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변증법의 시금석이다.: 엥겔스의 ‘자연변증법’과 신유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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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태의연한 유물론의 입지점은 시민사회이며, 새로운 유물론의 입지점은 인간적 사회 또는 연합적 인류 die vergesellschafttete Menschheit이다.”(마르크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10)

  1. ‘인류세’ 이후의 유물론: 다시 엥겔스를 읽는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위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역사를 이해하고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면 어떨까. 뉴런과 원자에서 행성과 인공지능에 이르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합당한 마르크스주의적 인식 기준을 충족할 때 온전한 마르크스주의가 될 수 있다면? 만일 이러한 요구가 터무니없고 지나친 것이라고 반발하며 마르크스주의란 근본적으로 역사적인 사회관계의 비판에 불과한 것임을 겸손하게 인정하여야 하는 것일까. 어느 마르크스주의자가 ‘만물의 유물론’을 구성한다고 강변한다면 이는 독단에 불과할 뿐이라고 배격해야 마땅할까. 이러한 잇단 질의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와 이론적 논쟁에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는 그다지 생소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전체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의 뒤꼍에서 마치 배음(背音)처럼 윙윙거렸던 어떤 질문(마르크스주의는 역사유물론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기반한 것인가 아니면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공식 ‘철학’과 무관한 역사유물론일 뿐인가)을 떠올리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는 이른바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구(舊)소련의 공식마르크주의와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결정적인 차이로서 간주되어 왔다. 또한 이는 나아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관계를 비롯해 엥겔스의 저 악명 높은 ‘자연변증법’에 대한 고발과 거부를 둘러싼 오랜 쟁점과 관련되어 있다. 비록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친밀한 지적인 협력자로서 활동하였고, 엥겔스 자신의 지적 업적을 인정한다하더라고 마르크스의 사고와 엥겔스의 사고를 동일시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암묵적 동의가 널리 퍼져왔다. 물론 엥겔스의 지적 이력에서 가장 마르크스와 먼 것으로 지목된 것은 그의 자연변증법일 것이다. 그것은 나쁜 자연주의(naturalism)로 채색되어 있고 마르크스를 ‘만물의 유물론’을 고안한 인물로 오인되도록 한 모든 오해의 원천이었다.

모든 정신, 사고, 표상, 의식 등을 신경뉴런의 신경생물학적인 메커니즘의 작용 효과로 환원하는 인지주의(오늘날 성행하는 기계적 유물론의 주된 형태)나 인간의 사유 활동에 고유한 것을 자연에 투사하면서 자연에 어떤 일반적 법칙이 존재한다고 가정함으로써 보편적 자연이라는 대상을 상정하는 자연주의(naturalism)을 선뜻 받아들이는 마르크스주의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 외적 세계나 자연의 독자성을 손쉽게 부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은 물질적이라고 말하는 것(푸코나 라클라우와 같은 담화적 유물론을 포함하여)으로는 충분치 않을 것이다. 인간의 의식도 결국엔 뇌라는 물질의 활동에 불과하다는 식의 극단적인 인지주의나 생물학주의적 입장을 유물론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은 그다지 유익한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물어야 할 물음은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이 이러한 유물론과 구별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유물론인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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