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노동자 – 탈근대자본주의 시대의 주체성과 비판이론



탈근대자본주의의 주체성을 압축 재현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약호는 단연 “지식노동자”일 것이다. 그렇지만 지식노동자를 현 단계 자본주의의 노동자의 역사적 종(種)으로 개념화해서는 안될 것이다. 예를 들어 자유경쟁자본주의 단계의 산업노동자와 독점자본주의단계의 대중노동자같은 유형으로 탈근대자본주의의 지식노동자를 분류하는 것은 그다지 유익한 일이 아니다. “지식기반경제” 혹은 “신경제”의 노동자로서 지식노동자는 전 단계의 노동자와 전연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기술적 구성이나 노동과정의 조직, 그리고 노동하는 주체를 사회적으로 조직하는 형태가 역사적 단계마다 다르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지식노동자란 노동자의 사회적 현실을 표상하는 개념이 더 이상 아니라는 점에서 특유하다. 지식노동자는 길드나 동업조합의 장인, 포드주의적 노동자와 더 이상 유사하지 않다. 지식노동자는 비노동주체와 구분될 수 없다는 점에서, 노동의 세계와 노동이 없는 세계가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노동의 생애단계와 노동으로 입장하고 노동에서 은퇴하는 생애단계의 간격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유령처럼 존재한다. 그것은 이미 네그리와 하트가 푸코의 개념을 빌어 이야기했던 노동의 생정치(biopolitics)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리 멀리가지 않도록 하자. “신지식인 운동”으로, “평생학습체제”로, “학습혁명”으로, “국가인적자원개발계획” 등으로, 지식노동자라는 새로운 주체성의 기획은 우리 주변에 이미 정착하였고 또한 가동 중에 있기 때문이다.
지식노동자는 일관생산라인이라는 직접적인 생산과정, 공장과 사무실이라는 특정한 공간의 배치, 출퇴근 시간과 테일러주의적인 시간동작연구로 상징되는 신체의 통제와 더 이상 상관없다. 노동자를 개별적인 신체로 규정하고 그를 표준과 규범에 따라 통제하고 조정하는 포드주의적인 훈육으로부터 지식노동자는 벗어나 있다. 개별적인 신체로서의 노동자는 이제 집합적인 신체 안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 명의 노동자의 묶음이란 뜻에서의 집합적 신체가 아님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가상사회에서의 정보와 지식의 (재)생산을 말할 때의 “집단지성”처럼 그것은 개별 신체, 지성, 감각의 집행이나 연장이 아니다. 일관생산라인에서 린 생산으로, 팀제로 변화된 탈근대적 노동 과정에서 노동자는 개별적인 신체로서 성과를 발휘하고 생산성의 지표에 의해 측정되고, 동기와 보상의 체계 안에 귀속되지 않는다. 노동자는 일반적인 노동력 안으로 사라진 채 측정될 수 없는 순수한 추상적인 힘으로 등록된다. 이는 거꾸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를테면 신경제의 “부”의 담론의 핵심은 재산이 아니라 자산(asset)일 것이다. 이는 직접적인 생산을 통해 만들어진 물질적 결과로서의 생산물이 아니라 법인기업이 가진 것으로 예측되는 잠재적인 능력 흔히 자산가치이다. 따라서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보유하고 있는 현물과 수익이 아니라 자산을 통해 자본을 평가하는 유령적인 등가(等價)의 세계에 익숙해 있다. 물론 그 유령의 세계는 나스닥과 코스닥, 증권거래소이다. 아마존닷컴과 벅스뮤직의 주식가치와 월마트나 삼성전자의 주식가치 사이의 관계는 더 이상 미스테리가 아니다. 아마존닷컴의 자산가치는 아마존닷컴의 수익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마존닷컴의 자산가치는 곧 그것의 잠재성일 뿐이다.
신경제 이데올로그의 주문같은 말처럼 “유한한 물적 자원에서 무한한 지식의 힘”으로 자본의 힘이 변화되었다면, 이는 노동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다. 노동 역시 그에 대응하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과받는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노동자 없는 노동의 세계를 가리키는 개념에 익숙해져 있다. 그것은 “인적 자원(human resource)”이란 용어일 것이다. “인적 자원 개발”, “인적 자본” 등의 개념은 한 명의 구체적인 심리적인 개인으로서의 노동자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일하는 나, 직장에 다니는 나, 월급을 받고 연금과 보험을 내는 나와 같은 뜻에서의 노동자 역시 잔존한다. 그렇지만 지식기반경제는 지식(그것은 신경제의 이데올로그들에 따라 다중지능, 창의성, 탁월성, 성공하는 사람의 습관, EQ, NQ 등 다양하게 정의되고 세밀화된다)이라는 역량을 요구한다. 이것은 노동자의 신체와 지성 안에 포함되어있는 실체로서의 능력도 아니고 또한 노동자가 판매하며 보상되는 소유물도 아니다. 다시 푸코를 끌어들이자면 그것은 삶(life)이며 생능력(biopower)이다. 투입되는 노동력을 이미 예상하고 규정하는 생산수단(이를테면 미싱은 재봉사, 선반은 선반공과 같은 식으로)과 달리 지식기반경제의 생산은 이미 형식화되고 표준화된 노동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인적 자원이란 개념은 따라서 경직된 직업 교육과 숙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를 실행하고 자신의 능력을 지속적을 개선하고 향상하는 노동력을 요구한다. 이런 점에서 인적자원은 평생학습을 요구하며, 노동하는 주체의 지속적인 자기계발을 강요한다.
한편 노동자는 언제나 해체와 이동을 함으로써 변신한다는 자본의 요구에 따라 혹은 변화를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는 자본의 가속화된 순환에 따라 그 스스로 끊임없이 변형되어야 한다. 이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마 최근 끊임없이 회자되는 “직장인에서 직업인으로의 전환”이라는 담론일 것이다. 지속적인 직업 이동, 동일한 직무와 직종 안에서의 이동이 아니라 다른 직업으로의 이동을 수반한 노동자의 이동은, 노동을 통한 자기(self)의 구성을 파산시킨다. 일의 여정(旅程)을 통해 자기의 생애를 재현하던 사람들은 이제 그 자리에 새로운 주체성의 형식에 사로잡힌다. 평생직장과 철밥통의 세계를 대신하여 이태백, 사오정이라는 유연화된 노동자가 들어설 때, 그것은 불안과 위험 속에 내동댕이쳐진 노동자의 물질적 생존만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또한 끊임없이 스스로를 혁신하고 관리하며 향상시켜야하는 기업가적 주체의 세계로 휩쓸려 들어간다. 이들은 리더십 프로그램과 자기계발 세미나, “아침형” 습관의 중독자, “메모의 기술”의 달인, 자기표현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노동하는 주체에게 단순히 새로운 노동 기율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더 많은 성과, 더 높은 생산성을 요구하는 점에서 다를 바 없지만 그것은 관료적으로 조직된 조직 체계에서 즉 외부로부터 오는 명령이 아니다. 그것은 탈근대자본주의의 주체에게 던져진 최대의 명령인 “자기주도”가 알려주듯이 “자기를 돌보는” 에토스를 실현하는 주체이다.
물론 이러한 새로운 에토스는 노동하는 주체가 공통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던 상징적 동일시의 형식(당연히 이에 해당하는 고전적인 개념은 당파성, 프롤레타리아트적 계급의식, 의사소통적 합리성 등이다)을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노동은 있지만 노동을 수행하는 주체는 사라지고 있고, 노동하는 주체의 정체성을 재현하는 물질적인 제도와 기관(정당, 노동조합, 클럽, 신문, 출판사 등)은 위축되거나 무력해지고 있다. 노동자를 대신하여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기업가(the entrepreneur)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경력경로를 관리하고 다중경력을 체득하며 고용가능성(employability)을 향상시키는 주체이다. 물론 이를 가장 잘 요약하는 것은 신경제의 가장 탁월한 이데올로그인 톰 피터스의 “나-브랜드”일 것이다. 그에게 삶이 어떻게 의미작용의 코드와 사회적 재생산의 네트워크에 의해 규정되는가를 묻는 것은 진부한 일이다. 나의 삶은 일종의 프로젝트이며, 나는 무엇보다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노동하는 주체의 정체성의 변화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무엇인가. 기호학과 정신분석학 그리고 포스트구조주의를 익히며 데카르트적 코기토와 남근로고스중심주의와 투명한 자기의식적 주체와 작별을 고하는 것은 적어도 비판적 학계의 시대정신이었다. 그렇지만 그 시대정신이 잊고 있었던 것은 그러한 변화가 탈근대자본주의의 주체성을 정의하는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힘들의 장이었다는 것이다. 통속적인 경영학 서적에서 데리다가 신경제의 지식경영의 선구자로 칭송받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운 일이 아니다. 디지털정보자본주의를 선구한 예언가로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를 들먹이는 것은 차라리 참신하다 할 일이다. 젠체하는 마케팅서적에서 부르디외의 “아비튀스”와 “문화자본”을 인용하는 것은 이미 관례가 되다시피 하였다. 물론 그 자체 나쁜 일도 좋은 일도 아니다. 담론의 소비를 지식인이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마르크스 역시 월스트리트의 철학자로 둔갑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분석가로서의 마르크스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분석가로서의 마르크스가 다르지 않은 인물이었음을 잊고 있었다. 탈근대자본주의의 주체성을 분석하고 정의하는 일은 정치적인 개입이다. 그런 점에서 탈근대자본주의의 지식인들에게 필요한 일은 근대성과의 단절 혹은 극복이 아니다. 외려 필요한 것은 탈근대자본주의의 주체성을 둘러싼 적대적인 논쟁의 공간을 창출하고 참여하는 일이다. 지식노동자라는 탈근대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대응하는 개념은 무엇인가. 놀랍게도 우리는 그 자리에 컴컴한 공백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확인할 뿐이다. 이는 슬프고도 참담한 일이다.
– 연세대학교 대학원신문에 기고한 글

기관 없는 신체 혹은 신체 없는 기관

기관 없는 신체 혹은 신체 없는 기관 – 신체의 재현과 그 위기


재현의 위기 그렇다면….
<아침형 인간>이란 자기계발서가 최근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자기계발서의 유행은 이제 더 이상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명민한 사회학자라면 이러한 자기지침서(self-help manual) 혹은 자기계발서의 유행을 이른바 후기 자본주의사회의 사회적 증상(social symptom)으로 진단하고 그것을 분석해야 할 것이다. 물론 사회학 혹은 문화이론으로부터 이러한 자기계발서에 대한 분석이 적잖이 등장하고 있다. 사회학자들이 자기지침서를 분석의 대상으로 정의할 때 주로 의지하는 개념은 “자아(self)”이다. “재귀적 근대성(reflexive modernity)”이란 개념으로 후기 근대자본주의의 주체성을 분석하는 앤서니 기든스의 입장 역시 자아 정체성이란 개념의 둘레를 맴돈다. 후기 근대의 자기정체성에 관한 그의 저작의 제목은 <근대성과 자기정체성>이었다.
그가 말하는 후기 근대의 “성숙한 자아”란 재귀적 근대성의 체계 안에 놓여 있다. 재귀적 근대성을 설명하는 한가지 방식은 근대화는 곧 탈전통화라는 것이다. 탈전통화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규정하는 일반적인 규범을 합리적인 반성의 대상으로 옮겨놓는다. 줄여 말하자면 이는 ‘감히 자신의 오성을 사용하여’, 전통이나 미신과 같은 억견을 비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앤서니 기든스는 탈전통화라고 불리우는 근대성의 영향은 정치나 경제와 같은 공식적인 사회적 관계에 머물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탈전통화의 논리는 이제 일상적인 삶의 영역으로까지 흘러들어 미만해 있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우리는 몸에 관한 의료과학의 공식적 지식의 일의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다양한 대체의학을 선택한다, 우리는 친밀성의 유일한 합법적인 형식인 이성애적인 결혼을 상대화하고 있으며 다양한 대안적인 가족을 인정하고 있다 운운). 그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후기 근대이고 성숙한 근대성이다. 이제 탈전통화라는 근대의 비판적 해석학은 바야흐로 결혼과 가족관계, 그리고 사랑이라는 친밀성의 영역까지 침투하고 있다. 그러나 기든스가 예상하는 후기 근대의 성숙한 주체의 모습은 혹시 그 반대의 모습을 취하는 것이 아닐까. “감히” 자신의 정체성과 자유를 개척하는 성숙한 근대적 주체의 재귀성은 거꾸로 뒤집혀져 우리의 삶을 옥죄는 “금지 없는 명령”이 된 것이 아닐까.
– 문학과 경계 봄 호에 기고한 글의 도입부입니다.

욕망의 해방, 그리고 새로운 성혁명

결혼전문가 혹은 커플매니저야말로 우리 시대의 중요한 사회학적 증상일 것이다. 모든 사회이론은 만남 자체를 괄호친다. 만남을 성사시키는 조건은 묻지 않은 채 만남이 이뤄진 뒤의 공식적인 사회적 계약 요컨대 결혼과 가족, 연인 등을 분석한다. 따라서 그런 만남이 이뤄지도록 만들어주는 조건을 분석하는 것은 망각되거나 포기된다. 그런 점에서 커플매니저와 결혼전문가는 사회학자들이 방만하게 무시했던 중요한 영역, 즉 만남에 관하여 분석하고 종합하는 우리 시대의 숨은 사회학자들이다. 그들은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분석하며 그것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중요한 상징적 지식을 생산한다. 물론 그것을 통해 꽤 많은 돈까지 벌어들인다.

(제프 쿤스, <블로우 잡(카마수트라)>)
접대 혹은 손님을 맞이하는 정신적 태도가 제3자 혹은 이방인과의 만남이라면, 결혼이나 연애는 내부에서의 만남에 해당될 것이다. 전자의 경우 제법 많은 사회이론가들이 분석을 시도하였다. 예를 들어 호텔은 전문화되고 상업화된 접대의 공간이다. 나날이 번창하는 컨벤션 센터류의 접대 공간과 파티서비스업과 캐터링 산업 등이 선도하는 접대 행위의 산업화는, 만남의 행위가 어떻게 변형되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는 가능한 손님을 집으로 맞이하길 꺼린다. 푸짐한 성찬과 과시적인 증여로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던 과거의 접대의 에토스는 사라진지 오래이다. 우리는 가능한 집을 밀실화하고 있으며 “둥지”와도 같은 집이 바깥에 드러나길 꺼린다. 탈근대적 주거문화의 표본이자 “한국판 상류층의 신주거문화”의 상징인 “타워팰리스” 아파트는 아예 입주자를 찾는 손님을 재울 게스트룸을 따로 만들어놓았다고 한다. 타워팰리스 아파트의 입주자들을 취재한 어느 신문의 기사는 “그들의 생활양식”에 관해 흥미로운 소식을 전해준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정의하는 태도는 한마디로 말하면 “예절과 매너”라는 것이다. 동네 수퍼마켓을 갈 때라도 츄리닝을 입어선 안되는 예절이 바로 그들의 에토스이다. 그렇지만 접대의 문화적 정체성이 이렇게 바뀌어가듯이 만남의 정체성 역시 상당히 바뀌었다.
일전 누가 서평을 게재한 적이 있는 미셀 우엘벡의 소설 [소립자]은 우리 시대의 만남의 불가해한 성격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보고서일 것이다. 그는 놀랍게도 욕망의 철학을 비판하는 과격한 선언을 제출한다. 그는 이미 노환에 시달리고, 그 자신의 잦은 표현에 따르면 망령이 들은 노인들의 헛소리에 불과한 것으로 “욕망의 철학”을 규탄한다. 물론 그가 말하는 그 염병할 노인들이 누구일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들은 분명 들뢰즈와 가타리, 푸코 나아가 욕망과 쾌락을 예찬한 모든 철학자들일 것이다. 우엘벡의 이야기를 따르자면 욕망의 철학과 생활양식은 미국에서 건너온 비트족과 히피족의 정신적인 에토스를 흡수하고 욕망에서 자유와 행복을 찾다가 스스로 파멸했으며 나아가 그 뒤를 잇는 세대를 파멸시킨 자들이다(따라서 들뢰즈와 푸코가 미국에서 복잡계이론과 초끈이론, 분자생물학을 뒤섞은 희한한 히피들 사이에서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예찬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들은 나체 해수욕장과 뉴에이지 풍의 레저시설의 주인이 되었으며, 불감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병자들이다. 그들은 사회의 비판을 자신의 욕망을 확보하기 위한 저열한 경쟁과 아집으로 몰아넣은 자들이다. 무엇보다 나쁜 것은 바로 이러한 68 세대의 철학 아래에서 황폐한 삶을 살아야 했던 그의 아들, 딸들이다. 그들이 근사한 아파트의 테라스에서 스와핑을 즐기고, 저녁 식사에서 욕망의 철학을 회상하며 쭈글해진 뱃가죽을 쓸어 내릴 때, 바로 그들이 번식시킨 두 아들, [소립자]의 주인공인 브뤼노와 미셸은 우울증과 편집증 속으로 하염없이 빠져든다. 그런데 우엘벡의 [소립자]나 [플랫폼]같은 소설이 들려주는 하염없이 서글픈 20세기를 향한 부고는 또한 우리에게도 더없이 해당된다.
그러나 우엘벡의 소설이 환기하는 것은 만남에 대한 음험하고 도저한 향수이다. 그것은 낭만적 사랑, 진실한 사랑을 향한 안타까운 열망을 제외하곤 만남의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우엘벡은 실증주의와 무성생식의 세계를 꿈꾸는 미셸과 결국은 미쳐버린 채 자발적으로 정신병원에 수감된 섹스중독자인 브뤼노로부터 지극히 애매하고 반동적인 주장을 암시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잃어버린 사랑의 재발견이다. 그들이 죽기 직전 마침내 진정한 사랑인 듯한 운명적인 그녀들과 재회하고, 잠시 행복을 맛본 후 곧 끔찍한 죽음으로 그녀들을 잃어버릴 때, 그들은 각자 파멸적인 선택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그러나 우리는 우엘벡의 싱겁고 시시한 결론의 암시로부터 가정의 가치를 일깨우고 진정한 헌신과 맹세에 바탕한 결혼을 강조하는 통일교와 모르몬교의 복음을 들을 뿐이라고 강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실, 우엘벡같이 총명한 작가가 주장하려 한 바는 바로 섹스를 둘러싼 “풍속의 해방”이 가져온 파국적인 결과, 사이비 절대 자유주의의 감당할 수 없는 결과에 대한 반성의 시도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우엘벡의 주장 따위는 아랑곳 않을 것이다.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옹호하며 기꺼이 안전하고 쾌적한 SM을 즐길 것이고, 애널 섹스를 둘러싼 공포를 극복하고자 애쓸 것이며, 스와핑을 둘러싼 논쟁에 참여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사이버네틱스를 통해 추출된 상대와 수백 번이 넘게 미팅을 할 것이다. 또한 자신의 가장 안전하고 훌륭한 만남을 성사시키기 위해 기꺼이 요금을 지불하고 데이터베이스 속에 자신의 자질구레한 신상명세를 넘길 것이다. 또한 “동쪽에서 오는 귀인을 만나게될 것이다”는 따위의 점괘를 얻고자 복채를 지불할 것이며, 타로카드와 사주궁합을 보는 데 아낌없이 주의를 집중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싸구려 행동심리학과 뉴에이지 풍의 사이버네틱스, 허접한 동양학이 뒤섞여 만들어낸 만남의 과학을 통해 만남의 “기적”을 통제하고 지배하려 한다. 그러나 이같은 “만남”을 둘러싼 인식의 증대가 어느 사회학자의 말마따나 “친밀성의 구조변동”을 가져오고 한결 “자기성찰성”이 증대된 “순수한 관계”, “조형적인 섹슈얼리티”로의 진화를 가져오는 것일까. 물론 우리는 그런 주장에 한치도 동의할 수 없다. 우엘벡의 주장처럼 우리는 사랑을 더욱더 지혜롭게 통제할 수 있는 세대가 되기는커녕 만남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한 인류 최초의 세대가 되었다. 여기에서 벗어날 탈출구는 무엇일까. 그것에 대한 답을 찾느라 우리는 또 수십 년을 허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바야흐로 또 한번의 성혁명이 있을 것이다. 부디 그것이 극우가족주의자에 의한 반혁명이 아니길 학수고대할 뿐이다.

<삼국지> 읽는 남자

<삼국지>의 독서공간과 탈근대 자본주의의 자기계발 담론
삼국지 읽는 남자
<삼국지>야말로 우리 시대의 탈근대 자본주의적 대중문학의 가장 탁월한 표본이 아닐까. 혹은 문학적 정전의 전통에 속한 “작품”을 패키지화된 “상품”으로 소비하는 뛰어난 사례이거나. <삼국지>는 알다시피 원본을 정의하기가 불가능한 텍스트이다. 그러나 그 원본으로서의 가치를 나눠 받은 텍스트이든 아니면 <삼국지>를 참고하거나 인용하며 쓰여진 이차적인 텍스트이든, 그것은 모두 <삼국지>라는 텍스트를 구성하는데 참여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삼국지>라는 본래적인 문학적 텍스트 혹은 고전이 따로 있고, 그로부터 파생된 기생적인 문화적 생산물로 나누는 생각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다수의 문학 담론은 원본으로서의 <삼국지>를 특권화한다. 그것은 국내에서 간행되어온 <삼국지>의 저자성을 이야기할 때 고스란히 반복된다. 국내에서 이문열본, 조성기본, 김홍신본, 김구용본 그리고 최근 출간된 황석영본의 <삼국지>를 각기 나눌 때, 그것은 <삼국지>를 해석되고 평가되는 가상의 원본으로 다룬다. 그리고 각기 다른 판본은 그 원본만큼이나 가치 있는 이차적인 저작으로서의 권위에 가담한다. 다시 말해 각기 서로 다른 판본의 저자들은 <삼국지>의 저자와 유사한 저자로 권한있는 주체로 격상되고, 다른 인접한 텍스트들과는 다른 “저자”로서의 지위를 보장받는다. 따라서 그것은 <삼국지>를 문학적 정전의 지위에 안전하게 보존하고 더불어 저자로서의 문학의 주체라는 신화를 유지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가 <삼국지>를 둘러싸고 제작되고 순환하는 다양한 이차적 텍스트로부터의 오염을 막고 자신을 안전하게 격리시켜주는 것은 전연 아니다.

한편 그것이 “독서 시장” 안에서 “스테디셀러”와 “베스트셀러”로 소비되고 있는 문화적 대상으로서의 <삼국지>를 분석하는데 얼마나 쓸모있을지 역시 의문이다. 문학 작품의 읽기의 공간을 한정하고 읽기의 방식을 감독하는 문학제도적 담론은 쇠잔해진지 오래이다. 더욱이 <삼국지>라는 텍스트를 전유하는 독자의 체험을 규정하는데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삼국지>와 삼국지의 주변에 놓인 잡종적 텍스트의 배열을 읽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삼국지>를 다른 텍스트를 규제하는 담론적 진실의 장소로 정의하고 그 곁에 놓여있는 텍스트들을 이차적이고 파생적인 텍스트로 놓는 것은, <삼국지>를 소비하는 하나의 장(문학제도의 장)이 강요하는 특권적인 시점일 뿐이다. 최근 “독서 시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삼국지 열풍’을 이해하는데, 앞에서와 같은 문학제도적 장으로부터의 시점은 별 쓸모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삼국지>를 문학의 보편적인 공간 안에 놓고 이야기하던 경향이 자취를 감추고 특수한 “지역문학” 혹은 “국민문학”의 범주 안에서 분석하는 주장에 의해 대체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모든 거장 소설가들이 도전하고 시도하는 필생의 기획으로서의 “<삼국지> 쓰기”나 아니면 보편적인 문학적 교양의 대상으로서의 <삼국지>가 있었다면, 지금 변화된 문학제도의 장은 <삼국지>를 지역문화적 텍스트로 재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전지구적인 문화의 공간에서 <삼국지> 역시 보편적인 문화적 교양으로부터 지역 문학의 한 예로 간주하려는 문학제도적 담론에 영향을 받고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최근 새로 옮겨진 황석영의 <삼국지>는 정통 중문학자와 한시 전문학자의 감수와 교정을 받았고, 또 번역의 전본으로 삼은 텍스트 역시 지역 내에서 검증받은 권위의 텍스트였음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사정이 어떻든 지금 <삼국지>를 수용하고 소비하는 독자들에게 문학(제도)적 장의 담론의 영향은 잦아들고 있다. 오히려 <삼국지>를 매력적인 독서의 대상으로 선택한 독자들에게 그것은 부차적인 소비의 기준으로 동원될 뿐이다(기왕 읽어야할 <삼국지>라면 누가 번역한 텍스트를 고를 것인가. 이런 단계에서나 <삼국지>를 둘러싼 문학비평적인 평가가 소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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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문학계간지 [Para21]의 2003년 가을호에 실린 글입니다.

대중문화로서의 트렌드 혹은 트렌드로서의 대중문화

(문화방해운동 cultural jamming)의 전위인 미국의 록밴드 네거티브랜드의 앨범 표지)
지식인이나 문화비평가가 시대정신을 대변하고 문화나 문명의 위기를 고발한다는 생각은 어느덧 맥추지 못하게 된지 오래이다. 그들이 맡아하던 역할은 나오미 클라인이 <노로고>라는 책에서 “멋 사냥꾼”이라고 부른 시장조사자들이 떠맡고 있다. 그들은 통신원과 포토저널리스트를 동원하여 청소년들이 모여있는 게토를 누비고 그들의 은밀한 언어 안에 깃들어있는 성향과 감수성을 파악한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소비자 욕구 조사의 거대한 정량기법의 사회통계를 비웃으며 이들은 도시의 인류학자들이 되어 민속지를 쓴다. 과포화된 미디어,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열광적인 정보통신의 네트워크 안에서 우리는 불확실성에 사로잡혀 있다. 시대의 풍경은 갈수록 모호해지고 흐릿해지지만, 다행히 우리는 조각보처럼 기워진 세계의 이미지를 가까스로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시장조사자들과 트렌드 연구자들 그리고 미래예측가들의 덕택이다.
이미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미래생활사전>이나 <클릭 미래 속으로>의 저자이고 조금은 섬뜩하지만 우리 시대의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예언가의 명성을 얻은 페이스팝콘을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 혹은 청소년 시장을 대상으로 한 마케팅의 기상예보관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스푸트니크”라는 회사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이들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마케터 혹은 트렌드 분석가의 모습과 다르다. 그들은 상품의 판매를 위한 아이디어의 제공자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문화분석가이기도 하다. 이는 문화와 경제의 구분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한 단면을 반영한다. 상품은 더 이상 제조품이 아니라 정보와 상징, 기호(sign)가 되어버렸다는 주장은 이미 하나의 상식이 되었다. 나아가 “무게 없는 경제”, “무형의(intangible) 경제”란 용어들은 유행어가 되었다. 상품의 세계는 곧 문화의 세계이고 상품의 판매는 물질적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욕망과 환상의 소비를 위해 이뤄진다.
결국 우리는 트렌드 분석가야말로 우리 시대의 대중문화의 분석가 혹은 시대정신을 분별하고 제시하는 인물이란 인상을 떨치기 어렵다. 노르베르트 볼츠와 다비트 보스하르트란 독일의 문화이론가 겸 트렌드 연구자들은 천연덕스레 트렌드란 “문명 속에 깃들어있는 의례”라고 정의한다. 이 알쏭달쏭한 이야기는 트렌드와 유행의 차이, 또한 트렌드와 사회적 법칙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하여 제안된 것으로 보인다. 유행이란 이미 이뤄진 선택이고 사물 혹은 상품 그 자체이다. 이를테면 남성용 색조화장품은 유행이지만 “메트로섹슈얼”이라는 현상은 트렌드이다. 우리는 메트로섹슈얼이란 트렌드에 따라 남성용 화장품은 물론 새로운 티비 프로그램과 팝 스타, 출판 아이템, 패션 디자인, 장신구 나아가 의료서비스와 자동차 설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행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트렌드는 곧 어떤 유행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습성, 행위의 경향, 심미적인 태도를 아우르는 것이란 뜻이 된다. 우리는 트렌드란 개념에 근접한 어떤 또다른 용어를 이미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라이프스타일 또는 생활양식이란 말이다. 틈새시장과 라이프스타일 마케팅이라는 후기 자본주의의 경제적 활동의 핵심적인 특성은 곧 제조업과 서비스업을 분간하기 어려운 우리 시대의 경제활동을 잘 보여준다. 이미 국내의 어떤 대기업은 자기네를 생활문화기업이라고 명명하였다. 감량경영과 리엔지니어링, 아웃소싱, 유연화, 생산의 정보화같은 말이 범람한지 십여년이 지난 후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상품의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상품의 진열은 문화의 박람회로 바뀌었다.
한편 트렌드는 사회 법칙과도 다르다.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규제된 행위의 규칙을 가리키는 사회 법칙과 달리 트렌드는 매우 우연적이고 자의적인 행위의 문법을 가리킨다. 트렌드란 이미 주어진 규칙에 따라 이뤄지는 행위가 아니라 일련의 연속적으로 행위가 행위기 이어짐으로써 행위 방식과 선택이 결정됨을 가리킨다. 트렌드란 이미 결정된 규칙이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행위들의 시리즈이고 그를 통해 만들어지는 일종의 관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한 행위에 다른 행위가 덧붙여지고 그 행위에 대한 외부의 반응이 추가되고 내면화되면서 또 다음의 행위는 전개된다. 다음에 무슨 행위가 벌어질 것인가는 행위자의 의도, 행위자의 등뒤에서 그를 지배하는 규칙이 아닌 것이다. 물론 그것은 무질서한 것이 아니다. 행위가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반복성과 상대적인 일관성이 결국 행위를 규제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트렌드란 일종의 경향이다(프랑스의 사회학자는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문화를 특정한 심미적인 성향의 체계로 분석하며 아비투스(habitus)란 개념을 제안한다).
예를 들어 보자. 누군가 홍대 앞에서 자신이 흠모하는 영국의 펑크 밴드를 카피하는 연주를 시작하였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부르고 그들의 행위를 해석하기 위해 인디 음악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거나 빌려쓰게 되고, 다시 그것은 인디 음악이라는 일련의 성향을 만들어낸다. 물론 여기에서 우리는 인디 음악의 정신을 반영하고 집행하는 연주자들의 묶음으로 인디 음악을 정의해서는 안된다. 인디 음악은 우발적으로 뒤섞이고 또한 외부의 반응을 수용하거나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에 재투입하면서 만들어지는 연속적인 돌연변이일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진짜 인디 음악과 “짝퉁” 인디 음악을 나누고 가늠하려는 시도가 언제나 반복되겠지만 그런다고 자신을 순수한 인디 음악으로 정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인디 음악의 연주가 되는 것은 인디 음악의 ‘법’에 마침내 다가섬으로써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바로 인디 음악이란 무엇인가를 해석해 냄으로써 어느덧 나는 인디 음악의 연주자가 된다. 줄여 말한다면 해석자와 해석하는 대상의 거리는 없다. 마치 과학철학에서 관찰자와 관찰 대상을 순수하게 분리시켜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트렌드 역시 이렇게 볼 수 있다. 우리는 트렌드를 묘사할 수 있지만 분석할 수는 없다. 아니 그것이 트렌드로 묘사하는 순간 사람들은 그것을 에워싸고 다양한 말을 쏟아내고 행위를 추가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생태계를 만들어 낸다.
문화 산업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수십 년 간 대중 문화의 기류 역시 트렌드의 정착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조용필과 서태지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우리는 조용필을 위대한 대중음악가로 기억한다. 대중음악의 가인(歌人)이자 장인 혹은 거장으로서의 조용필과 신세대 문화의 아이돌로서의 서태지 사이에는 대중음악가란 점을 빼곤 일치하는 점이 없다. 그 사이 한국 대중음악의 정체성이 근본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미소년 보이밴드의 댄스뮤직 일색의 대중음악을 향한 볼멘 푸념과 저항은 음악 문화의 다양성을 해친다는 명분을 들먹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음악을 에워싸고 있는 변화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주장일 것이다. 물론 대중음악의 생산이 소규모의 고도로 분업화되고 전문화된 기획사의 시스템을 통해 제작되고 거대 자본에 의해 집중된 배급 체제와 미디어를 통해 유통된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의 영화 산업의 구조를 보나 음반 산업의 구조를 보나 이는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화산업의 구조가 획일화된 대중 소비자의 시대와 얼마나 다른가는 서태지를 통해 입증된다.
그러나 멀리 거슬러갈 것도 없다. 지난 해 가장 뜬 “비”라는 뮤지션을 생각해보자. 그는 요즘 뜨고있다는 새로운 트렌드인 “메트로섹슈얼”의 전형으로 평가받는다. 남성적이면서 또한 동시에 여성적인 그의 외모와 인상, 분위기. 시중의 평가는 그가 메트로섹슈얼이라는 컨셉의 진정한 재현이라고 한결같이 이야기한다. “꽃미남”의 느끼한 감상적 호소와도 거리를 두고 촌스럽고 멍청한 진짜 사나이와도 무관한 그의 이미지는 물론 제작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그저 진부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것은 HOT와 GOD 모두 분발했던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거대한 자본을 거느린 기업의 생산물이 아니라 작은 기획사의 용의주도한 기획과 마케팅을 통해 시장에 나왔다. “비”를 기획한 회사는 그를 정보경제의 콘텐츠로 가공하고 판매하는데 발군의 능력을 발휘한다고 한다. 그의 음반은 디지털콘텐츠의 쿠폰을 내장하고 있고, 그의 초상은 상품권으로 판매되고 있으며, 그의 뮤직비디오는 간접광고기법을 도입하여 여러 브랜드와 윈윈 전략을 구사한다. 그는 모 치킨회사의 광고에 출연하여 “야마카시”란 익스트림스포츠를 즐기는 분위기를 선사하고 브랜드를 감성화한다. 그의 음반에는 “비의 1일 매니저되기”와 “리니지 무료이용권’이 들어있어 고객관계관리, 멋진 말로 관계 마케팅을 솔선한다. 그렇다면 그는 두루두루 트렌드의 첨단을 걷는다. 그는 정보통신산업의 새로운 변화와 함께 하고 섹슈얼리티와 몸을 둘러싼 우리 시대의 트렌드와 함께 한다.
이처럼 현재의 문화산업은 세분된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혹은 트렌드의 방향에 따라 틈새 시장의 골목을 누비며 제작되고 마케팅된다. 역시 요즘 유행하고 있는 표현처럼 “비”는 뮤지션이 아니라 “콘텐츠”인 것이다. 댄스 음악 일색의 뮤직 비디오형 가수들의 음악과의 차별화 덕택에 라이브 공연이 자신을 유지하고 인디 음악이라는 주변적인 음악 산업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나름의 문화 자본을 가진 부족화된 청중 집단과 만나게 된다. 조용필이라는 대중음악가가 딴따라에서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독창적이고 천재적인 개인, 영웅으로서의 예술가라는 미학적인 신념을 통해 대중음악을 향유하던 시대가 본격적으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청취자로서 FM 음악방송을 열심히 듣고 연주회에 참여하는 전 시대의 대중음악의 향유자들과 지금의 대중음악의 수용자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서태지가 대표하듯이 대중음악은 곧 그 시대를 향한 태도라는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의 차원까지 상징한다. 나와 대중음악가 사이에 연주자와 수용자 사이의 즉 저자와 독자 사이의 거리가 사라지고 서태지는 우리가 된다. 물론 우리는 이를 밥 딜런, 비틀즈와 마돈나, 에미넴의 차이로 풀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록큰롤의 천재적인 아티스트였으며 반항적인 시대의 영혼이었던 비틀즈, 밥 딜런과 달리 마돈나와 에미넴은 동시대를 들여다보는 거울 그 자체이다. 따라서 우리는 록큰롤의 모차르트로 비틀즈를 부른 것처럼 마돈나와 에미넴을 부르지 않는다. 그들은 요즘의 트렌드 분석가의 표현을 빌자면 신화의 제조자이고 생활양식의 창조자들이며 시대의 이야기꾼이고 삶의 연출자이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 대한 가장 손쉬운 비판은 그것이 진정한 체험과 쾌락으로부터 우리를 소외시키고 문화산업이 만들어낸 조작된 욕망에 길들인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경제와 문화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간격이 있다는 가정을 깔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한 이들은 문화산업이 개성의 표현이라는 교환될 수 없는 고유한 삶의 세계를 상품이라는 보편적인 교환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은 이른바 “신경제”의 시대로 불리는 후기 자본주의에서는 계속 설득력을 지니기 어렵다. 따라서 트렌드란 개념이 난데없이 부상하고 그에 관련된 책들이 날개 돋힌 듯 팔리는 현상도 이해할 수 있다. 과연 시장에서 어떤 상품이 잘 팔릴 것인가를 예상하고 소비자의 욕구를 조사하던 시대의 트렌드는 우리 시대의 트렌드가 아니다. 우리 시대의 트렌드란 결국 문화이다. 그렇다면 대중문화 역시 다르지 않다.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의 부상은 새로운 상품 세계의 등장이다. 그렇지만 우리를 따로 분간할 수 없을 것이다. 곧 문화는 상품이고 상품은 문화인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집약하는 말이 있다면 트렌드일 것이다. 쿨(c0ol)에 관한 강박증을 생각해보자. 청소년 하위문화와 대항 문화의 레퍼토리를 모방하고 전용한 이 희대의 트렌드는 곧 상품의 세계이자 문화적 관례의 세계이다. 그것은 의류와 가방, 음반에서부터 심지어 마약과 윤리적 태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망라한다. 그리고 그것은 광고와 마케팅, 홍보에서 교육과 사회운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펑크가 룩이 되고, 그런지가 패션이 되는 세계, 그것은 또한 트렌드의 세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