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조(灰色調)의..


서동욱의 회화에 관하여
서동욱의 근작 전시인 의 카탈로그는 그의 그림이 “댄디즘과 멜로와 신파, 센티멘털리즘과 퇴행/퇴폐주의가 사이좋게 몸을 섞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작가의 의도이기도 했다면서. 이런 말만 들어서는, 정작 그의 작업을 눈에 익히지 않은 이들은, 그의 그림들이 ‘손가락이 오그라들리만치’ 키치할 것이란 인상을 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들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작품해설은 “느릿하고 기품 있는 서동욱의 퇴행주의”라는 제목을 붙였을 것이다. 그의 아름다운 그림들에 덧붙여진 이런 지적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보다 그것은 그림이었으므로”란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하필이면 그림을 그리고 있고, 문제는 회화라는 매체를 고집한다는 것이다. 그림이라는, 노고로 가득 찬 그리고 그다지 대접을 받기에 어려운 매체를 고수할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그림을 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상은 “하필 그림일까”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꽤 괜찮다는 전시에서 그림을 보는 일은 흔치 않다. 그림은 현대 미술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는 조금 궁상맞고 처량해 보일 뿐 아니라 은근 미술시장에 추파를 던지는 교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미술이라는 행위가 만들어내는 것은 여러 가치를 넘나든다. 공공미술관에 소장될 가치가 있는 교육적 대상일 수도 있고 당대의 미학적 정체성을 표상하는 문화적 유산일 수도 있고 투자를 위한 여러 가지 금융적 수단 가운데 한 가지 항목을 이루는 자산(asset)일 수도 있다. 미술은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이 어디에 해당될지 민감하게 눈치를 살핀다. 실은 그런 것이 미술의 역사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탓에 그림을 계속 그리겠다고 고집하는 자세를 마주할 때 우리는 그래야 할 만한 이유를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냉소적인 의혹으로부터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역시, 그림이야. 왜냐면…” 운운. 아니면 회화가 과연 다른 이미지와 힘을 겨룰 만큼의 어떤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듣고 싶을 수도 있다. “오, 회화에게 그가 가진 힘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점을 알려주시기를.” 말인즉슨 회화가 이미지의 고고학에서나 관심을 기울일 만한 일이 아니라면 말이다. 미술사에 해박한 미술이론가들은 유럽 미술 기행 같은 관광 상품의 가이드가 되어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누비고 다니는 형편이다. 우리는 회화를 죽어있는 저 오랜 옛날의 의고적인 이미지의 한 형태로 즐기는 데 익숙하다. 그렇지만 내가 매혹되는 이미지는 실은 마침 미술관 견학을 마치고 돌아온 호텔 방에서 침대에 누워 본 텔레비전 광고의 이미지일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영면(永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회화를, 우리는 관람한다. 이제 회화라는 이미지는 고요한 관 속에 누워 우리가 찾아주기를 대기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 때 회화는 지성적이고 혹은 호사스런 라이프스타일의 일부로서 소비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여전히 회화를 고수한다는 것은 무슨 객기인가.
한 때 회화는 이미지의 본보기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회화는 많은 이미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의 본보기이자 거의 유일한 이미지였던 시절의 회화를 지금의 회화와 견주는 것은 부당한 일일 것이다. 명민한 미술이론가들은 그래서 회화를 이미지 일반으로 간주하길 포기하고, 회화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특수성이 무엇인지 집요하게 물어왔다. 그러나 그런 어려운 주장에 밝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림을 바라 볼 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사진이든 영상이든 아니면 그 무엇이 되었든, 수많은 이미지가 있다. 그런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매체들 가운데 회화가 존속해야 할 이유란 무엇인가.” 아마 이런 물음을 떠올리지 않은 채, 진지하게 그림을 바로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단적으로 말해 이제 그림은 이제 그림 자체를 그린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그림은 그림 바깥에 있는 무엇을 이미지로 만들어낸다고 너스레를 떨기에는 다른 이미지들의 능력에 뒤쳐진다. “절 그려주세요”라고 말하는 당신과 “절 사진 찍어주세요”라고 말하고 당신은, 이미 각각의 이미지에 대하여 다른 생각을 품고 있을 수밖에 없다. 여러 가지 이미지 가운데 하나로 전락한 회화를, 여전히 지속될 수 있고 지속되어야 할 이미지로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실은 서동욱의 그림을 보았을 때, 많은 이들은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마를렌 뒤마(Marlene Dumas), 빌헬름 사스날(Wilhelm Sasnal) 같은 ‘화가’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들은 회화의 존속을 아니 회화적 이미지의 예외적인 가치를 보여주는 미술가들로 꼽히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의 작업을 ‘회화적인 것의 증언’이라는 이름으로 묶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서동욱도 그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인물을 그린다. 실은 그가 이번 전시에서 그의 최근 작업의 성과인 스산하고 멜랑콜리한 도시의 밤 풍경을 그릴 때에도, 실은 그것은 ‘낯’과 같다. 초상화와 풍경화의 구분은 회화가 융성하던 시절의 구분이다. 사진이 등장한 이후 그리고 다른 형태의 이미지들이 범람하는 지금 그런 구분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인물 혹은 낯은 무엇을 그린 것일까. 아마 작가는 사진을 들고 그 사진적인 이미지를 회화적인 이미지로 변환하는 일을 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바로 그 사진적인 이미지와 회화적인 이미지 사이에 놓여있다. 그리고 두 이미지 사이에 놓인 ‘거리’야말로 회화적인 것을 존속시켜야할 이유 아니 욕망이라 불러야 할 것이 놓인 자리일 것이다. 서동욱은 자신이 작업하는 공정 자체를 전시의 제목으로 삼았다. “Day for Night”이란 느와르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밤 장면을 낮에 촬영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밤 장면을 효과적으로 촬영할 수 있는 조명 장비가 없던 시절에 써먹던 촬영 방식은 이제는 기술적인 제약을 보완하려 동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독특한 심미적인 효과를 만들어내는 형식으로 독립한다. 그리고 공정은 곧 서동욱의 그림이 제작되는 공정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그가 자신의 회화가 만들어지는 공정을 가리키기 위해 나아가 그가 회화적인 것이 놓여있는 자리를 가리키기 위해 채택한 이름이 “Day for Night”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먼저 한 대상이 이미지로 존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식을 의식한다. 그가 부암동이든 성북동이든 아니면 여의도의 공원이든 그 장소를 그렸을 때 우리는 그가 그 장소를 그렸을 것이라고 믿을 수 없다. 그는 화면으로 옮겨질 그 이미지의 대상(referent), 즉 그 장소 자체에는 없는 것, “댄디즘과 멜로와 신파, 센티멘털리즘과 퇴행/퇴폐주의”를 그리려 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 그 이미지는 이미지가 된 대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 것이다. 실은 그가 회화적 이미지로 화면에 현상시키는 것은 벌거벗은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이미지로서만 체험할 수 있던 대상일 것이다. 어떤 대상을 이미지처럼 생각하지 않은 채 볼 수 있을 가능성은, 적어도 20세기 이후에는 없기 때문이다. 마치 관광객이 자신이 찾은 낯선 장소를 이미 사진에서 보았던 그 풍경으로서만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이미지가 되기를 기대하며 묵묵히 대기하고 있는 이미지 이전의 순수한 대상이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서동욱은 바로 이미 이미지로서 있던 대상을 회화적인 이미지로 만든다.
그의 그림은 이미 펄프픽션이냐 아니면 통속적인 느와르 영화에서 보았던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를 가지고 온다. 그렇다면 그는 대중문화를 통해 성행하게 된 한 가지 장르적인 이미지를 그리는 사람에 불과할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멜랑콜리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어떤 정조를 그가 그리게 될 대상에 덧씌운 후 이를 화면 안에 가두는 화가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회색 물감을 두툼하게 섞어 화면을 채울 때 그는 그 이상을 했을 것이다. 나는 그 회색조의 화면이 회화가 놓여있는 자리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이미지의 보편적인 언어였던 회화가 몰락하고, 다양한 이미지들의 가짓수 가운데 하나가 된 회화적 이미지를 고집할 때, 그것은 회화가 증언하는 어떤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회화가 아니면 사라지고 마는 이미지의 어떤 요소? 즉 회화적 이미지를 그것으로서 존속시키는 어떤 최소한의 요소? 나는 엉뚱하게도 그것이 회색 물감이란 생각이 든다. 그 물감은 단지 어떤 색채를 변형시키고 채도를 증감시키는 안료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회화 속에서만 현상할 수 있는 이미지의 자리를 가리키는 것이지도 않을까. 회색 물감을 짜 넣고 어떤 이미지를 그리도록 하자. 그럼 그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가 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을 데카당트한 세계의 정조 속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 때 회화는 이미지의 한 종류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이미지가 어떤 힘을 가지도록 만드는 요소를 증언하는 능력을 발휘한다. 그의 그림에서 느끼는 향수의 한 부분은 바로 그런 회화적 이미지의 능력에 대한 향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이다. ❒

상품의 추억


상품의 추억: 한국 자본주의 물질문화의 이미지, 김한용의 사진


표상과 현상: 광고 사진을 읽기 위하여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김한용의 광고 사진은 한국 현대 광고 사진의 이정표이다. 기호학적 표현을 빌자면 그는 물건의 쓸모를 언급하던 지표적인 사진을 상품의 매력을 이야기하는 상징적인 사진으로 둔갑시켰다. 그런 점에서 그는 한국 사진의 역사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그를 낱낱이 따져본다면 이야기는 아주 복잡하고 긴 것이 될지 모른다. 나는 이 글에서 김한용의 사진을 읽는데 필요한 몇 가지 실마리를 찾아볼 작정이다. 간단히 말해 김한용은 ‘상품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한국 광고 사진의 개척자이다. 여기에서 ‘물건의 초상’이나 ‘사물의 표상’이라 말하지 않고, ‘상품의 이미지’라고 말해야 한다는 점에 주의하도록 하자. 상품의 이미지라고 말할 때, 김한용은 물건을 보여주는 사진이 아니라 물건을 상품으로 전환시킨 사진적 마법을 실행하였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사진은 한국 사진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상품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기여하였을 것이다. 나아가 그의 사진은 한국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물질문화의 전환을 알려준다. 그렇기 때문에 상품이란 낱말과 이미지란 낱말 모두가 중요하다. 따라서 김한용의 사진을 보다 잘 이해하려면 조금 번거로운 우회가 필요할 것 같다. 그를 위해 나는 먼저 상품과 이미지란 개념을 조금 더 따져보고 그의 사진을 살펴볼 생각이다.
먼저 상품. 그의 사진은 쓰임새만을 가진 물건을 유혹적인 상품으로 만들어 주었다. 누구나 알듯이, 상품은 시장에서 사고 팔리는 물건이다. 그렇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그것은 아직 상품이랄 게 못된다. 상품이기 위해 사고 팔리는 물건은 새로운 인격체를 만나야 한다. 그의 이름은 소비자이다. 소비자는 구매자와 다른 사람이다. 소비자도 값을 치르고 물건을 산다는 점에서 구매자이다. 그렇지만 구매자는 어느 시대에나 있다. 소비자는 구매자와 다른 독특한 사람이다. 무엇보다 그는 물건을 상품으로 만나는 사람이다. 물건을 상품으로 전유하는 사람은 물건에서 쓸모 이상을 찾는 사람을 일컫는다. 물건을 사는 사람은 그에게 널리 알려진 쓸모를 사지만, 상품을 사는 사람은 다른 것을 산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그는 쓸모없는 것을 산다. 우리는 ‘소비사회’란 말을 숱하게 들먹인다. 흔히 생각하기에 소비사회란 ‘풍요’로운 사회이다. 그렇지만 풍요란 사물이 충분히 존재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풍요란 쓸모 혹은 실용성이란 장벽을 넘어서며 너무 많이 존재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풍요는 필요를 만족시킬 만큼의 풍족함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과잉이다. 달리 말해 소비자는 ‘그 이상’을 산다. 그 때의 ‘그 이상’이란 충분한 것을 넘어서는 어떤 상대적이고 객관적인 양이 아니다. 그 이상이란 부족, 충분이나 과분(過分)과 관련 없는 실체이다. ‘그 이상’이란 것이 필요의 ‘그 이상’일 필요가 없다. 나아가 ‘그 이상’은 그것이 이상이기 위해 전제하였던 필요 자체도 소급적으로 다른 것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소비사회에 접어들었을 때, 필요란 ‘그 이상’이란 몫을 통해 그 자체 ‘그 이상’인 것, 즉 필요 이상의 것으로 되어버린 필요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더 이상 콩나물을 먹지 않고, 항상 콩나물 이상의 것을 먹는다. 이제 대형마켓 진열대 위에는 온갖 브랜드와 포장을 한 콩나물이 늘어서 있다. 그 콩나물은 필요한 물건이다. 그렇다면 물건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또한 나에게 상품으로서 말을 건넨다, 아니 나를 유혹한다. 내가 유기농을 재배된 콩으로 만들고 비타민 성분이 강화되어 있고 자연분해 플라스틱 봉지에 담긴 이름난 브랜드의 콩나물을 집어들 때 실은 나는 콩나물을 산 것일까? 콩나물이 필요했다면 나는 아무 콩나물이나 사서 쓰면 된다. 그러나 내가 어떤 특별한 콩나물, 강원도 청정수로 씻고 제주도의 유기농 콩으로 만든 A사의 브랜드 콩나물을 살 때, 실은 나는 콩나물 이상의 것을 산다. 이 때 그 이상의 것이 추가된 물건, 우리는 그것을 상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상식과 달리 쓸모를 가진 상품을 사서 쓰는 일은 소비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생산물을 교환하는 어느 사회 체계에서 관찰할 수 있다. 따라서 보편적으로 교환되는 것은 물건이지만, 상품은 오직 어떤 역사적 시대에만 특수하게 나타난다. 사랑하는 애인의 생일에 건네주는 생일 선물은 물건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상품이 아니다. 폴라니라면 이를 상호성의 경제에서 관찰할 수 있는 물건이라 할 것이다.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 우리 시대의 정치 경제적 기원’, 홍기빈 옮김, 길, 2009
수재민에게 적십자에서 나눠주는 생활물자는 물건이다. 그렇지만 그것도 상품이 아니다. 다시 폴라니라면 이것을 재분배의 경제에서 볼 수 있는 물건이라 할 수 있다. 슈퍼마켓에서 내가 돈을 주고 산 코카콜라 한 병도 물건이다. 그러나 그것은 완벽히 진짜 상품이다. 폴라니라면 이를 시장경제에 나타나는 물건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상품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크게 대수롭지 않게 넘기지만 마르크스는 저 유명한 ‘자본’이란 책은 상품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자본’ 1권의 제 1장 제 1절 “상품의 두 요소: 사용가치와 가치(가치 실체와 가치 크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부는 하나의 ‘거대한 상품 집적’으로 나타나고, 하나하나의 상품은 이러한 부의 기본 형태로 나타나다. 그래서 우리의 연구는 상품의 분석으로부터 시작한다.” 카를 마르크스, ‘자본 I-1’, 강신준 옮김, 2008, 길, 87쪽
그런데 이런 발언은 조금만 주의해 들여다보면 당혹스럽게 들리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를 분석하기 위해 출발점이 될 만한 것이 왜 노동, 자본, 화폐, 이윤 같은 것이어서는 안 될 이유는 뭐란 말인가. 우리는 흔하게 “자본주의는 돈이 돈을 낳는 세상이야”라고 말하거나 아니면 “자본주의는 뭐니 뭐니 해도 이윤을 최고로 여기는 세상이지”라고 말하곤 한다. 그렇다면 돈이나 이윤이 분석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마르크스는 천연덕스럽게 “부는 하나의 ‘거대한 상품 집적’으로 나타나고, 하나하나의 상품은 이러한 부의 기본 형태로 나타나다. 그래서 우리의 연구는 상품의 분석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넘어간다. 의식적으로 자신이 왜 이런 순서로 분석을 하고 글을 쓰는지 생색을 내곤 했던 마르크스치고는 꽤 그답지 않은 서술인 셈이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여러 서로 다른 생각이 출현할 수 있다. 또 실제로 그렇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복잡한 이야기이니까 건너뛰자.
아무튼 문제는 상품이 왜 출발점이냐는 것이다. 가장 간단한 답은 ‘외양’ 혹은 ‘현상’이란 낱말에서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는 어떻게든 현상한다. 자본주의는 추상적인 현실의 법칙이어서 내가 직접 느끼고 볼 수 있는 것일 수 없다. 그렇지만 그렇다면 그것은 경험할 수 있는 현상을 넘어 관념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무엇인가. 마르크스에게서 독특한 점은 법칙을 추상적인 본질의 편에 놓고 현상은 그것의 외피(外皮) 혹은 기만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자신의 본질을 은폐하기 위하여 외투를 걸치고 환상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물건 혹은 사물이 상품으로 지각되고 교환되는 순간, 이 가장 흔해빠지고 평범한 대상은 이미 본질 자체가 현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탓에 상품은 이미 본질의 현상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현상한다는 말 자체가 중요한 단절을 도입한다는 것이다.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말과 사물 사이에 혹은 지식과 현실, 이미지와 세계 사이에 놓인 관계가 근대로 접어들며 유사(resemblance, 類似)에서 표상(representation, 表象)으로 전환되었다고 말한다. 미셀 푸코, ‘말과 사물’, 이광래 옮김, 민음사, 1987
말 혹은 지식이 그것이 가리키거나 의미한다고 말하는 세계와 닮았거나 일치한다고 말하기 위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유사하다는 점에 따르지 않고 표상한다는 것을 통해 결정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사와 표상(적 동일성)이란 뭐가 다른가 말할 때 사람들은 흔히 이런 비유를 든다. 호두는 뇌와 모양이 닮았기 때문에 뇌에 좋은 음식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유사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리바이스 청바지 한 벌과 한 상자의 코카 콜라가 같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이 같은 가치를 같기 때문에 같다고 말한다. 그것은 같은 가격을 갖기 때문에 동일한 것으로 표상된다. 푸코가 말하듯이 ‘근대’는 표상의 시대이다. 푸코는 주로 담론의 고고학이란 점에서 유사와 표상의 관계를 다룬다. 이미지의 고고학이란 측면에서 유사와 표상의 관계에 대해서는 일단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Jen Webb, Understanding representation, London & LA, Sage, 2009

그렇다면 푸코가 말하는 표상하기는 방금 마르크스의 상품을 두고 말했던 현상하기란 것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푸코는 마르크스 역시 어떤 물건에 투여된 노동의 가치란 점을 통해 부가 어떻게 표상되는지 보려했다는 점에서 그 역시 표상의 이론가였다고 말한다. 사실 신고전파경제학자들은 마르크스를 리카도와 스미스를 뒤잇는 고전정치경제학의 이단적인 후예쯤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하는 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마르크스 모든 부는 그것에 투여된 노동을 통해 표상될 수 있다는 가정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예컨대, x량의 상품 A와 y량의 상품이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것에 투여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의 크기가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짐작과 달리 마르크스가 표상하기란 틀을 통해 부를 분석하려 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현상하기란 틀로 표상하기란 것을 비판하려 했던 것이라 생각해보면 어떨까. 표상한다는 것과 현상한다는 것은 질서의 편에서 세계를 인식하는 것과 적대의 편에서 세계를 인식하는 것 사이의 차이와도 똑같다. 부는 어떻게 표상되는가를 물음으로서 표상의 정치경제학자들이 사물들의 조화로운 교환의 세계를 꿈꾸었다면 마르크스는 표상은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이지 않을까. 그가 ‘이윤율의 경향적인 저하’니 위기(crisis)니 하는 것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도 아마 이것 아니었을까.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이는 결국 자본주의는 붕괴하게 되어있다는 예언이 아니라 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자신의 경제적 현실을 표상하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었다고 말하려 했던 것 아닐까.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란 결국 자신을 작동하기 위해 자신을 하나의 조화로운 교환의 질서로 표상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내고자 폭력을 도입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던 것이고, 그런 점에서 그는 표상의 가능성/불가능성이라는 생각을 제안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표상하기를 현상하기로 비판한 것이었다고 말할 때, 내가 생각하는 것도 바로 이런 표상의 체계를 성립하기 위한 폭력이다. 아마 이런 폭력은 최근의 금융위기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더 이상 아무런 지불수단도 될 수 없게 된 엄청난 양의 화폐를 살려내기 위하여 미국과 유럽은 엄청난 구제 금융을 퍼붓는다. 그 때 그 구제금융이란 게 바로 부의 표상으로서의 화폐가 기능하도록 하기 위해 도입된 폭력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화폐가 더 이상 부의 표상이 될 수 없을 때 자본주의는 움직이길 멈춘다. 그렇다면 화폐를 통한 부의 표상을 정상화시키기 위하여 자본은 구제금융을 퍼붓는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왜 마르크스가 상품을 통해 자본주의를 분석하려 한 것인지 이해할만 하다. 그는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표상인 상품을 다룬다. 상품이라는 것은 공통의 것, 그것의 본질을 표상한다. 물론 그것을 이전의 정치경제학자들은 노동이라고 부른다. 마르크스는 여기에서 그런 가정이 아주 웃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면 그는 노동이란 것은 어떤 본질의 현상으로 표상되기 위하여 도입되어야 하는 폭력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상품이 노동을 표상하는 것이고자 한다면 이때의 노동은 빵을 만드는 일, 기계를 조립하는 일, 셔츠를 만드는 일 같은 구체적인 일이 아니어야 한다. 그것은 마르크스를 읽어본 이라면 누구도 알듯이 ‘추상 노동’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을 추상화한다는 것은 노동의 어떤 구체적인 특성을 낱낱이 해부해 본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체 노동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체노동이란 낱낱의 노동을 모두 합쳐놓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체 노동 혹은 마르크스가 즐겨 쓰는 표현을 빌자면 사회적인 노동이란 인간의 모든 경제적 활동이 노동으로 표상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폭력이 개입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상품이란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표상한다고 간주하는 노동이 이미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노동력 상품이라고 고쳐 쓴다. 그리고 자기가 기존의 정치경제학과 다른 점은 오직 여기에서라고 말한다.
마르크스가 이렇게 말할 때, 그는 표상되는 것(노동)이 이미 표상하는 것(상품) 속에 전제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노동이 상품을 통해 표상된다고 말할 때 그 노동은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이미 그 노동은 상품으로서의 노동, 즉 표상되기를 기다리는 대상이 아니라 이미 표상되어진 것으로서의 노동, 즉 자본이 만들어내는 표상의 세계를 통해서가 아니라면 표상될 수 없는 노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표상한다는 것은 이미 표상되어지는 것이 표상하는 것 속에 포함되어 있는 모순에 봉착한다. 그리고 이 모순이 바로 마르크스가 자본의 적대적인 모순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리고 그 모순은 모든 경제적 현실을 현상하게 하는 비밀이다. 이 모순은 자본의 편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그것은 표상하기란 자신이 작동할 수 있도록 이미 그 기원에 폭력을 도입하고 또 그것을 완벽히 부인하는 것이다. 그래야 자본주의는 부를 표상하는 자신의 질서를 움직일 수 있다.
따라서 상품은 노동을 표상하지 않는다. 그것은 외려 자본을 ‘현상’한다. 그것은 노동이란 것을 지배하기 위하여, 상품, 화폐가 노동을 표상한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하여, 자본은 무엇보다 먼저 노동을 노동력이라는 상품으로 만들어놓아야 한다. 거기에는 자연스러운 것이란 하나도 없다. 여기에는 노예 무역에서 시작하여 토지에서 농민들을 쫓아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식민지를 탈취하는 것에 이르는 역사적인 폭력이 포함되어 있고, 이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표상하기를 현상하기로 전환시켰다고 말할 때, 그는 실은 노동의 표상으로서의 상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왜 자본은 상품으로 자신을 현상하는가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앞서 말했듯이 표상의 질서라는 근대의 담론을 결정적으로 공격하는 현상의 폭력이란 담론을 제안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직 그것 뿐!
그렇다면 이것이 상품의 이미지를 분석하는데 어떤 도움을 준다는 것일까. 이미 말했듯이 상품은 노동을 표상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지에 대하여 대해서도 같이 말할 수 있다. 이미지는 대상을 표상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이미지는 표상으로 다룰 수 있다는 우리 시대의 시각문화 분석의 상식과는 매우 어긋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미지가 대상을 표상한다고 기꺼이 말할 수 있다. 이미지가 대상을 표상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자신의 증명사진에 찍힌 내가 자신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고, 텔레비전에서 본 현장 사진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억지를 부리는 짓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표상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현상하기란 관점에서 생각해본다면 문제는 달라질 것이다. 무엇보다 광고 사진을 살펴볼 때 이는 더욱 그러하다.

그림 코카콜라, 김한용, 1970
그림 미국 코카콜라 광고캠페인의 사진, 1970
그럼 에두르지 말고 김한용의 사진으로 들어가자. 내가 여기에서 살펴볼 그의 광고 사진은 그를 한국 광고 사진의 역사에 등록시킨 코카콜라 광고 사진이다.
“‘오직 그것 뿐!’으로 대표되는 코카콜라 광고(1970)는 한국 광고의 현대화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한국 광고 시장에 진출한 코카콜라는 광고에 새바람을 일으켰으며, ‘It’s the real thing’이라는 영문 슬로건은 ‘산뜻한 그 맛, 오직 그것뿐!’으로 번역되어 이 시기의 표현스타일을 주도했다.”(강조는 인용자) 김병희·윤태일, ‘한국광고회사의 형성: 구술사로 고쳐 쓴 광고의 역사’, 커뮤니케이션북스, 2011, 66쪽
“코카콜라가 한국에 진출할 무렵의 광고 캠페인 테마는 ‘It’s the real thing’이었다. 우리말로는 ‘산뜻한 그 맛, 오직 그것뿐’으로 옮겨진 코카콜라의 광고가 한국광고계, 특히 크리에이티브 면에 미친 영향은 측정하기 힘들만큼 컸다. 철저한 조사에 기초하여 컨셉트를 정하고, 광고를 캠페인으로 끌고 나간다는 기본개념이 도입되었다. 광고의 아이디어를 나타내는 카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낳게 했으며, 연간 광고계획에 따라 프리젠테이션을 하고나면 변함없이 캠페인을 밀고 나간다는 새로운 광고방법은 그 당시 한국 광고계에서는 거의 없는 일이었다. 전 매체를 일관하는 광고표현, 제작비의 대담한 투입, 사진에는 김한용, 편곡을 위해서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의 작곡가 최장권, 노래에 조영남을 쓴 것 따위는 일찍이 한국 광고사상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강조는 인용자)” 신인섭·서범석, ‘한국광고사’, 나남출판, 296-7쪽
방금 인용한 것은 한국 광고의 역사를 다루는 텍스트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서술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코카콜라의 ‘상륙’이 한국 사회의 물질문화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의의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앞의 인용문에서 말하듯이 그것은 ‘크리에이티브’를 도입함으로써 광고 산업을 바꾸었다. ‘크리에이티브’란 광고산업 내부에서 상용하는 흥미로운 방언(方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크리에이티브가 광고를 생산하고 조직하는 작업공정을 조직하는 이름이든 아니면 광고란 천재적인 작가의 영감과 솜씨로 인해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자 만들어진 내러티브의 일부이든 크리에이티브란 용어를 만들어내며 광고산업을 전환시킨 미국과 영국의 광고회사들은 모두 창업주의 이름을 딴다. 데이비드 오길비, 레오 버넷에서 사치&사치에 이르는 모든 광고회사의 이름들은 ‘신화적인’ 크리에이티브의 존재를 두드러지게 한다. 광고를 이끈 영웅들의 신화적인 역사란 점에서 광고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으로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마크 턴게이트, ‘광고판: 세계 광고의 역사’, 노정휘 옮김, 이실MBA, 2009

이는 우리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다. 초창기 코카콜라 광고 크리에이티브는 이렇게 전개되었다.  1968-1969: “마시자, 코카콜라(Let’s drink, Coca-Cola)”  1970-1977: “오직 그것뿐(It’s the real thing)”  1978-1980: “즐거움을 더해주는 코카콜라(Coke adds life to)”  1981-1982: “코카콜라와 함께 웃어요(Have a Coke and a Smile)”  1983-1987: “코카콜라 그것 뿐(Coke is it)”[김병희·윤태일, 앞의 책, 67-8쪽]
또한 한국에서는 시리즈라고 불리는 이른바 캠페인 광고를 통해 광고가 제시되는 형식에서의 혁신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코카콜라 광고가 신기원을 도입했다고 말하는 것도 여기에서는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코카콜라 광고가 “한국 광고의 현대화”이자 “한국 광고사상 전례가 없던 일”이라고 역설할 때, 그것은 또한 광고 자체를 떠나 사진이란 이미지의 역사에서도 큰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코카콜라’와 ‘펩시콜라’가 각각 1968년과 1969년에 우리나라에 상륙함으로써 국내 청량음료업계는 크게는 상륙품 대 국산 ‘콜라’로, 그리고 이는 다시 ‘코카’ 대 ‘펩시’ 및 국내 기존 제조업체의 ‘칠성’ 대 ‘서울’로 각각 판도를 압축하여 경쟁을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국내에는 총 68개의 청량음료메이커가 산재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대다수의 군소업체들은 성수기 한철을 바라고 영세한 규모로 가동하고 있으나, ‘상륙’ 콜라의 국내 대 메이커에 눌려 1969년에 들어서면서 기업계 전반에 걸친 자금난의 중압으로 도산된 기업체가 많아졌다. 즉 1964년에 42개, 1966년에 48개, 1967년에 69개, 1968년에 81개까지 늘어났었던 청량음료 메이커 수가 69년에 들어 13개 업체의 도산으로 68개 업체로 줄어든 것이다.
…… 다수의 국내 생산업체 중에서도 대기업인 ‘필성’과 ‘서울’이 ‘코카’, ‘펩시’의 두 상륙품과 서로 경쟁을 하면서 시장확보를 위하여 주력하고 있다. 1968년 이전 ‘코카콜라’가 상륙하기 전에는 東邦 청량음료 주식회사의 ‘칠성’(스페시콜라)이 청량음료 판매시장을 독점하다시 했었다.
‘코카’와 ‘펩시’가 상륙하여 치열한 판매경쟁이 벌어졌던 1969년에는 ‘칠성’의 시장점거율이 대폭 후퇴하긴 하였지만 아직도 전시장의 35%를 점거하고 있어, 적어도 상륙제품 ‘콜라’보다 10%포인트 정도는 각각 앞지르고 있다. 즉 1969년 청량음료업계의 4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칠성’, ‘서울’, ‘코카’, ‘펩시’의 판매기록을 보면 ‘칠성’이 전술한 바와 같이 약 35%, ‘서울’이 10.2%, ‘코카콜라’가 25.5%, ‘펩시콜라’가 24.3%를 점하고 있고 나머지 5%는 국내 군소 ‘메이커’가 점거하고 있는 실정이다.“ ‘1970년 한국경제연감’, 전국경제인연합회, 1970, 290-1쪽
앞의 인용문에서 코카콜라는 ‘상륙품’으로 묘사된다. 수입품도 아니고 외제도 아니라 왜 상륙품일까. 나는 그것이 제법 적절한 표현이란 생각이 든다. 이미 ‘거무스레한 달콤한 액체’인 콜라란 물건은 충분히 있었다. 그와 경쟁을 벌이고도 남을 숱한 음료들 역시 있었다. 그런 점에도 코카콜라는 음료 시장을 순식간에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시장에서 구매할 수 있는 사물들의 가짓수 가운데 하나가 추가되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코카콜라는 콜라의 한 종류, 음료의 한 가지가 아니라 그 모두, 여기에서는 음료수라는 물건 혹은 사물을 상품으로 바꾸어 놓았다. 따라서 코카콜라는 다른 무엇보다 상품 중의 상품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 그 당시 코카콜라의 지역 광고 캠페인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카피였다고 알려진 “오직 그것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오직 그것 뿐”이란 사물들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이 아닐 것이다. 가장 맛있고, 가장 근사하고, 가장 좋은 무엇이라면 그것은 상품이 될 수 없다. 사물은 그것의 쓸모와 미적 가치를 사람마다 다르게 발휘한다. 아버지가 유품으로 남겨준 손목시계는 내게는 시계이기에 앞서 중요한 징표이다.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사물일 수 없다. 사물은 이처럼 구체적인 대상이다. 그러나 상품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똑같다, 아니 똑같아야 한다. 그렇지만 세상에 그런 사물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사물이 상품이 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상품은 사물로부터 해방되어 사물을 보편적인 매력의 대상으로 끌어올린다. 상품은 사물에서 사물로서의 특성을 빼앗고 사물 이상의 무엇을 각인한다. 그렇게 새겨진 무엇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무엇이 좋을까?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에는 “오직 그것 뿐”이란 말보다 더 적합한 말도 없을 것이다. 실은 그 말은 아무 것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그것일 뿐이다. 오직 그 것뿐, 혹은 영어의 카피처럼 바로 그 “진짜(the real thing)”야말로 상품이라는 것을 표상하기 위해 예약된 표현이 아닐까. 이 때 사진은 물건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다. 사진에서 등장하는 사물의 이미지는 그 사물을 상품으로 현상하게 한다. 더불어 사진 속의 사물도 상품으로 된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원근법적인 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1970년 코카콜라 광고가 등장하면서 상품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또한 본격적인 ‘소비자’ 즉 사물을 구입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구매하는 소비자가 등장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물이 상품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어떤 음료가 내게 “바로 그것”이 될 수 있게끔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를 위해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것이 바로 사진적인 이미지일 것이다. 알다시피 내가 마시는 맥주는 이미 사진에서 본 맥주이다. 내가 입고 있는 청바지는 이미 사진으로 본 청바지이다. 내가 구입한 자동차는 당연한 말이지만 지겹도록 사진으로 이미 본 자동차이다. 따라서 사진으로 이미 본 적이 없는 상품이 아니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한 번도 사진으로 찍혀 본 적이 없는 상품도 부지기수이다. 그러나 설령 그것의 사진을 본 적이 없더라도, 나는 이미 그것을 사진 속에서 본 듯한 대상처럼 대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이미 사진과 함께 있는 상품이다.
“코카콜라의 광고 캠페인은 한국 시장에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려 한국 광고계에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함과 동시에 코리에이티브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코카콜라 캠페인에는 특유한 방법이 도입되었다. 우선 철저한 조사에 기초해 콘셉트를 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수많은 캠페인 주제를 개발한 다음, 소비자조사를 바탕으로 조사에 나타는 결과를 보완해주는 캠페인 주제를 결정해 나가는 방식이었다. 이는 당시 국내에는 처음으로 시도했던 방법이었으며, 아이디어 위주로 표현되던 기존의 광고방식에서 탈피해 소비자에게 광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광고계에는 연간 광고계획에 따라 한 가지 광고 콘셉트를 꾸준히 끌고 나가는 캠페인 효과의 중요성을 알려주었다. 또한 모든 매체에 일관되게 광고표현을 한다든가, 제작비를 대담하게 투입하게 한다는 가하는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접근방법을 시도했다.(강조는 인용자)” 김병희·윤태일, 앞의 책, 68쪽
코카콜라 광고에서 상품의 출현을 볼 수 있다는 점은 지금 인용한 글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아이디어 위주로 표현되던 기존의 광고방식에서 탈피해 소비자에게 광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었다”는 표현이 눈에 띈다. 광고의 대상이 된 상품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보면 이런 전환은 더욱 두드러진다. 주요 광고주 10개를 추렸을 때 대부분을 차지하던 제약회사는 1970년대가 지나면서 고작 하나 정도만 남기고 사라진다. 신인섭·서범석, 앞의 308-11쪽

그리고 광고 시장은 식료품과 전기제품들 중심으로 대체된다. 그것은 “알리기만 하면 팔리던 시대에서 효율적으로 알려야 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앞의 책, 396쪽
의약품은 사물로서의 가치에 갇혀 있는 미숙한 상품이다. 그것은 질환이라는 분명하고 특정한 쓸모의 세계에 갇혀있다는 점에서 아직 상품으로서의 자리에 이르지 못한다. 또한 그것은 효능이라는 정보를 전달하고자 하지 코카콜라처럼 모두를 위한 ‘그것’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의약품 광고가 몰락하고 코카콜라로 상징되는 식료품 광고가 광고의 세계를 석권하게 되자, 광고는 상품이라는 언어, 즉 기호(記號)를 다루는 일로 바뀐다. 그리고 상품은 사진적 표상을 통해 존재하게 되는 사물이 된다. 그것은 더 이상 사물이 아니라 특정한 상징적 가치를 가진 물건, 즉 ‘그것’이 된다. 거무스레한 달콤한 물이 ‘오직 그것 뿐’이 되듯이 말이다.
최선의 이미지, 상품의 이미지
김한용은 아직도 “김한용 사진연구소”를 운영한다. 그곳은 아마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진연구소일 것이다. “사진연구소”는 한국 사진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낱말이다. 그것은 광고 사진이 등장할 때, 사진을 둘러싼 가치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조금 어렵게 말하자면 우리는 광고 사진과 더불어 사진의 표상적인 가치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 사진연구소는 사진을 연구하는 곳일까? 물론 아니다. 재미나게도 사진연구소는 광고사진을 찍는 곳을 가리키는 독특한 이름이었다.
“사진 스튜디오는 벌써 1950년대에도 있었고 1960년대에도 있었고 상당히 오래됐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뭐라 그럴까 광고 사진을 본격적으로 취급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몇 집 안돼요. 그런 데는 오히려 사진연구소 이런 간판을 붙여가지고 일을 했지요 …… 당시에 원로인 김한용 사진연구소라든지, 미대 출신으로 유명한 사진연구소 하는 사람들 몇 명이 있었어요.” 김병희·윤태일, 169-70쪽
앞의 인용문을 보면 광고 사진을 하는 곳이 사진스튜디오(더 익숙한 말을 찾자면 사진관 혹은 사장(寫場)일 것이다)가 아니라 사진연구소란 간판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사진스튜디오와 사진연구소는 다른 사진을 찍는 곳이다. 그렇다면 두 곳에서 나오는 사진들은 어디가 다른 것일까. 인물 사진과 광고 사진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싱거울 뿐 더러 그럴싸하지도 않은 답일 것이다. 인물 사진이 없는 광고사진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광고에서의 인물 사진은 전연 다른 인물 사진을 생산한다. 나는 사진스튜티오와 사진연구소의 차이는 바로 이미지로서 사진의 가치, 사진의 표상적 가치와 관련한 차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연구소는 광고사진을 찍지만 그것은 또한 사진에 새로운 표상적 가치를 끼워 넣는다. 그 가치란 바로 사진에서 표상되는 대상을 “오직 바로 그것”으로 ‘실체 변환’(transsubstantiation)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가 김한용 씨와 제품 하나를 찍는데 스물다섯 번을 찍었다니까요. 하루건너 매일 저녁마다 찍으면서 코카콜라 프로덕트가 어떻게 찍어야 잘 나오는지를 제가 터득한 거죠. 매일 찍어 현상해 보고, 제가 병 뒤에 다 페인트질까지 했다니까요. 그렇게까지 해서 찍었어요. 김병희·윤태일, 237쪽
“코카콜라 업무에 아직 익숙하기도 전인 1970년 새해 벽두에 홍콩으로부터 스틸 CF 제작할 카메라맨을 파견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당시 우리나라 정(靜) 사진계에는 김한용 씨, 이윤정 씨, 한영수 씨 등 원로들이 주로 활약하고 있었는데 사진의 내용이 정적인 것이든 동적인 것이든 하나같이 4X5 대형 카메라를 받쳐놓고 모델에게 움직이는 동작을 그럴 듯하게 시킨 후 ‘움직이지 말고, 하나 두울 셋-찰칵’하고 찍는 것이 고작이었다. 초점이 정확하게 맞아 있는지는 사전과 사후에 결과물을 놓고 확대경을 들고 확인해야 가능했다.” 윤석태, 2001, 56-8쪽
그림 유한킴벌리 코텍스 광고 1973년
그림 4 리처드 아베돈(Richard Avedon)이 촬영한 <하퍼스 바자 Harper's Bazaar>, 1955년 6월호에 게재된 사진
이런 이야기는 광고 사진을 제작하는 과정에 담긴 노고에 관하여 말해주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실은 더 이상 사진적 이미지를 제작하는 일이 전같지 않게 되었을 표지하는 이야기로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광고 사진에서 최고의 컷을 얻는 일은 사진스튜디오에서 인물사진을 찍을 때 최선의 사진적인 이미지를 얻는 일과 사뭇 다른 일이지 않았을까. 따라서 ‘사진연구소’에서 사진을 뽑아내는 일이 더 복잡하고 정교한 솜씨를 요하는 일이 된 것이었다기보다는, 아마 ‘연구’가 필요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연구’란 말이 광고 사진에서의 사진, 그 사진의 표상적 가치를 생산하는 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광고 사진은 그래픽을 중심으로 조직된 이미지, 즉 그래픽의 연장으로서의 사진일 수도 있다. 이때의 사진은 그래픽의 레이아웃과 가장 잘 어울릴 수 있어야 하고 또 그 일부이기도 하여야 한다. 그래서 초기 광고 사진은 회화나 그래픽과 동일한 표상적 가치를 가진 대상으로 다루어진다. 이를테면 그림 3과 그림 4를 보자. 1973년 유한킴벌리의 생리대 코텍스 광고에서 우리가 보는 사진 이미지는 실은 화면의 기하학적인 구성에 따른다. 즉 그것은 곁에 놓인 문자 텍스트와 함께 그래픽적인 레이아웃을 위해 이바지하는 사진이 된다. 이때의 사진은 사진 이미지 단독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이는 리처드 아베돈(Richard Avedon)이 찍은 그림 4의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다. 이 사진은 광고의 역사를 서술할 때 흔히 아트디렉터의 전설이라고 말하는 알렉시 브로드비치(Alexey Brodovitch)가 편집한 <하퍼스 바자 Harper's Bazar>의 광고에 등장하는 사진이다. 이 때 이 광고 속에서의 사진은 전적으로 그래픽에 가까운 이미지처럼 보인다. 따라서 그것은 이후의 광고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전연 다른 표상적 가치를 가진다. 이 사진은 그래픽이라는 이미지 구성 원리에 종속된 채 자신의 표상적 가치를 한정한다.
그러나 이미 그림1과 그림2에서 보았듯, 미국에서의 코카콜라 광고 캠페인과 김한용의 광고 사진에서 보는 코카콜라는 더 이상 이미지가 놓여있는 표면의 구성, 즉 그래픽적인 이미지의 구속에서 벗어나 있는 듯 보인다. 여기에서 사진은 사진 이미지 그 자체로서 말을 건넨다. 물론 초기 텔레비전 광고 역시 이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초기 텔레비전 광고에서 동영상은 사진의 연속체나 슬라이드처럼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물론이려니와 한국에서도 초기의 텔레비전 광고는 대개 슬라이드쇼를 조직하는 것 이상을 넘어서지 않았다. 앞서 인용한 글에서 광고 사진가를 “정(靜) 사진”이라고 서술할 때, 그것이 스틸 사진에 대한 한국의 지방적인 번역이기도 하겠지만 또한 그것은 사진을 어떻게 지각하고 체험하는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텔레비전 광고에서 보게 된 사진 이미지는 아직 동영상을 통해 표상되는 사진 이미지로서의 자율적인 표상적 가치를 획득하지 못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불연속적인 전환은 컬러텔레비전이 출현하고 무엇보다 MTV가 등장하게 되면서, 비슷한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둘러싼 광고 이미지 제작자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새로운 매체 형태에 부합하는 기술적인 적응이나 변화를 보여주는 이야기로 들을 것이 아니라 광고에서 사진의 표상적 가치를 규정하기 위하여 그들이 무엇을 하였는지 헤아려 보아야 옳을 것이다.

그림 광고 사진 속의 윤정희, 김한용 사진

그런데 김한용이 코카콜라 사진을 통해서 보여준 “오직 그것 뿐”으로서의 사진, 즉 상품적 이미지로서의 사진이 무엇을 뜻하는지 헤아릴 수 있는 또 다른 사례는 인물 사진일지도 모른다. 인물 이미지가 어떻게 변천하였는지를 풀이하는 손쉬운 방법은 아마 관상학에서 골상학을 거쳐 사진적 도상학으로 이어지는 변천을 떠올려보는 것이지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관상쟁이가 얼굴을 읽는 방법과 광고사진가가 얼굴을 읽는 방법이 같을 리 만무할 것이다. 현대 소설이 인물의 캐릭터를 주조(鑄造)할 때, 즉 그가 악인이거나 범인임을 독자에게 알려주고자 할 때, 소설은 인물의 얼굴 인상을 채용한다. 그것은 관상학적인 지식을 통해 인물의 낯과 그의 인품 즉 캐릭터를 상관시킨다. 예컨대 움베르토 에코가 <얼굴의 언어>란 글에서 “음침하게 충혈된 눈, 튀어나온 턱, 납작코, 크고 뾰족한 송곳니, 땀에 절은 뻣뻣한 턱수염을 한 사내에게 지금까지 저축한 돈을 맡기고 싶지 않다는 감정을 어떻게 억누를 수 있겠는가” 움베르토 에코, ‘얼굴의 언어’, ‘예술과 광고’. 김효정 옮김, 열린책들, 2009, 69쪽
라고 말할 때, 그는 얼굴 이미지는 절대 투명하지 않음을 일러준다. 다시 말해 그는 얼굴이란 항상 어떤 담론을 통해 매개된 채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말한다.
이런 점은 김한용의 주요한 업적이라고 할 인물 사진보다 더 두드러진 것은 없을 것이다. 김한용이 찍은 인물 사진은 상품이 된 인물을 보여준다. 그것은 사진에서 표상하는 개인을 지운다. 그의 사진은 엄앵란을, 윤정희를, 유지인을 보여주지만 실은 그가 보여주는 것은 각 개인들의 인품도 개성(personality)도 아니다. 그의 인물 사진은 상품의 이미지를 표상하는 사진처럼 상품화된 인격으로서의 인물을 표상한다. 아마 그런 인물 사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한국에서 광고를 소비하는 독특한 매체였던 달력을 통해 볼 수 있다.
그림 대한석유공사 1969년 달력, 김한용

그림 코카콜라 1971년 달력, 김한용

“70년대 우리나라 광고산업은 소비자 서비스 측면에서 캘린더의 비중이 의외로 높은 편이어서 광고주마다 경쟁적으로 새로운 캘린더를 제작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코카콜라 내에서도 판매상이나 소비자용으로 캘린더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계절별로 CF용으로 촬영된 6X6 스틸 필름 중에서 두 달에 한 장씩 총 6매의 캘린더에 24장의 사진을 골라 추천했다.” 김병희·윤태일, 70쪽
앞의 코카콜라 달력 광고 제작에 관한 회고에서 보듯이 달력 제작은 광고 산업 자체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또한 이는 대중이 사진을 소비하는 방식에서의 전환을 가져왔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그 때 사진을 전유하는 방식에서의 전환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인물 사진을 소비하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점일 것이다. 이는 극장에서 진열된 영화 스틸 사진이 배역이나 개성적인 개인이 아니라 ‘스타’라는 독특한 인물(figure)을 창조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도 달력 사진의 도상 속에서 살아 숨쉬는 이 독특한 인물 사진의 사진적 미학은 실은 ‘상품-얼굴’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상품의 이미지로서의 사진이 그러한 것처럼 육체의 일부로부터 해방된 얼굴을 창출하였을 것이다.
맺음말에 대신하여
장 보드리야르는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라는 악명 높은 저작에서 ‘생산물’이 존재하던 사회에서 ‘사물’이 존재하는 사회, 다시 말해 “사물의 의미목적성, 전언(傳言) 및 기호로서의 지위”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 것은 바로 바우하우스였으며 그 때문에 ‘물건의 혁명’에 관한 연대를 논리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바우하우스로부터이다”고 주장하였다. 장 보드리야르, “디자인과 혁명 또는 정치경제학의 단계적 확대”,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 이규현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2 211-2쪽

여기에서 그가 생산물과 사물이라고 칭하는 각각의 낱말을 우리는 물건에서 상품이라고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신화적인 슬로건을 통해 기억된다. 그 때 그들이 그 슬로건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디자인을 위한 하나의 목표를 내거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실은 디자인 자체를 창립하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때까지 전연 양립할 수 없었던 모든 물건들을 등가화(等價化)시킨다. 스푼과 의자, 양탄자, 부엌 벽지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아마 그 때까지 이런 물음을 던지는 이들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우하우스는 그것을 모두 기능이라는 점에서 똑같은 값을 지닌 물건으로 간주하였다. 그것은 부엌의 사물, 요즘말로 키친웨어(kitchen ware)라는 물건의 집합에 속한 등질적인 사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엌에 속한 사물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공통의 기능에 따라 공통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 그리고 스푼과 식탁과 접시, 의자는 동일한 형태를 취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따라서 바우하우스는 물건을 표상하는 새로운 지평을 설립하였다. 그런데 이는 모든 물건을 상품으로서 등가화하는 자본주의가 존재하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일상적인 삶의 물건들을 상품으로 표상하는 세계가 도래함으로써 있을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바우하우스의 실험은 또한 동시에 이미지로서의 상품의 세계, 엄밀한 의미에서의 소비사회가 출현했음을 알리는 신호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진에서도 똑같이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김한용의 사진이 한국 자본주의 물질문화에서 수행한 역할 역시 이러한 것 아니었을까. 그는 구체적인 현실의 대상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가치, 여기에서는 상품으로서, 상품과 동등한 얼굴로서의 이미지를 표상하는 사진을 생산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실은 김한용의 사진을 사진의 역사적 연대기 속에 가두는 것은 그의 사진이 만들어낸 효력을 억압하거나 망각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그의 사진을 한국 자본주의 물질문화의 역사 속에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 이때 사진은 물질문화의 한 성분이 된다. 그것은 사물이 된 상품과 더불어, 추상적인 아름다움의 도상이 되어버린 얼굴과 더불어, 특정한 형태를 취하게 디자인된 물건과 더불어, 상품을 수식하고 표현하기 위하여 자신의 어법을 수정하게 된 언어와 더불어, 함께 이야기되어야 한다. 사진은 고독하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김한용의 사진은 그러하다. 한국 자본주의 물질문화의 궤적과 함께 한 사진이며 또한 그것을 증언하는 사진이기에, 그의 사진은 한국 현대 자본주의의 중요한 기록이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사진 이미지의 역사 속에서 생생하게 존재한다. ❍
_김한용 사진전을 위해 쓴 글. 일부 그림은 제외. 아직 미출간 원고이므로 글에서의 인용은 자제!

<모래>에 대한 몇 가지 생각

The Field – A Paw in My Face

뒤척이며 고백하는 이야기를 엿듣는 기분이 쾌적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모래>가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모래>는 ‘대치동 은마아파트’에서 성장한 여성 감독의 자술서이다. 감독은 반목하거나 아니면 무심했던 아버지의 세계를 헤쳐 보는 딸이다.
그녀는 대치동 은마아파트에 살고 있고, 꾀죄죄하게 영락한 아파트에서 얼마라도 더 건지겠다고 버티는 부모님을 납득하기 어려워한다. 그녀는 진보적인 당파를 지지하고 아버지는 열성 여당 지지자이다. 그러나 그 여당은 정치적 신의를 바치는 정당이라서 지지하는 당이 아니다. 악착같이 살아 마련한 유일한 삶의 자산인 아파트의 값을 지켜주는 수호성인인 탓에 여당은 아버지의 당파이다. 물론 지배 당파는 항상 그렇게 지지를 동원하지만 말이다. 반면 맏딸인 감독은 배우겠다는 것이라면 두 말 없이 밀어줘 대학원까지 보내놓았더니 취미 생활로나 삼았을 영화를 자신의 업으로 삼고 있는 나쁜 딸이다.
그렇게 살았던 한 가족이 있다. 대치동 은마아파트에서 가족이란 인연으로 흩어지지도 외면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는 가족 말이다. 그리고 그 가족은 대치동을 떠난다.
누구는 부동산 공화국이라고 혀를 차며 개탄하고, 누구는 토건 국가라며 진저리를 치는 이 나라에서, 치부의 가장 안전한 수단은 뭐니 뭐니 해도 강남 아파트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서글프게도 이는 틀린 말이 아니다. 그것은 인플레이션과 상관없이 안전하게 제 값을 지켜주기에 은행에 맡겨두는 돈보다 안전하고 사업을 하는 것보다 믿음직스럽다. 펀드니 주식이니 설쳐도 그것은 언제나 생각하기도 싫은 리스크란 이름의 유령을 동반하고 다니지만, 그래도 강남의 아파트는 아직은 리스크 제로이다. 강남 아파트는 사회적인 쓸모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가치가 있다는 믿음 때문에 가치를 유지하는, 한국 자본주의의 가장 완벽한 물신이다.
<모래>의 주인공일 아버지는 퇴직 후 옷 공장을 운영하고 어머니는 남대문에서 그 옷을 판다. 아마 사업 수완이 있거나 했다면 덤볐을 리 만무한 사양 산업에, 부모는 뛰어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그것은 매 달 꼬박 갚아야 하는 빚만 안겨준다. 따라서 다시 아파트이다. 어쩌다 목돈이 생겨 욕심을 부려 빚을 좀 더 얹어 장만한 유일한 미래의 보증일 그 아파트 말이다. 해결책은 안전한 생존의 모든 약속인 아파트를 처분하는 것이지만 그러기 어렵다.
어쩌다 목돈을 쥐게 되어 강남으로 건너 간 이들이 모여 사는 곳, 아마 그런 곳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 대치동의 은마아파트일 것이다. 중동에서 공사장에서 일을 하였고, 다시 서울에서 답십리에서 아파트를 짓고, 집 장사를 한다는 게 무슨 짓인지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가족을 위해 부모님은 강남의 아파트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결국 퇴장한다.
<모래>는 그렇게 은마아파트에 살게 된 그러나 그곳을 떠나게 되어버린 한 가족에 관한 초상을 그린다. 아파트 한 채가 좀 더 나은 형편으로 상승할 수 있는 모든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기만일 뿐이다. 마음만 먹으면 사고 팔 수 있는 자산에 불과한 아파트를 소유한 자들과 모든 부는 아파트에서 나올 것이라고 믿은 채 아파트 한 채에 인생을 걸게 된 이들 사이에는 닮은 점이라곤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망설이게 된다. 강남에 입성하였지만 결국 실패를 한 채, 아니 그 물신의 유혹에서 마침내 풀려난 채 강북으로 떠나게 된 가족의 초상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을지 말이다.
그런데 <모래>를 자전(自傳) 다큐멘터리로 읽는 것은 아무래도 빗나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모래>는 아무런 자술도 하지 않는다. 아니 자술을 피하려 애쓴다고 해야 옳을지도 모르겠다. 외려 자술하는 것은 은마아파트 그 자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길지 않은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시정이 넘치는 부분을 찾는다면, 혹은 감독이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가족에 대한 느낌을 온전히 드러내는 주관적인 장면을 찾는다면, 내 생각엔 그것은 쓸쓸하게 부식하고 있는 아파트의 모습을 담은 롱 테이크들이지 않을까 싶다.
이 얼굴 없는 장면들은 다큐멘터리에서이든 혹은 아니면 극영화에서이든 낯선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는 클리셰(cliché)라고 불러도 좋을 장면들일 것이다. 그런 장면들은 전개되는 이야기를 쪼개고 나눠주는 삽입구일 수도 있고 영화에서 지속되는 정조를 상기하기 위해 수사적인 반복 어구처럼 사용될 수도 있다.
<모래>에서도 그런 관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장면들이 이어진다. 창을 통해서 바라본 아파트 바깥의 풍경이거나 달리는 차창에서 바라본 서울의 풍경 혹은 미국 뉴욕의 마천루 혹은 차창에서 바라본 풍경,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투여된 분주하고 화려한 욕망과는 아무런 상관을 찾을 수 없는 낡을 대로 낡은 아파트의 풍경, 이런 것이 이 영화의 주인공일 것이다.
그러므로 <모래>라는 영화 속에 어쩌면 과하다 싶으리만치 자주 등장하는 이 삽입어구에 대하여 마땅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야기의 흐름을 중재하기 위해 등장하는 어떤 서사적인 매듭일까. 나는 그것이 마치 문장 속의 말줄임표처럼 카메라가 어떤 생략을 표시하는 몸짓을 취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객관적인 이미지를 찾지 못한 채 거기에 시야 속으로 들어온 화면일 것이다.
감독은 차마 말을 다 못하거나 아니면 말을 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런 부정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화면은 감독에게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모래>가 아름답다. 그것은 은마아파트에 살았다 떠나게 된 어느 가족의 사회사를 그려내는데 급급하지 않으려 하는 흔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화해하고자 다가서는 윤리적인 대상이 가족일 때, 과연 누가 그것에 완벽한 말을 가지고 있을까. 감독은 범람하는 자전적인 다큐멘터리와 모든 것을 안다는 듯 너스레를 떠는 TV 속의 감상적 휴먼 다큐들과 거리를 둔다. 거기에서 우리가 듣고 보는 것은 황폐하고 불임일 뿐인 수다일 뿐이다.
그러나 <모래>는 ‘차마’ 혹은 ‘미처’ 같은 수사적인 말들을 화면으로 옮긴다. 어떤 이야기에서 진실이란 이런 세부의 수사법에 있기 마련이다.

쾌락의 횡포를 넘어

Wu Meng Chen
쾌락의 횡포를 넘어 : 오종의 초기 영화를 읽는 한 가지 방식
<사랑의 추억>, 그 이전과 이후
오종의 영화 이력은 매우 복잡하고 더불어 균질적이지도 않다. 언제나 그의 뒤를 쫓아다닌 도발꾼, 악동, 패덕자 등의 꼬리표는 적어도 <사랑의 추억> 이후엔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키치-캠프적인 감수성을 화려하게 내보인 <8명의 여인들>을 뺀다면, <사랑의 추억> 이후 <타임 투 리브>에 이르기까지 그가 발표한 신작들은 전작들과 매우 먼 거리에 놓여 있는 듯이 보인다. 부르주아적인 성도덕을 무책임하게 위반하고 조롱했던 인습파괴자로 오인 받았던 그의 행적은, 이제 그런 이유로 그를 숭배했던 팬들을 당황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는 도발과 논쟁을 위한 감독으로부터 은퇴하여 마치 관조적인 현자(賢者)같은 모습으로 탈바꿈한 듯 보이기까지 한다. “뉴 퀴어 시네마”의 그 어떤 과격한 작품 못잖은 도발을 일삼던 감독이, 그 스스로의 표현을 빌자면 “백퍼센트 헤테로섹슈얼” 영화로 갔으며, 스타일 역시 매우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사랑의 추억>과 이후의 작품들은 마치 누벨 바그 이후 프랑스 영화의 주요한 흐름들에 근접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를 조롱하거나 거부했던 평론가들마저 일제히 그를 환영하며 그를 향한 반감을 뉘우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프랑스 영화에 관한 많은 텍스트들은 그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제부터 오종은 90년대 이후의 가장 중요한 감독으로 꼽히게 될 것이다. 어쨌든 오종이 몇 년 사이에 건너뛴 거리는 컬트 무비의 악당인 존 워터스의 영화와 유럽의 가장 탁월한 작가인 샹탈 애커만의 영화 사이에 놓인 거리에 가까울 정도이다. 존 워터스의 세계는 온갖 도착자들이 등장하는 세계이고, 그 세계는 그 인물들의 모습 자체만으로도 직접적으로 의인화되는 선명한 패덕의 세계일 것이다. 반면 샹탈 애커만의 세계는 인물에게 부여된 어떤 정체성(주부, 여학생 따위)으로부터도 물러나, 탈인격화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인물들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민감하고 미묘한 감정의 세계이다. 오종은 그와 흡사한 두 세계를 건너뛰며 자신의 영화적 이력을 전개하였다. 그 거리는 너무나 멀고 그 거리를 종주한 것은 매우 큰 단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여기에 모인 오종의 작품들은 그의 영화의 한 단계를 집약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아버지의 영화
그렇다면 그토록 서로 다른 세계로 나아가며 오종은 무엇을 하였던 것일까. 조금 도식적인 논리를 들이밀자면, 어쩌면 오종의 지금까지의 행적은, 마치 그의 초기 단편 중의 하나인 <작은 죽음>에서 언급한 어느 사진작가의 초상을 되풀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서 그는 아버지의 눈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발버둥 치던, 그러나 다시 그 아버지를 자신의 눈길 아래에 놓으면서 화해하는, 어느 사진작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것이 완곡한 방식으로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믿을 근거가 있다. 그가 인터뷰에서 자주 언급하듯 자신이 영화감독이 되도록 하였던 “아버지의 영화”를 향한 반목과 이 단편의 이야기는 의미심장하게 대응한다. 오종은 인터뷰 자리에서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홈 무비용 소형 카메라로 가족들을 찍었고, 자신은 언제나 그 영화가 볼품없어 불만이었다고 곧잘 말하곤 하였다. 그리고 급기야 자신이 직접 영화를 찍겠다고 결심한 후 카메라를 만지기 시작했을 때, 그것이 감히 말하기 어렵던 것을 말할 수 있도록 하는 야릇한 쾌감과 권력을 준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는 아버지를 향해 다시 카메라를 돌리고, 아버지의 영화를 향해 조롱을 퍼붓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손으로 영화를 찍게 되었을 때, 그것은 카메라의 눈길로 자신을 지배하던 아버지의 권력에 도전한 것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갓난 시절 찍힌 자신의 사진을 보며 그를 흉물스럽다고 모욕하던 아버지 때문에 정신적인 외상(外傷)을 얻은 아들이 병상의 아버지를 찍을 때, 그가 얻는 것은 어떤 반전된 위치, 자신의 자리에서 상상하던 아버지의 권력은 아니었다. 그는 그것이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던 커다란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 그가 아버지의 자리에 위치하는 순간 그는 아버지와 동일시 하기는 커녕 이전의 자리, 즉 아버지에 반목하던 위치야말로 아버지와 동일시하던 자리임을 깨닫는다. 아버지의 시선에 자신을 놓았을 때 그는 아버지와 동일한 자리에 오르지 않는다. 자신을 통제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의 눈길을 그가 차지하게 되었을 때, 그는 그것이 자신이 상상했던 아버지와 너무나 다른 것임을 깨닫는다. 그것은 무해하고 심지어 유약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일 뿐이다. 그리고 아버지라는 은유는 오종의 초기 영화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프랑스식 뉴 퀴어시네마?
그렇다면 우리는 오종이 반목했던 아버지의 영화가 무엇인지 상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이른바 누벨 바그가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그 이후 필립 가렐이나 샹탈 애커만 등이 등장한 70년대 세대, 그리고 80년대 이후 프랑스 영화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모리스 피알라와 그의 후예들의 영화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90년대 이후 프랑스 영화의 세계는 어느 영화평론가의 적절한 표현처럼 “여러 세대의 이중인화된 단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누벨 바그 감독들은 여전히 건재하며 가장 중요한 영화적 혁신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지지와 영향 아래에서 성장한 프랑스의 영화 제도(특히 비평과 교육)와 산업이 배출한 젊은 감독들이 역시 그들과 동거하고 있다. 이런 세대적 동거는 물론 그들에게 “훌륭한 프랑스 영화감독이 된다는 것”에 대한 규범이 연속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은 “작가(auteur)”로 알려진 감독의 정체성일 수도 있고, 그것이 영향을 주는 제작 방식과 미적인 규범일 수도 있다. 비록 제한된 채널을 통해 언제나 그렇듯이 소규모의 관객들을 만나는 것이지만 프랑스 영화는 사회주의 정권의 지지를 받으며 일종의 인공호흡장치에 매달린 채 유럽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산업적 기반을 재생산하여 왔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누벨 바그 이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작가적인 영화의 생명선이었다. 그 내부에서 온전히 성장하였으며 또한 그것으로부터 자신의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오종에게, 그에 거스르고자 하는 갑갑증과 반감이 없었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우리는 오종의 영화를 프랑스 판 뉴 퀴어시네마의 흐름 속에 놓고 분석할 수도 있다. 멀리 잡아 시릴 꼴라르의 <사베지 나이트 Les Nuits Fauves>(1992)에서부터 근년의 브누와 작꼬의 <육체의 학교 L'Ecole de la chair>(1998)나 까뜨리는 코르시니의 <리허설La Répétition>(2001)에 이르는 일련의 영화들은 프랑스의 독특한 레즈비언, 게이 영화의 흐름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이 가운데 빠트릴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감독은 단연 앙드레 떼시네일 것이다. 프랑스 영화를 대표하는 거장 감독인 떼시네는 후기의 그의 대표작인 <야생 갈대 Les Roseaux sauvages>(1994)와 <도둑들 Les Voleurs>(1996) 등 작품을 통해 프랑스 레즈비언, 게이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처럼 알려졌다. 그렇지만 오종을 이러한 자리에 놓는 것은 조금 억지스러운 일이다. 어느 인터뷰 자리에서 오종이 자신의 영화를 위한 범주가 있다면 차라리 “양성애(bisexual) 영화”일 것이라며, 자신이 샌프란시스코 게이, 레즈비언 영화제에 참가했을 때 주최 측으로부터 그런 말을 함구해달라는 부탁을 들었는데 뉴욕에서는 그런 말을 해도 되냐고 농담을 한 걸 읽은 적이 있다. 물론 이는 프랑스의 레즈비언, 게이 영화들이 이미 기성의 동성애 정체성을 서술하는 영화에 전연 관심이 없으며, 외려 이성애를 벗어난 성애적 관심, 성정체성의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성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다.
따라서 영미식 “정체성 영화” 평론의 관점을 투사하여 그를 게이 영화의 계보 속에 끼워넣는 것은 그다지 온당하지 않다.(알다시피 프랑스에서는 게이란 정체성을 통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둘러싸고 동성애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그의 대표적인 초기 단편인 <섬머 드레스>에서부터 <타임 투 리브>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게이 인물들은 모두 이성인 여성과 관계를 맺는다. 심지어 그런 관계로부터 자신의 성욕을 회복하고 무기력했던 관계를 되살려 내거나(섬머 드레스) 아니면 성행위를 통해 자신의 아이를 얻음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온전히 수락한다(타임 투 리브). 파스빈더의 희곡에 바탕한 <워터 드롭스 온 더 버닝 락스>에서의 게이 커플 역시 파스빈더 영화의 게이들이 그렇듯이 게이 정체성을 대표하는 전형이거나 그것의 인격적 표현은 아니다.
“프랑스 영화”의 감독
한편 그렇다고 해서 오종의 영화를 가스파 노에(<돌이킬 수 없는>)나 얀 쿠넹(<도베르만>)같은 젊은 감독들과 나란히 놓으며 섹스와 폭력, 그리고 인습파괴의 상투적인 도식 안에 묶어버리는 것 역시 잘못이다. 어느 평론가의 가혹한 비평처럼 “포스트모던한 허섭쓰레기”와 “작가주의” 사이에서 아슬한 줄타기를 하던 오종은, 자신의 재능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고 이제 분명한 프랑스의 작가로 돌아왔다. 그러나 오종의 영화적 이력을 그의 스타일이나 주제의 변화만으로 축소시켜 바라보는 것은 하는 단견일 것이다. 그가 프랑스 영화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단순하고 명확하다. 그는 무엇보다 프랑스의 영화감독이다. 그의 출신 국적이나 그가 활동하는 곳이 프랑스여서가 아니라 그가 프랑스의 국가 영화(national cinema)의 체제와 전적으로 동행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프랑스 영화 산업이 스스로 버티기 위해 만들어 놓은 시스템의 측면에서 보자면 오종보다 더 그것과 변죽이 잘 맞는 감독도 없을 것이다. 오종은, 행여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국가 영화 장학생이라 불러야 옳다. 그는 페미스(FEMIS)로 알려진 국립영화학교를 졸업하였고, 자국의 “국민 영화(national cinema)”를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시스템을 통해 계속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그의 많은 영화를 제작한 “피델리티”는 프랑스의 감독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카날 방송국이 설립한 제작사이다. 많은 감독들이 관객 수입의 일부를 적립하여 제공하는 예산지원을 받고 그 대신 티비 판권을 방송사에 제공하고 근근이 자신들의 영화를 찍는다면, 장르 영화의 관습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일정한 흥행의 성공을 기대하면서 제작 지원을 받는 소수의 감독 가운데 하나로 발탁된 셈이다. 오종은 적어도 <사랑의 추억> 이후 “의욕과잉의 떠벌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비타협적인 작가 감독”으로서 승인을 받았고 더불어 프랑스 영화의 “자산”이자 희귀한 “돈이 되는 작가 감독”으로서의 지위를 얻었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영화와 화해한 셈이다.
쾌락의 횡포
오종은 이제 자신이 증오하고 반항했던 아버지의 영화가 결국 자신의 투사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기성 제도와의 타협이나 권위와의 화해로 풀이하는 것은 억지이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종은 B급 영화와 다양한 악취미의 영화들을 참조하고 인용하는 영화를 만들어 왔다. 그러나 그 영화들을 젊은 날의 반항으로부터 물러나 성숙한 어른으로 변신하기 위하여 지불했던 철부지같은 그러나 불가피했던 대가로 치부하며 어떤 과도기적인 작품으로 치부하는 것은 너무나 인색한 짓이다. 외려 거꾸로 우리는 그의 반항적 몸짓 속에서 오직 반항만을 보았던 것을 뉘우치며, 그가 송신하려 했던 메시지를 이제야 비로소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어쩌면 오종의 영화는 거꾸로 보아야 맞을 것이다. 즉 역순으로 연대기를 쫓아가며 그의 영화를 봄으로써, 우리는 난삽하기까지 했던 다채로운 그의 영화들이 상호 반향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오종 영화의 초기작들의 가장 중요한 경향이라 할 것이 바로 쾌락의 횡포와의 투쟁이라 생각할 때이다. 여기서 말하는 쾌락의 횡포란 말 그대로 쾌락을 억압하는 권위의 반대말이다. 2차 대전 이후, 적어도 70년대의 “성혁명” 이후 성적인 쾌락이 지닌 위치는 현저하게 바뀌었다. 성적인 쾌락은 더 이상 질서를 위하여 억압되어야 했던 제물이 아니라 거꾸로 자신의 자유를 증빙하기 위하여 의무적으로 추구해야하는 것으로 바뀌어버렸다. 그리하여 1980년대 이후 우리는 희한하게도 쾌락의 의무로부터 달아나려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보게 되었다. 이를테면 우리는 “섹스를 하지 않을 자유”를 외치는 기이한 장면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이런 추세는 곧 오종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반항적인 인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예시적인 것은 단연 <시트콤>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기괴한 장면은 식탁에서 불쑥 자신이 게이임을 커밍아웃한 아들을 향해 아버지가 보이는 태도이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충격에 휩싸이고 아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공을 들여 동성애 정체성이 정당한 것임을 장황하게 설명한다. 그는 고대 그리스에서 동성애가 널리 행해졌다는 등의 이야기를 중언부언 늘어놓는다. 따라서 이 작품에 대한 상투적인 인상, 즉 모든 것을 금지하고 쾌락을 독식했던 아버지를 살해함으로써 자신들의 성적인 자유를 되찾았다는 생각은 정반대로 뒤집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들이 정반대로 아버지의 집요한 요구, 즉 쾌락을 위하여 살라는 요구로부터 벗어나 마침내 쾌락의 횡포에서 놓여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끈덕진 쾌락의 요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하반신 불수가 되어버린 딸, 과잉성욕자라는 혐의를 인정하는 듯이 음험한 외모의 변태성욕자들을 초대하여 모임을 갖지만 그 감춰진 방에서 고작 평범하고 건전한 게임을 즐기는 아들 등, 이 영화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성욕을 추구하는 자들의 세계가 아니다. 따라서 이 영화의 종결부에서 우리가 보는 아버지의 장례의 장면은 쾌락을 추구해야하는 의무로부터 벗어난 평온한 커플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모두 짝을 이룬 채 쾌락의 의무에서 벗어난 상대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아버지의 살해
이런 점은 <크리미널 러버>에도 예외 없이 적용할 수 있다. 이 영화에 대한 우리의 피상적인 느낌은 자신의 성적인 유희와 환상을 위해 자신의 남자친구의 욕망을 조종하는 사악한 소녀와 그녀의 좌절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점은 바로 그 소년의 성적인 불능이다. 그는 자신의 여자친구와 섹스를 할 때마다 번번이 발기에 실패한다. 하지만 자신의 여자 친구의 말을 믿고 그녀를 강간했다고 믿은 동급생을 살해한 후에 그는 어느 사냥꾼으로부터 겁탈을 당한 후에 자신의 성욕을 회복한다. 이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설정은 사이코스릴러의 장르적 관습과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동화를 뒤섞은 난삽한 영화적 구성과 엉켜 더욱 혼란을 자아낸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그가 마침내 자신의 성적인 능력을 회복하고 여자친구인 앨리스와 풍족한 섹스를 나누고 그 주변으로 작은 동물들이 모여들고 배회하는 키치적인 장면은 더욱 황당하다. 그렇지만 이제 그의 영화를 되돌아볼 때 우리는 그것이 매우 인정할만한 논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원기 왕성하고 욕정적인 동급생 남자 아이를 대신해 성적으로 무능한 애인을 택한 앨리스의 선택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녀는 왜 그를 살해하자고 음모를 꾸몄을까. 또한 왜 그녀의 애인인 뤽은 왜 사냥꾼의 겁탈을 통해 성욕을 회복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는 왜 자신을 능욕한 그 사냥꾼 사내를 사랑하는 시늉을 보이는 것일까. 물론 그것을 일리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들이 모두 성욕의 만족으로부터 끈질기게 도피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욕의 추구를 강요하는 색정적인 동급생 남자아이를 죽이는 것, 상대의 성적 만족이란 부담으로부터 해방된 섹스로부터 비로소 자신의 성욕을 되찾는 것이 이들 인물의 특성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다시 사랑을 위하여
그렇다면 어쩌면 <바다를 보라>에서 예고되었으며 <사랑의 추억>에서 본격적으로 완성되는 영화들 역시 달리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앞의 두 영화들이 모두 친밀한 관계 속에 깃들어 있는 착취와 폭력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여 왔다. 물론 휴양지 해변에서 홀연 종적을 감춘 남편에게 짓눌린 채 그의 부재를 고통스럽게 애도하는 <사랑의 추억>의 마리 역시 “관계”의 문제 속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섬뜩하고 잔인한 떠돌이 여자 여행자의 출현이 불러일으키는 질식할 듯한 불안과 그녀의 잔인한 앙갚음이 도식적이라면 <사랑의 추억>은 매우 섬세하고 풍부하다. 여자의 고독과 제어할 수 없는 성적인 욕망, 그리고 그것을 이어주며 각 인물의 고통스런 변화를 보여주는 배경(주로 자연)과의 관계는 두 영화에서 모두 공통적이지만, 후자에서 오종은 간단한 이야기의 틀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곧 자신의 뮤즈가 될 샬롯 탬플링의 연기를 완벽하게 이끌어내고 그녀는 어떤 인물이 아니라 불안과 광기, 욕정과 무력감 사이의 감정을 어슬렁거린다. 그리고 관객들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잇고 그 감정들 사이의 사건을 스스로 상상하고 작성하며 그의 영화에 참여하도록 요구받는다.
따라서 우리는 오종의 영화 속에 두 가지의 경향이 혼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다를 보라> 이후 잠복하다 <사랑의 추억>을 통해 회귀한 하나의 경향과 <시트콤>에서부터 <워터 드롭스 온 버닝 락>으로 이어지는 “쾌락의 횡포”를 거부하는 또 하나의 경향이다. 물론 이 두 경향은 거리가 멀지 않다. 두 가지 모두 어떤 점에서 서로를 반향한다. 물론 여기에서 부정적인 반향의 지점은 쾌락의 횡포와 그를 거부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그는 쾌락의 의무를 비난하지만 그 방식은 그것을 예찬하던 영화의 관습을 빌어 불장난을 벌이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중요한 초기작들은 그 관습에 익숙한 관객들의 당연한 수용방식, 즉 성적인 모험과 도발을 통해 인습과 맞서 싸우는 목소리라는 인상을 되풀이하여 만들어냈다. 그러나 우리의 분석이 맞다면, 오종의 초기작들은 정반대의 목표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는 형식과의 작위적인 유희 그리고 더 이상 아무런 전복의 효과도 일으키지 않는 충격 효과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실패의 이면에 바로 쾌락의 횡포를 향한 그의 거부가 있었다고 읽는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는 이제 자신의 영화 속에 잠재하던 가장 중요한 능력을 회복한다. 그것은 바로 쾌락의 횡포 바로 옆에 놓여있는 자리, 즉 쾌락의 짓누르는 부담으로부터 벗어나 “관계”의 영역으로, “둘이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란 물음으로 향하는 것이다. 물론 이 물음은 지금 우리가 직면한 가장 커다란 물음 가운데 하나이다. 쾌락의 횡포 아래에서 서로에게 오르가즘을 제공할 의무를 지닌 상대로 취급받았던 사랑하는 이들의 관계는 사랑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위기에 처한 사랑은 금욕적이고 낭만적인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아 올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손쉬운 유혹에 빠지지 않고 관계를 맺는다는 것에 관하여 물음을 던질 수 있고, 이제 영화들은 그런 물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런 물음을 던지는 영화의 가장 앞자리에 오종의 영화들이 서 있다. 다시, 사랑을 위하여, 그러나 쾌락의 횡포에 속박되지 않은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관하여, 오종은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그 물음에 이르기 위하여 그는 자신의 영화들을 찍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소모적인 몸짓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유혹에 빠졌던 방식을 취하지 않고 또한 그 물음에 이를 길 역시 없기 때문이다. 즉 그는 도착적인 아버지이긴 하지만 그 아버지를 거부하는 몸짓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찾았던 것이다. 따라서 오종의 초기작들은 상처로 가득 찼지만 또한 우리 시대의 영화가 어떤 물음을 향해 나아가기 위하여 회피할 수 없는 길을 걸어온 영화들로 볼 충분한 근거가 있다. ●

<丙戌年>을 위한 슬라이드

Yu Dong Ling
Yu Dong Ling
Yu Dong Ling
Yu Dong Ling
Yu Dong Ling
Yu Dong Ling
Yu Dong Ling

중국 현대미술의 작가인 유동링의 작업입니다.
때늦은 것이긴 하지만 개의 해를 위한 송가로
적절한 야유인 듯 하여 올려봅니다.
조용한 감상을 위해 짖지 않기! …:)
시간이 나신다면 포스트-사회주의의
처량한 말로에 관하여 3초 이상 생각해 보기!
마오 동지. 제가 다 미안합니다.
(일전 홍콩에서 들른 벼룩시장에서 전 미친듯이
모택동 기념품을 샀습니다. 당신의 작은 붉은 책과
당신의 배지와 사기로 만든 컵과 당신을 책을 흔드는
작은 여성투사가 있는 탁상시계와 당신의 낯이 새겨진
작은 접시를. 그래서 어느 쇼핑퀸으로부터 졸지에
마오 쇼핑 퀸으로 낙인찍혔습니다. 말인즉슨 맞지요.
저는 당신을 쇼핑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에 대한 물신주의로라도
당신의 文化革命에 대한 저의 믿음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영면이 안될 당신을 위하여
그러나 사유하는 미술가가 있다는 기쁜 전갈, 드립니다.
광기의 시대로 규탄하는 당신의 시대를 위해 마련된
끔찍한 정경은 붉은 책을 흔드는 홍위병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을 규탄하는 자들의 세계는
애완견을 안고 돈다발을 흔드는 자들의 세계입니다.
이 품위 없고 멍청한 세상을 향해 어느 작가가 보내는
대위법은 아주 현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중국, 그리고 당신들이 일으킨 革命,
그것이 쉬이 잊혀지지 않고 있다는 증좌입니다.
기뻐하시길…..
– 블로그를 쓰는 누구나 그렇겠지만 누가 나의 글을 읽고 있을까, 적잖이 궁금하다. 여기에 올라오는 글을 읽는 이로 내가 아는 이들은 몇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이다. 이야기를 건네면 답해 주기도 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친구이고 싶고 또한 지지받거나 거부당하길 원한다. 그것이 내가 여전히 무언가 글을 써야할 이유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디 읽었다는 기별이라도 남겨주시길…

<브로큰 플라워> 그리고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짐 자무시의 <브로큰 플라워>는 말장난같은 전작 <커피와 담배>보다는 월등히 낫다. 자신의 출세작에 대한 자기모방적인 반영에 이제는 전설이 되어도 좋을 뉴욕의 하위문화적인 파토스를 뒤섞은, 이 엉거주춤한 영화는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브로큰 플라워>에서 짐 자무시는 자신의 이력에선 조금 생소한 선택을 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적어도 풍속화를 그리는 감독은 아니다. 그런 풍속화를 그리는 솜씨에 관한 한 아마 스필버그나 하다못해 지금 유일하게 미국 영화를 밀고 나가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필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차라리 토드 솔론즈나 래리 클락이 그려내는 세밀화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냉소적인 태도보다 그는 적어도 진지하다.
짐 자무시는 이른바 “미국적 생활양식”을 조롱하고 싶었던 것일까,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동물과 의사소통을 하며 살고 있다는 과거의 여자 친구, 카르멘(제시카 랭)이나 카 레이서였던 전 남편과 사별한 후 옷장정리라는 희한한 일을 하며 먹고 사는 여자 친구(샤론 스톤), 젊은 시절 히피 생활을 하다 지금은 핑크색의 명함을 만들어 다니며 교외의 택지와 집을 팔면서 사는 부동산 중개인이 되어버린 여자 친구(프랜시스 콘레이) 등과 컴퓨터사업으로 벼락부자가 되어 유유자적하는 주인공, 돈(빌 머레이)의 지루한 삶은 기이하게 짝을 이룬다. 나는 이 영화가 우리의 삶은 이 지경까지 와버렸네, 라고 되뇌이는 듯 했다. 이를테면 <동물과 정체성 이슈>라는 책을 내고, 정신은 아니지만 동물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다는 그의 옛 여자 친구의 모습은 잃어버린 자신의 삶을 애완동물이나 물건들로 얼마든지 대신할 수 있는 여기에서의 삶을 가리키지 않을까.
영화를 보며 나는 그의 집요한 몽타주에 조금 신경이 쓰였다. 챕터를 나누기 위해 그가 소박하게 반복하는 페이드 아웃처럼, 감독은 주인공 돈의 움직임을 언제나 장소에 관한 사진적 이미지로 시작하거나 끝맺는다. 그는 배경을 설명하기 위한 용도도 아니고 더더욱 그곳을 바라보는 인물의 시점도 아닌 어떤 위치에서 물끄러미 그림을 보여준다. 좀 복잡하게 말해 영화적 재현을 중단시키는 사진적 사실을 제시하려는 것이 그의 의중에 있었던 것일까. 이를테면 영화가 장면의 연속을 통해 사진적 사실 이상의 것을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관습과 달리 그는 장면이 연속하여 만들어내는 영화 특유의 허구적 환영을 어떻게든 중단시키려는 듯이, 화면을 사진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모더니스트 영화 감독들이 곧잘 써먹던 수법과는 다르다. 그것은 영화적 이데올로기와의 투쟁이라는 명분에서 나온 것이라기 보기엔 어려울 것이다. 그가 보여주는 장면은 다큐멘터리 사진인지 광고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요즘의 사진들과 차라리 가깝다. 따라서 그것은 비판적인 거리를 갖지 않는, 이미 잘 알려진 이미지의 목록 어디에서 선택한 것이다. (래리 클락의 사진은 또한 그의 영화의 이미지이다. 물론 그 말은 넌센스이다. 사진적 사실과 영화적 의미작용 사이의 긴장을 지우면서 그는 가장 포스트모던한 감독이 되었다. 둘의 거리는 비판적인 거리가 아니라 이미 더 이상 아무런 거리 없이 균등한 자리에서 제시되는 이미지들의 한 종류에 가깝다. 영화는 뮤직비디오에 가깝고 뮤직 비디오는 광고클립에 가까우며 상업광고는 예술 작품과 가까우며 다큐멘터리 사진은 더더욱 패션 화보와 분간하기 어렵다. 혈흔이 낭자한 범죄 현장을 제시하는 사실주의적 신문 사진과 쿨한 광고 화보는 더 이상 다르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잖은가.
그렇다면 자무시는? 그가 만드는 숏들은 빌 머레이는 그곳에 갔다가 아니라 여기에 빌 머레이가 있다와 같은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에 가깝다. 따라서 장소는 도무지 인물의 시점을 통해 제시되지 않고, 혹시 그런 말이 가능하다면 그것 자체의 관점으로 그것은 보여진다. 이를테면 그것을 본 그가 말했다가 아니라 그것이 자신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는 식의 장면. 그가 처음 들린 샤론 스톤의 집에서 혼자 빈 집을 지키고 있던 맹랑한 딸 아이, “로리타”의 모습은 매우 충격적이다. 그러나 치모를 드러낸 채 엄마의 옛 친구를 유혹하며, 창녀 비슷한 흉내를 내는 그 아이의 모습보다 더 흉측한 것은 사실 어처구니 없는 그 집의 세부였을 것이다. 이를테면 벨 소리와 함께 화면에 크게 확대되어 보이는 붉은 핑크색 반짝이 덮개의 핸드폰은 인물만큼이나 강력하다. 핑크색의 그 무엇을 발견하고 타자기라는 소멸 직전의 물건을 찾아나서는 그의 눈길은, 지금 살고 있는 세계의 비밀 전체를 응축하고 있는 어떤 은밀한 상징의 체현물을 찾아가는 탐정의 눈길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탐정을 대신하는 인물은 옆집에 사는 흑인이다. 그의 옆집에 살면서 얼치기 탐정 흉내를 내고 주인공 빌 머레이를 조정하는 듯한 역할을 하는 이디오피아 이주민 아저씨의 위치는 흥미롭다. 빌 머레이가 그의 꼬마 딸아이와 소꿉장난용 탁자에 앉아 소꿉장난 커피잔을 홀짝이며 “니네, 아빠가 샘 스페이드인 걸 아니”(자막에는 “콜롬보”라고 나왔지만)라고 묻던 장면. 아이가 아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고개 짓에 계속하여 빌 머레이는 미국 대중문학 속에 등장하는 명탐정 이름을 열거한다. 나는 그 장면이 모두 속한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 아무도 속해있지 않는 어떤 세계에 유일하게 속한 사람은 정작 이방인인, 그 이디오피아 출신의 이주민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이디오피아 커피를 마시며 이디오피아 재즈를 CD로 구워 선물하는 진짜 이디오피아인이지만 또한 동시에 미국인보다 더 미국적인 인물이다. 그는 추리 소설을 참고하면 실제 범죄의 비밀을 풀 수 있다고 믿고 더불어 범죄는 또한 범죄에 관한 소설 스토리의 반복이라고 믿는 범죄소설가 지망생이다. 그는 컴퓨터로 벼락부자가 되었으면서도 집에는 컴퓨터를 들이지 않고 돈 주앙에 관한 고전 영화를 보며 소일하는 주인공보다 더 미국적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은 의미심장하다. 아마 이 영화를 보는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이물스러우면서도 너무나 감상적이고 아름다운 이디오피아 재즈는, 어쨌거나 타인을 하나의 양식화된 문화적 사물로 대하는 미국적 사고방식의 증명일지도 모른다)
결국, <브로큰 플라워>는 제목처럼 사물에 관한 영화일 것이다. 시들어 망가진 핑크색 꽃을 가리키는 영화의 제목처럼, 주인공은 그는 자신의 파멸 직전의 고독한 삶을 납득시켜줄 비밀의 열쇠를 찾아 떠나지만 그가 본 것은 사물의 편린일 뿐이다. 그가 지금 사귀고 있는 연인이 떠날 때 싱싱하던 꽃들은 자신의 숨겨진 아들이 있다는 느닷없는 편지에 놀라 찾아 떠난 과거의 애인들의 방문 이후에 시들어 버린다. 여행 끝에 아무런 결론도 얻지 못한 채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그에게 낯선 젊은 무숙자 청년의 반응은 희비극적이다. 스스로 자신을 찾아온 아들일 것이라 확신하는 주인공에게 그 청년은 미친 영감을 봤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며 달아난다. 그리고 진정 오랜 만에 보는 빌 머레이를 빙그르 도는 360도 패닝. 그 패닝 속에 마치 짐 자무시가 이 영화에서 하려는 모든 것이 있을 것이라는 나의 쓸쓸한 확신.
– 아마, 올 겨울도 필시 쓸쓸할 것이란 확신에서 준비해 두었던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단편전집을 읽은 탓에, 이런 생각이 들었을지 모른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제 스스로 지탱하는 주인공들, 자신의 세계를 하나의 사물에 응축하여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 전체를 대신하는 주인공들. 그것이 그녀의 소설 속의 주인공이라면, 그 이후의 세상을 자무시는 그리고 있다고, 나는 믿었을지 모른다.

포스트-민중미술을 넘어 – 배영환의 <남자의 길>과 그 성취

“상식적인” 삶, 그리고 “상식적인” 미술가

배영환, 완전한 사랑

배영환은 자신의 미술가적 정체성을 고백하는 어느 글에서, “반은 예술가로 반은 무능력자로 살아갈 거룩한 결심”을, 농반진반(弄半眞半) 다짐한 적이 있다. 그것은 다시 작가의 말을 빌자면 “우리 착하게 정말 상식적으로 살면서 각자의 길을 가자”던 비상식적인 약속대로 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 시대의 상식이란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믿음에 관하여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식을 따르는 짓은 손해일 뿐이라는 영악한 확신에서 비롯되는 냉소주의자의 상식일 것이다. 그러므로 배영환이 일컫는 상식적인 삶이란 비상식적인 삶을 기꺼이 살아가면서 동시에 상식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 냉소주의를 향해 보내는 야유일지도 모른다. 이런 야유를 발설하는 자리에 선 인물과 자신의 미술가적 정체성을 동일시하는 것은 고상한 엘리트적 예술가를 고발하고 조롱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이런 몸짓을 간단히 비판의 몸짓으로 지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의 현대 미술의 흔한 유행 가운데 하나는 미술가의 권위와 정체성에 대한 공격과 비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상식에 대한 믿음을 온전히 지키면서도 동시에 그 어떤 죄의식이나 거북한 감정 없이 몰상식하게 살 수 있는 냉소주의자의 모습은 또한 미술가의 모습과 겹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현재의 미술가들 역시 자신의 미술가로서의 정체성을 극구 부인하면서, 아니 나아가 미술가 아닌 정체성과 동일시하면서, 미술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돋보이도록 하지 않는가. 이는 마치 새로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이 취하는 논리와 흡사한 것이기도 하다. 새로운 자본주의에서 상품은 으레 ‘대량생산시대’ 혹은 ‘공급자중심 경제’의 상품 정체성을 비판하는 시늉을 취한다. 예컨대 현재의 자본주의에서 상품은 언제나 건강을 걱정하고 환경을 보살피며 개성과 자유를 생각하는 상품 아닌 상품으로 자신을 내세운다. 따라서 상품은 더 이상 더 이상 경제적 대상이 아닌 듯이 자신을 뽐낸다. 따라서 상품을 구매한다는 것은 특정한 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한다거나 미적인 쾌감을 향유하는 일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상품은 자신의 정체성을 거부하면서, 즉 맹목적인 이윤의 추구를 위해 환경을 파괴하고 개성과 자유를 질식시키는 과거의 상품의 세계를 힐난하면서, 더욱 집요하게 자신의 상품 정체성을 관철한다.
포스트-민중미술과 작가의 정체성

(중략)
완전한 사랑에의 꿈
배영환은 <남자의 길>에서 금욕적일 만큼 매우 단순한 설치를 제시한다. 작가가 손작업을 통해 꼼꼼하게 혹은 처량하게 복원(?)한 기타들과 그 기타를 만들면서 사용한 재료의 출처이자 또한 매체로서의 기타의 서사적 유래를 가리키는 사진들이 전시의 전부이다. 그리고 전시 작품 가운데 표제를 가지는 것은 <완전한 사랑>이란 이름을 단 쌍기타 한 점과 역시 그 기타를 장식한 재료의 출처이자 서사적인 유래를 가리키는 자개 경대의 사진과 볕이 내리쬐는 덤불숲에서 기타를 찍은 사진이 전부이다. 그렇지만 이는 그의 직전의 작업인 <유행가> 작업보다 정서적인 감응이 훨씬 진하고 강하다. <유행가>는 흘러간 유행가의 가사를 다양한 오브제를 써서 직접 옮겨 적는 작업이었다. 알약이든 깨진 병조각이든 다양한 매체는 가사가 언급하는 현실(사랑, 죽음, 고독 등)을 재현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런 재현의 과정에 연루된 자들의 삶을 환기시켜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독하게 멜랑콜리한 것이면서 또한 동시에 비루한 주변적인 존재의 삶을 단숨에 현상하도록 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남자의 길>은 그런 주변적인 삶에 관한 서사적인 재현의 틀을 쫓으면서도 이전의 작업과 단절을 꾀한다. 얼핏 주변적인 삶의 세부를 관찰하며 그것을 유행가와 각기 짝짓는 형식을 취하던 작업이 허세와 위악에도 불구하고 순정하고 소박한 남자의 이야기로 단순화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외면적인 축소의 형태는 그의 작업의 반성적인 확장으로 뒤집어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주변적인 삶을 향한 연민이나 감상적인 애착이라면 우리는 그의 작업에서 크게 감동할 부분이 없다. 그의 작업보다는 훨씬 정교한 아니 감상적인 연민의 공식에 통달한 “휴먼 다큐”가 훨씬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연민과 자선의 윤리로 분노와 저항의 윤리를 대체하고, 민중을 피해자나 희생자로 재현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윤리-정치적 좌표라면, 우리가 그의 작업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차이는 갤러리에 전시된 미술작품이라는 제도적 형식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남자의 길>은 그런 자리에 서지 않는다. 그가 제시하는 “남자의 길”은 알레고리나 패러디같은, 성행하는 편의적인 수사법과 거리를 취한다. 그가 선택한 “남자의 길”이란 제목이나 유일한 작품 표제인 “완전한 사랑”은 맥락, 특수성, 차이를 강조하는 유행 담론에 비추어보자면 매우 저속하거나 아니면 맹목적인 것이다. 그것은 “남자”라는 보편적인 인물을 내세우고 “완전한” 사랑이라는 수사학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어쩌면 전형을 향한 충동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를 것이다. 물론 그 때의 “남자”의 “완전한 사랑”의 길이란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의 비루한 사랑에 대한 애상적인 향수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사회의 상실을 향하여 보내는 안타까운 그리고 추문에 가까운 물음일 것이다. 따라서 <남자의 길>을 어느 무명의 노동계급 남자의 사랑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지만 그것은 또한 “불가능한 사회”를 향한 작가의 제유(提喩)로 읽을 수 있을지 모른다. 다시 말해 “완전한 사랑”과 그것을 증언하는 특수한 이야기를 채집하고 전시하는 작가의 몸짓은, 단순히 풍속화적인 재현이 아니라 사회의 근본적인 불가능성을 떠맡고 있는 보편적인 주체를 재현하려는 욕망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배영환의 작업을 민중미술의 계보에 속한 그러나 그것의 한계를 돌파하려는 작가로 보아야할 이유도 제법 분명해진다. 그는 한국의 진보적인 미술 속에서 정체성의 정치학과 타협하지 않고 보편적인 주체의 재현에 충실하려는 드문 작가라 할 수 있다. 포스트-민중미술에 속한 젊은 진보적 작가들이 결국 포스트-정치적인 정치학으로 전락하였다면, 그는 민중미술의 가장 중요한 미적 정치학을 고집한다. 물론 그것이 그의 작업을 각별하고 동시에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주는 힘임은 물론이다.
월간미술의 청탁과 친구 배영환의 압력으로 쓰게된 평론. 아직 출판되지 않은 글이라 민중미술과 전형의 관계를 논하면서 차이의 정치학이라는 포스트민중미술의 경향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는 부분을 생략했다. 앞뒤가 부자연스러워 보일 것이다. 나의 친구에 대한 충성심은 가끔 분별력을 잃고 그들의 작업을 지지할 이유를 발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 이번 작업은 근사하고 감동적이었다.

“시대착오적인 도착의 시대극 – 데릭 저먼의 르네상스 영화들”

– 이젠 내 글을 남의 블로그나 홈페이지에서 보고 읽는다. 아, 이게 내 글이었구나. 저를 떠나 제 스스로 삶을 살고 있는 문자들, 아니 푸코의 말을 빌자면 언표들. 문장도, 명제도, 발화도 아닌 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발명하는 말들. 그저 사물이 되어버린 그 글자의 행렬. 서운하다, 나의 문자들이여, 그렇게 저를 낳은 주인을 저버리는가,그런, 당치않은 허튼 감상이 들 정도이다.
1.
*데릭 저먼의 작품을 전유하는 일차적인 맥락은 그의 시대착오성이다. 물론 그는 기꺼이 시대착오적이고자 했으며 또한 시대에 지나치게 몰입했다. 이는 데릭 저먼을 “뉴 퀴어시네마”의 자장 안에 머물게 하는 요인이다. 그러나 그는 토드 헤인즈나 존 그레이슨, 말론릭스보다 과격하다.이는 숨겨진 역사를 복원하고 자신의 거부된 흔적을 답파하려는 게이 역사학의 영화적 실천과 상관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뉴 퀴어 시네마의 다른 감독들에게는 이성애규범적인 역사(쓰기)로부터 추방당한 온전한 자신의 역사가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회향할 과거조차 없다고 확언한다는 점에서 저먼은 그들과 구분된다.
*저먼의 퀴어 시대극들은 향수와 회한의 돌아보기를 통해 과거 자체를 (재)보존하려는 욕망에 복무하는 모든 영화적 실천을 비난한다.
케네스 브래너, 아이보리 형제 나아가 피터 그리너 웨이 등의 영국 영화는 이른바 유산영화(heritage film)를 만개시켰다. 유산영화는 “제 2의 엘리자베스 시대”를 주창했던 대처주의와 공명했고, 1985년 영국 영화산업계는 “영국영화의 해”를 선언하며 유산영화가 가져온 영국영화의 성장을 자축했다.오랜 동안의 쇠퇴와 부진 속에 허덕이던 영국의 부흥을 위해 영국은 르네상스를 반복하고자 열망했다.
물론 그 르네상스는 저먼이 집요하게 자신의 영화 속에서 대적했던 엘리자베스 시대였다.
*그런 점에서 저먼의 르네상스 영화( <천사의 대화> ,<템페스트>,<희년>,<에드워드 II세> 등)는 모두 영국 영화의 동시대적 맥락에 조응한다. 그러나 그는 많은 이들이 강조하듯, 카라바지오와 푸생(Nicholas Poussain)의 대립과 자신의 영화적 실천이 놓여있는 형국을 대조한다. 그는 기원과 전통 그리고 사실적 재현의 명령에 복종했던 푸생의 계보(여기에는 단연 케네스 브래너와 피터 그리너웨이를 포함시켜야 것이다.)를 자신의 작업과 구분한다. 그는 카라바지오의 회화적 재현의 정치학을 또한 그의 영화적 재현의 정치학과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 그것은 언제나 현재의 담론을 통해 매개된 과거만이 있을 수 있음을 공언하고,
같은 시대의 민중의 삶을 신화와 성서의 회화적 재현의 대상으로 삼은 카라바지오의 전망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푸생이 르네상스 이후의 회화를 정의 하며 로마적 원리,
본래적으로 존재했던 미술의 규칙과 법이 유일한 예술의 소명이라고 믿으며, 카라바지오를 반역자와 파괴자로 비난 했을 때,
이는 또한 저먼에게 쏱아졌던 비난과 다르지 않다.
모두들 그가 역사를 파괴하고 오염시키며 날조한다고 중상하지 않았던가.
*카라바지오가 역사적 과거의 제시를 위해 동시대의 민중의 신체를 화면에 옮겨 놓듯이,
데릭 저먼 역시 과거라는 환영적인 공간에 파묻히지 못하도록 끈덕지게 개입한다.
<에드워드 II세>에서의 영국의 유명한 레즈비언, 게이 운동조직인 “아웃레이지(Outrage)” 운동가들의 시위,
애니 레녹스의 등장 등이나 <카라바지오>에서의 모터사이클,타자기,전자계산기 등의 사용등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물론 우리는 아예 시간여행 자체를 모티브로 삼는 <희년>에의 기괴한 펑크적인 시대극이나
<천사의 대화>의 세익스피어의 소네트와 동조되어있는 프리즈 화면의 연속체는 숫제 그런 시대착오성을 전면화하고 있다 볼 수 있다.
이를 위한 그의 형식적 실천 역시 매우 명료하다. 상이한 역사적 시대에 속한 사물 혹은 소도구의 병치를 통한 시대착오적 미장센의
활용이나 역사의 담론적 구성을 영화적 실천자체에서 서술하는 그의 명민한 특기인 밀실공포적인 내부적 공간의 특권화
(우리는 이 점을 화면으로부터 외부를 어둠 속에 잠기게 함으로써 표면 위에 재현되는 대상 자체에 몰입하게 하는 카라바지오의 화법과 그의 인테리어 영화가 놀랍도록 대응한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그러나 시대착오적인 퀴어 시대극의 감독으로서의 저먼에게 있어 영화를 전유하는 주체의 문제 역시 매우 중요하다.
그 스스로 일종의 중세적 카니발인 가면극을 상연하는것으로 간주했던 <에드워드 II세>는 분명 자신이 속한 공동체,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을 위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영화 작업을 둘러싼 모든 의문에 한결같이 자신의 영화는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을 위한 영화 일 뿐이라고 강변한다.
저먼은 자신의 삶을 해석하고 표상하는 언어를 박탈하고,자신에게 치욕과 박탈, 고통의 삶을 배당해준 역사에 대하여 언제나 적대적이다.
(“나는 우리의 활기찬 현재를 거세했던 엘리자베스적인 과거를 깊이 혐오한다”,<퀴어 에드워드 II세>).
로카르노 영화제 에서 <세바스찬>의 첫 상영중에 벌어진 소동, 그리고 그날 밤 펑크들의 시위와 폭력,
스위스 첫 게이운동조직의 출범을 회상하며, 저먼은 언제나 행복해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시대착오적인 퀴어 시대극의 주체로서 퀴어의 존재를 압축하는 곳은 <대영제국의몰락>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스프링”의 난폭한 수음의 장면일 것이다.
카라바지오의 <육욕의 사랑 Profane Love> 이란 그림 위에 누워 그는 아랫도리를 부비며 수음을 하고,
그위로 그를 쳐다보며 촬영하는 저먼의 그림자가 떨어진다.(저먼은 이를 “cinematic fuck”이라고 부른다).
그는 자신의 영화가 훗날 퀴어들이 침대에 누워 포터블 텔레비전을 통해 자신의 영화를 보면서 수음을 하기를 원했다.
(Long Live cinematic fuck!).
*저먼의 시대착오적인 퀴어 시대극의 특성은 또한 그가 직조하는 시각적 쾌락의 장치를 통해 만들어진다.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미적 형식들을 개주 하거나 재무대화한다.
<카라바지오>의 그림(저먼은 카라바지오가 영화적 빛을 발명했다고 선언하기도 하였다.
그의어두운 실내는 곧 영화의 스튜디오 세트이다),
<천사의 대화>의 소네트, <에드워드 2세>의 가면극(the masque)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저먼에게 르레상스기에 있어 중요한 미적 형식이자 그것을 주재한 집단은
연금술사, 신플라톤주의자(플라토닉 러브!) 점성술사였다.
그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연금술사 존 디( John Dee )는 바로 르네상스의 이단적 연금술사였다.
그리고 연금술적 이미지
(<천사의 대화> 에서의 수정공, 부채, 또한 <희년>의 존 디 , 그리고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거울, <템페스트>의 그림 등)는
저먼에게 있어 자신의 영화적 실천의 은유였다.
저먼은 “빛과 물질의 화합 – 연금술적 결합이 영화이다” 이라고 주장한다.
2.
*”나는 신비의 영역은 동성애적 상황의 은유라고 생각한다. 알다시피 마법은 금지되어 있으며 위험하고 난해하며 신비스럽다.
나는 콕도의 영화, 케네스 앵거, 그리고 에이젠슈타인의 영화에서 마법을 본다.
아마 그것은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불편한 금지의 영역이며 게이 상황에 관한 은유일 수 있다.”().
저먼은 그럼으로써 퀴어 영화의 계보속에 자신을 기입해 넣는다.
장주네의 <사랑의 찬가>의 감옥, 장 콕토의 <오르페우스>의 회랑과 요술상자같은 방들,
<쾌락궁전의 창립>등에서 그 스스로 마법의 사도이고자 했던 케네스 앵거,
파졸리니의 <살로,소돔 120일> 의 격자창에 에워싸인 밀실, 그리고 자신의 <세바스찬>에 등장하는 숙영지 . 이 모두는 퀴어 공동체의 물질적 현존이며 그것의 영화 속 장소이다.
그러나 한가지 추가할 점, 그것은 암호와 은밀한 언어이다.
그 장소에서 우리는 공통의 언어로는 들을 수 없는 세계의 목소리를 포착해야 한다.
<희년>에서 엘리자베스가 토로하듯 “아름다운 꽃들의 은밀한 언어 “가 바로 그 언어이다.
*한편 연금술은 “기억의 기예(art)”이다. 퀴어 시대극은 결국 그런 연금술적 기억의 기예로부터 출발한다.
그 스스로 연금술과 르네상스기의 마법에 몰두하였던 저먼은 자신의 영화들이 곧 기억의 기예가 되기를 희구하였다.
<대영제국의 몰락>와 <천사의 대화>혹은 <여왕은 죽었다>같은 뮤직비디오를 참작하며
그를 장 뤽 – 고다르를 사사한 모더니즘으로 간주하고
나아가 영국의 “뉴 웨이브”(콜린 맥카베나 피터 울른 등)의 전통 속에 묶어버리는 비평적인 입장은 그런 점에서 빗나간 것이다.
영화적 재현의 환영성을 비판하기 위한 모더니즘적인 책략이라기보다는 저먼의 영화는 정서적 힘 자체를 겨냥하며 움직인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레오 버사니가 말하듯이 저먼은 파졸리니와 같이 영화로부터 힘을 회복시키고자 했다.
영화적 텍스트의 물질적 조성에 대한 꼼꼼한 반응을 시도하는 관객이 아니라
영화로부터 정동(affect)을 취하고, 그를 통해 자신의 감각과 의식을 변형시키는 것이 영화여야한다
(알다시피 물직과 의식의 변형이야말로 연금술의 텔로스 아닌가)
그런 점에서 파졸리니의 시학의 영화는 곧 저먼의 연금술적 영화와 상통하는 것 아닐까하는 과감한 상상까지 한다.
*<천사의 대화>의 프리즈된 화면의 연속체
( 8mm 카메라로 빠른 속도로 촬영한 후 이를 다시 정상 속도로 영사하고
다시 이를 필터 촬영한 후 다시 35 mm로 블로우업하면서 생겨난 사진적인 혹은 수정공적인 이미지),
<대영제국의 몰락>의 홈 무비와 빈번한 이중인화 그리고 대조적인 몽타주,
<여왕은 죽었다>에서의 피카디리 광장의 에로스 상, 헤엄치는 금붕어, 우울한 소년 등의 이중인화 등은 모두 저먼에게 있어 “기억의 체계”이다.
저먼은 푸코의 말을 빌자면 “반기억(counter-memory)”를 실천하는 기억의 연금술을 발휘한다. 그것은 역사적 세부에 대한 고증과 발견,
그리고 그를 통한 역사 자체를 장악할수 있고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다는 믿음, 나아가 그로부터 역사와 현재의 거리를 확보할 수있는 이데올로기적 공간의 보장, 이 모두가 저먼이 위반해야 하는 것들이다.
“신은 과연 무엇을 말했는가”라는 물음을 거절하고, 언제나 과거와 현재의 대화에 착수하고 과거를 현재의 맥락과 해체시키고, 과거의 물질을 현재의 시간적대상 속에 합성하는 연금술. 그것은 저먼의 반기억의 실천을 위한 영화적 전망을 구성한다. 물론 연금술사들, 소도미(sodomy)와 마녀 라는 이름으로 박해를 받은 주변적인 주체들은 곧 르네상스 시대의 소수자들이었고, 또한 그것은 대처주의의 암운과 애국주의적 광기로 충만한 동시대의 소수자들인 퀴어의 환유이기도 하다.
*저먼은 <에드워드 II세>에서 추방지에서 돌아오는 가베스턴은 가면극의 휘황한 매력과 즐거움을 상기한다.
단 한번도 야외 장면을 포함하지 않은 <에드워드 II세>의 밀실공포적인 세트는 곧 가면극 자체를 상영한다.
물론 이 때의 가면극은 곧 근대적인 연극과 다르다.
그것은 재현과 청중사이의 관계가 전연 다르기 때문이다.
“아웃레이지”의 액티비스트들이 화면 속으로 들어오고 그들은 저먼의 시대착오적인 퀴어 시대극의 정치학을
가장 효과적으로 상징화 한다.
르네상스의 화려한 가면극은 관객이 극 속으로 끼어듦으로써 극 안에서 전개되던 갈등을 해소하는 카니발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가면극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연행(performance) 자체로부터 신화적인 진실을 현재의 진실과 포개어 놓는다. 그런 점에서 가면극은 저먼의 퀴어 시대극과 공명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저먼의 영화들은 에이즈 시대의 퀴어 영화이다.
저먼은 커밍아웃한 퀴어 감독이다 또한 HIV감염자 였다.
그의 <가든>, <블루>와 같은 후기작들은 에이즈 위기 시대의 맥락과 분리시킬 수 없다.
그러나 또한 에이즈 위기는 그를 동시대의 뉴 퀴어시네마와의 관계를 설명하도록 해준다.
그의 퀴어 시대극은 에이젠슈타인과 장 콕토 그리고 퀴어 하위문화를 연결하는 존 그레이슨의 <소변기>와 대응하고,
장 주네와 B급 호러영화, 그리고 타블로이드 신문 속의 퀴어를 연결하는 토드 헤인즈의 <포이즌>과 대응한다. 또한 랭스턴 휴즈와 할렘 르네상스를 소환하는 아이작 줄리언의 <랭스턴을 찾아서>역시 그에 추가되어야 한다.
이 모두는 뉴 퀴어 시네마의 퀴어 시대극들이며 또한 가장 탁월한 작품들이다.
그들은 자신을 이성애자와 다르지 않은 정상적인 존재로 등록함으로써
자신을 표상하려던 게이 영화의 “정체성의 정치학”과 모두 단절하고자 하엿다.
그리고 저먼은 그러한 뉴 퀴어 시네마의 척후병이었다.
참고한 글들
Leo Bersani & Ulysse Dutoit, Caravaggio, London, BFI, 1999
Jim Ellis, “Queer Period – Derek Jarman’s Renaissance”, Outtakes -Essays on Queer Theory and Film, Ellis Hanson ed., Duhram and London , Duke Univ Press, 1999
Derek Jarman, At Your Own Risk -A Saint’s Testament, New York , The Overlook Press, 1993
Derek Jarman, Kicking the Pricks, London, Vintage, 1996
Derek Jarman, Queer Edward II, London, BFI, 1999
Tony Peake, Derek Jarman: a Biography, New York, Overlook Press, 2000
Justin Wyatt,” Autobiography, Home Movies, and Derek Jarman’s History Lesson”, Between the Sheets, in the Streets: Queer,
Lesbian, Gay Documentary, Chris Holmlund and Cynthia Fuchs, eds.,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7

오한을 훑어낸 후

– 만취할 만큼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술을 잔뜩 마셨더니 오한이 으스스 온 몸을 훑는다. 잠깐 눈붙인다. 무슨 꿈이었을까. 두 개의 노래가 같았고 똑같은 진실을 발설하는 것이었다는…이상한 꿈이었다. 도대체 무엇의 비밀을 알려고 그런 꿈을 꾸었을까. 어제 오늘 내 머릿 속 도랑에서 흘러 다니던 어떤 생각의 건지가 그런 불쾌한 꿈을 조장했을 것이다. 고얀 것.
– 저널의 새 物主를 찾아야 하는데, 뾰족한 수가 없다. 그 일에 총대를 매고 나설 만큼 그것에 깊이 관여한 일도 적도 없는데, 그 일을 상의하잔다. 물론 책임을 지지 않은 채 입공양만 하는 편집위원들-나보다 훨씬 소속감도 강했으리라고 믿는 이들-에게 불만이 없지 않다. 이미 출판계는 초토화되었고, 언론 쪽으로 가자니 덥석 급소를 물고 놓아주지 않을까 하는 불안 때문에 갈 길이 분명치 않다. 내일쯤 아는 출판사 몇 곳에 전화라도 넣어봐야겠다. 자유주의적인 쿼터로 내게 할당된 편집위원의 몫을 누리며 그간 제가 털어놓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겠다던 나의 의지와 달리, 저널에서 가장 상스러운 좌익이 되어버렸다. 지혜롭고 또한 선량한 이들 곁에서 성난 낯으로 투덜내는 악역이 달갑지 않다. 그럼에도 홧병에 가깝도록 절망했고 분노했던 좌파 지식인 집단의 기류에 개입하고 싶었다. 몇 꼭지의 글을 썼?별반 호응도 없었으며 논쟁의 가능성은 쥐꼬리만큼도 없었지만 스스로를 몰아부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 이번 주는 최악의 스케줄이다. 주말에 몰린 심포지엄, 강의 때문에 머릿 속이 노랗다. 블로그 관련 심포지엄에서 사회를 맡았는데, 딱히 임자가 없어 어찌어찌 역을 맡았는데, 따로 그 문제에 관해 자료들을 읽어두기가 귀찮다. 일견 뻔한 인터넷을 둘러싼 말장난과 허황된 언어의 향연에 동승하기도 싫다. 그래도 어쩌랴.
– 결국 친구를 위해 씨네21에 글을 쓰게 되었는데, 더럭 걱정이 된다. 조금 억지를 쓰고 강변을 해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잇단 시사회가 끝난 후 평자들로부터의 악담과 핀잔에 주눅들고 질겁한 친구는 내게 자신을 옹호할 책임을 떠넘겼다. 친구와의 우정을 생각해서 선선히 수락한 일인데, 쏜살같이 연락이 왔다. 씨네21의 기자가 오후에 전화를 걸어 지면을 만들자고 한다. 짐작보다 넓은 지면을 주겠다는데 그게 더 걱정이다. 수십 매를 쓸만큼 아직 그 영화를 내가 진득하게 즐겼던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향후로는 영화에 관한 리뷰나 기고는 않겠다고 작정하고 있던 터에 우정의 責任으로 글을 쓰게 되었다. 꾀바르고 스마트해진 관객들을 무시하고 무대뽀로 현실을 정면으로 재현하려는 친구의 시대착오적인 결심과 의지를 칭찬하기로 결정했다. 스타일이라곤 없는 이 범박하고 무딘 영화로부터 미덕으로 가득한 정치학을 찾아내는 것이 내 요점이 될 터인데..
– 밀린 일들이 뒤통수에서 계속 꼼지락댄다. 면회를 다녀와야 하고, 새로 제 둥지를 찾은 후배의 집들이를 마련해주고 싶고, 미처 꼼꼼히 챙기지 못한 학생들의 프로포절에 조언을 덧붙여주어야 한다. 주말의 민노당 강의에서 털어놓을 이야기의 얼개라도 마련해두어야 하는데 아직 감감하다. 전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의 성 소수자 운동이란 거창한 이름을 제안했는데, 딱히 어떤 이야기에서 시작해야 지금의 문제들을 적절히 요약하고 개입할 구멍을 찾을지 모르겠다.

盛夏의 어느 週末


– 세네프 심사위원 회의를 마치고 Y씨를 만나 수다를 떨다가 차이밍 량의 <안녕, 용문객잔>을 다시 보았다(나는 부산에서 지난 해 이 작품을 보았다). 설친 잠 때문에 필시 졸거라는 짐작대로 초반 나는 잠시 고개를 주억대며 졸았던 듯 하다. 그렇지만 역시 <안녕, 용문객잔>은 대단하다. 구스 반 산트의 기이한 변화처럼 그의 변화도 이미 <하류>에서 예고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정착된 듯 보인다. 더 변화하기보다 그는 지금의 발견에서 잠시 더 머물 듯 하다. 그가 발견한 것은 아마 이미지의 정동(情動)을 생산해내는 영화의 능력일 것이다.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혹은 여기 한 컷의 이미지가 있다. 아니 여기에 지리한 하나의 씬이 있다. 물론 그 안에는 약간의 정보가 있다. 불이 환이 켜진 마지막 날의 극장의 객석, 장마비가 자욱히 쏟아지는 극장 어귀의 스산한 모습, 침침한 불빛이 켜진 긴 낭하와 화장실의 문 등등. 그리고 그 이미지 안으로 가끔 사람들이 등장하고 사라진다. 이 過少한 정보 탓에 관객은 처음엔 지루해하고 조금은 불편하며 어색한 감정에 빠져들 것이다. 그렇지만 곧 우리는 그가 이야기를 할 의중이 없음을 깨닫는다.((너무 많은 지나침과 너무 적은 지나침 가운데서 후자에 대한 이야기는 드문 듯 하다.로트코나 말레비치의 그림에 대한 추상성 운운의 분석은 그런 점에서 잘못일 것이다. 그 그림은 적음이 너무 많거나 지나치게 적음으로 인해 무언가를 생산해내는 것 아닐까? 그리고 왜 나는 이런 적은 것들에 이토록 많은 관심이 가는 걸까? 지나치게 화려하고 많은 캠프적인 아름다움에도 유혹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사실 그리 깊은 감동을 얻지는 못한다….언젠가 곱씹어볼 문제이다).
– 사실 그의 영화에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기억 속의 장면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처럼 회상될 때마다 장면은 다른 모습과 다른 정서적인 힘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사실 그 탓에 나는 그날 바로 이런 일이 있었다는 식의 기억의 회상에 관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그것은 거의 기억의 절차를 기만한다. 기억은 노동에 가깝고 그 노동은 그 사건들의 뭉치를 기억하게 하는 서로 다른 강세를 가진 이미지들과 소리의 파편들과 함께 내 의식 속에서 조립된다. 따라서 기억은 애시당초 이야기를 모른다. 기억은 이야기가 되는데 실패한 것들을 계속 남겨두었다가 내 의식 속으로 자꾸 떠민다. 기억은 이미 완결되어 저장되어 있던 이야기를 다시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되지 못한 채 떠도는 장면들(어쩌면 그 말 뜻 그대로 기표(signifiant))을 내게 들이민다.
– 이를테면 내가 어제 술을 먹다 Y씨와의 대화에서 다시 떠올린 대여섯살 남짓의 기억의 한 장면, 하얀 법랑을 씌운 대야에 고여있던 핏물이 그렇지 않을까. 나는 누이의 실수로 어느 겨울날 시멘트로 쌓은 수돗가에 내동댕이쳐졌고, 오른쪽 이마가 으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내 오른쪽 눈썹은 비뚤어져있다. 여튼 스냅 숏처럼 엮인 내 기억 안에서 그 사고의 이전 장면은 굴다리가 있는 시장 통의 어느 가게 앞에 아버지가 펴놓은 난전이다. 아버지는 그 때 색색의 나일론사가 섞인 싸구려 겨울 양말을 팔고 있었고, 누이는 날 업고 그리로 갔던 듯 하다. 나는 비닐 위에 놓여있던 연두색과 감귤색의 나일론 양말들이 아직도 뚜렷이 기억한다. 그리고 다시 점프컷되어 횟가루가 쌓여있던 장의사 앞의 수돗가 근처가 생각나고 그 뒤로 난 저장된 장면을 가지고 있지 않다. 까무러쳤던 나는 아마 외과에서 치료를 받다 잠시 의식이 깼던 모양이다. 그 때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눈부시게 흰 하얀 법랑을 씌운 병원의 대야였고 그 안에 고인 내 핏물이었다. 그런데 이따금 떠오르는 그 장면은 애초부터 다른 장면으로부터 떼어내진 것이다. 다른 장면이 붙여졌다면 나는 그 장면을 회상할 때마다 다른 이야기와 감정에 사로잡히는 혼란을 억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외톨이같은 장면은 기억의 순간에 내가 사로잡혀있던 느낌과 이야기 속으로 삽입되어 다른 정동의 장면으로 생산된다. 곰곰이 생각하면 그 장면은 매번 조금씩 다른 이야기와 함께 불려나온다. (6. 27.)
– <안녕, 용문객잔>은 구스 반 산트의 <제리(Gerry)>나 <엘리펀트(Elephant)>로의 이행과 흡사하다. 비트 세대의 적자인 구스 반 산트가 왜 <아이다호>의 음울하고 멜랑콜리한 고급 드라마에서 벗어나 <제리>로 갔을까. 광주의 어느 대학교에서 불과 몇 사람과 뒤섞여 본 <제리>는 적잖이 충격이었다. 이 아연할만한 금욕적인 영화는 시종일관 길을 걷는 두 사내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니 보여준다기보다는 들려주고 보여주며 종내엔 화면 안에 존재하는 인물과 동화되어 버린다. 그런데 이는 동일시가 아니다. 내가 화면 속의 인물과 같은 위치에서 세계를 지각하고 있고 그것을 매개하는 일차적인 통로가 카메라였다면 그것은 동일시겠지만, 사실 화면 안의 인물은 거의 아무 것도 보지않는다. 아니 볼 필요가 없다. 사건이 없기에 그는 말을 건넬 사람도 없고, 자신을 이야기하기 위해 참조할 어떤 사물도 없다. 그저 그는 걷고 있을 뿐이다. 아니 걷는 사람이 보여지지만 그것은 걸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걸음에 깃들어있는 감각을 보여준다. 걷는다는 사실 혹은 정보를 전달하는 것으로 화면을 지켜보는 한 화면은 지루하고 고통스럽다. 그것은 언제나 걷는다는 동일한 사실을 끊임없이 전송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지루함에 익숙해질 무렵 나는 문득 놀라게 된다. 나는 이제 걷는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걸음에 깃들어 있는 감각의 세계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비현실적으로 크게 들리는 발걸음 소리, 모래를 밟고 수풀을 헤칠 때의 미묘한 소리, 그리고 걸음의 강약 심지어 걸음 사이로 비쳐드는 빛의 강도까지 나는 어느새 감각한다. 그런 점에서 <제리>는 봄/보임의 영화가 아니라 감응 혹은 정동(affection)의 영화였다. 어떻게 달리 보도록 할 것인가, 봄(seening)이라는 행위 안에 작동하는 시각적인 법칙을 어떻게 철폐할 것인가. 이것이 지난 수십년간 (비판적) 영화 이론의 모토였다면 우리는 그 자리에 전연 다른 영화들이 들어서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다. 적어도 <와화장룡>과 <매트릭스> 이후 대중영화의 변화가 영화의 정체성을 위협에 빠트렸듯다면, <제리>는 그것을 아예 자신의 문제로 제시하는 듯 하다. 영화는 어떻게 정보를 전달하고 환영적인 사실을 인지하도록 하는가. 이런 반복된 물음에서 빠져나와 몇몇 감독들은 다른 물음을 던진다. 나는 그런 물음의 노선에 구스 반 산트 역시 서있다는 생각이다. (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