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에서 상상하는 전지구적 떠돌이들의 오아시스


1985년 대학에 갓 입학한 새내기이던 내게 신촌은 만국박람회장같은 곳이었다. 로마다방, 파리다방, 워싱턴미용실..영문을 알 수 없지만 다방과 맥주집, 그리고 미장원등은 모두 이국적인 도시의 이름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2004년인 올 해 내게 신촌에서 이곳과 다른 곳의 거리는 사라지고 없다. 파리 다방이 파리와 여기의 거리를 가리키고, 바깥에 있는 불가해한 세상의 매력을 알려주었다면, 신촌은 시쳇말로 어디에도 없는 곳(nowhere)에 가깝다. 신촌 안에는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만화를 보는 놀이방과 이태리 커피전문점, 베트남 국수집, 태국 요리점이 모두 함께 있다. 그러나 이제 신촌은 청담동보다는 후지고 싸구려이며, 홍대 앞보다는 너무 속물스럽고 천박하다. 신촌은 이제 한심해졌거나 아니면 눈길조차 끌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간다.
신촌은 원주민이 없는 장소이다. 한국에서 대학은 언제나 원주민들이 엘리트 국민으로 선발되어 훈련받는 곳이었다. 따라서 신촌에 있는 명문대의 대학생들은 또한 한국 사회 안에서 장소로부터 벗어난 문화를 만들어내는 주역들이었다. 그들은 문화를 근대화하고자 하였고, 그것은 촌티를 벗는 것이었고 또한 유행에 민감해진다는 것이며 또한 국제적인 감각을 터득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신촌이 대표하던 그러한 국민문화의 경계 안에서의 특권은 사라지고 없다. 전지구적인 문화의 흐름 안에 신촌 역시 흡수되었고 다른 모든 장소들도 역시 그 안으로 빨려들었다. 그리고 장소는 그 흐름을 운반하는 사람들의 복잡한 삶의 리듬과 속도에 따라 펼쳐졌다 오므라들었다 하기를 반복한다. 물론 불행한 일이지만 그런 흐름은 언제나 상품의 흐름이고 정보와 지식의 흐름이다.
전지구적인 문화의 풍경으로부터 신촌을 따로 떼어내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신촌이 아무런 문화도 없는 곳이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신촌이 좋은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곳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고 아마 지금도 있을 것이다. 신촌의 문화적 생태계를 조금만 더 유심히 관찰한다면 우리는 놀라운 일을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붙박이 주민이 없는 마을, 장소가 아닌 공간, 상품의 교환과 소비만 있는 거리에, 역설적인 일이지만 사람들은 무엇보다 어떤 절박한 문화적 갈망을 싣고 온다. 그렇다면 신촌에서 우리는 전지구적인 떠돌이들이 만들어내는 문화적 공간을 실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신촌의 부동산, 신촌의 교통 순환, 신촌의 유행의 흐름, 신촌의 학벌, 신촌의 섹스, 신촌의 음악, 이 모두를 분석해 보는 것은 어떨까. 아마 그것은 한국 사회에서 문화가 움직이는 회로를 찾아내는 일이 될 것이다. 또한 그 회로에 새로운 전류를 공급하고 그 안에서 순환하는 나쁜 흐름-자본의 흐름, 권력의 흐름-을 바꾸는 길을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 수업을 듣는 어느 학부생이 만드는 신촌문화관련 신문에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끄적여 본 글…

치통…


– 어영부영 논문 프로포절 발표를 끝나고 난 연후 이제 종강 준비를 하고 있다. 갑자기 들이닥친 몇 꼭지의 원고를 처리해야 하고 성적 처리를 해서 넘기면 올 상반기의 내 스케줄은 마감된다. 그리고 이제 바야흐로 논문의 초안을 몇 챕터라도 써놓아야 가을에 편해질 것이다. 연락해둔 몇 곳과 만나 인터뷰를 본격적으로 할 것이고, 이미 수집한 데이터들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일도 손을 대야할 것이다. 갈수록 늘어나는 자료들 때문에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다. 거의 매주마다 정부나 기업의 문서, 보고서, 그리고 이미 출간된 다양한 경영학의 텍스트북들을 사모으고 있다. 다들 작정하고 뜯어볼 가치가 있는 중요한 문서들이긴 한데 느긋이 자료들을 읽어볼 여유가 없었다. 이젠 좀 시간이 나려나..그 많은 문서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읽을 수도 없어 이 끔찍한 먼지더미와 소음에 파묻힌 집에 틀어 박힌 채 읽어야 한다니 그것도 기가 막힌 일이다. 어찌나 동네에 공사장 먼지가 많이 꼈는지, 공사현장에서 살수차를 불러 집들을 모두 닦아준단다. 제길. 그건 큰 공사장 이야기고 앞치에서 하던 아파트 공사장이야 그런 여력이나 있겠지 옆구리에서 하는 빌라 공사는 그런 엄두도 못낼 것이다. 장마나 길어지면 조금 나을려나.. 이럴 줄 알았으면 청주행을 좀 더 일찍 준비하고 저축이라도 해 둘 것을..여름은 어쨌거나 빈궁기이다. 빙수를 적게 먹고 아이스커피를 탐내지 말 것..!! 냉면은 일주일에 한번만..!!
– 황홀한 치통 때문에 프로포절 발표를 엉망으로 마치고 기분이 꿀꿀하다. 무슨 대단한 걸 하는 자리도 아니었고, 절차와 의례를 성실하게 통과하는 것이었는데, 치통의 발작을 걱정해서 미리 꾸역꾸역 먹은 진통제가 고열에 현기증에 별 해괴한 증세로 날 괴롭혔다. 드문드문 기억나는 건 준비해간 문서를 읽으면서 지금 내가 뭐라 지껄이는거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기분..코멘트를 들으면서 그걸 메모해보려는데 무슨 말인지 귀에 들어오지 않아 멍하니 백지 위에 펜끝을 누르고 정말 땀이 비오듯 하네 속으로 혼잣말하던 기억..이런 것 뿐이다. 거의 끝나갈 즈음에서야 식은 땀을 한 대야쯤 쏟고 머리가 맑아진 듯 하다. 그리고 술먹으러 가고…그리고 본격적으로 치통으로 몸부림쳤다.
– 밤을 꼬박 샌 채 공포스런 치과 치료의 체험을 강변하는 인터넷의 글들을 읽으며 뭐 심리적 준비운동을 했다고나 할까. 거의 빈속으로 버텼던 하루가 지나고 진통제로 부대낀 속에 멀겋고 뿌연 피로만 몸에 걸치고 있었다. 새벽에야 잠깐 눈붙이고 간 병원에서도 고역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괘씸한 치과병원의 행태도 못마땅했고, 1800만원의 견적을 들이밀며 대공사에 필요한 할부와 할인의 흥정을 벌이는 코디네이터인가 하는 직원의 기겁할 상담도 정나미가 떨어졌다. 무성의한 스캘링에 나와보니 거의 두 개의 이빨을 뭉개놓고 거기에 석회질인가 먼가를 벽공사하듯이 덕지덕지 발라놨다. 임플란트를 하라고 윽박지르는데 그건 다른 데서 해야할 일이다. 곧 낼모레면 들러야할 치과 가기가 영 괴롭다..
– 주말에 잠시 외출, 근사한 식사 대접받고 술마시고 그리고 또 한바탕 벼랑 끝으로 갔다. 정말 이젠 불귀점을 지나가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구 지치기도 한다. 더 북적대며 갈등하는 것조차 힘들어지고 눈치가 보일 때면 손을 놓아야 할 것이다. 하물며 그 고통이 치통만 할까..후후
– 혼자 밥을 입안에 들여놓기란 참 쉬운 일이 아니다. 늦잠을 자고선 대충 국수를 말아먹고 나서 안먹을 핑계를 찾다 결국 며칠 전부터 냉장고에서 뒹굴던 아욱을 꺼내 밤늦게 국을 끓여 저녁을 먹었다. 어차피 시원찮은 입사정을 생각하면 국에라도 말아 먹으면 조금 목구멍을 넘어가줄까 하는 기대에서 였다. 조만간 누군가를 초대해서라도 즐겁게 푸짐하게 밥상을 벌여놓고 밥을 먹어야 겠다. 생선도 구워먹고 일전 눈여겨보았단 닭고구마 찜도 해먹어야지. 올 여름엔 잘 먹어두어 이 푸석한 살갗에 조금이라도 윤기를 돋워야 겠다.
– 오즈를 보지 못한 건 역시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 아마 결국 일본에서 나온 오즈 전집을 구해서 보거나 아니면 크리테리온에서 나올 예정인 다른 오즈의 작품들을 알음알음 구해서 보겠지. 그를 극장에서 공손하게 보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원통할 텐데…

명상산업의 세계, 탈근대자본주의의 자기의 테크놀로지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은” 다중인격장애는 아마 21세기를 대표하는 마음의 병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물론 그 병은 더 이상 “다중인격정애”라는 비과학적인 명칭에 따라 불리지 않는다. 그것은 “해리성 정체 장애”같은 거창한 이름을 선사 받으면서 그 안에 깃든 약간의 신비하고 주술적인 후광마저 벗어 던졌다. 귀신들림이나 빙의(憑依)에 가까운 다중인격장애는 – 저 유명한 공포영화 <오멘>에서 거의 완벽하게 재현되었던 – 이제 모든 개인들에게 열려있는 평범한 그러나 불행한 심리적 성장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합리적인 근대 물질 문명 세계에서 추방되었던 신비함의 화신으로서든 아니면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소외된 삶의 이면에 놓인 본연의 자기의 표상으로서든 “귀신들린 주체”는 대중문화의 중요한 정치적 상징이었다. 그렇지만 심리치료사와 신경정신과 의사들이 대면하고 있는 “해리성 정체 장애”를 겪는 개인들은 더 이상 귀신들린 주체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심리적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보다 나은 자아-이미지를 만들어내야 할 평범한 개인들일 뿐이다.

물론 이런 마음의 병은 알콜의 소비가 줄 생각을 않고 항우울증 약이 날개돋힌 듯이 팔리는 대다수의 서구 사회에서나 크게 회자되는 일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것이 곧 서구 사회에만 특유한 일일 성 싶지는 않다. 당장 우리 주변에 범람하고 있는 명상산업을 둘러보자. 아이러니하지만 신비한 동양의 명상은 동양인들의 관념과 수행이 아니라 언제나 캘리포니아를 경유하여, 전지구적인 문화의 회로 속에서 순환하는 문화적 상품이 되어 우리에게 도착한다. 그것도 이번에는 다가서기 어려운 불가해한 말씀으로서가 아니라 매우 간편하게 소비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주어진다. 얼마 전 모 신문사가 주최한 “웰빙 페어”에 출품되었던 상품 가운데 인기를 끈 것 중 하나는 “명상편의점”이었다. 알다시피 깊은 우울과 자기를 향한 분노가 무엇 때문인지 속 시원히 설명하고 처방하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산업을 이루고 있다. 제약산업이 항우울제로 벌어들이는 돈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그러나 처방과 치료의 약속은 의학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좌절감, 자기모멸감, 무기력감 등을 치료하고 “자아혁명”을 선물하며 성공과 행복을 안겨다주겠다는 자기계발 산업도 성장과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개인주의 혹은 나르시시즘에 물든 서구 자본주의의 사정만은 아니다. 또 나와는 좀 다른 별난 사람들의 별난 생활방식도 아니다. 자기계발계의 원조, 맥스웰 몰츠의 말처럼 “정신의 성형수술”을 받으려는 사람들은 꼬리를 물고있고, 이미 한국 사회에서도 평범한 일상이 되었다. 자기계발이라는 문화상품을 가장 잘 팔아치우는 곳은 뭐니뭐니해도 한국에서 “명상산업”이라 부르는 것이리라. 웰빙이라는 트렌드가 소비문화의 황금률로 자리 잡으면서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사람들을 겨냥한 상품들이 넘쳐난다. 물론 남들은 굶어죽는데 저 혼자 배불리 살겠다는 못된 심보로 웰빙을 폄하는 것은 시대착오임에 분명하다. 20 대 80의 극악한 불평등의 사회를 호도하는 나쁜 이데올로기의 모범으로 웰빙을 규탄하는 것은 편협할뿐더러 잘못된 생각이다. “삶의 질”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믿음과 기대는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그들이 퍼뜨린 선동이 아니라 오랜 동안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변화시키려 했던 수많은 자유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의 신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진정한 본질로부터 소외되지 않은 삶을 향한 욕망, 기계의 부품처럼 되어버린 테일러주의적인 산업 세계의 악몽에서 해방되려는 의지, 표준화된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의 여정을 “탈영토화하려는” 꿈이 바로 “웰빙에의 의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이제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설명해주던 구 시대의 모든 보증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고향이 어디인지 알면 출신학교가 뭔 줄 알면 직장이 뭔지 알면 그의 삶을 짐작할 수 있던 사회적 캐릭터의 시대-소설의 세계이던-는 슬슬 자취를 감추고 있다. 탈근대 자본주의의 시대는 전처럼 신분이나 계급 혹은 가족과 직장이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해주고 보증해주던 시대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구속으로부터 정체성이 떼어지고 그것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고 역설한다. “자기를 찾아가는” 패키지 관광 상품, 아로마요법, 명상 프로그램이 나날이 번창한다. 웰빙에의 의지가 상품을 사서 쓰는 소비자의 의지이지 탈자본화된 새로운 사회적 주체가 품은 삶의 의지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제는 삶의 시간의 일부를 노동으로 빼앗아 가는 것도 모자라 그 바깥에 있던 삶의 힘 마저 자본이 포섭하고 동원하려 한다고 강변하는 것은 일면적이다. 억압받는 민중이란 삶의 자리에 명상을 하는 개인이 들어선 것은 불행한 일도 다행스런 일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self)라는 삶의 주체를 만들어내는 방식이 바뀐 것뿐이기 때문이다.
잘살아보려는 의지가 극히 평범한 본능이자 인간의 정신의 프로그램이라면 모를까, 그것이 하필 요즈막에 갑자기 등장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유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거창한 문명론이나 삶의 가치의 변화 따위의 공허한 입씨름에 휘말리고 말 것이다. 명상산업은 무엇보다 탈근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세계가 바뀌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에 불과하다. 그것은 “나”라는 개인적인 자기를 빚어내는 세계의 틀과 사회적인 주체를 생산하는 틀 사이의 새로운 관계가 등장했음을 알려주는 전조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가 신용불량자와 청년실업과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와 명상산업의 번창 사이에 놓인 도착적인 관계를 해명해야 한다는 것을 요청한다. 물론 그것에 눈뜨지 않는 한 자본주의 외부에서의 삶을 꿈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컬티즌에 기고한 글입니다>

명상산업과 자기라는 상품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은” 다중인격장애는 아마 21세기를 대표하는 마음의 병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물론 알콜의 소비가 줄 생각을 않고 항우울증 약이 날개 돋힌 듯이 팔리는 대다수의 서구 사회에서의 일이기는 하다. 그 깊은 우울과 자기를 향한 분노가 무엇 때문인지 속 시원히 설명하고 처방하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산업을 이루고 있다. 제약산업이 항우울제로 벌어들이는 돈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그러나 처방과 치료의 약속은 의학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좌절감, 자기모멸감, 무기력감 등을 치료하고 “자아혁명”을 선물하며 성공과 행복을 안겨다주겠다는 자기계발 산업도 성장과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개인주의 혹은 나르시시즘에 물든 서구 자본주의의 사정만은 아니다. 또 나와는 좀 다른 별난 사람들의 별난 생활방식도 아니다. 자기계발계의 원조, 맥스웰 몰츠의 말처럼 “정신의 성형수술”을 받으려는 사람들은 꼬리를 물고있고, 이미 한국 사회에서도 평범한 일상이 되었다. 자기계발이라는 문화상품을 가장 잘 팔아치우는 곳은 뭐니뭐니해도 한국에서 “명상산업”이라 부르는 것이리라. 웰빙이라는 트렌드가 소비문화의 황금률로 자리 잡으면서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사람들을 겨냥한 상품들이 넘쳐난다. 잘살아보려는 의지가 극히 평범한 본능이자 인간의 정신의 프로그램이라면 모를까, 그것이 하필 요즈막에 갑자기 등장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으리라. 그것은 아마 자기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던 구 시대의 모든 보증들이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전처럼 신분이나 계급 혹은 가족과 직장이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해주고 보증해주던 시대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구속으로부터 정체성이 떼어지고 그것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고 역설한다. 그렇지만 그 자유로운 선택이 진짜 나를 찾기 위한 방황을 낳고, 그 방황이 시장에서 상품-정체성을 사들이는 행위로 끝난다면, 이는 즐거운 일은 아니다. “자기를 찾아 가는” 패키지 관광 상품, 아로마요법, 명상 프로그램이 나날이 번창할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비분강개할 일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시대에 자기라는 정체성을 무엇이 결정할지를 두고 벌어지는 갈등의 한 편린을 보여줄 뿐이기 때문이다.
[서울경제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마흔을 생각하다























– 별일도 아닌 것을 마음이 부산하여 꾹꾹 신경을 눌러가며 성과없는 헛일을 계속 하고 있다. 내주에 닥친 알량한 박사 논문 프로포절 발표에 말뜻 그대로 “들려” 오늘 부산을 떨었다. 덕택에 90년대 이후 지금까지 세상살이의 변화를 다시 한번 눈여겨 보게 되었다는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이랄까. 이 나이먹도록 수험생 시절처럼 벼락치기하는 버릇이 여전하니 어쩔꼬.
– 문득 수험생 시절?…그 말을 떠올리니 며칠전 주문한 책 사이로 함께 주문했던 씨디 한장 생각난다. 뽀득거리는 투명공기주머니 안에 들어 배달되었던 그 씨디를 오늘 꺼내서 들었다. 타공기 소리와 쇠파이를 써는 그라인더 소리에 백주에 집에 머무는 것은 고역이다. 이사 온 연후 계속되는 이 슬럼가 풍의 재개발의 합창은 날 녹초가 되게 만든다. 그 소음이 견디기 어려워 맞장을 뜰 작정으로 그 씨디를 걸고 들었다. 남새스럽게도(?!) 그것은 피셔 디스카우의 슈베르트 가곡집이었다. 성음이었나? 카셋 테이프로 나온 그 유명한 클래식 씨리즈 가운데서 나는 성악곡을 그토록 기피함에도 불구하고 아그네스 발차의 이태리 민요집과 피셔 디스카우의 슈베르트 가곡집을 좋아했다. 그 피셔 디스카우의 가곡집을 주문했던 것이고 그걸 오늘 다시 꺼내 들었다. 고삐리 시절, 처연하다기보다는 개폼이 반쯤 섞인 우울에 휩싸일때마다 나는 그 테입을 싸구려 전축에 꽂고 들었다. 해남이나 나주에 갔으면 하는 충동과 불란서 문화원엘 가봤으면 하는 충동 – 앞엣 것은 김지하나 김남주를 읽은 뒤의 충동이고 뒤엣 것은 김영태나 오규원 혹은 김광규를 읽은 뒤의 충동이었을 터. – 을 조물락거리며 나는 내 문청으로서의 소질을 보증해주는 그 음악에서 허우적댔을 것이다.
– 그러나 마흔 – 나는 요즘 이 말이 아주 맘에 들어졌다. 맙소사 마흔이라니..그러나 서른과 달리 마흔은 아주 기쁘고 뿌듯하다. 섣부른 생각이지만 이제 마감을 준비하고 정리하기 전에 제 삶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고 잘 가꾸고 좋은 끈으로 묶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한다. – 에 접어든 나이에 십대의 소년 시절을 상기한다. 그 아름다웠던 십대. 문득 MTV에서 보는 도무지 엉키지 않는 그 발랄함 혹은 낯선 불가해한 현재에 비해 내 십대가 지척에 있는 듯 하다. 늙어가고 있는 것일까. 사실 살갗의 기름이 마르고, 푸석하게 덤불처럼 팔등에 얹혀진 털거웃을 보면 나는, 문득 뇌졸중으로 쓰러져 사위를 분간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팔을 마사지하던 내 십대가 생각난다. 그럴 때는 진짜 와락 아들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살갗을, 내 몸의 작은 동작을 기억해주는 그 작은 아이가 있었으면…
– 잠을 청하려고 집어든 지난 계간지에서 시 몇 꼭지를 읽었다. 다들 여전했으면 좋았을 것을, 제 못다한 일들과 저를 끼워주지 않는 세계에 관한 투정 뿐이다. 그러고도 원고료를 받아 쳐먹냐 이 잡것들아…후후..
– 섹스를 하겠다고 집에 들어온 녀석이 배불리 밥을 먹고, 옆에서 곯아떨어졌다. 잠든 줄도 모르고 옆에서 글을 읽던 나는 개구리다리처럼 가볍게 경련하는 녀석의 다리의 움직임을 깨닫고서야 잠든 줄 알았다. 배불리 먹고 곤해서 자니 좋은 거다. 맘 편히 곤하기 어려운 노역에 시달리는 녀석에게 좋은 잠의 배경이 되어 물끄러미 앉아 있는 것도 좋은 일이다.
– 오늘 아침, 잘 일어날까.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有感

일상의 탈출을 맛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평범한 관객에게 불쾌감만 주는 나쁜 영화라며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본 어느 학생의 글이 게시판에 올랐다. 그가 나는 그 영화를 어떻게 보았는지 물어와서 이렇게 몇자 적었다.
-소시민 혹은 프티부르주아지의 위선적인 삶에 대한 조롱 혹은 야유로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읽는게 거의 관행인듯 합니다. 물론 그런 지적은 틀린 것도 아니지요. 특히 영화가 스펙터클을 즐기는 오락, 뻔한 서사적인 구조를 반복적으로 보면서 느끼는 강박증적인 퇴행의 쾌감(똑같은 것은 언제나 즐겁지요^^)이 되어버린 이후에, “내면”이라는 자아의 공간을 보여주는 것, 특히 그냥 무심하고 평면적인 사물의 풍경인데도 그 내면의 표현으로서 제시하는 것은 분명 모더니즘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위선적인 그의 속내(혹은 멋진 모더니즘적인 문화비평의 용어를 빌려쓰자면 “내면”)를 보여주는 영화를 만드는 홍상수 감독은 뒤늦게 부활한 모더니스트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그의 뒤틀리고 야비한 심지어 비열하고 아주 사악하기까지한 관찰과 폭로의 과정이 매우 즐겁고 짜릿하지만(거의 자학적인 것이겠지만..^^), 그에게서 어떤 대단한 점을 찾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면의 관찰은 상투적으로 재현되는 그의 예측할 수 있는 정체성-그는 남자이니,노동자이니, 서울사람이니, 한국인이니 아마 이러저러할꺼야와 같은 미리 상상할 수 있는 삶의 이야기 – 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고유한 개별성을 삭제하고 지워버리는 것에 대한 부정과 비판이 바로 내면이라는 개념이 갖는 미덕이겠지요. 그래서 내면은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나와 그와 어긋나는 내가 상상하는 나 사이의 고통스러운 차이, 불일치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홍상수의 영화에서는 바로 그 고통스러운 발견의 대상인 내면과 외부 세계의 긴장이 사라진채 거의 물신화된 내면만이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정교하고 또한 가장 흥미로운 <생활의 발견>이 가장 지리멸렬한 이유도 그런 점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 영화에서 그는 <오! 수정>같은 곳에서 끈덕지게 유지했던 그런 내면과 그 위부 사이의 긴장을 잃은 채 내면이라는 것을 저 혼자 키득키득 웃으며 상상하는 싸구려 심리학자의 모습으로 바뀌어버립니다. 그런 것이 이번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도 역시 반복되었던 것 같아요.
(객설이지만 그런 점에서 왕가위는 아주 별난 감독이겠지요? 그의 중경삼림이나 아비정전, 춘광사설 심지어 그 모든 것의 극치인 화양연화같은 작품에서 그는 내면이라고 상상하는 풍경을 아름답게 정말 유혹적으로 보여주지요. 그러나 외부의 세계가 자신에게 부여한 모든 정체성의 덧없음, 허위성, 피상성에 반해 은폐되어 있는 자신의 진정성이 보증받는 그 곳은 이제 전혀 없습니다. 그는 오히려 거꾸로 내면 자체가 구경거리가 되어버린, 안과 밖이 뒤집혀진 세계를 보여주는 듯 하지요. 그의 영화가 견딜 수 없도록 멜랑콜리한 점도 그런 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 그리고 적고 싶은 몇가지가 더 있었다. 나는 이번의 홍상수의 작업이 갖는 어떤 회화적인 금욕주의(?)라고 할만한 것에 의문이 들었다. 그는 설정 숏에서부터 마지막 엔딩 씬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돌리 숏을 가능한 억제하면서 카메라 만을 움직인다. 그것이 물론 인물의 시점과의 몰입을 억제하도록 하고 언제나 관찰하는 듯한 불편함을 가져다 주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것이 시점화를 억제함으로써 화면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동일시하는 것을 차단하거나 억지하는 상투적인 작위라면 모를까 그것이 다른 기능을 하는 듯 하였다. 솔직히 나는 그것이 영화를 못찍는 어떤 견습생적인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또한 적잖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미니멀한 것이라기보다는 관조에 가까운 눈길이다. 다시 그의 영화를 본다면 이 수수께끼를 풀어보고 싶다.
– 마지막 씬에서의 그를 유혹한(그가 그녀를 유혹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를 유혹한) 여학생과 앞길이 막막한 시간강사인 유지태와의 섹스 후의 대화는 나를 졸게 만들었다. 그런 기회가 한번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 내 주변 사람들은 언제나 내가 그런 위험한 일탈을 벌이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기대하기도 하는 눈치이다 – 학생과 불륜에 빠지면 어쩌나 하는 기우 말이다. 학생과 사랑을 나누고 싶지는 않지만 섹스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그리고 난 후의 아주 불쾌하고 유치한 기분을 생각하면 모험을 걸 일이 아니라는 결론이다.

임태훈을 후원하는 모임을 제안하며


양심적 병역거부를 이유로 서울구치소에 구속 수감되어있는 우리의 벗, 임태훈씨의 1심 재판이 끝났습니다. 지난 5월 15일 세계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날을 맞이하며 우리는 아직도 서울구치소에 갇힌 수인의 신세에 놓인 임태훈 씨를 상기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알다시피 그는 최근 많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의 재판 과정에서 나타난 불구속 수사, 보석 허가, 재판 유보 등의 흐름과는 달리 재판부의 “독특한” 재량과 판단에 의해, 실형 1년6개월이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이에 그의 양심적 병역거부를 지지하고 동성애자의 군대 내에서의 차별을 폐지하는데 깊은 관심을 가진 이들은 이번 재판 과정을 지켜보며 임태훈 씨를 지지하고 후원하는 뜻을 한데 모으고자 합니다. 다행히 최근 서울 남부지방법원은 양심적 병역거부자 3명에게 무죄판결을 내림으로써 자신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헌법이 보장하는 제 권리와 합치하는 것임을 뒷받침하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임태훈씨의 재판 과정에서 재판부가 보여준 인권을 향한 참담한 인식에 대한 실망에서 벗어나 이후 재판 과정에서 그의 평화를 향한 충정과 양심적인 결단이 보다 깊이 존중받고 그의 조속한 석방을 포함한 전향적인 판결이 이뤄지길 기대하여 봅니다. 이에 우리는 임태훈씨가 지난 재판 과정에서 겪었던 부당하고 모멸적인 대우를 지적하고 아울러 다음의 재판 과정에서 우리가 품은 기대와 희망을 밝히고자 합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임태훈씨는 최후 진술과정에서 병역거부자 구속수사의 부당성을 이야기하던 중 판사의 제지에 의하여 최후진술이 중단되는 폭력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또한 재판부는 심리 과정에서 병역거부라는 고통스러운 결단을 내려야 했던 배경이었던 인권운동가로서의 전력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여 우리를 실망케 하였습니다. 재판부는 피고인 임태훈 씨의 전력에 관한 기록에 충분히 제시되었던 그의 인권운동가로서의 활동을 참고하지 않은 채, 그에게 “무슨 인권활동을 했느냐”, “국제사면위원회는 어떤 단체이냐”는 등의 납득키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이는 재판부의 성실한 심리의 태도를 의심케 할 뿐 아니라 피고인 임태훈씨의 동성애자 인권운동가로서의 삶을 폄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를 품게 합니다.
우리는 이런 재판의 경과를 지켜보며 임태훈 씨의 동성애자로서의 소수적 성정체성에 관련된 편견이 재판부의 심리 및 판결과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인정하기 어려운 의혹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은 헌법의 근본적인 정신에 위배될 뿐 아니라 인권의 규범에 위반된다는 것이 널리 인정받고 있는 지금, 재판 과정에서 임태훈 씨의 군대 내에서의 동성애자 차별에 대한 항의와 비판은 지극히 정당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 과정에서 재판부는 그의 동성애자로서의 성정체성에 관한 언급과 검토를 기피함으로써 동성애자로서의 그의 특수한 지위와 입장을 무시하였습니다. 임태훈씨의 동성애자 정체성은 양심적인 병역거부를 결단하게 하였던 중요한 이유이자 근거였음에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부는 그의 양심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자 하는 노력을 거부함으로써 매우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알다시피 현재의 병역법은 위헌법률심판이 제청된 상황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병역법은 헌법재판소에 계류 중인 상태이고 그 위헌성 여부가 아직 판결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 연유로 현재까지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많은 재판이 최종 판결을 헌법재판소의 판결 이후로 연기하여 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임태훈씨의 경우 다른 양심적 병역거부자들과 달리 구속 수사를 받음은 물론 보석 조치까지 거부당함으로써 심각한 인권 침해를 겪어야 했습니다. 다행히 최근의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재판부의 무죄 판결은 항소심에서 보다 전향적인 결론이 나타나길 기대하는 우리의 희망에 작은 용기를 더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임태훈씨의 예정된 항소심에서 재판부의 전향적인 접근을 기대합니다. 물론 양심적인 결단을 내린 그에게 어떤 증거 인멸과 도주의 위험이 없음은 물론입니다. 따라서 재판부는 마땅히 보석 결정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재판부가 그의 양심적 결단을 존중하고 평화와 인권을 향한 그의 충정을 이해하는 결단을 내리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는 군복무에 따르는 노역과 수고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살상의 전쟁을 거부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는 임태훈씨가 대체복무제의 도입과 개선을 한결같이 주장하였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전체 병역 의무 이행 대상자 가운데 60%정도만이 현역병으로 복무하고, 나머지 40%는 병역특례 등 기타의 방법으로 병역을 이행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 복무가 곧 안보불안을 야기한다는 식의 주장이 전연 근거 없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는 안보와 반공이란 이름으로 국민의 인권을 서슴없이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의 열망을 질식시켰던 과거의 군사독재 시대의 논리로 병역 의무의 이행을 재단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한 개인의 양심에 따른 결단임과 더불어 안보와 국가적 이익이란 이름으로 국민을 억압적으로 지배하고 훈육시켰던 구 시대의 마지막 잔재를 극복하는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친근한 벗, 임태훈 씨의 양심적 병역거부의 결단을 지지한다는 뜻을 밝힙니다. 그리고 그의 조속한 석방과 군대 내에서의 어떤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사라질 때까지 힘차게 투쟁할 것을 다짐합니다. 아울러 그의 처지에 공감하고 양심적 병역거부를 지지하는 많은 이들의 참여와 지지를 기대합니다.
2004. 5. 24.
양심적 병역거부 동성애자 임태훈을 지지하는 동성애자들의 모임
(서동진, 중전, 달래, 승우)

두 시대를 살기


사회과학적으로 말해 나는 포드주의적 자본주의와 이 잘난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 두 시대를 한꺼번에 겪어야 하는 불행한 아니 多福한 세대의 주인공이다. 군사독재와 개발훈육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맞이한 이 찰나의 변화에, 나는 거의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그 어리둥절하고 불안한 심정은 크게 두가지의 증세로 나타난다. 첫 번째는 혐오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우울해지거나 아니면 망명객의 심정으로 자신이 속한 사회의 주변에서 배회하는 것이다. 이런 유아론적인 태도는 곧장 자신을 빈약한 윤리적인 늪 속으로 끌어내린다. 위악하고 타락한 세계를 향해 적대감을 품고, 그에 동조하는 배신한 모든 이들에게 가눌 수 없는 원한을 품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아주 자포자기적인 태도로 혹은 조금은 그로부터 원기를 회복한 듯한 착각에 빠져 결단을 꿈꾸기도 한다. 나의 경우 몇 해 전 그것은 이를테면 탁발승과도 같은 삶을 살거나-진정코 나는 IMF 직후 프란체스코 수도회나 빈민구제단체에 평생을 바칠 생각에 시달렸다.- 아니면 더 가난하고 더 참혹한 나라로의 이민을 가겠다는 유혹에 한참을 망설여야 했다. 나는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혹은 브라질이나 베네수엘라에 가야할 것 같은 망상을 버리기 어려웠다(아직도 나는 욱한 심정이 들면 서둘러 짐을 싸들고 그곳으로 가야겠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물론 내가 마더 테레사나 레지 드브레같은 인물이 되겠다는 꿈을 꾸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꿈꾸었던 세계, 그리고 내가 이룩하고자 했던 세계를 위해 자신의 삶을 한결같이 다스리던 의무를 저버렸다는 분노와 수치심 때문에 나는 도피하고 또 되살아나고 싶었을 것이다. 리베르탕의 자격으로 날 호명하는 자리에서, 그리고 인습과 전통, 규범에 반하는 이데올로그의 화신으로 날 초대하는 자리에서, 나는 스스로가 몹시 역겨웠고 지겨웠으며 세상이 모두 피곤했다. 그 때 결단을 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일까 아니면 후회스런 일일까. 그것은 아직 잘 모르겠다. 나는 아직 그 때의 고민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아직 그 근처에서 꿈지럭대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그런 윤리적인 선택을 저버린 것을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빈자들을 돌보는 우리 모두의 윤리적인 책임, 자신이 세계를 향해 지고 있는 빚을 적극적으로 떠맡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뿐더러 위험하기조차 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빈민구제기관의 훌륭한 사제가 되는 것보다 말만 많은 혁명가가 더 실제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변화를 꿈꾸는 이들에게 씌워지는 가장 손쉬운 모욕과 비난은 그들이 말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에 분노하는 이들이 정작 온전히 말의 힘을 입증하듯이 나는 말에 패를 걸고 희망을 상징화하고 그를 위한 프로그램을 그리는 일에 전력하고 싶다. 그리고 그게 내가 선택한 아니 선택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접어든 길이었다.
지구화니 구조조정이니 따위에 관한 글들을 닥치는 대로 읽고, 그간 내 앞으로 흘러갔던 변화의 실체를 가늠하기 위해 자료와 문서들을 뒤지면서 또한 지난 신문들을 다시 꼼꼼히 읽으면서 나는 내가 접어든 세계가 어떤 것인지 조금씩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는 더 많은 자유주의가 필요하다고 믿었던 사회주의자에서 나는 그 자유를 향한 꿈이 이미 질식할 듯한 새로운 명령이자 규범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사실 자유라는 말은 이제 오염될만큼 오염되었고, 다양성-차이-시민-자율같은 말은 가진 자들의 말이 되어 입에 담기조차 민망하다. 87년의 민주화가 열어놓은 환기창을 통해 권위와 획일에 찌든 삶을 살던 우리는 모두 자유롭고자 했고 더 많은 상상의 권리를 옹호하고자 했고 더 많은 위반적인 삶을 현실에 등록시키려 애썼다. 그래서 언더그라운드니 인디니 올터너티브니 하는 등록상표가 붙은 모든 것들을 게걸스럽게 숭배했고 한결같지 않은 고유한 삶, 특이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을 축복했다. 히피의 전설을 다시 듣고, 비트 세대에 관한 소문을 수집했으며, 68혁명의 뒤안에서 벌어진 그 아름답고 현혹적인 소동의 현장에 입회하지 못했던 것을 통탄했다. 그리고 또한 새롭게 읽고 듣고 보아야할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우리는 맑스와 레닌을 넘어 푸코와 들뢰즈를 읽었고 프로이트와 라캉을 읽었다. 심지어 니체도 백치같은 문학청년의 염세적 아포리즘의 운명에서 구제하였다. 또한 우리는 밥 딜런과 찰리 파커, 부르스 스프링스틴 그리고 벨벳 언더그라운를 들을 수 있었다. 고다르와 안토니오니, 오시마, 그리고 모든 B급 영화와 심야영화들을 한꺼번에 보느라 눈코 뜰 새 없었다. 새로운 잡지를 창간하고 싶었고, 전위적인 지식인-예술가 그룹을 만들고 싶었다. 페미니즘과 게이운동이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지고 공중보건과 위선적인 도덕의 나락에 빠진 우리의 섹스를 만회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때 덩달아 마치 우리의 뒤통수를 후려치듯이 악몽과도 같은 새로운 자본주의가 등장하였다. 구조조정, 다운사이징, 아웃소싱, 유연화같은 말들에 익숙해지고, 우루과이 라운드니 WTO, OECD, IMF같은 말들이 흉흉하게 떠돌 때도 역시 우리는 아직 충분한 함량에 이르지 못한 자유를 찾아 우리는 서성이고 있었다. 그리고 물론 다들 그랬겠지만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불안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몇 해 뒤 과거의 꿈이 시들해지고, 기사거리를 찾는 싸구려 일간지와 주간지의 문화부 기자들,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유행을 뒤쫓는 하이애나같은 마케팅 담당자들과 광고업자들, 사진가들과 디자이너들에게 우리가 포위당했다는 걸 문득 느꼈을 때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현실에 이르렀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반공훈육자본주의로부터의 탈출하기 위한 우리의 반항이 어느새 소비자본주의의 미끼이자 유혹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클럽과 대안공간, 영화제와 축제, 파티 그리고 반항적인 예술가들에게 염증을 느끼고 심지어 혐오감을 가누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소아병적인 태도이다. 그렇지만 뉴에이지주의와 자기계발의 잡탕, 소비자적인 라이프스타일의 생산자가 되어버린 문화비평의 음란한 공간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고, 냉소적인 빈정거림으로 그들과 굳이 불화를 일으키며 그 자리에 참석해야 할 의무를 찾기 어려웠다.
물론 아직도 나는 이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풍경에서 탈출할 신뢰할만한 꿈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온갖 버림받은 천민들과 혁명가들이 모여들어 만들어낸 코뮌을 꿈꾸기엔 서울은 너무 거대하고 첨단이다. 브라질에 있었다는 카누도소를 상기하며 코뮌에의 꿈이 박멸당한 세계를 비탄하는 지젝의 맥빠진 이야기에 지지를 보내고 싶지 않다. 시애틀에서의 반세계화 투쟁에 전율하며 새로운 희망을 역설하는 이들에게서도 나는 별다른 흥분을 느끼지 않는다. 불과 지척에 우리는 수십만이 운집한 그리고 피의 쿠데타를 감수하겠다는 각오로 싸운 거리에서의 투쟁이 있었고 아직도 절박한 투쟁은 도처에 있다. 사회협약과 거버넌스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적 정부에 농락당하고 있는 같은 세대의 많은 벗들에게 나는 더 이상 실망도 않는다. 그들도 한 세대 전체를 덮어 누르고 있는 미망에 갇혀 있을 것이다.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현되고, 반공주의라는 파시즘의 훈육으로부터 벗어나고, 시민사회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사회를 향한 그들의 꿈은 그리고 공정한 분배라는 불가능한 미래를 상상하는 그들의 희망은 건강한 것이고 또 배반당해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문제는 그런 희망은 거의 모두 가짜라는 것이며 지금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가장 나쁜 변화의 전략을 지원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더 많은 시민사회의 참여는 결국 국가라는 권력에 매개되지 않은 지배를 낳는 것이고, 아무런 책임질 주체가 없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결사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 돌보아야 할 책임을 떠맡게 된, 불행하고 참담한 “시민” 아닌 “벌거벗은 삶”으로 남게 될 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자유로운 욕망을 억압하는 권위와 억압에 저항하는 것이 더 이상 급진적이지 않으며 심지어 거꾸로 가장 나쁜 노예화의 회로에 흡수되는 길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나는 다시 삶을 시작하는 기분이다. 아직 나는 그 삶의 불안한 기분에서 어떻게 다음의 길로 옮겨가야 할지 모른 채 여전히 궁리만 하고 있다. 몇 해 동안의 우울한 마음의 행적을 어떻게든 요약하고 싶은 심정도 아마 그런 궁리만 하며 서성대는 삶의 부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친밀성의 상품화 – 인맥관리 혹은 네트워킹의 문화

미니 홈피와 블로그 – 그들의 쾌락, 그들의 욕망
지금 20대의 가장 큰 소일거리를 꼽자면 당연 미니홈피와 블로그를 들락거리는 일일 것이다. 인터넷에서 좀 “논다”는 이들은 너남 없이 블로그와 미니홈피에서 떠날 생각을 않는다. 틈만나면 “파도타기”를 하면서 혹은 “블로깅”의 사슬을 주유하며 인터넷을 쏘다닌다. 오죽하면 가르치는 몇 수업에서 우리 시대의 일상문화를 관찰하고 해석하는 글을 쓰라 했더니 너남 없이 미니홈피와 블로그 이야기를 내놓는다. 그만큼 인터넷에서 소일하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증좌일 터이다. 그렇지만 하필 그것이 왜 게임 사이트나 정치 사이트가 아니고 미니홈피며 블로그인지, 곰곰이 새겨볼 필요가 있다. 이런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포털 사이트들 역시 사용자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 블로그 서비스를 다투어 시작하였다. 내로라하는 대형 인터넷 사이트들은 블로그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런 서비스를 기획하고 또 그것의 흥행 성적을 평가하는 이들이 접근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대개 블로그나 미니홈피를 인맥관리라는 콘텐츠 상품으로 정의한다. 사실 이런 사이트를 오래 전부터 이용했던 이들은 그 사이트들이 처음엔 인맥관리를 통한 자기 계발 사이트로 마케팅되었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굳이 인맥관리란 용어를 들먹이며 이런 서비스를 이용할 필요는 없다. 이런 사이트를 이용할 때 사용자들은 인맥관리는 타산적인 이해와 목적을 염두에 두며, 줄여 말하면 “도구적인” 태도로 접근할 필요가 없다. 굳이 인맥관리라는 이름을 빌어 자기의 관심과 의지를 동원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인맥관리는 우리 시대의 저류를 관통하는 무의식적인 강박관념이기 때문이다. 미니홈피나 블로그는 “인맥관리에의 의지”라는 우리 시대의 에토스를 상품화하는 다양한 대상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것에 특별히 다른 구석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계발”의 문화로 부를 수 있을 우리 시대의 문화적 정체성이 평범한 일상생활이 되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결국 미니홈피와 블로그 그리고 숱한 인터넷 문화의 변종들은 인맥관리로 압축되는 새로운 자본주의사회의 문화적 정체성을, 자발적으로 혹은 즐겁게 집행하는 것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인맥관리 – 탈근대자본주의의 문화적 에토스
구경제의 시대가 “지능지수(IQ)”의 시대라면 신경제의 시대는 “감성 지수(EQ), 인맥 지수(NQ)”의 시대라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신기한 주문으로 들리지 않는다. 신경제의 다른 이름은 물론 지식기반경제이니 지식정보사회, 포스트자본주의니 네트워크경제니 글로벌 경제니 하는 말이다. 이를 대변하는 이들은 구경제의 시대에 직업적인 활동을 하는 이의 능력은 이른바 숙련이나 기술같은 이른바 인지적인 지식이었다면, 신경제의 시대에 노동하는 이의 능력은 감성과 인간관계의 능력을 포함한 모든 것이라고 강변한다. 기업이 필요로 하는 것은 감성적 가치와 네트워크 능력 등이라는 주장이 새로운 경영학의 신조가 되고, 이를 구체적으로 응용하는 취업, 인사관리, 조직 설계 등의 다양한 경영 기법 담론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지 이미 오래이다. 그리고 앞 다투어 경영의 구루(gurus)나 경영학자, 직업상담가, 미래예측가 혹은 자기계발전문가들은 “삶 전체”의 능력이 기업과 회사에서 필요한 역량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들의 말은 어느 정도 옳다. 컨베이어 벨트로 운반되는 노동대상에 규칙적이고 표준화된 지식으로 세분된 이른바 “노동”을 투입하던 과거의 공장 노동의 이미지는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많은 이들이 경고하듯이 물론 그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주변화되거나 세계의 공장인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의 나라들로 “아웃소싱”된 것에 불과하다(혹은 전에 없이 참담한 조건에서 불완전한 고용상태를 감수하며 일을 해야하는 글로벌 도시 내부의 초과착취 공장(sweatshops)도 있다). 그렇지만 브랜드화된 상품의 세계에서 우리가 구매하는 것은 더 이상 범용품이나 제품이 아니라 상징적 가치나 소비의 규범, 혹은 라이프스타일이라면, 결국 그러한 가치를 불어넣는 노동은 어떤 종류의 일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신경제와 함께 성공을 거둔 또 하나의 우리 시대의 표어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이른바 “지식노동자”란 개념일 것이다. 물론 지식노동자란 지식인 더하기 노동자, 훨씬 더 똑똑해진 노동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지식노동자란 개념은 물론 변화된 자본주의 경제에 필요한 새로운 노동자의 이미지를 제공해주기도 하지만 또한 그것은 노동에 종사하는 이들(그리고 노동에 참여할 준비를 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도록 하는 사회적인 전략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지식노동자는 변화된 시대에 노동자로서 어떤 자질이 필요한지 정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것은 노동자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다루고 체험해야하는지 규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지식노동자는 또한 평생학습의 주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구경제의 노동자가 학교 교육을 졸업하면 더 이상 공부를 않아도 되는 노동자였다면 신경제의 노동자는 평생학습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좋은 노동자란 급속히 바뀌는 시대의 흐름을 재빨리 따라잡고 끊임없이 자신을 혁신하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한국 사회에서 가장 성공한 자기계발문학이자 대중문학 가운데 하나일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의 주인공들처럼 우리는 자신의 실패와 정체를 남 탓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변화의 주체가 되는 각오를 다져야 한다. 이처럼 지식노동자란 말에는 자기를 구체적으로 살피고 돌보는 태도 다시 말해 자기(the self)의 윤리가 바뀌어야 한다는 압력과 요구가 스며있다. 따라서 구경제에 필요했던 노동자와 달리 신경제가 필요로 하는 직업인은 누구인가와 같은 일종의 객관적인 설명을 담는 듯 보이지만 지식노동자란 개념은 노동하는 주체가 자신과 관계 맺는 방식과 목적(telos)을 이끌어내고 또한 독려하는 새로운 장치이자 테크닉이기도 하다.
빽에서 인맥까지 – 능력으로서의 인간관계
그런데 이런 지식노동자의 개념이 요구하는 “탁월한 능력”은 지극히 애매모호하다. 그것은 이미 형식화되어 있으며 그것을 획득하고 평가받는 방법과 절차가 잘 알려져 있는 과거의 능력과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구경제를 움직인 중요한 일의 원리였던 테일러주의(Taylorism)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란 영화를 통해 이미 테일러주의의 풍경을 잘 알고 있다. 물론 그것은 아직도 현대자동차나 대우중공업과 같은 공장을 움직이는 중요한 원리이기도 하다. 테일러란 사람이 창안했다는 과학경영기법은 말 그대로 노동자들의 일을 세부적으로 관찰하고 분석하여 이를 노동의 규칙과 질서로 삼는 것이었다. 이는 크게 보아 일꾼들이 일하는 시간의 흐름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기술이었다. 규칙적으로 운반되는 노동대상, 시간에 따라 관리되는 일과 그에 연계된 보상(이를테면 월급, 일당 등의 임금 체계)은 테일러주의의 핵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성과급과 연봉계약으로 바뀐 신경제의 기업과 많이 다른 것이었다. 그렇지만 테일러주의는 일의 과학자들이 세부적으로 연구하고 과학적으로 설계한 노동의 종류와 질에 관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고 노동자가 될 사람들은 모두 학교와 직업교육을 통해 그러한 노동에 필요한 능력(기술이나 기능 따위)을 배울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 신경제의 노동자들은 그런 능력만으로는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것이 신경제의 옹호자들의 주장이다. 이를테면 멀티형 인간, 다중지능같은 용어는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능력이 전연 다른 것임을 알려준다. 인맥관리가 노동자의 능력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런 배경이다. 감성마케팅이니 정서 자본이니 체험경제니 하는 말은 이제 우리가 소비하는 상품, 우리가 생산하는 제품이 더 이상 물건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 혹은 취향(taste)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런 점에서 인맥관리는 노동자의 중요한 능력이며 적극적으로 계발하고 관리해야하는 자원이 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인맥관리란 것도 알고 보면 왕년의 마당발을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이 아니냐며 빈정댈 수도 있을 것이다. 인사청탁에서 차떼기에 이르기까지, 시쳇말로 “빽”을 통해야 일이 되던 사회 기풍을 떠올린다면, 이런 조소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동사무소에서부터 청와대까지 뒷줄과 뒷돈을 대지 않으면 될 일도 안되는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이러한 “비공식적인” 연줄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고, 다들 비밀장부와 수첩을 통해, 사과상자와 빳빳한 현금을 통해 그 연줄을 기름지게 살찌워왔던 터에, 인맥관리란 말로 유난을 떨 것은 없지 않을까. 물론 이는 얼핏 생각하기엔 맞는 말처럼 들린다.
그렇지만 “빽”이 자신의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동원해야하는 얼마간 비겁하고 떳떳하지 못한 예외적인 행위이자 순전히 도구적인 선택이었다면, “인맥관리”는 그와 사뭇 다르다. 인맥관리는 어떤 이해를 실현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끌어들이는 부정한 선택이기는커녕 그 자체 가치로서 추켜올려지며 특별한 목적이 없더라도 언제나 행해져야 하는 활동으로 여겨진다. 수많은 자기계발서와 경영담론들이 들먹이는 인간관계는 고객으로서든 직원으로서든 우리가 맺는 모든 대인관계가 곧 가치를 창출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그것은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표가 된다. 왜냐면 신경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생각엔 인맥 자체가 자원이고 그로부터 가치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나아가 인맥관리의 담론은 곧 자기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연줄을 맺은 도구적인 이해관계의 타인과 감정적으로 친밀한 타인들 사이의 구분을 지운다. 연줄이나 빽으로 연결된 사람이 “원치 않지만” 혹은 “마음에 드는 사람은 아니지만” 사업과 성공을 위해 돌보아야할 “타인”이었다고 한다면 인맥관리의 담론은 나와 타인들 사이의 친밀감의 거리와 간격을 없애버리다. 우리는 백화점과 쇼핑몰, 병원에 들린 고객을 나의 친한 가족처럼 따뜻한 감정과 태도로 맞이하고 응대하여야 하는 것이다.
친밀성의 상품화 – 탈근대자본주의의 문화경제
친밀감을 사회적으로 조직하고 관리하며 생산하는 것이 물론 어제오늘의 일인 것은 아니다. 이미 백화점의 사원이나 비행기 승무원, 은행의 수납계원 혹은 호텔의 종업원들은 친밀감의 감정적인 관리와 통제를 통해 자신의 노동을 판매하는 대표적인 집단이었다. 그렇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노동자들의 상품화된 친밀성의 서비스를 제공받았을 때 거북하고 불편해 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친밀감은 경제적인 거래와 교환으로부터 벗어난 자연스러운 감정이어야 하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우리”인 척하는 태도는 작위적일뿐더러 심지어 위악한 태도로까지 보였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신과 별로 인연도 없는데도 자신에게 친하게 구는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따뜻한 친밀감은커녕 거꾸로 그로부터 친밀감 자체가 훼손당한 듯한 모욕감이나 불쾌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고객이 OK할 때까지”를 모토로 삼고 있다는 기업광고와 시민들에게 이웃처럼 다가서는 행정 서비스를 실현하겠다고 공언하는 공공기관의 자기다짐에 익숙해져있다. 그리고 지나치다 싶으리 만치 자주 전화를 걸어 배송은 잘 되었냐는 둥, 더 불편한 사항이 없냐는 둥 꼬치꼬치 캐묻고 배려하는(!) 인터넷 쇼핑몰의 여직원들과 매일매일 만나고 있다. 이는 접대(hospitality)가 전문화되고 숙박업이나 관광업을 비롯한 몇몇 산업에 배타적으로 독점되었던 과거의 단계의 자본주의와 전연 다른 모습이다. 이제 우리는 공장과 사무실에서부터 소매점과 학교 그리고 공공기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적 삶의 영역에서 접대가 불가결한 서비스가 되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신경제를 특징짓는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을 꼽자면 단연 우리는 친밀성의 전면적인 상품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맥관리라는 “친밀성의 문화공학(cultural engineering)”은 탈근대적인 자본주의 사회의 중요한 경제적 관행 가운데 하나이다. 조직을 관리하는 담론이자 기술로서도 혹은 노동자를 통제하고 훈련하는 담론으로서도 친밀성은 중요한 것이 되었다. 또한 그것은 상품으로 판매되고 또한 추구되어야할 가치로서도 중요해지고 있다. 체험의 경제니 미적 경제니 하는 말과 더불어 우리는 이제 정서의 경제, 친밀성의 경제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친밀성이 상품화되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맥관리는 또한 타인과의 관계일 뿐 아니라 또한 자기와 맺는 관계 역시 변화시키도록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맥관리는 무엇보다 자기의 자원으로 평가된다. 공정한 질서(?) 즉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이뤄지는 사회경제적 활동에 들러붙은 기생물이었던 연줄은 이제 인맥이란 새로운 이름을 얻었고 나아가 기업조직과 사회활동 안에서 어엿한 능력으로 그 가치가 격상되었다. 앞에서도 이야기하였듯이 지식기반경제에서는 학교교육을 통해 배운 기술적 지식이 아니라 인적 자원으로서 삶의 모든 능력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인간관계 역시 능력이다. 따라서 그것은 “네트워크 지수”로 관리되고 평가받아야 한다, 인맥관리란 자신을 강하게 만들고 성공하는 주체로 만들 수 있는 변신의 계율이 된 것이다.
“성공한 CEO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스스로 가 자신의 내면을 깊이 있게 성찰해야 할 뿐 아니라, 부하직원의 감성 및 니즈를 이해하고 배려함과 동시에 서로가 함께 추구해야 할 지향점을 찾아 이를 향해 자연스레 구성원들을 리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일간지 경제면이나 자기계발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레토릭은 곧 우리 시대의 “자기(self)”의 윤리학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런 식의 수사학은 도구적이고 타산적인 이해집단을 조직하도 통제하는 조정자 혹은 감독으로서의 지휘, 통제가 아니라 영혼의 지도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이를테면 최근 큰 유행을 타고 있는 “서번트(servant) 리더십” 담론은 기업이든 학교이든 아니면 공공기관이든 그 조직 안에서 이뤄지는 사회적 관계가 감성적이고 윤리적인 인간관계임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이것이 감정이 메마른 관료제화된 조직을 인간화시키는 행복한 변화일까. 사장과 직원, 작업감독과 공원 사이의 형식적인 지위를 통해 매개된 관계가 아니라 인간 김씨 대 인간 박씨의 구체적이고 풍부한 직접적인 인간관계가 이제 우리가 살아갈 세계의 원리일까. 물론 우리는 그런 주장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앞서 강조했듯이 그것은 조직의 목표와 효율이라는 기준에서 그 안에 이뤄지는 활동을 합리화하던 것을 넘어서 그 안에서 이뤄지는 감정의 교류와 각 개인이 자신과 맺는 관계 역시 합리화하는 새로운 원리가 뿌리를 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맺음말 – 이중무대의 세계
인맥관리의 세계 그것은 친밀성을 상품화하고 더불어 자신을 끊임없이 타인에게 매력적이고 바람직한 주체로 빚어내도록 하는 새로운 윤리적 명령의 세계이다. 그렇지만 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러한 새로운 삶의 계율에 강박적으로 쫓기지만 또한 동시에 그로부터 빠져나갈 냉소적인 탈출구를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당장 자신에게 친구처럼 구는 사장과 교사, 아버지, 공무원들을 우리는 인맥관리의 전문가이자 훌륭한 자기경영의 달인으로 평가하는 척 제스처를 취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이면에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지위의 불평등이 엄존하는 상황에 분노할 수 있다. 그는 여전히 나보다 더 많은 특권을 누리고 더 많은 보상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어긋난 관계를 향한 우리의 분노와 저항은 매우 뒤틀린 채 도착적으로 표현된다. 우리는 강박적으로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매력적인 연출과 자기제시의 기법을 익히면서 더불어 자신과 타인이 제공하는 모든 친밀한 태도를 부인하고 신뢰하지 않는 냉소적인 태도에 빠져들게 마련이다. 따라서 휘황한 컨벤션센터의 뒤에는 음침한 호텔이 있기 마련이다. 좋은 인상을 보여주고 명함을 교환하며 환대를 제공하는 세계의 바로 뒤편에서 우리는 자신이 잃어버린 진짜 감정의 나, 친밀감의 핍진성(authenticity)을 강박적으로 추구하려 애쓰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끊임없이 새로운 글과 이미지를 게시하며 자신을 멋지게 드러내 보이는 블로그 사용자들이 곧 다른 가상공간에서 후안무치하고 파렴치한 폭언과 욕설을 퍼붓는 게시판 이용자가 되는 것이다. 타인의 눈길 그리고 자신을 감시하고 평가하는 눈길 아래에서 매력적인 나는 곧 다른 자리에서 난폭하고 저열한 충동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저 많은 블로그와 미니홈피의 주인공들은 누구이고 저 많은 게시판의 욕설과 조롱의 주인공들은 누구일까. 물론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은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맥관리의 시대에 살아가는 탈근대 자본주의적 주체의 초상이다. ■

인맥관리라는 우리 시대의 문화적 풍경


지금 20대의 가장 큰 소일거리를 꼽자면 당연 미니 홈피와 블로그를 들락거리는 일일 것이다. 인터넷에서 좀 “논다”는 이들은 너남 없이 블로그와 미니 홈피에서 떠날 생각을 않는다. 포털 사이트들 역시 사용자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 블로그 서비스를 다투어 시작하였다. 이런 문화현상의 이면을 지배하는 우리 시대의 흐름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문득 떠오르는 것이 인맥관리를 향한 강박관념이다.
구경제의 시대가 지능지수의 시대라면 신경제의 시대는 감성 지수, 인맥 지수의 시대라는 말은 이제 상식처럼 통한다. 물론 인맥관리란 말도 알고 보면 왕년의 마당발을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이 아니냐며 빈정댈 이도 있을 것이다. 인사청탁에서 차떼기에 이르기까지, 시쳇말로 “빽”을 통해야 일이 되던 사회 기풍을 떠올린다면, 이런 조소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과거의 연줄은 지금의 인맥관리로 바뀌었다. 그에 대한 대우와 평가도 물론 달라졌다. 공정한 질서의 기생물이었던 연줄은 이제 탈관료제화된 기업조직과 사회에서 어엿한 능력으로 격상되었다. 이른바 지식기반경제에서는 학교교육을 통해 배운 기술적 지식이 아니라 인적 자원으로서 삶의 모든 능력이 중요하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관계 역시 능력이다. 따라서 그것은 “네트워크 지수”로 관리되고 평가받아야 한다, 경력관리, 자기관리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인맥관리를 해야 한다, 성공하고 부자가 된 사람은 아침을 혼자 먹지 않는다, 운운의 이야기가 난무한다.
그렇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다. 이는 인맥관리가 인간관계마저 비정하게 성공과 자기실현의 도구로 삼아버린 세태를 보여주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제는 친밀감마저 패키지에 담긴 상품으로 판매된다. 갈수록 관계는 접대와 사교의 이벤트 상품의 소비가 되어간다. 물론 그럴 수록에 사람들은 자신의 진짜 인간관계를 찾아 배후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휘황한 컨벤션센터의 뒤에는 음침한 호텔이 있기 마련이다. 좋은 인상을 연출한 나의 뒤에는 어떤 진짜 감정의 나를 찾는 무대가 만들어지기 쉽다. 자신을 멋지게 꾸며 보이는 블로그의 사용자는 또한 후안무치한 욕설로 가득 찬 댓글을 쓰는 게시판 이용자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좋은 조짐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매일경제신문에 기고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