾌한 일이 일어난 척 시늉할 필요도 없었다. 눈치껏 술자리는 일찍 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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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빈더처럼 a la Fassbinder

Fox and His Friends (1975) – Rainer Werner Fassbinder

<폭스와 그의 친구들 Faustrecht Der Freiheit>은 파스빈더 스스로 우둔한 프롤레타리아 게이 주인공 역을 맡아 연기하고 또 감독했던 작품이다. 이 영화는 우아하고 세련된 중간계급 게이가 복권당첨으로 벼락부자가 된 게이를 등쳐먹고 버리는, 어쩌면 신파적인 게이 멜로이다. 할리우드의 멜로 황제인 더글라스 서크를 사숙했던 파스빈더의 작품 가운데, 아마 이 영화는 가장 신랄할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파스빈더 식으로 살겠다고 재차 다짐한다. 그래서 “파스빈더처럼 à la Fassbinder”이다. 그는 계급과 사랑, 섹스, 섹슈얼리티를 파고드는 갈등과 불화, 적대를 탐색한다. 단 정체성에 대한 지루한 농담은 거기엔 없다. 소수자로서의 자기동일성을 단언하기에 바쁜 오늘날의 정체성 정치를 쳐다보자면 비동일성을 만드는 대립에 골몰하는 파스빈더의 영화는 과거로부터 날아온 냉정한 야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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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간다 사진의 유령들

Arca – Desafío

만취한 채 책을 읽었던 탓일까 아니면 나이가 먹어 심약해진 탓일까. 결국 늦은 밤 나는 더 이상 인내심을 발휘하기 어렵다고 항복한 채 책을 덮었다. “더 이상 읽을 수 없는 책”이란 제목의 글을 쓰는 것은 어떨까 잠시 생각하였다. 벽시계를 올려다보니 새벽 3시가 지나고 있었다. 결국 손에서 놓고 만 책은, 며칠 전 세상에 나온 디디에-위베르만의 사진 에세이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2017)이었다. 모든 것을 무릅쓰고 사진을 찍으려 했던 나치수용소의 유태인의 광기에 가까운 용기를 생각하면, 책의 제목처럼 모든 것을 무릅쓰고 사진-이미지를 세상에 남기겠다는 각오를 생각하면, 나의 뒷걸음질은 비겁한 짓이리라. 끔찍한 살인과 죽음의 광경을 전하는 언어를 견디지 못한 채 욕지기를 느끼며 책을 덮은 물러터진 비위 역시 부끄러운 것이다. 그러나 죽어가는 자들의 살갗과 표정 가까이 바싹 다가가 그것의 표면을, 윤곽을, 보이지 않는 비명을 확인하도록 하는 윤리적 요청은 가누기 어려웠다. 그러나 실은 그런 것들이 대단한 것은 아니다. 이미지, 무엇보다 아무런 값을 못하는 사진-이미지의 무력함에 대하여 한 비평가가 보내는 고문과도 같은 글은, 우리를 아니 어쩌면 나를 걷잡을 수 없는 죄의식에 빠지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사진적 진실’(photographic truth)을 비웃고 조롱하며 보낸 지난 포스트모던 사진 비평의 철없는 불장난에 대하여, 그는 거칠게 화를 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숨 막힐 듯 빠른 속도의 문장을 따라가며 어느 사진-이미지 앞에서도 미처 몇 초를 머물지 못하는 부박함을 힐난하는 듯한 저자의 고집에, 몇몇은 얼굴이 달아오르지 않았을까. 사진-이미지는 즐거움을 주고, 잠시 쾌적한 기분에 젖게 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냉소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는 단 한 장의 사진-이미지가 만들어지고 보전되고 증언하는데 동원되었던 압도할만한 사태들을 추적한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의 손에 주어진 4장의 아우슈비츠의 사진, 영원히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를 그 끔찍한 지옥이 실재했음을 고발하는 그 사진은, 우리에게 사진-이미지는 그렇게 거품과도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도록 촉구한다. 이 때 사진은 어떤 정보를 담은 기록이기에 앞서 이것을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누군가의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사진-이미지에서 어떤 윤리적 부하(負荷)도 찾을 수 없는 듯 보이는 교만한 이미지 소비의 시대를 끔찍하게 혐오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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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나라냐는 물음을 곱씹는 밤

Mono No Aware(もののあわれ) – Various Artists

 

결국 호기심을 못 누르고 멍하니 화면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괘씸한 마음에 껐다 켰다 하길 되풀이하였다. 결국 반도 넘기지 못한 채 관전을 단념하고 술을 꺼내들었다. 몸 속 깊이 어딘가에서 ‘끄응’ 하는 신음이 터져 나올 듯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측은한 나라에서 산다는 것이 서글프고 비참했다. 다음 날이 되어 찾아본 뉴스에는 그런 것을 두고 안보프레임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북한을 주적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다그치는 물음에, 도대체 안보관은 무엇이냐고 따지는 물음에, 국가보안법을 어떻게 할 작정이냐는 트집에, 언론이 붙여준 냉소적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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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리고 굿즈

The Doors – Alabama Song At The Hollywood Bowl Live

나이 먹은 탓인가. 걸핏하면 심화가 치밀어 오른다. 눈이 침침하고, 자고나면 흰 머리가 희끗하고, 매일 다르게 눈 밑이 쳐지는 꼴을 봐서는, 분명 짜증을 달고 살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것도 그런 나이에 따른 짜증인지 모를 일이다. 걸음을 했댔자 찾는 책도 없어 걸음을 마다하던 서점엘 우연히 들렸다, 그만 또 짜증이 났다. 사단의 원인은 서점 입구에 자리한 가판대 때문이었다. 거기엔 서로 다른 장정과 표지를 한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나란히 펼쳐져 있었다. 처음 책이 나올 때의 표지를 복원한 판본부터 그간 이런저런 곳에서 낸 갖은 모양의 책들이 주르르 낯을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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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기의 사회학을 생각하다, 그만



Else Marie Pade – Faust (1962)

동네 어귀의 먹자골목, 누구는 무슨 로데오거리니 하는 이름을 버젓이 붙여 부르곤 하는 골목에, 뽑기 가게가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한때는 우후죽순 떡볶이 체인점이 들어섰다가 슬며시 문을 닫고, 또 잠시 휴대전화를 파는 가게들이 빈 가게를 채우다 물러나면, 핫도그며 생과일주스며 하는 가게들이 신장개업을 하곤 하던, 그 정든 골목이다. 오늘의 세상물정을 반영하는 오롯한 지시계라도 되는 듯, 그렇게 새로운 업종의 가게들이 문을 열고 닫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딱히 즐거운 일은 아니다. 일자리를 갖지 못한 이들이 앞 다투어 창업에 나섰다 빚더미를 껴안게 되었다는 소식을 의기양양 전하는 뉴스 기사를, 나 역시 눈여겨 본 터이기 때문이다. 매년 신규 창업하는 자영업자들이 얼마나 많으며 또 그 중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문을 닫는지 전하는 맹랑한 통계를 접할 때마다, 나는 아침저녁 지나치는 그 골목의 풍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흥망성쇠가 수십 년 터울이면 모를까 그것이 단지 몇 달이라면, 이는 분명히 세상이 엉망이 되었다는 조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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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수상한 유물론들: ‘기분의 사회학’을 읽는다 (2)


In The Mood For Love. Song Yumeji’s theme

 

기분의 사회학 – 세계는 존재인가 아니면 객체인가

“여기서 내의 의도는 철학에서 인정받지 못한 유물론적 전통 하나가 존재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그것은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마키아벨리, 홉스, (두 번째 <논고 Discours>인간불평등기원론의) 루소, 마르크스, 하이데거의 전통입니다. 그들이 주장해 온 공백(vide), 한계, 주변(marge: 여백), 중심의 부재, 중심의 주변으로의 전위(傳位)(또 그 반대), 그리고 자유라는 범주들과 함께 말입니다. 그것은 통상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것으로 돌려지던 유물론, 즉 합리주의 전통의 모든 유물론과 마찬가지로 필연성과 목적론의 유물론, 다시 말해 관념론의 위장된 형태인 저 유물론을 포함하여 유물론으로 인정받던 유물론들에까지 대립하는 마주침의 유물론, 우연성의 유물론, 요컨대 우발성의 유물론(matérialisme de l’aléatoire)입니다.” (L. 알튀세르)

나는 하이데거에게 먀르크스주의와 매우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소위 실용주의적 하이데거, 즉 도구, 그리고 작업과 생산의 하이데거지요.이것이 일상 삶의 현상학인데, 갖가지 역사적․철학적 이유로 인해 마르크스주의의 일부는 아니었어요.일상 삶의 현상은 마르크스주의의 문제틀 전체 그 어디에서도 개발된 적이 없는 텅 빈 영역입니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실용주의적 측면은 마르크스주의의 실천 개념을 위한 토대로서 매우 매력적인 것이 됩니다. 그와 같은 것이 다른 형태로 싸르트르에게도 존재했어요.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여기저기에 보이는 처음에는 행동적이며 나중에야 명상적이거나 인식론적이 되는 현존재(Dasein)에 대한 전체 분석은 마르크스주의의 틀에서도 매우 쓸모가 있어 보입니다.”(F. 제임슨)

오늘날 우리가 현실을 경험, 인식하고 드러내는 일들이 심리학적이거나 혹은 감정 혹은 정동이란 렌즈를 통해 이뤄진다는 것은 것이 그리 새삼스런 일은 아닐 것이다. 감정적, 정동적 전환이라고 으스대며 자신들의 주장이 그간의 ‘이론’을 대단히 혁신하는 듯 강변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현실을 경험하는 지배적 방식을 꽁무니에서 졸졸 쫓아다니는 것에 불과한 짓일지도 모른다. 물론 정동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정색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를 빌려 대꾸하기로 하고, 일단 심리학적 개념이나 용어로 현실을 묘사하거나 밝히는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을 듯싶다. 자신의 사회적 경험을 심리적인 언어로 제시하고 병리화하며 진단하고 처방하는 일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세계에 사는 우리들이 겪어야 하는 저속한 관습 가운데 하나라는 것 역시 강조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마 이를 따로 상세히 소개하는 일 자체가 불필요하리만치 우리는 이런 변화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단지 지난 수십 년간 베스트셀러가 되어 온 책들이나 유행했던 어휘들이나 언어적 표현들을 되짚어보기만 해도 사정은 뻔히 짐작된다. 불안, 우울, 과잉행동장애, 정동장애 같은 말들이 우리 주변에서 개인들이 겪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적시하며 버티고 있게 된 꼴은 신자유주의라는 체제가 갖는 특징을 요약한다. 그것은 스스로 사회적 불행을 개별화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것을 서술하고 표현하는 언어를 개인을 위해 마련된 언어인 심리적 언어를 채택하도로 몰아부친다. ‘긍정의 심리학’이나 다중지성, 감성지능, 자기주도성, 자존감 같은 악취를 풍기는 심리적 개념은 과학인 듯 생색을 낸다. 그렇지만 그것이 과학적이면 과학적이고 그것이 제시한 처방이 효험을 발휘하면 발휘할수록 이는 현실에 달라붙어 그것에 상응하고 타협하는 것이란 점을 입증해준다. 그리고 이 모두는 한 가지를 겨냥한다. 그것은 고립된 개인들에게 스스로 세상을 살피고 겪는 방식을 헤아리도록, 스스로를 더 현명하게 주조하도록 윽박지른다.

오늘의 수상한 유물론들: ‘기분의 사회학’을 읽는다 (2)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